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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경교(敬敎) / 은파(隱坡) |
본관 | 남평 문씨[1] |
출생 | 1897년 9월 27일[2] |
경상남도 하동군 북면 직전리 (현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1212번지)[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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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6년 8월 27일[4] |
묘소 |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계명산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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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문공학은 1897년 9월 27일 경상남도 하동군 북면(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에서 아버지 문욱동(文勗東, 1866 ~ 1946. 2. 5)과 어머니 진주 강씨 강청등(姜淸登, 1874 ~ 1913. 3. 14)[5]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벽진 이씨(1899 ~ 1922. 4. 20)[6]과 혼인하여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다.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듣게 되자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하려 했으나, 가족의 만류로 중단하고 새로운 항일 투쟁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다. 1916년에 하동군 내의 청년들과 교우 관계를 가지면서 조국 광복 운동에 동참할 뜻을 확산시켰고, 1918년에는 사천 곤양보통학교 교사 조우제(趙佑濟)와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생 최원형(崔垣亨) 등과 교제하며 국내외 정세와 항일 애국지사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적인 추세에 호응하여 3월 21일 하동군 횡천면 여의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그 직후 이재기(李載基)·문증학·이영기 등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고 각 마을에 연락하여 거사에 참여할 주민들을 모집하였고, 그해 4월 3일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에서 주민 1,000여명의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고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하동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으로 이송되었고, 결국 그해 5월 1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그는 공소했으나 당일 공소를 취하하고 진주형무소를 거쳐 대구형무소에 이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해 11월 29일 출옥한 뒤에는 자택으로 돌아와 요양하다가 1922년부터 1925년 사이에 횡천주재소와 곤양수비대 등을 습격하는 투쟁을 계속했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 전국에서 학생 시위가 전개되자 청년들에게 항일 사상을 고취시키고 투쟁을 전개하도록 활동하다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
이후에도 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고, 1년 만인 1946년 8월 27일 별세했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