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22:49:06

동아시아의 전통적 외교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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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와 조공책봉을 맺은 이웃나라(주황)
1. 개요2. 역사3. 원인4. 조선 속국인가5. 조공책봉관계6. 외왕내제7.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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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늘날 21세기에는 유럽의 영향을 깊게 받아「 주권」이라는 개념과 함께 국가 간의 관계를 국가 대 국가로서 동등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외교적 시스템이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옛 동아시아에서는 국가 간의 관계를 위계질서적인 관점[1]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위계질서적인 관점은「 조공•책봉」과 같은 특수한 개념을 동아시아에 확립시켰고,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동아시아 만의 독자적인 외교 시스템이 구축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한자문화권 국가들을 비롯하여 동아시아권 국가들과 통상하려는 전세계의 국가들은 이러한 동아시아식 외교체제를 따라야했다.[2]

2. 역사

동아시아에서는 외교관계를 맺을 때면 어찌 되던간에 반드시 위계서열을 정하려고 했으며, 강한나라가 높은 위계서열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나라가 황제국하는거고, 그 보다 약한나라는 신하국이 되는 것이었다.[3] 모든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위계질서적인 외교관계를 가졌다.[4]

동아시아 국가 간의 외교관계에서는 서로가 평등함을 인정하는 관계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며. 평등한 관계는 동아시아에서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국력이 비슷하더라도 서로간의 우위를 주장하며 위계질서를 세우려고 했다.[5] 두 국가 간에 국력의 차이가 있음이 확실할 때는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였는데 약소국은 이에 수치심이나 불평등함을 느끼는 것이 전혀 없었고.[6] 외교에 있어서 상국을 사대하고 신하로서 예를 갖추는 것을 당연시 하였다.[7][8]

동아시아의 외교체제를 단순히 지금의 잣대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한일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국은 중국과 조공책봉을 맺어 신하국으로서 예를 갖추던 나라였지만, 동시에 여진과 일본을 속국 취급하며 그들에게서 조공을 받기도 하였다. 이는 동아시아의 외교체제가 절대적인 위계질서 세계였음을 증명한다. 반대로 일본은 한국을 자신들의 속국이라 여겼으며 한국이 보낸 외교사절을 조공사절단이라고 선전하기도 했다.[9]

중국이라고 항상 동아시아에서 서열 1위 였던것도 아니다. 중국도 돌궐,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민족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며 조공을 바친 전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이 그들의 신하가 되기를 자처했다고 하여, 다른나라들까지 그들이 천하의 패권을 쥔 황제국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였다.

3. 원인

중국의 진나라 유교적 영향이 크다고 볼 수 밖에 없다.

4. 조선 속국인가

독립국이라면 반드시 국가 간의 관계가 동등해야 한다고 여긴다면 조선은 명과 청의 속국이 맞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국가 간의 관계가 동등해야 한다는 개념이 전무했다. 무엇이 어찌되었든 반드시 위계서열을 정하려고 했으며, 국력이 비슷하더라도 두 나라는 서로를 속국 취급하였다.[10][11] 만약 자국의 국력이 타국 보다 약하다면 스스로부터가 강국의 신하가 되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자국을 황제국이라고 여겼어도, 외교를 하기 위해 신하국이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조선은 명과 청나라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았으며, 완전한 독립국으로서 존속하였으므로, "타국의 간섭과 타국의 국법을 적용받고 종속된다" 라는 뜻을 지닌 종속관계라는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개념은 조선 간의 황제-가신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는 동아시아의 외교체제가 얼마나 특수했는지를 증명한다.

현대식 외교체제에서는 조선은 명•청의 종속국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으나, 동아시아식 외교체제에 따르면 조선은 종속국이라고 보는 것 보다 그저 명•청과 수교를 맺었다고 여기는 것이 옳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애초부터 그것은 동아시아적 외교방식이었고, 굳이 오늘날과 비교해 따지자면 조공책봉은 오늘날로 치면 국교수립 또는 주권인정[12]이었고, 조공외교는 오늘날로 치면 국가 간의 무역이었다. 그런 것들이 싫으면 일본처럼 관계를 단절하였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조공책봉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 합의에 의한 것이다.[13]

5. 조공책봉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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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외왕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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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문서



[1] 주군과 신하, 형과 아우, 장인과 사위, 스승과 제자 등 [2] 베트남과 같은 한자문화권 국가들은 물론이고, 아편전쟁 이전까지는 청나라와 통상하려는 유럽국가들도 신하국으로서 청나라를 대해야 했다. [3] 왜냐하면 황제는 하나 뿐이고, 황제는 온 세상의 왕이니깐 [4] 한국과 일본은 국력이 서로 비슷하니깐 서로를 속국 취급하였다. [5] 예를 들어 한국 일본은 서로를 속국 취급하였다. [6] 그러나 입장이 역전되어 전통적으로 상국이었던 나라가 전통적으로 신하국이었던 나라의 신하가 되어야 했을 때는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는데. 예를 들어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섬겨야 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꼈는데. 그러한 연유는 한민족은 정말 오래전부터 숙신계 민족(여진족)을 자신들의 가신으로 여겨왔는데 그 입장이 바뀌게 되었으니 그것이 분했던 것이다. 또 다른 예시로 중국이 돌궐,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민족의 신하를 자처한 경우가 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로 중국은 수치심을 느꼈다. 그러나 외교에서는 강국을 섬기는 것이 동아시아의 외교방식이었다. [7] 지금으로서는 이해 할 수 없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자국 스스로가 신하를 자처하고 타국을 "폐하"라고 칭하는 외교문서가 많았다. [8] 진심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외교하는 방식이 그리하였다. [9] 신라 시절에는 실제로 일본에게 조공을 보낸적이 있긴하다. [10] 예를 들어 중국과 유목제국(거란, 여진, 몽골 등)이 서로 패권을 주장할 때 양국은 서로를 황제라고 칭하며 타국을 속국으로 여겼으나 결국 전쟁이 일어나서 위계서열을 정리했다. 한국과 일본도 서로를 속국 취급하였다. [11] 그러나 양국 간 친목을 다지기 위해 비록 국력이 비슷할 지라도 상대국을 높여주고 자국을 속국이라고 스스로를 낮추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한 경우는 한일 간 외교적 사례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12] 이성계는 쿠데타 이후 조선을 건국했는데 왕족의 피가 없어 그 당위성이 부족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조공책봉을 받음으로서 그 당위성을 확보했다. [13]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병자호란 이후 조선 청나라의 관계인데. 조선은 명나라를 섬기기를 원했고, 그러나 전쟁에서 청나라에게 지면서 청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청나라는 조선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편입하거나 몽골이나 티베트 같이 속국으로 만들기는 커녕 내정간섭 조차 안하였는데. 청나라가 그리하게 된 까닭은 근본적으로 병자호란은 이미 신하국인 조선에게 그저 확인만 받으러 간 것이지, 신하국이 아니었던 조선을 종속시키려고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이 무릎 꿇기를 끝까지 거부했다면 그 미래는 모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