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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곤살레스/클럽 경력/레알 마드리드 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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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곤살레스
1994-2010
파일:라울 곤살레스 데뷔.jpg
▲ 1994년 데뷔 당시
소속팀 <colbgcolor=#ffffff,#191919> 레알 마드리드 CF ( 라리가)
등번호 7, 17(1995~1996), 14,16(1994~1995)
기록
파일:라리가 산탄데르 은행 로고(가로형/화이트).svg
550경기
228득점 99도움
130경기
66득점 29도움
파일:코파 델 레이 로고.svg
37경기
18득점 4도움
파일:Supercopa-de-España-RFEF.svg
12경기 7득점
파일:UEFA 슈퍼컵 로고_white.svg
3경기 1득점
4경기
2득점 1도움
합산 성적
741경기
323득점 133도움
1. 개요
1.1. 데뷔1.2. 1994-1995 시즌1.3. 1995-1996 시즌 ~ 1998-1999 시즌1.4. 1990-2000 시즌1.5. 2000-2001 시즌1.6. 2001-2002 시즌1.7. 2002-2003 시즌1.8. 2003-2004 시즌1.9. 2004-2005 시즌 ~ 2006-2007 시즌1.10. 2007-2008 시즌1.11. 2008-2009 시즌1.12. 2009-20101.13. 레알 마드리드 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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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울 곤살레스 레알 마드리드 경력을 소개하는 문서 호날두 전에 챔스의 사나이라 불렸으며 레알 마드리드 그자체인 선수로 평가받는다.

1.1. 데뷔

1994년 10월 29일, 레알 사라고사와의 라리가 9R 경기에서 클럽 역사상 최연소 출전 기록인 17세 4개월이라는 어린 나이로 성인 팀 경기에 데뷔한다. 90분 풀타임을 소화했고, 레알은 이 경기에서 2-3으로 패했지만, 라울은 경기력 면에서 준수한 평가를 받았다. 이어서 11월 5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리그 10R 경기에도 선발 출전 기회가 주어졌고, 전반 36분 팀의 세 번째 골을 넣어 데뷔골을 작렬시켰고, 팀의 4-2 완승에 기여했다.

이때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득점왕 다보르 슈케르 유고슬라비아의 거성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가 결성한 투 톱에 밀려 섀도우 스트라이커 정도의 포지션으로 출전했다.

1.2. 1994-1995 시즌

데뷔 시즌인 1994-95 시즌에 라리가 28경기 9골, 코파 델 레이 2경기에서 1골을 넣어 총 30경기에서 10골을 넣으며 스페인 축구의 미래로 각광받게 되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30대 선수처럼 노련하게 경기를 뛰며 더욱 돋보였다. 흔히 말하는 이제 '축구가 보이는' 선수처럼 동료를 활용하며 슛과 패스할 시기를 잘 구분했다. 레알 마드리드 또한 이 시즌 라리가 우승을 차지했고, 라울은 신인상을 수상했다.

1.3. 1995-1996 시즌 ~ 1998-1999 시즌

프로 2년차인 1995-96 시즌에는 소포모어 징크스가 없었다. 라리가에서 40경기에 출전해 19골을 몰아쳤고,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8경기에서 6골을 넣었다. 특히 페렌츠바로스를 상대로 해트트릭으로 유럽 대항전 마수걸이 골을 넣은 것과, 유벤투스와의 8강 1차전에서 1-0 승리를 이끈 결승골을 넣은 장면이 압권. 비록 팀은 성적 부진으로 인해 무관에 그쳤지만, 라울은 전년보다 발전한 모습을 보이면서 이흔 스페인 대표팀에도 승선했다.

그리하여 파비오 카펠로, 유프 하인케스 등 감독들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게 된다. 처음엔 좌우 날개 혹은 공격형 미드필더로 위치했으나, 거스 히딩크 감독 휘하에서 최전방 공격수로 보직을 변경한다.

1998-99 시즌에 25골, 2000-01 시즌에 24골로 득점왕을 거머쥐고, 2000년과 2001년 연속으로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 엄청난 카리스마와 존재감으로 페르난도 이에로 이후 레알 마드리드의 주장이자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2000-01 시즌엔 라리가 득점왕과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을 동시에 거머쥐고 본인의 커리어 하이 스탯을 기록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1년 가장 유력한 발롱도르 수상자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마이클 오언이 상을 가져가 논란이 되었다. 당시 마드리드는 그야말로 충격의 도가니였는데, 적은 점수 차도 아니었던지라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불가사의한 결과였다는 의견이 많다.

1.4. 1990-2000 시즌

특히 1999-00 시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은 거의 라울과 비센테 델보스케 감독, 더해서 페르난도 레돈도 셋이서 만들어 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주전 선수들의 기량 및 조직력 저하로 인해 라리가에서 홈에서도 5골을 먹고 패배하며 5위로 추락하던 시절이었고 전체적인 경기력이 부진하였고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에서도 바이에른 뮌헨에게 2-4로 2연속 패배하며 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등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8강에서 만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홈에서 비기면서 알렉스 퍼거슨은 기자 회견에서 레알을 두고 "더 이상 레알 마드리드는 두렵지 않다."라고 말하며 심리전을 구사하며 도발할 정도였다. 하지만 라울은 퍼거슨의 발언을 들은 뒤 기자 회견에 임하며 퍼거슨의 발언에 대해 "다시는 그런 말 내뱉지 못하게 해주겠다."라고 일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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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또 너냐?[1]
그리고 2차전 경기에서 라울은 맨유를 상대로 2골을 집어넣으며 3:2 승리를 이끌었다. 준결승 바이에른 뮌헨 상대로는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지만 니콜라 아넬카의 활약으로 팀은 결승 진출에 성공했고, 결승에서는 발렌시아를 상대로 2:0 리드 상황에서 팀의 마지막 쐐기 골을 기록하며 팀에게 8번째 빅 이어를 안긴다. 이 시즌에 리그 17골, 챔스 10골 포함 57경기 29골을 기록하며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된 것은 덤.

1.5. 2000-2001 시즌

라울은 2000-01 시즌에 리그 우승과 리그 득점왕 그리고 챔스 4강과 득점왕을 동시에 기록하면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레알 마드리드 시절 라울은 팀이 필요로 하는 장소에서 뛰었고 스탯도 그와 연관성이 높다. 실제 라울이 2000-01 시즌 24골을 넣은 것은 루이스 피구 클로드 마켈렐레를 영입한 갈락티코스 정책의 성공이기도 하지만, 페르난도 모리엔테스의 부상으로 라울이 직접 득점을 할 필요성이 생긴 점, 이에 맞춰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위해 전방으로 올라온 호세 마리아 구티의 지원을 받게 된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면서 유력한 발롱도르 후보로 꼽혔으나, 아쉽게도 당시 리버풀에서 활약하던 마이클 오언에게 밀려 2위에 그쳤다. 오언의 발롱도르는 당시 논란이 많았는데, 미니 트레블[2]을 달성했다고는 하지만 리그 우승이 없었고 챔스 우승이 아닌 UEFA 컵 우승이었던 뿐만 아니라 리그나 챔스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해당 발롱도르를 두고 리그 우승과 챔스 4강, 리그와 챔스 득점왕을 동시에 석권한 라울 또는 리그와 챔스에서 더블을 달성하고, 골키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활약을 보여주고 특히 챔스 결승전에서 MOM을 수상하는 활약을 선보인 올리버 칸이 오언보다 나은 대상자라는 논란이 컸다. 또한 FIFA 올해의 선수에서도 유력한 후보로도 꼽혔지만 팀 동료인 루이스 피구와 당시 맨유 잉글랜드의 에이스인 데이비드 베컴에게 밀려 3위에 그쳤다.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에서도 유력 수상 후보로 평가받았지만 오언과 베컴에 밀려 3위에 그치고 만다.

1.6. 2001-200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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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선제골을 넣은 후 반지 세레머니

지네딘 지단이 합류한 2001-02 시즌에는 레알 사라고사와의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에서 2차전에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트로피를 견인했으며, 리그에서는 14골을 넣었고, 챔피언스 리그와 코파 델 레이에서 각각 6골씩 기록하며 총 55경기 29골을 기록했다. 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홈에서는 15승 4무로 무패를 달린 반면, 원정에서 5승 4무 10패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거두는 극심한 원정 경기 부진으로 인해 3위에 그쳤다. 코파 델 레이에서는 결승에 진출했고 라울도 결승전에서 득점을 기록했으나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게 2-1로 패배하며 빛이 바랬다.[3] 그러나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바이어 04 레버쿠젠과의 챔스 결승전에서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스로인을 받아 선제골을 넣으며, 레알 마드리드의 9번째 챔스 우승을 이끌었다.

1.7. 2002-2003 시즌

호나우두의 입단으로 공격력이 더욱 강해진 2002-03 시즌에는 충수염으로 인해 잠시 이탈한 기간이 있었지만 리그에서 16골,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9골을 기록하며 총 47경기 25골을 기록했다. 그러면서 레알 마드리드도 리그 우승, 챔피언스 리그 4강, UEFA 슈퍼컵 우승, 인터컨티넨탈컵 우승이라는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이렇게 많은 골들을 집어넣었지만, 그럼에도 2001-02 시즌과 2002-03 시즌의 마드리드의 탑 스코어러는 건재를 과시하는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호나우두였고 라울은 이들을 보조하며 15골 전후로 득점했다.

1.8. 2003-2004 시즌

그러나 새로운 주장으로 선임된 2003-04 시즌부터는 슬럼프 아닌 슬럼프를 겪게 된다. 잇따른 갈락티코스의 성공에 도취된 레알 마드리드는 2003년 여름에 데이비드 베컴을 영입하고 스티브 맥마나만 클로드 마켈렐레, 플라비우 콘세이상을 방출하며 에스테반 캄비아소마저도 가볍게 쓰는 선택을 한다. 공격수 위주의 갈락티코스 정책으로 팀의 밸런스가 급격히 무너지자[4] 라울은 아래로 내려가 미드필드에 가세하며 분전했지만 전 같은 경기력은 나오지 않았고 본인의 득점력마저 급감했다. 팀 성적도 명성에 비해 실속이 없어 이후 마드리드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끝내 캄비아소까지 내치고[5] 마이클 오언을 데려온다거나 모나코발 부메랑을 맞고 모리엔테스를 다시 데려온다거나 안토니오 카사노를 영입한다거나 혹은 조나단 우드게이트를 영입한다든가 같은 행위를 자행했다. 쉽게 말해 뻘짓의 연속이었다.

1.9. 2004-2005 시즌 ~ 2006-2007 시즌

라울은 이 와중에 열심히 경기장을 뛰어다녔지만 시즌이 끝난 후 결산 스탯은 2004-05 시즌부터 2006-07 시즌까지 리그에서 10골도 채 기록하지 못하는 등 하위권 팀의 그저 그런 공격수와 비슷하거나 떨어져, 여론의 화살에서 라울도 안전하지는 못해 부진이나 기량 하락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즉, 시궁창으로 향하는 팀에서 포지션을 상관하지 않고 그야말로 죽어라고 뛰어다녔으나 오히려 까인 케이스. 이렇듯 약 3시즌간 리가에서 공격 포인트 스탯상으로는 부진했지만, 최전방을 호나우두가 차지하거나 말거나 리가에서 호나우두가 골을 몰아치거나 말거나 챔피언스 리그는 여전히 라울의 독무대였고 호나우두는 강팀들의 수비에 막혀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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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 시즌 라리가 우승을 달성한 후
결국 성적 부진을 이기지 못해 결국 갈락티코스는 해체의 수순을 밟았다. 2005-06 시즌 루이스 피구 산티아고 솔라리 왈테르 사무엘을 내치고 토마스 그라베센을 영입했지만 실패, 2006-07 시즌에 이르러서야 마하마두 디아라 페르난도 가고가 중원에 정착했으며 호나우두가 부상으로 스스로 모습을 감추고 호비뉴, 데이비드 베컴, 뤼트 판니스텔로이 등이 효과적으로 가동됨으로써 우승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라울은 득점 면에서는 그 이전 시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경기력 측면에서는 확실히 이전과 달랐다. 루드-라울이라는 꿈의 투 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아닌 레알 마드리드에서 결성되었고, 알렉스 퍼거슨이 괜히 그 두 명을 투톱으로 구성하고 싶어 했던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루드와 라울 두 명은 처음 손발을 맞추는 선수들답지 않게 뛰어난 호흡을 보였다. 둘 다 서로의 장점을 잘 이해했고 잘 이용하는 멋진 축구였다. 서로 간의 차이점이 명확하지만, 축구 지능과 센스, 그리고 볼에 대한 집요함은 둘의 공통점이었다. 거기다 아무래도 공간 경합이나 몸싸움에서 별 도움을 안 주는 호나우두와는 정반대로 판니스텔로이는 수비수들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선수이기에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서는 훨씬 더 도움이 되는 선수이기도 하다.

1.10. 2007-2008 시즌

그리고 2007-08 시즌 라울은 리그에서 18골을 넣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라리가 우승의 일등 공신이 되었음은 물론 라리가 MVP의 성격을 띠는 상인 트로페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초대 수상자에 오르는 영광을 맛보았다. 여기엔 판니스텔루이가 부상 때문에 출장 수가 적어지고 베컴, 판니스텔루이라는 꿈의 콤비가 맨유를 떠나 마드리드에서 재회하자마자 헤어지게 된 영향도 있었다. 이러한 활약에 UEFA 유로 2008에 승선해야한다는 팬들의 목소리가 커졌으나 불발됐고, 스페인은 라울 없이 우승을 거머쥐었다.

1.11. 2008-2009 시즌

이 다음 시즌인 2008-09 시즌에도 리그 18골을 넣는 등 여전한 클래스를 증명했지만, 우승은 충격적인 경기력을 과시한 FC 바르셀로나 드림 팀 3기가 가져간다. 2007-08 시즌 좋은 활약을 보였던 호비뉴의 이탈, 그리고 시즌 초반 최고의 활약을 선보였던 뤼트 판니스텔로이, 마하마두 디아라, 루벤 데 라 레드의 시즌 아웃이 결정타였다. 이에 빡친 레알 마드리드는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을 다시 선임하게 되고, 갈락티코스 2기가 시작된다. 기존의 공격수 라인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카림 벤제마, 카카 등 그야말로 후덜덜한 라인을 첨가하였으나 최전방 공격진은 누가 라울의 파트너가 되느냐가 주 관심사였을 정도로 라울의 존재는 확고부동이었다.

1.12. 2009-2010

그리고 2009-10 시즌에는 라리가 개막전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전에서 1득점 1도움, 취리히와의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1차전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마누엘 펠레그리니 감독은 새로 영입한 선수들을 중심으로 역동적인 축구를 구상했고, 이러한 전술에 라울을 잘 맞지 않았다. 그렇게 시즌 후반을 향해갈수록 곤살로 이과인이 폭주를 시작하고, 카림 벤제마의 희망 고문이 시작됨에 따라 서서히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제한된 기회 속에 자신감이 떨어진 모습을 보였고, 부상까지 겹치며 그라운드 위에서 라울의 존재감은 사라졌다.

1.13. 레알 마드리드 퇴단

시즌 후 2010-11 시즌을 앞두고 주제 무리뉴 감독이 부임하였다. 무리뉴는 라울이 팀에 남기를 바랐지만, 라울은 아직 자신의 실력이 건재하다고 생각하여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팀을 찾아 2010년 7월 26일에 레알 마드리드를 떠날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이틀 뒤에 샬케 04로 떠나며 마드리드 커리어를 끝낸다.[7] 이렇게 2010년, 레알 마드리드에서 FC 샬케 04로 적을 옮기면서 이젠 퇴물이 되어버린 줄 알았으나 클래스는 영원했다.

[1] 레알 마드리드는 주요 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시벨레스 광장에서 퍼레이드를 벌인 뒤 주장이 여신상에 키스를 하는 전통이 있다. 이 제목은 레알 마드리드가 우승을 너무 자주 해서 매번 라울과 키스를 해야 하는 시벨레스의 상황을 재치 있게 표현한 것이다. [2] 당시 리버풀의 FA컵, 리그컵, UEFA 컵 우승을 가리키나 출처가 불분명한 표현이다. [3] 이 결승전이 레알 마드리드에게 무척 아쉬운 경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경기가 열린 날은 2002년 3월 6일이었는데, 이 날은 레알 마드리드가 창단된 지 딱 100년이 되는 날이었고 심지어 결승이 열린 장소는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였다. [4] 클로드 마켈렐레의 이탈은 한 가지 원인이었지 치명타는 아니었다. 치명타는 스쿼드 축소로, 베스트 11과 후보 선수 2~3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유스 수준의 선수들이었다. [5] 다만 캄비아소는 나가서 인테르에서 성공한 거지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대성할 자질조차 보이지 않았었다. [6] 호나우두의 챔스 기록은 42경기 16골로 그 명성이나 월드컵에서의 활약에 비해서는 별로 좋지 않았다. 갈락티코스 초창기 시절에는 챔스에서 나쁜 모습을 보였다고 하긴 어렵지만 빡빡한 경기에선 그저 그랬고 팀 밸런스가 붕괴한 이후에는 미드필드에 별 가세 없이 최종 라인에서 골을 따 내는 역할인데도 정말 성적이 나빴다. [7]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데, 2010-11 시즌에 팀을 떠난 주장과 부주장, 라울과 구티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팀을 떠난 것이다. 물론 두 선수가 고향과도 같은 팀에서 은퇴하지 못한 것은 선수 개인에게나 팬들에게나 몹시 안타까운 일이지만, 팀의 미래와 자신들의 출전 시간을 위해 좋게 헤어진 것은 분명하다. 마드리드 측에서도 페르난도 이에로 페르난도 레돈도같이 부족한 대우를 받고 나간 전례를 신경쓴 듯하다. 특히 라울의 경우 알 사드와의 친선 경기 개최를 통해, 클럽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우를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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