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3 03:18:59

동성 제후국

동성제후에서 넘어옴

同姓諸侯國

1. 정의2. 목록3. 주나라 시대의 입지4. 이와 흡사한 사례5. 같이보기

1. 정의

주나라 왕실과 같은 성(姓), 곧 희성(姬姓) 제후들이 통치하는 국가.

춘추전국시대에는 성(姓)과 씨(氏)가 따로였기에 이런 개념이 존재한다.

보통 주무왕(周武王) 희발(姬發)이 상나라 주왕을 무찌른 뒤에 통일 사업에 기여를 한 자신의 형제들이나 형제의 자손들에게 영토를 분봉해 줌으로써 만들어진 국가들을 통칭해서 가리킨다. 그 외에도 통일 이후 여러 사정 때문에 무왕 이후의 왕들이 따로 자신의 형제들에게 분봉해 준 경우도 있다.
"대저 주 왕실과 성이 같은 제후(=동성(同姓)를 해(日)로써 비유하고, 이성(異姓)인 제후을 달(月)로써 비유하지요."
열국지》, 기원전 575년 언릉 전투 진나라 장수(晉將) 난서(欒書)가 보름달을 맞추었다는 위기(魏錡)의 꿈 이야기를 듣고 초공왕이 그 한쪽 눈을 잃을 징조임을 해몽하면서

2. 목록

3. 주나라 시대의 입지

3.1. 서주시대

서주시대에서 동성 제후국의 위치는 지리상으로 오늘날 중국 하남성 근방에 자리잡은 경우가 많아 보통 왕실의 경사(卿士)[5] 직위를 제후가 동시에 맡는 경우도 존재하였다. 때문에 다른 제후들에 비해 왕실과 가까울 수 있었으므로 왕의 입지가 강력했던 서주시대에는 동성 제후국들은 이성 제후국들에 비해 그 위치가 확고하였다. 경사직을 겸직할 때는 자신의 봉토는 가신들에게 맡겨둔 채, 뤄양에 들어가 업무를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6] 그 외에 (燕), (魯), (吳)[7]와 같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주나라 세력의 첨병 구실을 맡은 제후들도 있는데, 이들은 조정에서보다는 각 지역에서 큰 권한을 누리면서 주변의 이성 제후국이나 이민족들을 통제했다.

3.2. 춘추전국시대

위에서 언급했던 어드밴티지들은 이 시기에 들어오면 없어진다. 그나마 주나라를 상전으로 인정은 했던 춘추시대부터 제후국들 사이에서는 힘이 우선시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동성 제후국들은 옆의 강한 국가들의 속국이 되거나 멸망하게 되고, 이것이 주나라의 권위가 완전히 무력화되는 전국시대로 들어서면서 가속화된다. 다만 전국시대 들어서도 능력 등등 여러 요소로 명맥을 이어간 동성 국가들은 있었다.

전국칠웅 중에서는 한(韓)나라가 희성 한씨, 위(魏)가 희성 위씨, 연(燕)나라가 희성 국가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연나라의 경우에는 시조 소공석 주문왕의 아들로서 직계 혈통이기에 씨(氏)가 따로 없는 순수 희성 국가다. 반면에 조나라(趙)와 진(秦)나라는 영성 조씨로서 같은 조상을 공유하며 초나라는 미(羋)성 웅(熊)씨다. 이 외에 멸망한 소국까지 따지면 위(衛)나라[8], 등나라 역시도 동성 국가고, 노나라 역시 약소국으로나마 전국시대 말기까지 남아 있었다. 이들 중 위(衛)나라가 가장 나중에 멸망했다.

4. 이와 흡사한 사례

5. 같이보기


[1] 이 때문에 족보상 오나라가 가장 항렬이 높다. 그래서 오왕 부차 시기에, 진정공(晉定公)과 패자의 자리를 다투며 희성(姬姓) 중에 내가 항렬이 가장 높으니 패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진정공은 희성 중 자기가 작위가 가장 높으니 자기가 패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단 당시 오나라가 강했기에 부차가 패자가 되었지만 그 시기 월왕 구천이 반란을 일으킨 바람에 부차는 패망했다. [2] 오나라 제후 주장의 동생. [3] 소주(小周), 주읍(周邑). 제후국의 이름이 본국과 같지만 가리키는 대상이 다르다. [4] 또는 담(聃) [5] 오늘날로 말하면 장관급 직위들의 통칭 [6] 주공 단 역시도 주와 노의 국군이었지만 노나라에는 자신이 직접 가지 않고 아들인 백금을 보내어 통치하게 했다. [7] 하지만 오나라는 기록의 결손으로 19대 왕인 수몽 때부터 오에 대한 기록들이 나오고 그 이전에는 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관계로 실제로 동성제후국인지 논란이 많다. 다만 희성 금문이 새겨진 서주시대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어쨌건 중원과 연계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 초기에는 위씨였다가 나중에 자남씨로 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