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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뤼사이-사파이 왕국 5-1대 군주 Ῥασκούπορις | 레스쿠포리스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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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레스쿠포리스 2세 |
그리스어 | Ῥασκούπορις | |
영어 | Rhescuporis II | |
생몰 년도 | 미상 ~ 19년 | |
재위 기간 | 12년 ~ 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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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드뤼사이-사파이 왕국 5-1대 군주.2. 생애
오드뤼사이-사파이 왕국 3대 군주 코티스 2세의 아들이자 4대 군주 로메탈케스 1세의 동생이다. 그는 서기 6년 일리리아 대반란이 벌어졌을 때 로마군에 가담하여 달마티아인과 판노니아인을 상대로 마케도니아에서 분투했다. 12년 로메탈케스 1세가 사망한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지시에 따라 조카 코티스 3세와 함께 왕국을 양분했다. 코티스 3세는 트라키아 해안지대와 그리스 식민도시 인근 지역을 맡았으며, 그는 트라키아 내륙 지대를 맡았다.그는 개발이 덜 된 트라키아 내륙 지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그리스 문화가 잘 전래되어 번영을 구가하는 조카의 영토를 빼앗고 싶어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분노를 살 걸 두려워하여 감히 야심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뒤 로마가 군인들의 폭동과 게르마니아 전쟁 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조카의 영토를 빼앗으려 들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양자간의 갈등은 갈수록 깊어졌다.
18년, 티베리우스 황제는 두 왕에게 사절을 보내 화해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그는 조카에게 화해하는 차원에서 연회를 열고자 하니 참석해달라고 부탁했다. 코티스 3세는 이에 응해 연회에 참석했지만 곧바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레스쿠포리스 2세는 코티스 3세가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꾀했다고 고발하면서, 자신에게 트라키아 전역을 다스릴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다. 티베리우스가 자세한 경위를 알고 싶으니 로마로 와달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감옥에 수감된 조카를 살해했다. 코티스 3세의 아내 안토니아 트뤼파이나는 그의 마수를 피해 자식들을 이끌고 키지코스로 피신했다.
19년 티베리우스 3세가 그가 사망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자 재판을 열고 그를 소환했다. 그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오랜 친구이자 모에시아의 총독인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플라쿠스가 설득하자 결국 로마로 갔다. 이후 증인으로 참석한 안토니아 트뤼파이나로부터 코티스 3세 살인자로 규탄받았고, 티베리우스 황제는 유죄 판결을 내린 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유배보냈다. 그는 도중에 탈출을 시도하다가 경비병에게 피살되었다.
그에게는 아들 로메탈케스 3세가 있었다. 서기 38년 코티스 3세와 안토니아 트뤼파이나의 딸 피토도리스 2세(또는 피토도리다 2세)와 결혼하여 공동 왕이 되었으나 46년 아내의 사주를 받은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