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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ff><colcolor=#FFBE29> 스리랑카 민주 사회주의 공화국 제18·22·24대 총리
퍼시 마힌다 라자팍사 Percy Mahinda Rajapaksa මහින්ද රාජපක්ෂ ,(싱할라어),| மஹிந்த ராஜபக் ,(타밀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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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5년 11월 18일 ([age(1945-11-18)]세) | ||
영국령 실론 남부 주 위라카티야 | |||
재임기간 | 제13대 총리 | ||
2019년 11월 21일 ~ 2022년 5월 9일 | |||
서명 | |||
SNS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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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ff><colcolor=#FFBE29> 배우자 | 쉬란티 라자팍사 | |
학력 | 스리랑카 법학대학 ( 졸업) | ||
종교 | 불교 | ||
신체 | 168cm | ||
소속 정당 | 스리랑카 인민전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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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리랑카의 정치인으로, 제6대 대통령(2005-2015)이자 제13대 총리(2004-2005; 2018; 2019-2022)이자 독재자.2004년 총리에 취임한 이래 2022년까지 무려 18년동안 스리랑카를 통치했다. 중간에 대통령직을 맡기도 했으나, 스리랑카는 이원집정부제를 표방하고 있으므로 기본적인 실권은 총리가 쥐고 있다. 그런데 스리랑카는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라서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하다. 즉 마힌다 라자팍사가 총리 시절이나 대통령 시절이나 막강한 권한을 쥐고 있었다는 얘기.
그리고 두 차례 야당 대표(Leader of the Opposition. 내각제 또는 이원집정부제에서 제1야당의 대표가 쥐는 직책)로 있던 시기(2015-2018; 2018-2019)에도 거국내각, 자당 내 측근들을 위시로 한 실권 장악 등을 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권력을 내놓지 않고 실질적인 여당 수뇌부인 것처럼 활동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마힌다 라자팍사는 인프라 개발과 경제 성장 등 각종 성과를 냈지만, 동시에 언론과 야당 탄압, 싱할라인 불교 과격파를 앞세운 노골적인 국수주의, 3선 시도가 실패하자 친동생 고타바야를 대신 출마시켜 당선시키는 등 족벌정치로 국내외로 큰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2015년 대선에서 야당들의 반대로 3선 시도가 좌절되자 쿠데타를 검토했다는 논란이 불거지는 등, 권력 장악을 위해 무슨 수라도 쓰는 인물. 한마디로 스리랑카의 푸틴이라고 봐도 전혀 과언이 아니며 푸틴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다. 푸틴도 3선 연임제한 규정에 걸리자 바지사장을 내세워 권력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바지사장이라고 내세운 인물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로, 본인과는 그 어떠한 혈연도 없는, 그냥 측근에 불과했다.[1] 반면 라자팍사는 바지사장으로 본인의 친동생을 내세우는 등, 푸틴도 안 한 족벌정치를 대놓고 했다.
2. 이름
출생 당시 이름은 마헨드라 퍼시 라자팍사(Mahendra Percy Rajapaksa)였으나, 후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했다. 마헨드라는 힌디어로 '위대한 인드라'라는 뜻이다. 인드라가 본래 베다 시절의 종교로부터 현대의 힌두교까지 숭앙하는 신격이지만, 상좌부 불교에서도 비중 있는 불교의 호법신으로 자주 등장한다. 인드라의 또다른 산스크리트어 호칭인 사크라(Sakra)를 팔리어화한 삭까(Sakka)란 명칭으로 팔리 경전에 종종 등장한다. 힌디어식 이름을 싱할라어식으로 바꾼 듯.또한 영어 이름이 '퍼시(Percy)'인데 이는 원래부터 남자 이름이었다. # 영어 위키백과의 Percy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등재된 인물 대부분이 남성이다.
3. 생애
3.1. 초기
영국령 실론 시절이던 1945년 11월 18일 스리랑카 남부의 위라케티야에서 9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안부터가 정치인 가문이었는데, 부친 D. A. 라자팍사(이하 앨빈)는 전직 국회부의장을 지냈으며, 농림국토부 장관을 지낸 중진급 인사였다. D. A. 라자팍사의 형이자 마힌다 형제의 큰아버지가 되는 D. M. 라자팍사(이하 매튜)도 정치인이었다. 매튜는 현재 스리랑카 국회의 전신이 되는 국무위원회 의원이었는데, 매튜가 사망하자 앨빈이 지역구를 물려받은 것. 물론 이는 죽은 형의 후광이 작용한 것도 없지는 않으나, 이때부터 족벌정치의 싹이 보인 듯 하다. 후술할 마힌다 형제의 족벌정치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갈의 리치먼드 초등학교에서 수학했으나, 이 학교는 감리교 계열 학교였고,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자란 마힌다는 1950년대 집안이 콜롬보로 이주한 이후 불교계 학교인 날란다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중등 교육은 남자중학교인 터스탄 중학교에서 수학했는데, 여기서 크리켓, 럭비 등 스포츠를 배웠다. 의외로 스포츠에 소질이 있던 모양.
3.2. 정치 경력
비드요다야 대학교(현재 스리자예와르데네푸라 대학교) 도서관에서 근무하면서 좌익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1967년 부친이 사망하자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자유당 대표로부터 영입되어 부친이 활동하던 벨리아타 선거구 지구당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사실 반다라나이케는 원래 마힌다가 아닌 형 차말 라자팍사를 영입하려고 했는데, 하필 형이 경찰이라서, 동생을 대신 영입한 것. 경찰은 공무원이라서, 정치적 중립의 의무에 따라 당적 보유가 원천 금지된다. 이는 대한민국도 마찬가지.1970년 총선에 벨리아타 선거구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통일국민당 란짓 아타파투를 꺾고 당선되었다. 당시 만 24세로 스리랑카 역사상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 이 시기 국회의원으로서 의정 활동을 하면서도, 동시에 스리랑카 법대에서 법을 전공하기도 했다. 허나 공부에만 너무 몰두한 나머지 지역구 관리에 좀 소홀했던 모양이었고, 결국 1977년에 낙선하여 아타파투에게 설욕당하고 만다.
그 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잠시 정계에서 물러나 있었으나, 1989년 함반토타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하지만 당시 인민해방전선 반란 사태로 정국이 어수산한 상태였고, 이때 정부 당국의 인권 탄압으로 말이 많던 상황이었다. 이에 라자팍사는 국제연합 및 국제사면위원회 등에 도움을 청하기도 했고, 작정하고 "정부가 인권 침해를 계속한다면 제네바만 가지 않겠다. 어디라도 갈 수 있고, 아니면 정부에 맞서겠다."며 대정부 투쟁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때 인권운동가로서 이름을 알리면서 그의 인지도는 점차 올라갔고, 여기에 부친의 후광까지 겹치면서 모두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다만 인권운동가였던 그가 막상 집권 후에는 독재자가 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
1994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이끄는 인민동맹이 승리한 이후 노동부 장관으로 처음 입각했고, 1997년 개각 때 어업수산자원부 장관으로 이동했다. 무난하게 업무를 수행했으나, 2001년 총선에서 인민동맹이 패하면서 그도 자연스레 장관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다시금 야당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후 2002년 야당 대표로 선출되었는데, 직전 총선으로 집권한 라닐 위크레메싱헤 총리와 대립각을 세우며 존재감을 널리 알렸다. 일단은 시작에 불과했지만, 훗날 둘은 총리직을 두고 다툼을 벌였고, 결국 영원한 앙숙이 되고 말았다.
3.3. 권력을 향해
위크레메싱헤 내각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인민동맹은 자연스레 반등의 기회를 얻기 시작했고, 총선이 다가오자 통일인민자유동맹(UPFA)으로 확대·개편을 단행한다. 그렇게 2004년 총선에서 UPFA는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라자팍사는 총리 겸 고속도로항만해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대통령이 내심 후계자로 삼고 있던 그는 이렇게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이후 2022년 현재까지 권력을 쥐고 있는 중이다.다만 총리직 1기는 대권을 향한 맛보기에 불과했다는 게 중론이다. 사실 직전 대선이 1999년에 치러졌는데, 임기가 5년이므로 이변이 없으면 2004년에 치러지는 게 맞았다. 이 때문에 라자팍사도 총리직을 몇 달만 수행하고 바로 대통령으로 직행할 것처럼 보였지만, 무슨 연유인지 쿠마라퉁가의 대통령 재임 2기 임기에 한해 1년 연장하게 된다. 이로서 대선은 2005년에 치러지게 되었고, 라자팍사는 대선 때까지 총리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3.4. 대통령 재임 1기(2005-2010)
그렇게 치러진 2005년 대선에 UPFA의 후보로 출마해,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한 위크레메싱헤 전 총리와 빅매치를 벌이게 되었다. 둘 다 비슷한 연령대이기는 했지만, 위크레메싱헤가 경험이 훨씬 더 풍부했기 때문에, 라자팍사로서는 상대하기 어렵다는 평이 있었다. 허나 결과는 50.29% 대 48.43%로, 라자팍사의 신승. 여기에는 위크레메싱헤의 실책이 결정타였는데, 비록 위크레메싱헤 내각 시절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기는 했지만, 민영화로 인한 폐해가 커지면서 여론의 비판이 쇄도했다. 라자팍사는 이 점을 노려 국유화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대선에서 극적인 승리를 이끌 수 있었다.하지만 앞날을 예견한 듯, 이때부터 본격적인 싹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선 당시 타밀계 반군인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TTE)는 대선 보이콧 운동을 전개했고, 이들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에서는 유권자들이 투표를 금지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연유로 타밀족들은 암묵적으로 위크레메싱헤를 지지했는데, 라자팍사와 UPFA 측에서는 이게 통일국민당과 위크레메싱헤 측을 공격할 빌미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때부터인지, 라자팍사와 타밀인 힌두교도들 간의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자세한 건 아래에 후술.
그리고 대통령직에 오르기가 무섭게 본격적으로 권력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 정년퇴임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은 상태였던 사라트 폰세카 군 사령관의 임기를 연장하는 한편, 마힌다 본인이 국방부 장관 및 재무부 장관직을 겸임했다. 심지어 동생 고타바야 라자팍사를 국방부 사무차관에 임명해 LTTE와의 전투에서 정부군 측을 이끌었다. 결과는 정부군 측의 승리로 LTTE 측 지도자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이 사살되었다.
이를 통해 "국가영웅"으로서 권력을 더 공고히 할 수 있었지만, 당초 마힌다 본인은 "평화 협정의 지도자"를 자처했기 때문에, 평화적인 절차가 아닌 무력으로 반군을 때려잡는 행동이 제 약속을 뒤엎는 이중잣대라는 비판을 피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한 번은 LTTE를 때려잡는다 치고 LTTE가 장악하고 있던 지역에서 쓰나미로 인한 대규모 피해가 발생했는데, 순전히 "LTTE가 점령 중인 지역"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원을 중단해, 지역 주민들의 큰 반발을 샀다.
그것도 모자라 지역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다는 의혹까지 불거졌으며, 2011년 4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내전 마지막 주에 최대 4만여 명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영국의 채널 4 뉴스에서는 그 참상이 더욱 더 생생하게 보도되었으며, LTTE 여성 반군들이 강간당한 사례까지 보고되었다.
3.5. 대통령 재임 2기(2010-2015)
이런저런 말이 많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스리랑카 내전에서 승리를 이룩한 덕에 입지를 더욱 더 공고화할 수 있었고, 2010년 대선에 재선 도전을 선언한다. 당초에는 위크레메싱헤 전 총리와의 리턴매치가 유력해 보였고, 이렇게 되면 내전 승리까지 이끈 라자팍사의 재선이 무난할 것이 확실했다.하지만 돌연 변수가 생겼는데, 내전 승리 직후 라자팍사 일가와 폰세카 간의 모종의 갈등이 발생했고, 이렇게 한때 동지였던 둘은 등을 돌리게 되었다. 결국 폰세카는 야권 대선 후보로 출마하였고, 일종의 빅매치에 가까워지면서 당초 누가 승리할 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결과는 57.88% 대 40.15%로 5년 전보다 더 큰 격차로 재선에 성공한다.
내전 때문에 여유가 없었던 1기 때와는 달리, 내전이 종결된 2기 때는 경제 성장에 더 초점을 두었다. 연꽃 타워, 함반토타 국제항구, 콜롬보항 남부 컨테이너 터미널, 마탈라 라자팍사 국제공항, 콜롬보-카투나야케 고속도로, 마힌다 라자팍사 국제 크리켓 경기장 등 각종 대규모 인프라들이 이 시기에 신축되었다. 최대도시 콜롬보의 미관 개선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국내총생산(GDP) 7% 상승 등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룩하기도 했다. 인간개발지수 또한 스리랑카가 "높음"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 성장의 빛에는 그림자도 있는 법. 저 GDP 7% 성장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2002년 대비로는 저보다 훨씬 낮다고 한다. 즉 공식 통계가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각종 인프라를 신설하느라 막대한 비용이 들었는데, 이 때문에 빚을 낼 수밖에 없었고, 결국 후반기에는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되었다.
흔히 스리랑카 부채의 대부분이 중국으로부터 빌린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중국으로부터 빌린 빚은 총부채의 10%에 불과하다.
3.6. 3선 시도와 낙선
이런저런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내전 승리와 경제 성장으로 라자팍사의 인기도 덩달아 올라갔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라자팍사의 3선을 지지했지만, 당시 스리랑카의 헌법상 대통령의 3선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미 2010년 재선한 라자팍사는, 2015년 대선에는 출마할 수 없었다.이렇게 3선을 할 수 없게 되어 권력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이자, 라자팍사는 3선 개헌을 강행한다. 2010년 총선에서도 위크레메싱헤의 통일국민당이 참패하여 개헌저지선 밖으로 밀려난 상황이었고, UPFA가 원내 절대권력을 장악한 상황이었다. 덕분에 3선 개헌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대법원에서도 국민투표 따위는 필요도 없다고 한 것은 덤.
그런데 스리랑카 대법원이 아무런 태클을 걸지 않았던 이유는, 라자팍사의 사법 장악 때문이었다. 당초 시라니 반다라나야케 대법원장이 라자팍사의 개헌에 태클을 걸었는데, 해당 개헌안이 대통령 임기 제한 철폐 뿐만 아니라 보다 더 많은 권력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등, 전형적인 독재정치이며 반민주적인 개헌임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자팍사는 반다라나야케를 경질하고, 자신의 최측근인 모한 페이리스를 새 대법원장으로 임명했다. 허나 야당들의 반대와 임명 절차상의 문제로 페이리스가 법적으로는 신임 대법원장으로 인정 받지 못했고, 결국 2015년 반다라나야케가 복직하게 된다. 물론 반다라나야케가 복직한 시점에서, 개헌은 이미 통과된 이후였다.
이로서 라자팍사는 3선을 향한 걸림돌을 하나 제거하는 데 성공하지만, 당연히 야당들과 국민적 반발을 피할 수 없었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그에게 맞서는 야당들이 지리멸실했던 탓에,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3선은 무난한 듯 싶었지만... 라자팍사 내각에서 근무했던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가 야권 후보로 출마하면서 총알을 피했더니 핵폭탄 맞은 꼴이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북동부에서 발생한 홍수 대처 과정에서 정부의 대응 능력이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라자팍사가 이길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47.58% 대 51.28%로 접전 끝에 예상 외의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사실 이렇게 된 원인은 라자팍사 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던 소수민족들의 반란이 컸다. 싱할라인들의 단 58% 만이 라자팍사에 투표했던 것과는 달리, 타밀인과 기타 소수민족들은 무려 84%가 시리세나를 찍었던 것이다. 홍수 대응 문제와 반군과의 내전 등으로 라자팍사에 앙심을 품고 있던 북동부 지역이 시리세나를 찍으면서, 기어이 라자팍사에게 철퇴를 날리고 말았다. 마치 세네갈의 압둘라예 와데마냥 위헌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3선을 강행했으나 결국 그의 계속된 실책에 불만을 품은 유권자들이 그를 응징하고 말았다.
3.7. 2015년 총선
하지만, 허무하게 권력을 내놓고 싶지 않았던 라자팍사는 이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최소 다른 기회가 있었는데, 바로 대선 후에 치러진 총선. 대통령직이 날아간 대신 총리직에 복귀해서 시리세나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본인이 실권을 계속 쥘 생각을 한 것이다. 이는 언급했듯이 스리랑카가 이원집정부제임에도 불구하고 총리 후보자를 대통령이 지명하기 때문에 정확히는 프랑스식이라서 실질적인 대통령제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총리 후보는 국회 표결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 즉, 형식상으로는 시리세나가 라자팍사의 횡포를 막기 위해 자신의 최측근을 임명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일단 국회를 장악하고 있던 UPFA가 맘만 먹으면 표결 통과를 막을 수도 있었고, 불신임을 강행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시리세나는 라자팍사의 정적인 위크레메싱헤를 다시 총리로 임명한 상황이었고, 국회 표결까지 통과시킨 상태이기는 했지만, 정작 국회는 UPFA가 장악하고 있었고, 그 우두머리는 다름아닌 라자팍사였다. 즉, 위크레메싱헤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것. 이렇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도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쥐고 있었던 라자팍사는, 일단 위크레메싱헤를 방패삼아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이를 통해 반사이익을 얻어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직에 복귀할 시도를 벌인다.
허나 라자팍사가 UPFA의 간판으로 전면으로 나설 경우, 유권자들이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며 비판을 할 것이 뻔했고, 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 꼼수를 쓴다. 바로 UPFA의 대표로 시리세나를 등재시킨 것. 마침 새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지라, 새 대통령이 다수당의 대표로 나가면 어느 정도 대통령 효과를 노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 치른 총선에서 위크레메싱헤와 통일국민당을 위시로 한 통일국민전선(UNF)이 단독 과반을 장악하면서, UPFA는 되레 49석을 까먹고 원내 2당으로 추락한다. 이유는 매우 간단했는데, 다수당 지위를 악용해 위크레메싱헤 내각에 자주 발목을 잡은 것이 되레 여론의 분노를 종용했으며, 아무도 UPFA의 등재대표 시리세나를 진짜 대표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국민들은 UPFA의 진짜 대표가 여전히 라자팍사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순전히 대통령 팔이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3.8. 야권 행보(2015-2018)
결국 야권으로 쫓겨났고, 자유당 내 라자팍사의 입지도 졸지에 위축되었다. 자신의 정적을 자유당 및 UPFA의 대표로 등재시킨 게, 역설적으로 자유당 및 UPFA의 무게감이 시리세나로 옮겨간 것.이렇게 궁지에 몰린 채 대통령직 복귀를 시도 중이던 2016년, 라자팍사의 측근들이 이름 없던 군소정당인 우리 스리랑카 자유전선(OSLFF)를 덥석 먹어버린 후 스리랑카 인민전선(SLPP)으로 재창당한다. 라자팍사 본인은 정작 자유당에 잔류한 채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창립총회에서 아이들에 둘러싸인 채 미소 짓는 모습에 포착되어, 라자팍사의 합류설이 본격적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라자팍사의 최측근인 G. L. 페이리스가 SLPP의 대표로 추대된 것은 덤.
물론 이 시기에는 평의원 신분에 불과했지만, 이 모든 것이 실제로는 다 연기였다. 야당의 평의원으로 전락한 그는 여전히 스리랑카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UNF가 비록 총선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UPFA와 거국내각을 구성해 UPFA가 야당/야권이라고 볼 수 없었으며, UPFA와 자유당 내 지분을 장악하고 있던 게 바로 라자팍사였다. 물론 무게감이 시리세나로 상당히 옮겨가면서 라자팍사 본인으로서도 상당히 궁지에 몰린 것은 사실이나, 이를 만회하기 위해 뒤에서 측근들을 앞세위 SLPP 재창당을 지휘했다. 비록 SLPP의 등재 대표는 페이리스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입당도 안 한 라자팍사가 당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3.9. 총리직 복귀 (2018)
그렇게 자유당과 UPFA의 조직력을 흡수한 SLPP는 2018년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위크레메싱헤 총리의 떨어지는 인기 속에서 반등을 노리게 되었다. 이후 거국내각 파기를 선언하고 위크레메싱헤 총리를 해임한 후 총리직에 복귀한다.당연히 위크레메싱헤 측은 강하게 반발했으며, 라자팍사가 원내 과반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시리세나 대통령은 조기 총선을 시도했고, 이게 확실시되자 라자팍사도 자유당을 탈당하고 SLPP에 전격 입당한다. 하지만 대법원이 태클을 걸었고, 결국 조기 총선은 무산되었다. 일단 무리하게 총리직을 버티는 시도를 했으나, 야권의 잦은 불신임 투표 등 헌정위기로 번지자, 이를 이기지 못하고 2개월도 안 되 총리직을 사임한다. 이후 위크레메싱헤가 총리직에 복귀했다.
3.10. 다시 야권으로 (2018-2019)
이후 SLPP는 다시 야당이 되었고, 라자팍사는 야당 대표로 추대되었다. 물론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쥐고 있었는데, 헌정위기 당시 시리세나와 라자팍사가 손을 잡고 화해하면서, 라자팍사로서는 시리세나를 바지사장으로 이용했던 것. 잦은 정치적 불안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시리세나는 라자팍사에게 제대로 휘둘렸고, 위크레메싱헤 내각을 자주 흔들었다.3.11. 권력 재장악
2019년 대선이 다가오자, 라자팍사의 대통령직 복귀설이 나돌았다. 시리세나가 초기 재선 의사를 밝히기는 했지만, 맨 처음에 약속했던대로 1번만 하고 물러나기로 결정한 것. 사실 자유당과 UPFA의 조직력이 박살난 것도 있어서, 시리세나로서는 재선을 시도해봤자 결과가 뻔했기 때문이다.그렇게 라자팍사가 SLPP의 대선 후보로 나가서 대통령직에 복귀할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지만, 4년 전 본인의 3선 시도를 위해 무리수를 둬서라도 개헌을 강행했다가 엄청난 논란을 불렀고, 그렇게 3선 도전을 강행했건만 낙선했기 때문에, 결국 3선 불출마를 선언한다. 허나 현실은 마힌다 라자팍사의 3선 포기였을 뿐, 라자팍사의 대통령직 포기라고 볼 수는 없었다. 마힌다 본인이 출마하는 대신, 동생 고타바야 라자팍사를 대선 후보로 내보낸 것.
대신 마힌다는 대선 후 치러질 2020년 총선에 총리 후보로 나서기로 결정했고, 대선을 앞두고 UPFA를 스리랑카 인민자유동맹(SLPFA)으로 확대·개편한다. 여기에는 라자팍사의 오랜 친정이자, SLPP 재창당으로 몰락한 자유당도 합류했다. 참고로 자유당은 일찍이 SLPP 지지를 선언한 상태였다.
선거 결과, 고타바야가 52.25%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아권단일후보 사지트 프레마다사[2]를 꺾고 당선되어, 라자팍사 가문은 권력으로 전면 복귀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고타바야는 마힌다가 앞세운 바지사장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자신의 동생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므로, 권력이 더욱 더 공고해진 것은 덤.
이후 여세를 몰아 2020년 총선에서도 SLPP가 이끄는 SLPFA가 압승을 거두었다. 반대로 위크레메싱헤의 통일국민당은 단 1석만 건져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마힌다 본인을 포함한 라자팍사 일가 5명이 원내 진입에 성공했다. 단, 대통령 고타바야는 제외. 이후 마힌다는 총리직에 복귀하였다.
3.12. 몰락
그러나 2022년 스리랑카 경제위기로 인해 결국 사임했다. 겉으로 보면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경제난이 주 원인이지만, 실제로는 부정부패, 족벌정치, 갖가지 갑질 등의 사회문제가 넘쳐나는데도 정작 그러한 문제들의 해결은 등한시하여 더욱 키웠고 이전부터 국민들 사이에 쌓여가던 불만이 경제난으로 한꺼번에 폭발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국민과 정면으로 대립하지 않는 한 살아날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사임한 것. 당연히 사람들은 사임해도 분노가 누그러들지 않아, 라자팍사의 집을 공격하여 불태워버렸다. 시위대는 라자팍사 총리의 동생인 고타바야 대통령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와 파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고타바야도 견디지 못하고 대통령에서 사임했다.총리직 사임 이후인 지금도 의회 다수당인 스리랑카 인민전선의 대표 자체는 마힌다 라자팍사가 맡고 있지만, 차기 대선 및 총선에서 재기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4. 비판
현재 스리랑카에서 가장 인지도와 인기가 가장 높고,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지만, 동시에 가장 큰 비판과 증오를 받는 정치인이기도 하다.이 사람이 독재자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거센데, 일단 언급한 행보들을 보면 독재자라는 비판이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총리직 1년에 두 번이나 대통령을 지내고도 만족하지 못해서 3선을 하기 위해 날치기, 사법장악 등 반민주적인 수단도 서슴치 않았고, 그러고도 낙선하자 총리직으로 복귀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이으려다가 이마저도 안 되자 거국내각 구성, 새 대통령을 막후에서 조종하는 등 권력을 위해서라면 설상 욕을 먹더라도 별의별 수단을 이용하고 보는 인물. 이런 점에서 종종 블라디미르 푸틴과 비교될 정도. #
사실 마힌다가 어떤 점에서는 푸틴보다도 더하다고 볼 수 있는데, 푸틴조차 안 하는 족벌정치를 했다는 점이다. 특히 마힌다 본인부터가 정치인 가문 출신이고, 부친의 후광으로 부친의 지역구를 물려받은 인물이고, 집권 후에는 형과 동생, 친척들을 자기 내각에 등용하였다. 심지어 2019년 대통령직 복귀를 시도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자 이를 우회하려고 본인의 동생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웠고, 총리직에 복귀한 2020년 총선에서는 마힌다 본인을 포함한 5명의 일가가 진입했다.
여기에는 마힌다의 아들인 나말 라자팍사가 있는데 일각에서는 이미 고령인 마힌다가 나말에게 권력을 세습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 정도면 푸틴이 아니라 북한하고 비교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얘기가 있다. 물론 이러한 비교는 너무 지나치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러한 비판이 나온다는 것은 스리랑카와 북한을 비교하는 경향이 꽤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3선에 실패한 2015년 대선 직후에는 대통령직을 유지하기 위해 쿠데타를 미수했다는 의혹이 나오기도 했다. 말이 "쿠데타"지, 정확히는 계엄령 선포를 통한 일종의 "친위 쿠데타"에 가깝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의 친위 쿠데타가 정당한 것은 전혀 아니다. 당연히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군·경 양측 다 쿠데타설을 전면 부인했지만,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진위 여부를 떠나서, 이런 음모론이 진지하게 제기된 것으로 보아서, 마힌다의 권력욕이 장난이 아님을 암암리에 보여준다.
언론도 심각하게 탄압했는데 스리랑카의 언론자유지수는 상당히 최악 수준에 들어가 있다. 2008년 국경 없는 기자회의 보도에 따르면, 스리랑카의 언론자유지수는 173개국 중 162위로, 전형적인 언론 탄압 국가로 분류하고 있다. 그나마 이듬해에는 162위, 2010년에는 158위로 조금씩 올라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언론 탄압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 형식상 스리랑카인들은 마힌다 일가를 비판할 수 있고 언론이 그런 보도를 하는 게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진짜로 비판적인 보도를 내거나 할 경우, 본인의 신변을 장담할 수는 없다. 특히 마힌다의 대통령 재임 시기 스리랑카에서 언론인 17명이 납치·살해되었다고 하는데, 정부는 해당 언론인들이 본인들과는 전혀 무관함을 내세우고 있지만, 피살자들의 면면을 보면 누가 봐도 누가 시켜서 암살했는지 당연히 알 수 있다. 푸틴을 반대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는데 러시아에서만 생산하는 독극물이 검출됐다면 누구 소행일지는 굳이 안봐도 알 수 있다. 실행범들은 잡아 가둬봐야 의미가 없고, 배후를 잡아들일 수가 없어서 묻어버릴 뿐이다.
형식상으로 라자팍사 정권은 좌파·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있지만, 사회주의가 내세우는 평등의 가치와는 달리, 실제로는 싱할라인 및 불교도들을 우대하고 타밀인 및 힌두교도들을 암암리에 탄압하고 있었다. 이념은 정 반대인 윗동네의 누구를 따라하다시피 하는데, 물론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지는 않고 있고, 형식상으로는 싱할라인과 타밀인 간의 평등과 공존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말이 무색하게, 싱할라인 불교 과격파들의 만행이 벌어져도 이를 제지하기는커녕 되레 수수방관하고 있다. 대통령이 된 동생 고타바야는 싱할라인 불교 과격파 단체인 불교 세력(BBS)을 지원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타바야는 정작 인종차별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미국에서 생활하였고, 한때 미국 국적자였다. 이것도 모자라, 자국의 국가(國歌)의 타밀어 가사를 사실상 금지하려는 시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행보들이 아주 이상하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라자팍사 일가와 측근들이 타밀인 반군들을 때려잡은 경력이 있었는데, 이때도 온갖 인권 침해가 난무한 것을 보면, 이들이 타밀인 힌두교도들을 멸시하고 탄압해도 전혀 이상할 이유가 없다.
북한까지는 아니지만 우상화 의심도 받고 있다. 마힌다의 집권 시기 신설된 각종 인프라에 "마힌다 라자팍사"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집권기에 이런 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