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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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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건축의 대표작인 타기 카스라 유적
파일:Salman_the_Persian_tomb_in_Ctesiphon_-_Madain_-_Iraq.png
살만 알 파르시 모스크

1. 개요2. 역사
2.1. 중세
2.1.1. 바그다드의 남쪽 관문
2.2. 근현대

1. 개요

아랍어 المدائن
아람어 מחוזא (마호자)
영어 Al-Mada'in

이라크 중남부의 도시. 바그다드 동남쪽 20km, 비스마야 신도시 남쪽 5km 지점의 티그리스강 동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7만명이다. 옛 크테시폰 유적 위에 세워진 도시로, 서쪽 강 건너편에는 셀레우키아 유적이 있다. 시가지 남쪽에 크테시폰 유구인 타키 카스라가 남아있다. 마다인이란 지명은 도시들이란 뜻으로, 크테시폰과 셀레우키아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도심부를 따로 이곳에 안장된 사하바 살만 알 파르시의 이름을 따서 살만 팍이라 부르기도 한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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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들은 이슬람 이전 자힐리야 시기부터 크테시폰 일대를 마다인이라 불렀고, 셀레우키아 인근 강 서안 쪽은 페르시아어 지명인 베흐-아르다시르가 변형된 베라시르로 불렀다. 베라시르에는 주로 유대인 부유층과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이 살았다. 495년, 대사제 마르주트라 2세 휘하의 유대인 주민들이 마즈다크교와 연대해 봉기하여 베라시르를 일시 장악했다가 502년 난을 진압한 카바드 1세에게 티그리스에 놓인 다리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540년에는 호스로 1세 안티오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크테시폰 남쪽에 이주시켜 '웨 안디옥 호스로'라 명명했고, 현지인들은 로마촌이란 뜻인 루마간이라 불렀다. 아랍인들은 알 루미야라 불렀다. 590-91년 바흐람 추빈 호스로 2세 간의 내전 중 크테시폰은 일부 파괴되었고, 후자가 현 바쿠바 인근에 다스타게르드란 새 겨울궁을 세우고 머물며 소외되었다. 628년에는 메소포타미아 일댈 덮친 역병으로 카바드 2세 등 여럿이 사망했다. 629년부터 크테시폰에서는 정변이 연이어 벌어졌고, 특히 파흘라브 (파르티아)와 파르시그 (페르시아) 계열 귀족들의 투쟁이 제일 두드러졌다.

2.1. 중세

636년 카디시야 전투 후 칼리드 빈 우르푸타 휘하의 이슬람 제국군이 셀레우키아 남쪽 외곽의 발라샤바드를 점령했고, 이에 루마간 (루미야)과 베라시르 등 크테시폰의 위성도시들이 지즈야 납부 등의 조건으로 항복했다. 637년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의 대군이 당도하자 사산 제국군은 소규모의 저항 후 도주했고, 이슬람 군대는 엄청난 전리품을 획득했다. 그후 일대는 공식적으로 '알 마다인'으로 명명되었다. 사드는 슈라빌 이븐 앗 시므트를 총독에, 부관 알 카카 이븐 아므르 앗 타미미를 주둔군 사령관에 봉했다. 656년경 페르시아인 사하바 살만 알 파르시가 마다인에 안장되었다.

661년에는 1차 피트나 와중에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하산 빈 알리가 마다인에서 무아위야 1세와 대치하다가 암살 위기를 겪은 후 그에게 항복하며 우마이야 왕조의 설립으로 이어졌다.[1] 우마이야 왕조 시기 마다인은 쿠파, 바스라와 함께 이라크 지역의 3대 총독부가 있는 대도시로 유지되었다. 비록 앞의 두 도시들보다는 뒤쳐졌지만, 지리적 요충지여서 자주 사서에 언급된다. 2차 피트나 시기인 687년, 알리와 하산 부자의 암살에 나섰던 카와리지 세력이 마다인을 함락하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696년에도 샤비브 이븐 야지드 앗 샤이바니가 이끄는 카와리지 군이 마다인을 일시 점령했다. 그리고 8세기 들어 와시트가 이라크 중남부의 새 거점으로 부상하며 마다인을 대체했고, 더이상 총독이 임명되지 않는 등 쇠퇴하였다.

압바스 왕조 수립 후 중심지가 이라크로 정해지며 마다인은 중흥기를 맞는다. 754년 즉위한 알 만수르는 기존의 쿠파 안바르 대신 수개월간 루마간 (루미야)에서 머물렀고, 시리아 총독 압둘라 빈 알리의 난을 진압한 후에는 공신 아부 무슬림을 불러 루미야의 궁전에서 암살했다. 이후 그의 시신은 궁전 옆 티그리스 강에 던져졌다. 755년 알 만수르는 새롭게 건설할 수도의 부재로 활용하기 위해 크테시폰의 사산 제국 황궁인 하얀 궁전을 파괴하였다. 새 수도의 부지는 마다인 북쪽의 바그다드로 결정되었고, 바그다드 건설 후 마다인은 그 남쪽 위성도시로 전락하며 짧은 증흥기를 마치고 더욱 빠르게 쇠퇴했다. 한편 바그다드 건설 후 알 만수르는 보상의 의미로 하얀 궁전을 재건했지만, 거의 쓰이지 않아 결국 폐허가 된다.

2.1.1. 바그다드의 남쪽 관문

바그다드가 빠르게 성장하며 주민들은 대부분 그곳으로 이주했는데, 예외적으로 기독교도들은 조정의 감시가 줄어든 마다인으로 더욱 몰려들었다. (혹은 마다인으로 추방되었다) 압바스 시기 마다인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로의 총대주교청 소재지였고, 그중 티모시 1세가 790년 마다인에 병원을 세우기도 했다. 4차 피트나 시기 마다인은 812년 알 마문의 대장군 타히르 빈 후사인에게 점령되었고, 후자는 마다인을 거점 삼아 이듬해 바그다드까지 함락한다. 817년, 바드다드 주민들이 봉기하여 알 마문의 동생 이브라힘을 칼리파로 추대하고 마다인까지 점령했지만 이듬해 알 마문의 페르시아인 장군 알 하산 빈 사흘이 수복하였다.

865년 5차 피트나 당시 마다인은 알 무스타인 소그드인 장수 아불 사즈 데브다드가 수비했는데, 6개월간의 전투 끝에 알 무타즈의 튀르크 군이 성벽의 틈새를 파고들어 함락하였다. 수비군은 강을 통해 도주하려다 튀르크 기병대의 돌격에 지원군 지휘관이 전사하며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이듬해 바그다드 역시 함락되었다. 사마라의 혼란을 끝내고 압바스 조의 중흥을 일군 알 무타디드 알 무크타피는 티그리스 동안에 타즈 궁전 등 바그다드의 신도심을 건설하기 위해 크테시폰 유적을 더욱 파괴하였다. 이라크가 재차 내전의 혼란에 빠진 942년 6월, 모술 총독 하산 (나시르 앗 다울라)과 동생 알리는 칼리파 알 무타키를 모시며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이후 8월에 알리는 정권을 위협하던 바스라 & 와시트 총독 하산 알 바리디의 동생 아불 후세인과 마다인에서 3일간의 전투를 벌인 끝에 힘들게 승리하여 사이프 앗 다울라 칭호를 하사받았다.

945년 이라크는 부와이 왕조령이 되었다. 974년 튀르크 장군 사북타킨이 반기를 들어 마다인을 비롯해 이라크 주요부를 점령했으나 이듬해 진압되었다. 983년 아두드 앗 다울라의 사후 두 아들인 삼삼 앗 다울라와 샤라프 앗 다울라가 각각 이라크, 이란을 거점 삼아 내전을 벌였다. 987년 샤라프 앗 다울라는 마다인을 점령했고, 곧 이라크 전역을 석권하며 내전을 종결시켰다. 다만 999년부터 이라크를 습격하던 아사드, 우카일 베두인 부족들은 마다인을 점령하며 바그다드를 위협했다. 1002년 바하 앗 다울라가 마다인 수복에 나섰으나 격퇴되었고, 이에 그는 부관 아부 자파르 알 핫자즈에게 베두인-쿠르드 원군을 더해주었다. 그리고 뒤이은 엘힐라 전투에서 부와이 군은 아사드-우카일 연합군을 격파하고 마다인을 수복하였다.

1055년부터 한세기 가량 이어진 셀주크 제국기에 마다인은 소도시로 전락하였다. 압바스 조의 직접 지배가 이어지던 1199년, 마다인의 유대인들은 시내 시나고그 주변에 모스크가 건설된 것에 항의하며 봉기하였다. 그들은 모스크의 이맘과 무슬림 군중을 공격해 승리했고, 얻어맞은 무슬림들은 칼리파 앗 나시르의 비서에게 항의하며 지원을 요구했다. 앗 나시르는 이에 동조하며 시나고그를 허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로써 본래 유대-기독교세가 강했던[2] 마다인은 점차 이슬람화되었다. 다만 도시 자체는 쇠락을 면치 못했고, 그나마 교통의 요지인 입지 조건과 살만 알 파르시 영묘를 찾는 순례객들이 방문으로 유지되었다. 13세기 무렵 마다인 주민 대부분은 열두이맘파 쉬아 무슬림이었고,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2.2. 근현대

파일:Ctesiphon,_Iraq,_1932.jpg
1932년 타키 카스라 유적
파일:Tomb_of_Salman_Al_Farsi.jpg
살만 알 파르시 모스크 내의 영묘

오스만 제국 사파비 왕조 간의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영묘는 17세기 오스만 술탄 무라트 4세에 의해 복원되었고, 1904-05년에 추가 보수 작업이 있었다. 18세기 들어 마다인은 크테시폰 유적을 찾는 유럽 학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이라크 내전기인 2005 ~ 2019년간 마다인은 다른 이라크 쉬아 도시들처럼 급진 수니파 단체들의 폭탄 테러나 인질극 등 수난을 겪었다. 2006년 2월에는 근래 들어 쉬아 모스크로 전환된 살만 알 파르시 사원에 사마라의 알 아스카리 영묘 테러와 동시에 미사일 공격이 가해져 돔이 붕괴하는 등의 피해가 있었다. 현재는 복구되었다. 2020년대에는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로 인해 마다인은 점점 바그다드 광역권에 포함되어 연담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1] 이후 알리를 도왔던 마다인의 잔존 페르시아인들이 추방된다 [2] 8세기까지는 마니교, 만다야교 등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