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22:43

랜디 존슨/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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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몬트리올 엑스포스
3.1. 1988 시즌3.2. 1989 시즌
4. 시애틀 매리너스
4.1. 1989 시즌4.2. 1990 시즌4.3. 1991 시즌4.4. 1992 시즌4.5. 1993 시즌4.6. 1994 시즌4.7. 1995 시즌4.8. 1996 시즌4.9. 1997 시즌4.10. 1998 시즌
5. 휴스턴 애스트로스
5.1. 1998 시즌
6.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6.1. 1999~2002 시즌6.2. 2003 시즌6.3. 2004 시즌
7. 뉴욕 양키스
7.1. 2005 시즌7.2. 2006 시즌
8.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기
8.1. 2007 시즌8.2. 2008 시즌
9.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9.1. 2009 시즌
10. 연도별 성적

1. 개요

랜디 존슨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고등학교 졸업 후 1982년 드래프트에 참가한 존슨은 4라운드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지명을 받았다. 이때 애틀랜타는 당시 기준으로 4라운드 지명자에게는 매우 파격적인 계약금인 5만 달러를 제시했는데, 존슨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제안을 거절하고 USC에 진학하게 된다. 당시 팀 동료이자 투타 겸업을 하던 마크 맥과이어는 존슨의 피칭을 보고 아, 저런 사람만이 투수를 할 수 있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어 타자로 완전히 전업하였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밝혔다.[1]

3. 몬트리올 엑스포스

파일:external/mlbreports.files.wordpress.com/randy-johnson-expos.jpg
랜디 존슨의 선수 초창기 시절.
그러니까 존슨 말년의 사진이 아닌, 20대 시절이다.

2년 후인 1985년, 존슨은 동 해 드래프티 중 전체 4순위 유망주로 평가받았었지만 하필 당해에 성적이 부진한 나머지 순위가 많이 밀려 2라운드에 몬트리올 엑스포스에 지명받았고 몬트리올과의 입단 계약을 맺었다.

3.1. 1988 시즌

208cm라는 NBA 평균 신장보다 큰 키와[2] 무시무시한 강속구로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프로에 와서는 무슨 소년야구만화의 주인공처럼 제구 불안에 시달리는 그렇고 그런 유망주일 뿐이었다. 게다가 이 당시에는 오버핸드였다. 리키 핸더슨은 존슨과의 첫 대결에서 4타석, 4볼넷, 5도루, 4득점을 따내며 존슨을 아주 가지고 놀았을 정도. 1988 시즌에는 4경기 출장에만 그치며 빅리그의 쓴맛을 맛보았다.

3.2. 1989 시즌

1989 시즌에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제대로 겪으며 폭망했고 유망주로서는 비교적 많은 나이와 제구불안 때문에 엑스포스는 1989년 시즌 도중 그를 마크 랭스턴과 트레이드시켜 시애틀 매리너스로 보내버린다.[3]

4. 시애틀 매리너스

파일:external/espngrantland.files.wordpress.com/randy-johnson-mariners-tri.jpg

4.1. 1989 시즌

시애틀 트레이드 이후 첫해에 선발 투수로써 기회를 받으며 몬트리올 시절보다는 나아진 모습을 보여줬지만 제구불안 문제로 볼질을 하는 등 명과 암이 공존한 모습이었다.

4.2. 1990 시즌

그러나 1990시즌부터 10승 이상과 3점대 평균자책점을 꾸준히 찍어주는 준수한 투수가 되었다. 1990년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기도 했고 당대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교타자 웨이드 보그스를 상대로 단일 경기에서 3K를 잡아낸 최초의 좌완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제구불안은 여전해서 볼넷왕에 오르는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4.3. 1991 시즌

1991년에도 준수한 활약을 하긴 했지만 제구불안은 여전하여 구단 단일시즌 최다 볼넷 허용이라는 영 좋지 않은 타이틀을 가져가는 등 여전히 리그를 지배하는 에이스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상태였다.

4.4. 1992 시즌

1992년 7월에 8연패라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자 경기 전 상대팀의 한 투수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는데 그게 바로 놀란 라이언이었다. 라이언은 상대팀 선수인 그를 성심성의껏 도와주었고, 라이언과 전담코치의 노력 끝에 제구력을 안정시키게 된다.[4]

놀란 라이언의 교육이 효과를 봤는지, 랜디 존슨은 이후 두 달 조금 넘는 남은 시즌 동안 3.30 ERA를 찍었고, 9월 27일 놀란 라이언과의 맞대결 경기에서는 MLB 최후의 160구 경기를 치르며 8이닝 18K 경기를 치렀다.[5] 1992년 시즌이 끝났을 때, 존슨은 만 29세의 나이로 일반적인 에이징 커브에 따르면 최전성기가 지나는 시점이었고 [6] 이때까지 커리어를 살펴봐도 49승 48패 평균자책점 3.73에 BB/9가 5가 넘는 구위는 좋은데 제구가 불안한 투수의 전형이었다.[7] 그러나...

4.5. 1993 시즌

1992년까지 3년 연속 볼넷왕에 5~7개 수준의 BB/9을 기록하던 존슨은 1993년부터 커리어가 끝날 때까지 BB/9이 4개 이상인 시즌이 없다. 제구가 잡힌 파워피쳐가 얼마나 무시무시해지는지를 제대로 보여준 것.[8]

라이언을 만나고나서 존슨은 제구가 안정되었지만 그해 12월 개인 훈련을 하느라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자책감에 빠진 존슨은 야구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듣고(자세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MLB 역사에 남을 대투수로 성장하게 된다.

1993년에 255⅓이닝을 던지며 308K, 99BB,[9] 19승 8패, 3.24 ERA을 찍으며 드디어 랜디의 포텐이 터졌다.

여담으로 1993년 트레이드 데드라인 때 존슨은 당시 최강팀이였던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트레이드 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고 한다. 당시 토론토의 GM 팻 길릭은 데드라인때 토론토의 전력을 어떻게든 상승시키기 위해 안전빵으로 두개의 별도 대형 트레이드 시나리오를 동시에 진행했는데, 그 대상 중 하나는 시애틀의 존슨이였고, 다른 하나는 오클랜드의 리키 헨더슨 이였다. 길릭은 오클랜드의 GM과 먼저 대화를 하여 트레이드에 구두합의를 하였지만, 당시 헨더슨은 트레이드 거부권이 있어서 일단 그를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였다. 헨더슨이 거부할 가능성이 꽤 크다고 봤던 길릭은 안전빵으로 시애틀과도 존슨을 대상으로 네고를 하였고, 결국 시애틀과도 사실상 트레이드에 합의한 상태였다. 근데 데드라인이 되기 불과 몇시간 전에 헨더슨이 의외로 트레이드에 동의하자, 길릭은 사실 원했다면 여전히 존슨을 대신 선택할 수 있었지만 먼저 네고를 한 오클랜드 GM과의 의리를 생각하여 결국 핸더슨을 대상으로 트레이드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헨더슨이 토론토에서 그리 큰 활약을 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팀이 결국엔 월드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던 것을 보면, 만약 존슨이 이 때 토론토로 갔다면 그의 커리어 첫 우승은 2001년보다 훨씬 전인 1993년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10]

4.6. 1994 시즌

1994년에는 파업에도 불구하고 172이닝 동안 204K를 잡아 13승, 6패, 3.19 ERA로 사이영 투표 3위에 올랐다.[11][12] 이 시즌 4월 25일 보스턴과의 경기에서 로저 클레멘스를 상대로 2실점 완투승을 거뒀다.[13]

4.7. 1995 시즌

[kakaotv(396036942)]
1995년에는 파업 여파가 이어지며 시즌이 단축되었음에도 214⅓이닝 동안 294K[14]를 잡는 활약으로 18승, 2패,[15] 2.48 ERA를 찍고 커리어 첫번째 사이 영 상을 수상한다. 더 뜻깊은 것은 이 해 시애틀은 창단 첫 지구우승을 달성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이 과정이 정말 극적인 것이, 이 때 시애틀은 8월 말까지 당시 지구 선두였던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게 10게임이나 뒤져있었다. 그러나 팀의 막판 스퍼트로 동률을 달성했고, 지구우승을 놓고 벌인 원게임 플레이오프에 3일 휴식 후 등판한 존슨은 완투승을 거두었다.

다만 이 때문에 디비전시리즈 1차전에 등판하지 못했고 시애틀은 뉴욕 양키스에게 1,2차전을 모두 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리 3일 휴식만을 취한 존슨은 3차전에서 선발승을 따내며 팀을 탈락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리고 단 하루 쉬고 5차전 9회 동점 무사 1,2루 위기에서 등판해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결국 3이닝, 1실점, 6K 구원승을 거두는 괴물같은 활약으로 팀을 챔피언시리즈까지 진출시켰다. 다음 상대는 당대 최고의 핵타선이었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였는데 존슨은 인디언스를 상대로 3차전에서 비록 8회에 나온 수비에러로 인한 비자책점으로 선발승을 따내진 못하지만 8이닝, 2실점(자책1점)으로 승리에 기여했다. 그리고 2승 3패로 탈락위기에 몰린 팀을 위해 6차전 또다시 3일 휴식 후 등판하지만 타선의 침묵과 수비진의 지원을 받지 못해 7회까지 비자책 1실점만을 허용했음에도 팀은 0:1로 끌려가게 된다. 어쩔 수 없이 8회에도 등판한 존슨은 결국 시즌 말미 계속된 피로가 쌓였던 탓인지 3점을 내주게 되고 매리너스는 그대로 완봉패하며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탈락하게 된다. 하지만 양키스와의 디비전 시리즈에서 매리너스가 명승부를 펼치면서 당시 인기 저조로 연고지 이전 논란까지 있던 시애틀에 야구 열기를 불지폈고 이는 오히려 새구장 건립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해당 문단 참조.

4.8. 1996 시즌

1996년에는 허리부상으로 14경기 등판에 그쳤고 일찌감치 시즌아웃이 되었다.

4.9. 1997 시즌

허리 부상에서 1년 만에 회복하고 복귀한 1997년에 213이닝 291K 20승 4패 2.28 ERA라는 엄청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런데 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에서 전부 2위라는 트리플 라운을 기록. 다승과 탈삼진에서 하나 차이로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한 토론토 블루제이스 로저 클레멘스에게 사이 영 상을 내준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ALDS 1차전에서 5이닝 5실점 7피안타 3K/4BB로 망하면서 7이닝 2실점 9K/0BB의 마이크 무시나에게 패했고, 4차전에서는 8이닝 3실점 7피안타 13K/2BB로 분전했으나 7이닝 1실점 7K/3BB의 마이크 무시나에게 또 패하면서 팀도 탈락했다.

4.10. 1998 시즌

이듬해에는 재계약과 트레이드[16]가 무산된 시애틀에서 9승 10패 4.33 ERA라는 영 좋지 않은 태업성 플레이를 펼쳤다.

5. 휴스턴 애스트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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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1998 시즌

시즌 중반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트레이드 후 10승, 1패, 평균자책점 1.28, 시즌 탈삼진 329K[17]로 진정한 괴수로 거듭나게 된다.[18][19] 아직까지도 2004년의 카를로스 벨트란과 함께 반년 렌탈의 레전설로 꼽힌다. 샌디에이고와의 1998 NLDS에서도 1차전 8이닝 2실점/4차전 6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1차전에서는 8이닝 0실점의 케빈 브라운에게 밀리고 4차전에서는 6이닝 1실점의 스털링 히치콕에게 밀리면서 2번 다 패배하며 팀도 탈락했다.

6.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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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시즌이 끝나고 그해 겨울 자유계약선수가 되어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치열한 영입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디백스의 4년 5,340만 달러 제안을 택하게 된다.[20] 그리고 이 결정은 신의 한 수가 되었고 진정한 전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6.1. 1999~2002 시즌

활약상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면 충분하다. MLB.COM 선정 역대 최고의 FA 계약 1위. FA 기간 동안 존슨은 4년 연속 사이 영 상 워렌 스판 상을 석권하고, 2001 월드 시리즈 MVP에 올랐다. 야구선수의 나이가 만으로 35세면 기량이 떨어져서 신인들에게 자리를 위협받거나 벤치신세가 될 수 있는데, 이 양반은 그 나이에 약물을 했건 안 했건 당대 최고 에이스들과 슬러거들이 즐비했음에도 상대 팀타선을 초토화시켜버렸다. 게다가 애리조나의 홈구장 뱅크원 볼파크(현 체이스 필드)는 리그 최고 수준의 타자 친화 구장이다. 그런데 그런 구장에서 이런 사람같지 않은 성적을 올린 원투펀치 덕분에 당시의 라이트팬들에겐 타자친화 구장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4년 연속 사이 영 상을 쓸어담은 1999~2002년의 성적을 간단히 살펴보면

1999년, 17승, 9패, 271.2이닝, 2.48 ERA, 364 탈삼진, 12완투, 2완봉승 fwar 9.5 bwar 9.1
2000년, 19승, 7패, 248.2이닝, 2.64 ERA, 347 탈삼진, 8완투, 3완봉승 fwar 9.6 bwar 8.1
2001년, 21승, 6패, 249.2이닝, 2.49 ERA, 372 탈삼진,[21]13.41이다.] 3완투, 2완봉승 + 월드 시리즈 공동 MVP fwar 10.5 bwar 10.1
2002년, 24승, 5패, 260.0이닝, 2.32 ERA, 334 탈삼진, 8완투, 4완봉승 + 트리플 크라운[22] fwar 8.1 bwar 10.7

4년간 81승, 27패, 1030이닝, ERA 2.48, 1417 탈삼진
연평균 20승, 7패, 258이닝, ERA 2.48, 354 탈삼진[23]

참고로 클레이튼 커쇼가 2008년 데뷔 후 2014년까지 잡아낸 삼진 개수가 1445개로, 존슨은 커쇼가 7년 동안 잡아낸 삼진과 비슷한 개수의 삼진을 4시즌만에 잡아버린 셈이다. 동시기 옆동네에서 리그를 초토화시키던 페드로 마르티네즈와 함께 인간계를 아득히 초월한 성적을 찍었다. 이 4년간 케빈 브라운, 톰 글래빈과 정말 많이 붙었다.


이 시기에 가장 유명한 건 역시 2001시즌 원투펀치 파트너였던 커트 실링과 함께 엄청난 활약으로 팀을 우승시킨 것. 뉴욕 메츠와의 1999 NLDS 1차전에서 8.1이닝 7실점으로 거하게 망했던 랜디는 2년 후 월드 시리즈에서 양키스를 상대하면서 2차전 완봉을 하고서 6차전을 선발 등판하고 바로 다음날 끝장 승부에서 7차전 구원등판하는 위력을 보였다. 하긴 마무리 김병현이 두 게임이나 무너져버려서 어쩔 수 없었던 면도 있긴 했다. 2001년의 활약으로 플레이오프에 약하다는 이미지는 깨끗이 날아갔다. 커트 실링과 함께 2001 월드 시리즈 공동 MVP 선정. 자세한 사항은 2001 월드 시리즈 항목 참조.

그러나 이어지는 세인트루이스와의 2002 NLDS 1차전에서는 6이닝 6실점 10피안타(2피홈런)로 난타당했고 팀도 0:3으로 탈락했다.

6.2. 2003 시즌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던 와중 2003년에는 부상으로 고생하며 18경기 출장에 그쳤고 성적도 좋지 않았다.

6.3. 2004 시즌

2004 시즌에는 40세 시즌인데도 완벽하게 부활했다. 부실한 팀 타선과 수비 때문에 승수는 16승밖에(?) 못 찍었지만 만40세 역대 최고령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는 등 여전히 리그 최고의 투수임을 증명하는 성적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승수가 아쉬웠던 탓에 1997년에 이어 또다시 휴스턴 애스트로스 로저 클레멘스에게 사이영상을 내주고 만다. 하지만 약켓이 트리플크라운으로 랜디 존슨을 확실히 제압한 1997년과 달리 이번엔 현지는 물론 한국에서도 논란이 되었다.[24]

이후 지표들을 비교해보면 1993년부터 시작된 랜디의 역대급 전성기는 이때에 종료된다. 2점대 ERA와 0점대 WHIP 및 리그 1위를 찍은 지표를 만든 시즌 역시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2005년부터는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이전만 못한 모습을 보여주며 황혼기를 맞이하게 된다.

7. 뉴욕 양키스

파일:external/cache.boston.com/1128193615_4939.jpg

2004시즌 종료 후, 연봉부담 때문에 디백스는 랜디 존슨의 트레이드를 시도했고, 2000년 이후 번번히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던 뉴욕 양키스가 슈퍼에이스의 역할을 기대하며 그를 데려온다. 등번호는 41번[25] 그렇지만 뉴욕 언론들은 엄청난 관심을 보임과 동시에 간섭과 감시도 함께 했는데 이는 조용한 성격의 랜디에게 심리적으로 엄청난 압박이 되었다. 실제로 자꾸 귀찮게 구는 카메라를 거칠게 밀쳐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아무리 최강의 에이스라고 해도 어느덧 만 41세 노장이 되었는데 전성기가 지난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다.

7.1. 2005 시즌

결국 그 우려는 어느정도 맞아떨어지며 2005시즌에는 17승 8패에 3.79의 ERA로 평균이상의 성적을 냈지만 기대했던 압도적인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2005년 지하철 시리즈 당시, 뉴욕 메츠에서 뛰던 구대성에게 '충격적인' 2루타를 허용하고, 뒤이은 구대성의 폭발적인 홈 대쉬[26]로 점수까지 헌납한 사건은 한국 팬들에게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7.2. 2006 시즌

여기에 2006시즌에는 타선의 도움으로 2년 연속 17승을 기록했지만 처음으로 5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고 디비전 시리즈에서도 1경기 5.2이닝 5실점으로 부진, 체면을 심히 구기며 팀의 광탈에도 일조하고 만다.[27]

8.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기

파일:external/dimg.donga.com/5070164.1.jpg

8.1. 2007 시즌

결국 2007시즌을 앞두고 형이 세상을 떠나자 가족과 함께하고 싶다며 브라이언 캐시먼 단장에게 디백스로의 트레이드를 요청, 다시 피닉스로 돌아와서 2007시즌에는 부상 때문에 몇 경기 못 나오며 친정팀에서 고생했다.

8.2. 2008 시즌

2008년 44세라는 야구 선수로는 환갑 수준의 나이에도 11승 10패 184.0이닝 평균자책점 3.91를 기록하며 선전했고, 시즌 최종전에서는 통산 100번째이자 마지막 완투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또 2008~2009시즌, 리그에서 2번째로 나이가 많은 선수였다.[28]

9.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파일:external/www2.pictures.gi.zimbio.com/Milwaukee+Brewers+v+San+Francisco+Giants+KkoV8a-WOG0l.jpg

9.1. 2009 시즌

2008시즌 종료 후 디백스는 고령의 그를 더 안고갈 뜻이 없었고[29], 300승과 5000탈삼진, 조금 무리하자면 놀란 라이언 추월까지 목표로 하던 랜디 존슨은 다른 팀을 찾아야 했는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그의 새로운 팀이 되었다. 그리고 2009년 6월 5일, 워싱턴 내셔널스 원정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메이저리그 역대 24번째 300승에 성공한다. 300승 이후 처음으로 체이스 필드 원정경기에 등판하던 날에는 디백스 팬들도 뜨거운 기립박수를 보내줬다. 그리고 후반기에는 불펜으로 강등된 끝에 2010년 1월 5일 결국 은퇴를 선언, 역사적인 커리어를 마감했다.

MLB 네트워크에서 선정한 그의 커리어 명장면 9개 The best of the Big Unit

10. 연도별 성적

파일:MLB 로고.svg 랜디 존슨의 역대 MLB 기록
<rowcolor=#fff>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88 MON 4 3 0 0 0 26 2.42 23 3 7 0 25 1.154 151 0.4 0.7
<rowcolor=#ffc425>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89 MON/
SEA
29 7 13 0 0 160⅔ 4.82 147 13 96 3 130 1.512 82 1.6 -0.6
<rowcolor=#c4ced4>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90 SEA 33 14 11 0 0 219⅔ 3.65 174 26 120 5 194 1.338 108 2.0 2.2
1991 33 13 10 0 0 201⅓ 3.98 151 15 152 12 228 1.505 103 2.6 3.0
1992 31 12 14 0 0 210⅓ 3.77 154 13 144 18 241 1.417 105 3.4 2.4
1993 35 19 8 1 0 255⅓ 3.24 185 22 99 16 308 1.112 135 7.0 6.6
1994 23 13 6 0 0 172 3.19 132 14 72 6 204 1.186 152 5.2 5.5
1995 30 18 2 0 0 214 2.48 159 12 65 6 294 1.045 193 9.5 8.6
1996 14 5 0 1 0 61⅓ 3.67 48 8 25 2 85 1.190 136 1.6 1.2
1997 30 20 4 0 0 213 2.28 147 20 77 10 291 1.052 197 7.0 8.0
<rowcolor=#fff>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98 SEA/
HOU
34 19 11 0 0 244⅓ 3.28 203 23 86 14 329 1.183 135 7.6 5.7
<rowcolor=#fff>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99 ARI 35 17 9 0 0 271⅔ 2.48 207 30 70 9 364 1.020 184 9.5 9.1
2000 35 19 7 0 0 248⅔ 2.64 202 23 76 6 347 1.118 181 9.6 8.1
2001 35 21 6 0 0 249⅔ 2.49 181 19 71 18 372 1.009 188 10.4 10.1
2002 35 24 5 0 0 260 2.32 197 26 71 13 334 1.031 195 8.1 10.7
2003 18 6 8 0 0 114 4.26 125 16 27 8 125 1.333 110 2.4 1.6
2004 35 16 14 0 0 245⅔ 2.60 177 18 44 10 290 0.900 176 9.6 8.4
<rowcolor=#fff>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2005 NYY 34 17 8 0 0 225⅔ 3.79 207 32 47 12 211 1.126 112 4.1 5.8
2006 33 17 11 0 0 205 5.00 194 28 60 10 172 1.239 90 3.2 1.7
<rowcolor=#e3d4ad>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2007 ARI 10 4 3 0 0 56⅔ 3.81 52 7 13 4 72 1.147 125 1.6 1.4
2008 30 11 10 0 0 184 3.91 184 24 44 6 173 1.239 118 3.6 3.2
<rowcolor=#fd5a1e>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2009 SF 22 8 6 0 0 96 4.88 97 19 31 2 86 1.333 87 0.3 0.3
MLB 통산
(22시즌)
618 303 166 2 0 4135⅓ 3.29 3346 411 1497 190 4875 1.171 135 110.5 103.5


[1] 물론 이는 존슨에게 해주는 립서비스일 확률이 높다. [2] 실제로 USC(남가주대학) 시절까지 농구선수를 겸업하기도 했다. [3] 여담으로 맞트레이드의 당사자인 랜디 존슨과 마크 랭스턴은 6년 뒤인 1995 시즌 아메리칸 리그 서부지구 우승팀 결정 원게임 플레이오프에 각각 시애틀과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의 선발 투수로 맞대결 했다. 결과는 랜디 존슨의 승. [4] 정작 라이언은 명예의 전당에 오른 투수들 중 제구력이 최하위권이였던 건 함정. [5] 이 경기는 라이언 역시 감명을 받았는지, 훗날 랜디가 300승을 달성한 뒤 AT&T 파크에서 가진 기념식에 참석해서 연설을 하며 그날 경기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6] 일부를 제외하면 랜디 존슨 정도의 고령에 더 잘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동 시대를 풍미했던 그렉 매덕스, 페드로 마르티네스도 만 29세 이후 성적은 그 이전과 확연하게 차이가 났을 정도이며 클레이튼 커쇼는 아예 이닝 이팅 능력이 사라지고 유리몸이 되었다. 배리 본즈 로저 클레멘스 같은 금지약물 복용 선수들을 빼고 보면 30대 기록이 20대보다 훨씬 좋은 선수는 거의 없다. [7] 동 나이대 그렉 매덕스는 152승 평균자책점 3.18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132승 평균자책점 2.65 클레이튼 커쇼는 144승 평균자책점 2.45를 기록하고 사이영 상을 모두 3회 수상한 상태. [8] 1993년 이후 2004년까지 랜디 존슨은 부상 시즌(1996, 2003)과 태업을 의심 받은 1998년을 제외하곤, 모조리 사이 영 투표 3위안에 드는 기염을 토한다. 이 기간 동안 사이 영 투표 순위는 1위 5번, 2위 3번, 3위 1번. 2위를 한 시즌 중 2번은 약쟁이 로저 클레멘스에게 사이 영을 빼앗겼고, 1998년 휴스턴으로 트레이드 된 이후의 존슨은 리그 최고의 피칭을 펼쳤으므로 부상을 제외하곤 적수가 없었던 셈 [9] 이전에는 140~150개의 볼넷을 내주며 240~250개의 탈삼진을 잡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1993시즌의 기록은 존슨이 리그를 지배하는 에이스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는 매우 고무적인 성적이었다. [10] 그리고 장기적으로 보면 이 선택은 토론토에게 큰 패착이 됐는데, 이 당시 존슨은 계약기간이 상당히 남아있었지만 헨더슨은 시즌 직후 바로 FA로 풀렸기 때문. 시즌 후 헨더슨은 토론토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클랜드로 돌아갔고, 토론토는 1994년 시즌부터 선발진이 크게 흔들려 장기간 암흑기에 들어가게 된다. [11] 이 해 AL 사이영 상 수상자는 데이비드 콘이었다. NL 사이영 상은 그렉 매덕스의 차지. 이 시즌에 매덕스는 본인 커리어 최저 ERA인 1.56을 기록했다. [12] 이 시즌 4월 11일 토론토를 상대로 2.1이닝 11실점을 했는데 이는 본인의 1경기 최다 실점 기록이다. [13] 로저는 7이닝 3실점. [14] 이 해 성적 덕분에 존슨은 놀란 라이언 이래 최초의 탈삼진왕 4연패를 달성하게 된다. [15] NL의 그렉 매덕스(19승 2패)와 함께 역대 최초로 200이닝 이상 승률 9할 시즌을 만들어냈다. [16] 당시 1997년 ALDS에서 시애틀에 패한 뉴욕 양키스가 랜디에게 반해 그를 영입하려 했는데 시애틀 측에서는 반대급부로 마리아노 리베라, 앤디 페티트를 요구했다고. [17] 시즌 종합 244⅓이닝 동안 19승 11패 3.28 ERA. [18] 삼진 개수로만 따지면 랜디 존슨이 전체 1위가 맞다. 단지 시즌 중간에 AL에서 NL로 옮겼기 때문에 기록이 나눠지면서(AL에서 213K, NL에서 116K) 어느 쪽에서도 수상을 못 한 것일 뿐이다. 당시 AL의 탈삼진 1위는 271K의 로저 클레멘스, NL은 300K의 커트 실링이었다. [19] 비슷한 경우로, 1997년의 마크 맥과이어가 시즌 중간에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트레이드 되면서 58개(오클랜드에서 34개, 세인트루이스에서 24개)로 양리그 합쳐 최다 홈런을 치고도 홈런왕은 각각 AL은 56개의 켄 그리피 주니어, NL은 49개의 래리 워커가 가져가고 맥과이어는 낙동강 오리알이 된 바 있다. [20] 랜디 존슨의 집은 피닉스이고, 가족들도 양키스 시절부터 피닉스에 살았다. 피닉스는 애리조나의 주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디백스의 홈구장인 체이스 필드가 피닉스에 있다. [21] k/9이 무려 [22] 좌완투수로는 스티브 칼튼 이래 최초. 9년후 클레이튼 커쇼가 이어 받는다. [23] 2022년 기준 한 시즌 250이닝 이상 소화한 투수는 2011년 저스틴 벌랜더가 마지막이고, 350K 이상 잡아낸 투수는 존슨 이후 전무하다. 선발 투수의 평균 투구 이닝이 점점 줄어드는 현 추세를 봤을때, 상술된 존슨의 4년은 불멸의 기록이 될 가능성이 높다. [24] 당시 두 사람의 성적을 비교하면 로켓 18-4 214⅓이닝 2.98 218K. 빅 유닛 16-14 245⅔이닝 2.60 290K. 이때 클레멘스의 수상은 바톨로 콜론 수상과 함께 투승타타가 어느 정도 유효하던 지표였던 거의 마지막 사례로 여겨진다. 이후 랜디 존슨 사례 때문인지 2006년에 16승을 거둔 브랜든 웹이 논란 속에 NL 사이영상을 수상했고, 2010년 AL 사이영 투표에서 vs CC의 대결에서 킹이 사이영상을 탔다. 또한 클레멘스의 추악한 모습이 밝혀진 이후로는 랜디 존슨은 피해자로 평가받는데, 클레멘스의 1990년대 후반기는 스플리터 장착이 그의 성공에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하는 반박 여론도 존재하지만, 2000년대는 이미 약빨을 받을 대로 받은 뒤로 여겨진다. [25] 주로 51번을 달았지만 양키스에서는 버니 윌리엄스가 주인이었다. 은퇴후 영구결번 [26] 사실 슬로우 카메라로 보면 포수 호르헤 포사다의 태그가 조금 더 빨랐기에 아웃이 맞다. 하지만, 허슬 플레이에 관대한 판정을 내주는 분위기상 세이프가 선언되었고, 상대팀에서도 딱히 항의하지 않아 그대로 인정되었다. [27] 이는 존슨의 마지막 포스트시즌 등판이었다. 8년 동안 통산 19경기(16선발) 7승9패 121.0이닝 평균자책점 3.50, 132k [28] 이 시절 MLB 최고령 선수 1위는 제이미 모이어였다. [29] 랜디 존슨은 팀에 남기 위해 기꺼이 연봉 50%를 삭감할 용의를 내비쳤지만 재정난에 빠진 디백스는 그것도 비싸다고 더 후려치는 바람에 존슨은 결국 팀을 떠나고 만다. 하지만 존슨이 떠난 뒤, 디백스는 랜디 존슨에게 제시한 금액보다 거의 두 배가 더 많은 액수로 선발 투수 존 갈랜드를 영입하였고, 존슨은 이에 대해 대단히 섭섭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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