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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 구성
윗첨자1: 舊 가로세로 세계사 1~4권.


1. 로마 제국의 멸망2. 중세, 근대3. 기타

1. 로마 제국의 멸망

  • 로마 제국은 포용력이 강한 다신교를 버리고 제국 통치를 위해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독선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반발한 타 민족들의 반발로 멸망했다.
18, 19세기 학설이다. 즉 로마 제국 서부 영토 기준으로 보면 맞는 말이지만 동로마를 기준으로 하면 틀린 말이다.[1] 힌두교에서 보듯 다신교라고 해서 다른 종교에 포용적이고 관대한 건 아니다. 게다가 기독교의 확산과 국교화 과정을 보면 기독교 때문에 로마가 망했다기보다는 로마가 망해갔기 때문에 기독교가 퍼졌다는 느낌이 더 든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급격하게 전파된 계기는 서기 3세기 이후 전염병이 빈발하고 경제가 쇠퇴하면서 내세지향적인 사회분위기가 형성된 것이 결정적이었다.[2] 서로마 제국이 망할 때쯤에는 제국 영토 대부분에 기독교가 퍼졌을 뿐 아니라 침공해온 게르만족 상당수가 종파는 다르지만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3] 한편 가로세로 세계사에서는 다신교 때문에 타 민족의 반발을 샀고,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포용력을 강화하였다고 묘사하였다.

로마 제국의 멸망은 대개 군인 황제 시대와 같은 끝없는 내분과 게르만족의 침공, 황위 불안으로 인한 계속된 내전으로 인한 부정부패의 증가 및 정복전쟁의 중단과 사회 구조 변화로 인해 국가 수입이 줄어들면서 커진 재정 적자 등의 복합적인 원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기독교 이전의 로마 제국이 열려있는 제국이었다고 이야기하나 이는 전혀 아니며 로마 민족이 아니면 야만족이라 멸시하는 건 공화정 때나 제정 때나 바뀐 게 없었다.

게다가 고대 로마뿐 아닌 후대의 여러 국가들도 독선적인 면이 많았다. 국교 지정은 로마 이후의 유럽 어느 나라나 다 같았고, 문화적으로도 당연히 유럽 문화 빼면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은 경우가 상당수였다. 심지어 인종에서도 유럽인들은 유럽인 외에는 흑인 노예들을 상품 취급하고 전시하기도 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을 비롯한 각지의 원주민들은 짐승 취급하듯 학살하는 일이 잦았다. 그럼에도 유럽의 식민지 제국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는 결코 독선적인 면만을 원인으로 지목할 순 없는 노릇이다.

참고로 이탈리아 편에 나온 오류가 여기서 또 나오는 건 에스파냐 편에도 이런 설명이 나오기 때문이다. Ctrl+c+v

2. 중세, 근대

  • 이슬람을 불러들인건 아길라?
    - 일단 로데리크에게 반대하는 이들이 이슬람을 불러들인건 사실이다. 단지 그게 아길라가 아닌 서고트 내부의 귀족이었기에 틀린 서술이다.
  • 카스티야레온 왕국은 13~14세기 동안 해외로 눈을 돌려 코르시카, 시칠리아, 발레아레스 제도를 차지했다.
    - 13~14세기에 걸쳐 해당 영토를 차지한 국가는 카스티야레온 왕국이 아닌 아라곤 연합왕국이었으며, 특히 발레아레스 제도의 경우 아라곤 왕국의 정복의 영향으로 카탈루냐어권으로 편입된 지역이다. 그 시기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엄연히 다른 국가였다. 지도에서도 엇박자가 나오는데 카스티야레온왕국이 코르시카, 시칠리아 등을 차지했다면서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한 파트에서 아라곤 왕국의 영토 중 코르시카와 시칠리아가 있는 등 앞뒤가 맞지 않게 나온다.
  • 만고의 충신 엘 시드
    - 사실과 다르다. 엘 시드는 실제로는 용병이자 군벌에 가까웠고 때문에 이익에 따라서 가톨릭, 이슬람 양쪽을 왔다갔다했다.
  • 카를 5세는 거대한 제국이 꼭 좋지 않음을 깨닫고 신성로마제국을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주었다.
    - 아니다. 오히려 카를 5세는 이마저도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고 싶었지만 작중에서도 카를 5세가 "지금까지 네가 실질적으로 제국을 다스려왔지만" 이라는 대사 그대로 신성로마제국의 통치는 거의 다 페르디난트 1세가 다 했다. 오스만 제국의 빈 포위를 막아낸 일이나 파사우 조약, 아우크스부르크 회의 등의 일은 실은 이 사람이 한거다. 즉 이 사람도 할 건 다 하고 물려받았다는 것. 물론 그랬기에 카를 5세도 신성로마제국의 관을 아들이 아닌 동생에게 줄 수밖에 없던 것이었겠지만[4][5]
  • 아타우알파가 사망하는 내용에서 그 페이지에서 아타우알파를 아타후알파라고 썼다.
  • 잉카 제국은 황제 아타우알파가 잡히고 난 후 별다른 저항 없이 멸망당했다.
    - 황제가 죽고 난 후에도 잉카 제국은 왕자 망코를 중심으로 계속 저항했고 몇 차례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에스파냐도 이를 진압하는 데 굉장히 고생했다. 사실 아즈텍만 제외하면 에스파냐도 남미를 순탄하게 정복한건 아니다.
  • 1710년 카를이 이끄는 동맹군은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격파해 마드리드에 입성했지만 이에 놀란 영국이 프랑스와 협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 카를 대공을 지지하는 연합군은 1706년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그러나 반격을 당해 곧바로 마드리드에서 철수해야 했고 카를 대공이 1711년 합스부르크 제국을 물려받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로 선출되자 영국은 다시 카를 5세의 제국이 되돌아오는 것을 우려하여 펠리페 5세 지지로 선회하였다.[8]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후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탈리아 영토를 할양받았지만 오스트리아와 떨어져 있던 영토라 큰 의미는 없었다.
    - 오스트리아 항목의 오스트리아 지도를 참조.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9]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유와 도시 지역의 부 때문에 밀라노 공국 등 이탈리아 지역의 영토를 할양받기를 원했다. 당초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가 네덜란드 지역과 북이탈리아 지역이었다. 이건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 나폴레옹이 피레네산맥 남쪽은 아프리카라고 하는 부분은 대중적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다.
  • 179페이지에서 프랑스가 이베리아반도전쟁을 프랑스전쟁으로 부른다.
  • 그란콜롬비아 영토가 현 기아나 일부를 포함한다고 나오는데 가이아나라고 해야 한다.
  • 페르난도 7세가 리에고의 자유주의 세력을 진압하려고 1823년에 프랑스에 개입을 요청하는 장면에서 프랑스 국기가 삼색기로 나온다. 이 때는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여서 흰 바탕에 노란 백합을 그린 국기를 써야 한다.
  • 조지 오웰 스페인 내전에서 공산당의 행태에 분개해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 조지 오웰이 파시즘과 다를 바 없던 스탈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반소련주의자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10] 조지 오웰은 비판적인 사회주의자였고 본질은 반독재, 반파시즘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는 그의 스페인 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스페인 내전 기간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공화파를 지지하는 젊은이들이 국제 여단을 조직해 국민파 편에 서 국민파와 맞서 싸웠다는 오타가 있다.
    - 인민전선을 말한 듯 하다.
  • 국민파와 독일군의 게르니카 공격은 공화파를 지지하던 바스크 지역에 대한 보복전이었다.
    - 게르니카는 내전 당시 바스크군의 주둔지 중 하나였고 독일의 게르니카 폭격은 도주하던 바스크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도로, 교량 등을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애꿎은 민간인들이 크게 피해를 입은 건 사실이나 사건 경위에 대한 설명이 잘못되었다.
  • 개정판 192쪽 3번째 가로줄 오른쪽 칸의 사진 설명을 보면 볼리비아의 수도 카라카스...... 이런 설명이 나온다. 게다가 두 칸 왼쪽으로 가면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 ...... 이렇게 바르게 설명해 놓았는데도 말이다.
  • 1판 6쇄 기준으로 226쪽 6컷에 오타가 나 있다. '팔랑헤 에스파뇰라'가 'Falange Española'가 아닌 'Falange Espaõola'라고 적혀 있다.

3. 기타

  • 중국어로 '그렇다'는 뜻의 말인 是 (shì)를 '쓰'로 표기했는데,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면 '스'가 맞다.[11] 하지만 '쓰'나 '스'나 중국어 원래 발음과 동떨어지긴 마찬가지고 한국어 화자 입장에서는 '쉬', '쉴' 등으로 들릴 확률이 높은 발음이지만, 정작 '쉬'는 외래어 표기법 상 xu를 표기할 때나 쓴다(...).
  • 전작들에서는 표지에 로마자로 국명을 쓸때 영어기준으로 썼는데 여기서는 원어기준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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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세기 기독교 박해와 이교 부흥 정책을 펼친 율리아누스 황제가 서방에서는 인기가 많았어도 동방 안티오키아에서는 대중들에게 인기가 빵점이었다는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로마 제국 서부 영토에서는 지식인 상당수가 이교도로 남았고 기독교와 로마 전통 다신교간의 갈등이 더 심했다. 이를 반영하듯 웬만한 역사서 뺨치는 고증으로 유명한 토탈 워 시리즈 아틸라 토탈워에서도 서로마 팩션으로 진행하면 다신교와 기독교간의 갈등이 팩션 난이도를 올리는 주요 장애 요인이 될 정도 [2] 출처: 비잔틴 제국의 역사 / 워렌 트레드골드 [3] 대체적으로 게르만족은 아리우스파를 믿고 있었는데 그 중 프랑크족은 처음에 아예 기독교를 안 믿는 상태에서 클로비스 치세에 다이렉트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4] 카를 5세의 말년즈음에는 페르디난트 1세는 구교, 신교 가리지 않고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이러니 아무리 카를 5세라도 GG를 칠 수밖에 없다. [5] 사실 이것만이 원인인 것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카를 5세는 전쟁에만 신경이 팔려 통치에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제후들과의 사이가 가까워지기 힘들 판인데 거기다가 카를 5세는 제후들에게 했던 약속을 자주 어겨서 어그로를 끌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선제후들의 지지가 필요하고 자신도 선제후들의 지지로 즉위했음을 감안하면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것 치고는 굉장히 안일하게 행동한 셈이다. [6] 카를 7세의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레오폴트 1세의 큰사위였고, 제2차 빈 공방전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을 구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사위다. 참고로 요제프 페르디난트의 외조부는 레오폴트 1세이고 카를 7세의 외조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이다. 또한 카를 7세의 장인은 레오폴트의 큰아들 요제프 1세다. [7] 단 이 사람은 욕먹을 짓도 저질렀다. 심지어 절도를 하고도 오히려 큰소리쳤으니 막장인 셈. 오죽하면 스페인이 밥이 되든 죽이 되든 신경도 안 쓰던 프랑스가 펠리페 5세를 통해서 이 인간을 유폐시켰을 정도 카를로스 2세가 펠리페의 손을 들어준 것도 마리아 안나의 막장짓의 영향이 컸다. [8] 영국의 우려는 당연히 유렵의 패권자가 등장하는 것인데 부르봉 가문이 스페인의 왕관을 차지하나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의 왕관을 차지하나 1개 가문이 2개의 왕관을 차지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지만 문제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하게 되면 합스부르크 제국과 스페인은 동군연합이 되어 카를 6세는 제2의 카를 5세가 되니 영국 입장에서는 최악이었다. 이럴 바에야 부르봉 가문이 왕관을 차지하도록 냅두되 대신 스페인 국왕과 프랑스 국왕을 서로 겸하지 못한다고 못박는데 더 낫다. [9] 다 만여기서 떨어져있다는 말은 나폴리 왕국 등 남부 이탈리아다. [10] 실제로 소련에서 온 고문단 등이 문제가 많았던건 사실이다. 공화국 정부조차 이들이 다 소련으로 귀환해버리자 다 져가는 상황인데도 좋아했을 정도 [11] '쓰'는 shi가 아닌 si를 한글로 표기할 때나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