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21:31:04

데카브리스트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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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3. 평가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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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Decembrist revolt(Восстание декабристов)

1825년 러시아 제국의 청년 장교 세력(舊 구원동맹/前 번영동맹[1]/북부 비밀 결사[2])이 전제군주정 철폐의 기치를 내걸고 일으킨 반란. '데카브리스트'는 12월을 뜻하는 러시아어 '데카브리'(декабрь)[3]에서 기인한 것이다.

2. 전개

1816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알렉산드르 무라비요프(Алекса́ндр Н. Муравьёв)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개혁을 꿈꾸며 '구제동맹(Союз спасения)'이라는 결사를 조직했다.[4] 이들은 시간이 지나며 이견이 생겨 공화정을 꿈꾸는 남부 결사(Южное общество), 입헌군주제를 꿈꾸는 북부 결사(Северное общество), 연방제를 주장하는 통일 슬라브 연맹 등으로 분리되었다.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승하한 후 후계자가 분명하지 않자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알렉산드르 1세는 아들이 없어 동생 니콜라이 1세가 황위를 물려받았는데, 이에 혁명가들은 알렉산드르의 동생이자 니콜라이의 형인 폴란드 총독 콘스탄틴 파블로비치를 옹립한다는 명분으로 니콜라이의 즉위식 날인 12월 14일에 반란을 일으켜 원로원 광장에 집결했다.

옹립대상이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는 엄연히 니콜라이 1세의 형인만큼 원래 니콜라이보다 계승순위가 앞섰다. 또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니콜라이 1세와 달리 나폴레옹 전쟁에서 군인으로 활약해 추종자가 많았다. 하지만 본래 아내인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율리아네 공녀[5]와 이혼하고 새 아내인 폴란드 귀족 출신의 요한나 그루진스카(Joanna Grudzinska)와 재혼했는데, 아내의 신분 때문에 알렉산드르 1세가 제정한 귀천상혼에 걸려 콘스탄틴의 후손은 계승권을 잃었다. 이 때문에 본인도 황위에 뜻이 없어서 알렉산드르 1세가 승하한 직후 순순히 니콜라이에게 양보했다.

그런데 정작 니콜라이는 이 사실을 몰랐고, 계승권에서 형을 건너뛸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설득하기 위해 콘스탄틴 본인이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폴란드를 오가며 꽤나 고생했고, 결국 니콜라이가 계승을 받아들인 것. 데카브리스트들은 이 공백과 혼란기 때 봉기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직접적 전투 대신 무력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약 3천명의 반란군은 허공을 향해 산발적으로 총을 쏘아대며 9천 명에 달하는 충성파 군대와 가만히 대치하였고, 이 소란을 목격한 일반 시민들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니콜라이 1세는 즉위식 날부터 피를 흘리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데카브리스트들과 교섭을 하기 위해 직접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몇 시간에 걸친 교섭은 아무 소득 없이 결렬되었다.

결국 니콜라이 1세가 군사를 동원해 이들을 진압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기병 돌격을 명령하여 직접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기병 돌격이 수포로 돌아가자[6] 니콜라이 1세는 대포 3문을 동원해 포도탄[7]을 발사하라고 명했다. 이 포격은 광장에 빽빽하게 밀집해있던 반란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고, 반란군은 사기가 떨어져 이렇다 할 반격도 해보지 못한 채 광장에서 도망쳤다. 결말이 이랬기 때문에 훗날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서 있는 혁명', '소리만 내는 혁명'이라는 비아냥을 얻기도 했다.

청년 장교들은 전원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체포된 자들은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후 니콜라이 1세는 철저한 반동정치를 취하였다. 그는 황제 중심의 독재체제를 확립시켰으며, 비밀경찰을 운용하고, 검열제도를 강화했다.

데카브리스트의 난 이후 콘스탄틴은 처벌을 받지 않고 폴란드 총독직을 계속 맡다가 그 곳에서 사망했다.[8]

3. 평가

비록 행동에 나섰지만 데카브리스트들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들은 당시에 어느 정도 준합법적(semilegality) 느낌이 남아 있는 방식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한 근위대 장교들이었다. 제위 계승을 결정하기 위해 젠트리 계급의 무장 개입으로 전제정을 조정하는 것은 19세기 초에 거의 "헌법"의 일부였다. 예카테리나 1세에서 알렉산드르 1세까지 모든 러시아 군주들은 — 적어도 오래 통치한 이들은 — 어느 정도는 무장 귀족 쿠데타에 의해 제위에 오르거나 그들에 의해 즉위 조건이 결정되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의 독창성은 이러한 오래된 방법들을 인도주의적 개혁을 위한 새로운 목적으로 전환시키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마틴 말리아, 알렉산드르 게르첸과 러시아 사회주의의 탄생 中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와 파리 점령이 데카브리스트 난의 발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통주의적 관점에서는 1814년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1세 나폴레옹을 권좌에서 축출하고 파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황제를 따라간 청년 장교들은 발전한 프랑스 사회의 모습과 자유주의의 향기를 맛보고 러시아의 현실과 비교하였다. 이 때문에 이후 이를 맛본 젊은 장교들은 러시아가 정상적인 유럽 열강으로 편입되기 위해선 급진적인 자유와 근대화 개혁이 필요하다 판단, 이를 차르와의 담판으로 정권에 큰 영향력을 줌으로써 행하려 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오래 전에 소련(+러시아)와 서방 학계 모두에서 설득력을 잃은 주장이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포함하여 러시아사에 계속 등장하는 유사한 주제들은 "억압적이고 후진적인 전제정에 대항하여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라는 내러티브는 단순한 후대의 편견이 아닌 당대 엘리트들이 프로파간다를 그대로 받아썼다는 점에서 객관적인 평가는 못된다. 단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소련 학자들에게 차르 체제는 실패한 구체제였고,[9] 서방 학자들에게 차르 체제는 (마찬가지로 실패한 혹은 실패할) 소련 체제의 원본이었다.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19세기의 귀족, 20세기의 공산주의자와 반공주의자가 같은 주장을 반복했던 것이다.

전제정은 봉건귀족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형성되는 체제고, 때문에 전제정에 저항하여 자유를 쟁취하려는 시도 대부분은 봉건귀족에게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표트르 1세 사후부터 해당 시점까지 러시아 제국은 귀족 쿠데타에 의해 황제가 옹립, 폐위되며 귀족평의회에서 차르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때문에 니콜라이 1세는 제위에 오르기 전의 대공 시절부터 귀족의 자유를 억압하고 전제권력을 확립하여야 한다는 점을 여러번 내비쳤다. 특히 귀족들의 부의 원천이 되는 농노제와 궁정 쿠데타의 주축이 되었던 귀족 근위대에 극도로 부정적이었고, 근위대에 외국인, 외국계 러시아인, 소수민족, 비귀족 신분들을 유입시켜 견제하려고 했다. 이는 귀족출신 근위대원 상당수가 데카브리트스의 난에 가담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평가는 반전된다. 데카브리스트들은 귀족조차도 포용하려고 했고 (혹은 그들 자신들부터가 출신성분의 한계로 귀족 중심적이거나 지지기반인 귀족에게 휘둘리는 처지였고), 실질적으로 귀족의 권리를 박탈하거나 귀족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일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현실적인 가능성이 처음부터 없었다. 예를 들어 데카브리스트 주동자들은 농노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해방된 농노가 경제적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 그들을 위해 귀족이 희생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정작 귀족이 농노를 착취하는 것을 법으로 더 강력하게 억제해야 하며, 농노제 폐지가 해방될 농노에게 경제적 생계수단을 보장 하는게 아니라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현실적인 문제제기를 한 쪽은 니콜라이 1세와 보수주의자들이었다.[10]

결국 데카브리스트들은 좋게 말하면 현실성이 결여된 이상주의자였고 나쁘게 말하면 봉건귀족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11] 이점에서 이전부터 있었던 귀족 쿠데타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즉 이는 독재정권에 저항한 민주투사들의 항쟁이라기 보다는 전제군주와 봉건귀족의 충돌에 더 가까웠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 니콜라이 1세가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한 후 따로 부서까지 만들어서 그들의 사상과 주장을 체계적으로 조사했다는 점이다. 일부 데카브리스트 주동자들도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고 니콜라이 1세한테 행운을 빌어줬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들보다 더 현실적인 정치적 계승자였던 셈이다.

애초에 영국-프랑스에서 일어난 정치지형의 변화를 보면 봉건제-절대왕정-혁명 식으로 진행되었다. 영국의 경우 이미 플랜태저넷 왕조 시절부터 봉건제식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고 튜더 왕조 때에 절대왕정을 이룩하였고 스튜어트 왕조 시절에 혁명을 겪어 입헌군주제가 되었고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기점으로 봉건제가 무너지기 시작해 부르봉 왕조 시절에 절대왕정을 누렸다가 프랑스 대혁명을 겪는다.

그런데 두 사례 모두 혁명의 주체가 원래는 절대왕정을 뒷받침해주던 계급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절대왕정 성립 이전에는 교권, 왕권, 귀족, 시민 등이 서로 싸우는 식으로 흘러갔다. 교권과 왕권, 귀족과 왕이 서로 싸우는 이유야 말할 것도 없고, 교권도 세부적으로는 상황이 퍽 복잡해서 대주교 등 고위 성직자는 귀족 출신이 많으니 귀족과 교권은 같은 편이기 쉬운가 하면[12] 교황청과 지역교회끼리 서로 신경전을 벌이면서 오히려 주교들이 왕권에 발을 맞추거나 도시영주로서 도시하고 갈등을 빚고는 하였다. 귀족과 시민 또한 근거지인 도시의 처우를 놓고서 대립하는 게 많았다. 그나마 시민과 왕권은 충돌요소가 없는 편이었고, 그러다 보니 시민과 왕권은 서로 손잡으면 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결탁하면서 생겨나는 게 바로 절대왕정이다.[13] 그리고 절대왕정 하에서 귀족과 교권도 왕권에 굴복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남겨진 왕권과 시민층이 대립하게 되었고, 여기서 왕권을 비롯한 지배층이 타협을 하면 영국과 같은 양상을 띠고 타협을 거부하면 프랑스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문제는 러시아는 이 조건에 맞지 않았다. 절대왕정을 이루고 후에 혁명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시민계급의 존재가 필수인데, 시민은 상업을 통해 본격적으로 성장하지만 러시아는 곡물 수출이 클 정도로 1차산업이 컸고 그 생산지는 귀족들이 다수 차지하고 있었으며 농노를 통해 생산했다. 이런 나라에서 시민이 서유럽만큼 성장할 수 있는건 어려운 일이었다. 즉, 왕권에 대항하는 혁명이 일어난다면 그 주체는 귀족이 될 수밖에 없고 귀족 주도의 혁명이라면 그 결과는 안봐도 비디오. 물론 영국에서 마그나 카르타와 같은 일이 있긴 했지만 마그나 카르타의 실질적 의의는 그 당시엔 그리 크지 않았다.

4. 여담

이 사건으로 장교, 지식인들이 시베리아 등지로 유배를 많이 갔는데 그 중 하나가 이르쿠츠크다. 이르쿠츠크는 이들의 영향으로 문화, 예술 등이 상당히 발전해서 오늘날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다. 이르쿠츠크 버스터미널 근처에 이들 중 한 명(볼콘스키 공작)이 살았던 저택을 복원한 박물관이 있으니 한 번쯤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던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도 이 사건으로부터 세월이 지나 시베리아 유배를 당한 적이 있는데, 데카브리스트의 난 이후 수십 년간 민중운동을 탄압하던 니콜라이 1세 시절의 일이었다. 프랑스 2월 혁명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이후 이 영향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생긴 사회주의 모임에 일반 회원으로 가입했다가 체포 후 구속되어 사형당할 뻔했으나 사면을 받고 유배생활을 했다. 사면된 이유는 니콜라이 1세가 처음부터 안 죽이려고 했기 때문. 니콜라이 1세는 사형쇼를 통해 민중운동 청년들을 사형 직전 상태까지 겁주고 죽기 직전에 풀어줘서 PTSD로 인해 다시는 사회운동을 못하는 정신머리로 만들기를 즐겼다.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이 보여준 순애보도 유명한데, 이혼과 재가를 전제로 귀족 작위를 유지하든지 맨손으로 시베리아로 가든지 택하라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남편을 따라갔다고 한다. 다만, 남편들은 실의에 빠져 술에 취해 살거나 현지 여자들과 바람난 경우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별거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온 사람은 드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소련 시대에 강한 여성상을 나타내는 캐릭터들로 많이 띄워졌다.

2019년 개봉한 러시아 영화 《구제동맹(Союз спасения, Soyuz spaseniya. 영어 제목은 Union of Salvation)》이 바로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주제로 한 영화이다. 트레일러, 전투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은 12월파의 이름을 딴 데카브리스트급 잠수함을 건조하기도 했다.

미국의 인디 록 밴드 디셈버리스츠 이름의 유래이다.


[1] 구원동맹 해체 이후 수립된 단체. [2] Северное та́йное о́бщество [3] 구개음화가 일어나 '지카브리'에 가깝게 들린다. '데카브리'라는 단어는 라틴어로 12월을 뜻하는 데켐베르(December)에서 유래하였다. 데카브리스트보다는 지카브리스트가 더욱 적합한 발음인 셈이다. [4] 이어 1818년에는 복지동맹(Союз благоденствия)으로 이름을 바꾼다. [5]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의 삼녀로 에른스트 1세 레오폴드 1세의 누나이자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의 언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이모이자 앨버트 공의 고모이기도 하다. [6] 반란군 측이 기병대가 광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곧바로 대기병 방진을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거기에 교전 장소 또한 넓은 광장이라지만 아예 사방이 탁 트인 야지도 아니라 기병대가 제대로 공격할 수가 없었다. [7] 말이 포도탄이지 아기 주먹만한 크기의 납탄이 수십발 정도가 동시에 발사된다. 워낙 크기에 관통은 물론 스치기만해도 리코셰로 몇 명은 거뜬히 죽일 수 있다. [8] 애당초 콘스탄틴 본인이 이 데카브리스트의 난에서 뭐 한게 없긴 하다(...) 원체 권력욕이 없었던 건지 귀천상혼으로 인한 자신의 계승권 박탈과 동생 니콜라이 1세의 즉위를 순순히 받아들였기에 처벌할 만한 건수도 없었다. [9] 때문에 전제군주정에 대한 저항자들, 특히 데카브리스트는 볼셰키비의 '선배'로서 이상화되었다. 당장 후술한 잠수함에 데카브리스트라는 이름을 줬던 것에서부터 알 수 있다. [10] 이와 별개로 러시아 농노제 하의 대부분의 러시아 농민들이 비슷한 시기의 유럽 농민들과도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의 주장이다. 땅이 원체 커서 귀족이 강제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농노는 상대적 소수인지라, 그냥 귀족과 농노 적당히 상부상조하면서 사는게 대다수였다. (비유하자면 한국사에서 외거노비는 소작농에 가까웠던 것과 비슷하다) 데카브리스트들 주동자들도 인정한 것이지만 농노제 하에서 많은 농노들이 경제적 이점을 누린 것도 사실이다. 귀족 입장에서도 위로는 차르 눈치도 봐야되고 아래로는 자신의 재산상의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라도 농노를 최소한 먹고 살게는 지원해야만 했다. 때문에 때로는 보증도 서주고 세금 대납도 해주고 도시 이주 비용도 대 주고, 종자, 가축, 농기계도 빌려주는게 대다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는 귀족의 지원으로 농노신분으로 지주, 기업가에 오른 이들도 상당수였다. 뭣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농노를 가혹하게 착취하는 귀족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그 시대에서도 가난하고 뒤떨어지는 귀족이거나 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나라 전체가 위기상황이었을 때였다. [11] 이러한 경향은 단순히 러시아 농민들이 종교적 이유로 차르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후진적인 존재이기에 엘리트들에 의해 계몽되어야 한다는 귀족-엘리트라는 관점에서 농민을 바라본 훗날의 인민주의자들의 브나로드 운동(러시아)에서도 반복된다. [12] 심지어 11~12세기 수도회 운동이나 개혁교황시대에 활동하였던 개혁적인 성직자들도 영역제후 가문 출신이 아닐 뿐이지 귀족과 연관성이 컸는데, 그보다 낮은 성주층 가문 출신이거나 그들의 후원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13] 왕권은 시민들을 자치권을 보장하여 귀족과 교권의 간섭에서 보호해주고, 시민은 그 대가로 왕권을 뒷받침해줄 군사력에 필요한 자금을 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