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00:03:14

마리냐노 전투

파일:마리냐노 전투.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 - 베네치아 연합군3.2. 스위스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서기 1515년 9월 13-14일 스위스 연방군과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밀라노 공국을 확보했으며, 스위스는 대외 확장 정책을 중단하고 영세 중립국을 선언했다.

2. 배경

이탈리아는 중세가 개막한 이래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밀라노 공국, 피렌체, 피사 등 여러 도시 국가들과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이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였고,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등 여러 열강도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뻗기 위해 수시로 침략했다. 여기에 교황령을 확장하여 이탈리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교황의 야망까지 맞물리면서, 이탈리아의 정세는 오래도록 혼란스러웠다.

1494년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1세가 사망하자, 프랑스 국왕 샤를 8세는 자기가 나폴리 왕위를 승계받았다고 주장하며 2만 5천 병력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피렌체를 점령한 뒤, 당시 교황이던 알렉산데르 6세와 밀약을 통해 나폴리를 점령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나폴리를 지나치게 약탈하는 바람에 이탈리아 전체의 공분을 샀고, 알렌산데르 6세는 프랑스와 관계를 단절하고 베네치아, 피렌체, 아라곤 왕국, 신성로마제국과 연합하여 프랑스군에 대항했다. 샤를 8세는 1495년 7월 포르노보 전투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가까스로 승리했지만, 전리품을 모두 놔두고 프랑스로 급히 귀환했다.

1499년 7월, 프랑스의 새 국왕 루이 12세는 밀라노 공국의 계승권을 주장하며 친히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그해 10월 밀라노를 점령한 그는 내친 김에 나폴리로 남하하면서, 피렌체의 도움을 받을 목적으로 1500년 6월 당시 피렌체와 대립하던 피사를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그러다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2세가 지원해주기로 하자, 루이 12세는 흔쾌히 받아들여 1502년 스페인군과 함께 나폴리 왕국군을 무너뜨리고 나폴리를 공략했다. 그러나 페르난도 2세는 곧바로 태도를 바꿔 프랑스를 적대하였고, 1503년 체리뇰라 전투와 가릴리아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크게 격파했다. 결국 루이 12세는 본국으로 철수했고, 스페인은 나폴리 왕국을 장악했다.

1509년 교황 율리오 2세는 교황령의 확대를 도모하기 위해 프랑스와 연합하여 캉브레 동맹을 체결한 뒤 베네치아 공화국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프랑스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루이 12세와의 분쟁이 생기자, 1510년 캉브레 동맹을 해체시키고 베네치아, 스페인과 신성 동맹을 체결하고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신성 동맹에 가담한 또다른 세력이 등장했으니, 바로 스위스 연방이었다.

스위스 연방은 13세기경 알프스 산맥의 도시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독립하고자 결성한 이래,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끄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했고, 주변의 여러 도시들을 가담시켜 영향력을 키웠다. 이후 1474년부터 1477년까지 용담공 샤를이 이끄는 부르고뉴국 부르고뉴 전쟁을 벌인 끝에 낭시 전투에서 용담공 샤를을 전사시켜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그들은 갈수록 향상되는 전투력과 군사적 명망에 자신감을 느끼고, 따뜻한 남쪽 지역인 이탈리아 북부로 진출하기로 마음 먹었다.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스위스 용병을 앞다퉈 고용하여 전쟁에 써먹길 반복했기 때문에, 스위스인들은 북이탈리아의 지리와 정세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십분 활용하여 북이탈리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1510년 결성된 신성 동맹에 가담한 뒤 1512년 프랑스군을 밀라노에서 몰아내고 밀라노 일대를 사실상 장악했다. 루이 12세는 밀라노를 되찾기 위해 란츠크네히트와 프랑스 기병 및 포병대를 동원하여 이탈리아를 재침했으나, 1513년 노바라 전투(Battle of Novara)에서 스위스군에게 완패했다. 그 후 스위스군이 디종까지 추격하여 공성전을 벌이자, 루이 12세는 그들이 스위스로 돌아가는 대가로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프랑스는 이렇듯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수차례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던 1515년 1월 루이 12세가 사망하였고, 사위이자 오촌 조카였던 프랑수아 1세가 2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 야심만만한 청년 왕은 밀라노를 탈환하기로 마음 먹었다. 마침 신성 동맹을 이끌었던 율리오 2세 1513년 선종했고, 스페인이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지나치게 확대하는 걸 경계한 베네치아 공화국이 동맹을 탈퇴했다. 이에 프랑수아 1세는 그해 4월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으로 향했다.

밀라노 공작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Massimiliano Sforza, 1493 ~ 1530)는 예상되는 프랑스의 침공에 대비하여 1515년 7월 교황 레오 10세, 신성 로마 제국, 스위스와 동맹을 체결했다. 사실 레오 10세는 더 이상 분쟁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고 파르마와 피아첸차에서 통치권을 유지하는 데 더 신경쓰고 싶어했지만, 프랑스가 이탈리아 북부를 장악하여 교황령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원하지 않았기에 동맹에 가담했다. 프랑스군이 알프스 산맥 인근에 이르렀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스위스군과 밀라노군은 피에몬테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프랑스군이 이전부터 알프스 산맥을 건널 때 이용하던 산길에 감시병을 배치했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적이 기다리는 길목에 그대로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보병 일부 부대만 그쪽으로 보내고, 대다수 부대를 더 복잡한 서쪽 경로를 통과하여 알프스 산맥을 넘게 했다. 일부 병력은 마르세유에서 함선을 타고 제노바로 항해한 뒤, 제노바군과 합세하여 여러 마을을 기습 점령했다. 자크 드 라 펠리스와 피에르 테라 일 셍귀 니엘 바야르 드 바야르(Pierre Terrail de Bayard, 1476 ~ 1524), 시뇨르 드 바야르가 이끄는 프랑스 사단은 콜드라르장티에르(지금의 마달레나) 산길을 통과하는 새로운 길을 통해 대포 72문을 끌고 이동한 뒤, 프로스페로 콜론나(Prospero Colonna, 1452년–1523년)가 이끄는 밀라노군을 기습하여 콜론나를 비롯한 여러 장교들과 말, 무기 대부분을 노획했다.

스위스군은 적군이 다른 경로를 통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급히 밀라노 공국으로 퇴각했고, 오데 드 푸아(Odet de Foix,1485 ~ 1525), 시뇨르 드 로트렉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이들을 추격했다. 프랑스군은 1513년의 패전을 안겨줬던 노바라를 곧 공략하였고, 프랑수아 1세는 8월 30일 노바라에 입성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스위스 군 내부에서 더 이상의 전쟁을 그만두고 그동안 얻은 전리품만 생겨서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에 스위스 측 사절이 프랑수아 1세를 찾아가 협상을 제안했다. 스포르차 공작이 프랑스에게 일부 영지를 헌납하고, 스위스군은 프랑스군과 교전하지 않는 대신 100만 에쿠스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전투를 미루기 위한 계략으로 간주하고, 프랑스군에게 밀라노를 향해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군이 접근해오자, 스위스 측은 재차 사절을 보내 밀라노를 프랑스에게 넘길 테니 스위스로 무사 귀환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프랑수아 1세는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밀라노에서 16km 떨어진 마리냐노 마을에 주둔한 채 협상을 이어갔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신규 병력이 도착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새로 도착한 병사들은 아무런 전리품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길 원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스위스군 내부에서 전쟁을 벌이자는 주전파와 교전을 회피하고 귀환하자는 주화파 간의 대립이 심해졌다.

그러던 1515년 9월 13일, 시옹의 추기경인 마테우스 시너(Matteo Schiner, 1465 ~ 1522)가 현장에 도착하여 스위스 장병들에게 전투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그는 노바라 전투를 상기하라면서, 이번에 이기면 막대한 전리품을 얻을 수 있다고 선동했다. 스위스군은 이에 고무되어 전투를 결의하고 마리냐노 마을로 진격했다. 이리하여 밀라노의 종주권을 둘러싼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 - 베네치아 연합군

3.2. 스위스군

  • 지휘관: 취리히 시장 마르쿠스 뢰이스트(Markus Röist, 1454 ~ 1524), 밀라노 공작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
  • 병력: 보병 22,000명, 기병 200기, 프랑스군으로부터 노획한 대포 수십문.

4. 전투 경과

1515년 9월 13일 늦은 오후, 스위스군이 마리냐노 평원에 들이닥쳤다. 프랑수아 1세는 이때까지만 해도 협상을 통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여기고 별 대비를 안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적이 쳐들어왔다는 급보를 접하자, 그는 즉시 전군에 전투 대형을 갖추게 했다. 그는 병력을 3개 부대로 나누었다. 샤를 드 부르봉은 우익을 이끌었고, 샤를 드 발루아(Charles III de Bourbon, 1490 ~ 1527)는 좌익을 이끌었으며, 자신은 중앙을 이끌었다. 또한 대부분의 프랑스 포병대와 9,000명의 란스크네히트, 그리고 프랑스의 화승총수와 궁수들이 포함된 선봉대가 전방에 포진했다.

스위스군은 먼저 적 선봉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프랑스 대포들이 포격을 퍼부었지만, 해가 저물어서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터라 대다수 포탄이 빗나갔다. 스위스군 선봉대는 거친 파도와 같이 진격하여 란츠크네히트 부대를 순식간에 격파하고 대포 몇 개를 탈취했다. 그러자 샤를 드 부르봉이 급파한 기병대가 측면에서 반격했고, 스위스 선봉대는 본대로 후퇴했다. 이후 어둠이 깔리면서 전투는 혼전 양상이 되었다.

프랑스 기병대는 적의 전열을 무너뜨리기 위해 수시로 돌격했지만, 스위스 보병대의 파이크 진형을 뚫지 못하고 번번이 후퇴했다. 반면 스위스군도 적의 전열을 돌파하려 수차례 시도했으나, 적의 거센 저항으로 실패했다. 그 와중에 프랑스 장교 수십 명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고, 프랑수아 1세 본인이 친히 기병대를 이끌고 가서 전열을 무너뜨리려는 스위스군을 요격하기도 했다. 이렇듯 지리한 소모전이 이어지다가, 전투 개시 5시간 만인 오후 10시경 내일 전투를 재개하기로 합의하면서 양군이 물러났다.

9월 14일 아침, 양측은 전투를 재개했다. 스위스 보병대는 방진을 편성한 뒤 포병대를 향해 재차 진격했다. 하지만 프랑스 포병대는 이번엔 포격을 제대로 하여 스위스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스위스군도 이에 맞서 포격하였으나, 그 수가 적어서 전황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스위스군은 포격 세례로 인해 많은 장병들이 쓰러지는 와중에도 꿋꿋이 전진했고, 앞을 가로막은 란츠크네히트를 또다시 격파했다. 이에 프랑스 기병대가 돌진하여 적의 진격을 막아냈고, 양측은 어제처럼 지리한 소모전을 반복했다. 그러던 중 용병대장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Bartolomeo d'Alviano, 1455년 – 1515년)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이 뒤늦게 전장에 이르러 스위스군의 배후를 치면서, 전세는 스위스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스위스군은 베네치아군을 몰아내기 위해 일부 병력을 파견했으나 실패했고, 프랑스군 포병대가 포격을 계속 퍼붓고 기병대가 연이어 돌격한 끝에 스위스군 전열이 조금씩 무너졌다. 결국 취리히 시장이자 스위스군 지휘관 마르쿠스 뢰이스트는 퇴각을 결심하고,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밀라노로 철수했다. 프랑스군은 오래도록 지속된 전투에 지칠대로 지친 데다, 적이 빈틈을 보이지 않고 철수하기 때문에 함부로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리하여 마리냐노 전투는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당대 기록에 따르면, 이날 약 16,500구의 시신이 전장에 남겨졌는데, 다수는 스위스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 측이라고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는데 전사자가 5천명이나 나왔으며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Louis II de la Trémoille, 1460 ~ 1525), 클로드 드 로레인 등 여러 프랑스 귀족들이 중상을 입었고, 기즈 공작은 22차례 부상을 입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프랑수아 1세도 직접 참전해서 싸우다가 장창에 세번이나 찔렸지만 판금 갑옷 덕분에 경상에 그쳤다[1]. 지휘부라 할 수 있는 국왕과 귀족들까지 부상을 입을 정도니 전투의 처절함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프랑수아 1세는 후에 왕비에게 편지를 보내 전투에 대해 설명하면서, "만약 스위스인들이 우리보다 더 많이 대포를 가졌다면, 우리가 패배했을 것이오."라고 밝혔다.

스위스군은 전투 패배 후 더이상 싸우기를 거부하고 이틀 만에 본국으로 후퇴했다. 결국 밀라노 공작 막시밀리아노 스포르차는 프랑스군에게 항복했고, 프랑수아 1세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 황금색 왕봉을 든 채 밀라노에 입성했다. 그 후 11월에 스위스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고, 교황으로부터 밀라노 점유를 인정받았다. 이로서 프랑스는 1513년 노바라 전투의 아픔을 씻어내고 밀라노를 되찾았다.

과시욕이 강한 프랑수아 1세는 로마 황제로 분장하여 개선식을 치르고, 승리 기념 메달을 주조하였다. 프랑수아 1세의 '마리냥 전투'에 대한 프로파간다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전투를 기념하는 그림과 음악이 만들어졌고, 그 중 클래망 잔켕의 샹송은 '전쟁'이란 이름으로 현재까지도 간간이 연주되는 16세기 프랑스 샹송의 명곡으로 남아있다. 10년 후의 파비아 전투로 인해 마리냐노 전투의 성과가 무위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는 왕의 무덤에까지 조각으로 전시되어 있다.

스위스 연방은 마리냐노 전투 후 대외 확장 정책을 포기하고 영세 중립국을 선언했다. 그렇지만 프랑수아 1세는 이 전투에서 스위스 보병대가 보여준 강인한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란츠크네히트가 스위스 보병대에게 제대로 대항하지 못한 것에 실망했다. 이에 그는 스위스 용병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로 마음 먹었다. 1516년 11월 29일, 프랑스와 스위스 연방은 프리부르에서 '영구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스위스 연방은 이 협정에서 '밀라노의 보호국'을 자처했던 걸 포기하고, 프랑스는 그 대가로 70만 크라운[2]을 지불했다. 또한 스위스는 프랑스의 적에게 용병을 보내지 않기로 하고, 프랑스에 대규모 용병대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프랑수아 1세는 스위스 용병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카를 5세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이 이탈리아에 개입하였고, 양측은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이탈리아의 패권을 놓고 격돌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프랑스는 힘들게 쟁취한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였고, 기껏 포섭한 스위스 용병이 시대에 뒤쳐졌음이 확인되었다.

[1] 흔히 영화나 드라마 및 만화 같은 수많은 대중 매체들에서는 판금 갑옷이 날붙이와 투사무기에 종잇장처럼 뚫리는 형편없는 보호구처럼 묘사되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심지어 제대로 만들어진 판금 갑옷 방탄 효과까지 있어서 이보다 훗날인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는 여러 발의 총상을 입었지만 무사했다 #. [2] 현재가치로 따지면 올림 적용하면 7천억 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