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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베컴/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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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이비드 베컴의 선수 경력에 대해 소개하는 문서.

2. 클럽 경력

2.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베컴은 맨유 유스팀의 일원이 되어 팀을 이끌었고, 92년 5월 잉글랜드 FA 유스컵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퍼거슨 감독에게 눈도장을 찍는다. 이후 베컴은 93년 5월이 되어서 맨유 퍼스트 팀으로 승격해 가끔씩 출전 기회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맨유는 매 시즌 우승을 노리는 강팀이었다. 아무리 유스팀에서 날고 기었던 베컴이었다해도 세계 최고의 선수들만 있다는 맨유에서 그가 주전을 차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렇듯 퍼스트 팀 승격 이후, 경기에 결장하는 것이 잦아졌고,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좌절감에 몸부림쳤다. 그런 베컴을 본 퍼거슨 감독도 베컴의 재능이 썩는 데에 아쉬워했다. 결국 1994-95 시즌에 베컴은 당시 리그 2 소속이었던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라는 팀으로 임대되었다. 프레스턴은 베컴을 주전 선수로 출전시켜줬고, 이는 그가 다시금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프레스턴에서의 경험으로 5경기 2골이라는 성과를 거두었고, 임대 2달차가 되던 때에 맨유의 갑작스러운 복귀 요청으로 다시 맨유로 복귀했다. 주전 선수들이 모두 부상으로 쓰러진 것이었다. 이에 퍼거슨 감독은 급히 프레스턴으로 임대가 있던 베컴을 불러들였고, 급한대로 그를 오른쪽 윙 플레이어로써 출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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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트레블을 달성하던 해의 베컴의 모습, 가히 그의 전성기가 열리기 시작하던 순간이었다.
맨유에 복귀한 베컴은 어린 나이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킥력을 선보였고, 자신의 이름을 잉글랜드 전역에 각인시켰다. 그는 1996-97 시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윔블던과의 시즌 개막전에서 골키퍼 설리반을 농락시키는 그 유명한 60야드짜리 초장거리슛을 성공시키면서[1][2] 베컴은 어느덧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리고 잉글랜드의 미래를 이끌어 갈 대표적인 기대주로 손꼽히게 되었다. 특히 97년 2월, 첼시와의 경기에서 터뜨린 대포알같은 중거리포는 유럽의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의 오른발을 떠나 골문을 향해 무시무시한 직선을 그리며 날아간 볼은 눈깜짝할 사이에 득점으로 연결됐고, 그 시속이 무려 97.9마일(약 157km)로 측정되었다. 이쯤되면 야구에서도 '강속구'가 아닌, '광속구'를 던지는 투수들의 직구 스피드에 버금가는 수치라 할만했다.
베컴의 활약에 힘입은 맨유는 프리미어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그 이후, 시즌이 끝나자 몇몇 스타 선수들이 이적해버리고, 퍼거슨 감독은 영입 대신 유스 출신선수들을 기용할 것을 결정, 이에 대해 영국 언론과 팬들의 질타를 받았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구단의 유스시스템에 확신에 차 있었다. 베컴 역시 그런 퍼거슨 감독의 신뢰에 부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한 이적시장을 보내고, 시즌이 시작되었다. 시즌이 시작되자 베컴을 필두로 맨유는 예상을 뒤엎고 6연승을 하는 기염을 토해내며 기량을 과시했다. 베컴을 비롯한 맨유의 유스팀 선수들이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이자 언론들은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거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매 경기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는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맨유의 아이들, 이른 바 '퍼거슨의 아이들'은 그렇게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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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에서 계속해서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1997년, 칸토나의 갑작스런 은퇴 결정으로 인해 많은 맨유팬들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베컴에게 7번을 주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고, 베컴 역시 7번 유니폼을 입고 이곳저곳 누비며 그 신뢰에 보답하며 결국 1998-99 시즌 맨유 역사상 프리미어리그, FA 컵, 챔피언스리그 모두 우승하는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구단 최초의 트레블의 중심[3]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에도 베컴은 세트피스, 프리킥, 페널티 킥 등으로 수많은 골들을 양산하며 잉글랜드 최고의 데드볼 스페셜리스트로 자리매김했다. 베컴의 존재는 맨유를 세계적인 인기 클럽으로 만들어줬다.

부상 전엔 환상적인 킥력 외에 돌파도 준수했는데 베컴은 맨유의 명실상부한 에이스로서 모습을 보였다. 다이내믹한 윙어의 최고봉이었던 라이언 긱스의 왼쪽과 후방에서 활동량과 로빙 패스로 받쳐 주는 베컴의 오른쪽은 한 시대를 풍미한 좌우 날개 조합이었다.[4]

1997-98 시즌부터 2000-01 시즌 사이에 세 번의 리그 도움왕에 올맀고, 맨유 시절 도움 해트트릭만 9회나 기록하며 공격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1998-99 시즌에는 팀의 트레블에 크게 공헌했기 때문에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상 2위, 그리고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상을 수상하였다. 이때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상을 가져간 선수가 다름 아닌 브라질의 히바우두였는데, 팀 커리어로는 맨유의 베컴이 압도적이었지만 포지션의 차이나 팀에서의 입지, 개인이 보여준 퍼포먼스 등의 차이로 베컴이 아깝게 놓쳤다. 이러한 결과는 과거에는 프란츠 베켄바워, 후에는 베슬리 스네이더르 프랑크 리베리 등이 비슷한 상황을 보여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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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2002년 4월 10일, 베컴은 데포르티보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왼발의 제2 중족골 부상을 당했다.[5] 이 부상으로 베컴은 시즌 남은 기간 동안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경기를 치르지 못했고, 프리미어리그를 아스널에게 내주었지만,[6] 추가 급여와 초상권 등과 관련해 구단과의 몇 달에 걸친 협상 끝에 5월에 3년 연장 계약을 맺었다. 새로운 계약을 체결해 다수의 협찬 계약으로 벌어들이는 수입과 합쳐, 베컴은 당시 세계에서 최고 주급을 받는 선수로 등극했다. 또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2001-02 시즌은 베컴이 유나이티드 선수로 치른 최고의 시즌이었다. 베컴은 리그에서 28경기를 치루면서 11골을 넣었고, 모든 경기를 통틀어 42경기에서 16골을 넣었는데, 이는 개인 최고 기록이었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저 부상으로 인하여 드리블 돌파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2002-03 시즌 초에 부상을 당한 후, 베컴은 주전 오른쪽 미드필더로서의 입지를 유지하기 힘들어졌으며 올레 군나르 솔샤르가 베컴을 대신하여 우측 미드필더 보직을 꿰찼다. 물론 부상 복귀 후에는 베컴이 다시 오른쪽 미드필더 주전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그런데 2003년 2월 15일, FA컵에서 아스날에게 패배한 뒤 알렉스 퍼거슨과 라커룸에서 충돌, 결국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게되는 계기가 된다. 당시 상황을 서술하자면, 경기에서 패배한 후 라커룸에서 알렉스 퍼거슨이 데이비드 베컴에게 "플레이가 이게 뭐냐. 애슐리 콜에게 완전히 발렸잖아."는 식으로 호통을 쳤는데, 발끈한 베컴이 "영감님은 아르센 벵거에게 완전히 발려버렸고요."는 식으로 맞받아치자 열받은 퍼거슨이 축구화를 발로 차버렸다. 솔샤르의 축구화였다 카더라 그런데 그게 우연히 베컴의 얼굴을 직격하는 바람에 축구화를 눈에 맞아서 눈썹 위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이에 분노가 폭발한 베컴이 퍼거슨에게 달려들었으나 팀메이트들이 엉겨붙어 간신히 떼놓았다고. 결국, 퍼거슨은 나중에 따로 베컴에게 찾아가서 이번에는 자신이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면서 사과를 했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러한 자초지종이 베컴의 아내 빅토리아 베컴에 의해 언론에 새어나가고, 이후 베컴도 보란 듯이 눈 위에 반창고를 붙이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파파라치에 의해 언론을 타면서 둘 사이는 봉합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시즌 종료 이후 베컴은 팀을 떠나게 되었다. 퍼거슨이 자신의 두 번째 자서전에서 밝히길 베컴이 자신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 훈련을 할 때 베컴이 비니를 쓰는 모습을 보고 (비니를) 벗으라고 했는데 무시한 것부터 시작해서 밑에도 나와 있듯이 빅토리아와의 사랑에 빠지거나 하는 등 축구에 소홀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에게 실망했다고 한다.[7] 만약 그가 축구에 더 집중했다면 자기가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도 맨유에 남아있었을 것, 정말로 축구 자체에 헌신했다면 레알 마드리드에서 로스앤젤레스 갤럭시로 이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성토했다. 물론 베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저런 축구 외적인 잡음들을 매우 싫어했던 퍼거슨과 이런 크고 작은 갈등이 쌓이고 쌓여 결국 2003년 축구화 사건이 터지면서 파국을 맞게 되었다. 현재는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의 앙금이 가라앉으면서 화해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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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 레알 마드리드 CF 전에서도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었고, 팀은 합산점수에서 밀려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나 베컴은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넣었고, 이후 문전 혼전 상황에서 볼을 밀어넣으며 2차전 경기만큼은 4-3 승리로 끌었다. 자신의 클래스를 제대로 보여준 경기였다. 그리고 이 경기 끝나고 베컴은 지단과 유니폼을 교환했는데 이때 베컴은 지단에게 마드리드로 오지 않겠냐는 꼬심(?)을 받았다고 한다.[9]

어쨌든 축구화 사건 이후로 팀에서 경기 출전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베컴은 이 시즌에 모든 대회를 통틀어 52경기에 출전해 11골을 기록했다. 또한 여전히 잉글랜드의 주전 현역 선수였지만, 축구에 대한 공로로 2003년 6월 13일에 영국 제국 금강 기사단 장교 훈장(OBE)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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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컴은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265회 프리미어 리그 경기에 출전해 61골을 넣었으며, 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에도 81회 출전해 15골을 기록했다. 베컴은 12년의 기간 동안 프리미어 리그를 6회, FA컵을 2회, UEFA 챔피언스 리그를 1회, 인터컨티넨탈컵을 1회, 그리고 FA 유스컵을 1회 우승했다. 이 시기에, 그는 라이언 긱스에 이어[10] 두 번째로 최장 기간 활약한 선수였다.

여담으로 베컴은 맨유의 7번으로 너무 유명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7번은 베컴이 클럽에 입단한 이래 네 번째로 부여받은 등번호였다. 그는 데뷔시즌 28번을 입었었고, 그 후 1995-96시즌부터 24번으로 바꾸며 정규 멤버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96-97 시즌부터 10번으로 번호가 승격되었는데, 바로 마크 휴즈가 달던 번호였다. 하지만 1년 후 테디 셰링엄이 맨유에 합류하고 에릭 칸토나의 충격적인 은퇴발표가 있은 후, 베컴은 자신의 등번호 10번을 셰링엄에 양보하고, 맨유에서의 나머지 생활을 7번 번호를 계승해 달고 뛰며 맨유의 상징적인 슈퍼스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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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 전설의 유스 출신 선수들인 Class of 92[11] 사망하였다.]. 왼쪽부터 라이언 긱스, 니키 버트, 데이비드 베컴, 게리 네빌, 필립 네빌, 폴 스콜스, 테리 쿠크[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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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게리 네빌의 은퇴 경기에 이들은 다시 모여 그때와 같은 포즈를 취하고 찍었다.[13]

2.2. 레알 마드리드 CF

2003년 여름 이적 시장이 다가오면서, 맨유는 베컴을 처음에 바르셀로나로 팔 것이 유력해 보였고, 두 구단은 베컴의 이적을 놓고 합의를 본 것으로 발표까지 했지만, 예상을 깨고 레알 마드리드와 €35M에 4년 계약을 맺고 둥지로 옮겼다.[14] 원래는 바르셀로나로 가는 수순이었으나 맨유를 정말로 떠나고 싶지 않았던 베컴은 자기를 그렇게 내보내야겠다면 최소한 자기가 가야 할 팀은 본인이 정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여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을 하게 되었다. 베컴은 플로렌티노 페레스의 갈락티코 1기 때 영입한 세계구급 거물들 중 한 명이었다.[15] 비록 6월 중순에 발표가 났지만, 이적은 2003년 7월 1일에 완료되었고, 베컴은 로리 커닝엄 스티브 맥마나만에 이어 레알 마드리드의 일원이 된 세 번째 잉글랜드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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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스타성과 상품성을 가진 데이비드 베컴이 화려한 네임밸류를 자랑하는 갈락티코스 1기의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자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베컴은 클럽과 대표팀에서 7번을 달았으나, 레알 마드리드의 7번은 클럽 레전드 라울 곤살레스이기에 23번을 달았고, 이후 23번은 베컴의 상징이 된다.[16] 그러나 본래 포지션인 오른쪽 윙어에는 포르투갈의 전설적인 윙어 루이스 피구가 존재했기에 중복된 포지션으로 인해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된다. 익숙치 않은 포지션에서 활약하면서, 게다가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클로드 마켈렐레가 떠난 상태이기에 더욱 고전을 면치 못했다. 사실 베컴도 부상으로 인해 신체 능력이 떨어졌고 맨유 시절에 비해 확실히 기량이 쇠퇴했다.

당시 갈락티코스 1기의 레알 마드리드는 모래알같은 조직력과 구멍난 수비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었다. 수많은 감독들이 경질되었으며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직은 '독이 든 성배'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엄청난 이적료를 주고 영입한 베컴이 아쉬운 활약을 펼치자 스페인의 언론들은 그를 비난하는 기사를 일제히 쏟아냈고, 더 자극적인 가십을 써 내려가기 위해 베컴의 사생활 취재에 집중하며 기자와의 몸싸움을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베컴의 스페인 생활은 실패로 끝나는 듯 싶었지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리그 적응에 완전히 성공해 루이스 피구 인테르로 이적시키고 원래 자리인 오른쪽 윙어 자리를 되찾았다.

이 시기 레알 마드리드는 02-03 시즌의 리그 우승 이후 세 시즌 째 무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승청부사라 불리던 파비오 카펠로가 06-07 시즌 감독으로 선임되지만, 이는 베컴에게 재앙으로 작용한다. 카펠로는 언론을 통해 대놓고 베컴을 중용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고, 베컴은 힘든 시간을 거치다가 시즌 종료 후 LA 갤럭시로 이적을 할 것을 밝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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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반전이 시작된다. 베컴처럼 퍼거슨과의 불화 때문에 레알로 이적하게 된 뤼트 판니스텔로이는 이적 시즌인 06-07 시즌 초반에는 다소 부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점점 팀에 적응하게 되고 이는 택배 크로스 전문가인 베컴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언론을 통해 대놓고 베컴을 디스하던 카펠로도 일단 리그 순위가 간당간당하다보니 당장 반니에게 질 높은 크로스를 배달하는 베컴을 안 쓸 수가 없었고, 06-07 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초반에는 위태위태한 출발을 하였으나 막판에 대폭발한 반니스텔로이- 라울 투톱에 이를 보조하는 베컴의 엄청난 활약으로 대역전 우승을 하게 된다.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우승청부사의 명성을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이어나갈 수 있었지만 결국에는 시즌 종료 후 경질당하게 되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레알 마드리드답지 않은 축구를 했다"라는 이유였으나, 실은 "당신이 필요없다고 한 베컴의 활약으로 리가를 우승했는데 그게 어떻게 당신의 능력이느냐"라는 뉘앙스가 강했다. 그만큼 해당 시즌의 베컴은 대단했고, 베컴의 택배 수취 전문인 판 니스텔로이는 라리가 데뷔 시즌에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리고 베컴의 레알 마드리드 생활은 라리가 우승으로 마무리한다.

2.3.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 AC 밀란

이적 이후 LA 갤럭시의 간판 스타로 활약. 하지만 이적 당시 갤럭시 구단은 비난을 많이 받았다. 야구나 농구, 미식축구, 아이스하키에 절대적으로 밀리는 메이저사커 리그에서 베컴이 받은 돈은 다른 팀 동료들이 받는 돈을 다 합치고도 남는 돈이었기 때문.[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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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갤럭시에 몸 담고 있었던 시즌 중 두 시즌은 AC 밀란에서 임대 생활을 하기도 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잉글랜드 국대 감독으로 부임하여 축구 변방으로 떠난 베컴에게 유럽 최상위 리그의 팀에서 뛰어야만 그를 국가대표로 뽑아주겠다고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전달하면서 AC밀란으로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추천을 하여 이루어진 임대였다. 밀란의 감독이었던 카를로 안첼로티는 베컴을 굉장히 아까운 인재로 여겼는데, 안첼로티는 베컴은 미드필더로서 투쟁심, 활동량, 수비력, 축구지능, 킥력 등 미드필더에 필요한 모든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맨유에서 플레이 스타일을 한정짓는 바람에 재능만큼 꽃 피우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특유의 정확한 크로스에 노련미 넘치는 플레이까지 더해지며 밀란의 미드필드에 활력을 불어넣는 쏠쏠한 활약을 펼친다. 밀란의 팬들은 베컴의 활약에 매우 만족해했고, 베컴 역시 밀라노의 생활을 즐겼다.

다만 베컴은 이 시기에 원 소속팀이 명백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꽤나 대놓고 AC밀란에 남고 싶다고 해서 LA 갤럭시 팬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들었다. 다른 팀원들이랑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액연봉자[18]가 팀 성적도 안 좋은데 원 소속팀 활동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팀에서 계속 임대로 뛰고 싶다고 하니 팬들이 불만을 가지는 게 당연했다. 팬들 뿐만 아니라 LA 갤럭시 라커룸에서도 베컴에 대한 불만이 심했다. 특히 미국 축구의 슈퍼스타 랜던 도노반은 자국 리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MLS와 갤럭시를 등한시하는 베컴에 화가 많이 나서 책에 그를 저격하는 내용을 실을 정도였다. 이 둘은 실제로 서로를 프로답지 못하다면서 공격하는 등 갈등이 있었다. 이 불화는 구단이 직접 나서서 중재를하고 도노반과 베컴이 서로에게 사과를 하며 일단락되었다. 훗날 베컴은 당시 자기가 국가대표 합류에 눈이 멀어 동료들, 가족의 입장은 안중에도 없었고 이기적이었다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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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안첼로티가 떠난 밀란에 임대 이적했을 때에는 절묘하게도 밀란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챔피언스리그에서 대결하면서 처음으로 올드 트래포드에 서게 되었는데 비록 선발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교체로 투입될 때 전 관중이 기립박수로 환대해줬다.[19]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팬들이 건네 준 노란색/녹색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퇴장하며 더 큰 환호를 받았다. 다만 그 스카프는 그 당시 경기장에서 구단주에 대한 항의 시위를 이어가던 팬들의 상징이라서 약간 논란이 있었다. 베컴 본인은 시위에는 큰 관심이 없고 그저 팬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는 듯. 그러나 2010년 시즌에 밀란에서의 최종전에서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하면서 2010년 월드컵 출전이 좌절되었다. 기량이 예전만 못하다거나 세간의 관심에서 조금 멀어졌다고 해도 베컴은 여전히 잉글랜드 국대 캡틴급의 위상을 가진 인물이었던 데다, 베컴 없이 치르는 국제 대회는 참 오랜만이었기에 잉글랜드 축구팬들에게는 큰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성적도 늘 그렇듯이 큰 아쉬움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 겨울 이적시장에서 토트넘에서 영입제의를 했으나 거절했다. 맨유 외의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뛰지 않겠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일단 2012년 12월에 열리는 MLS컵 결승을 마지막 무대로 퇴단 절차를 밟고 있다. 선수생활을 계속 이어가려는 의욕을 보이고 있는데 아직 차기 행선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 다만 현지 언론에 따르면 중동으로 팀을 옮겨 마지막 축구 인생을 불사르리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미러, 피플 등에서) 현재 유력한 행선지로 꼽히는 곳은 카타르의 알 사드[20], UAE의 알 와슬 등이며 프랑스의 모나코나 PSG도 관심이 있다는 설이 있다. QPR의 레드냅 감독도 토트넘 감독하던 시절부터 계속해서 베컴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지만 베컴은 맨유가 아닌 프리미어리그 팀에서 뛰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면서 계속 거절했다.

2008/09 시즌과 2009/10 시즌 겨울 기간에 임대로 와서 AC밀란에서 활약을 한 것에 대해 밀란 팬들은 긍정적이지만 정작 LA갤럭시와 MLS팬들은 당연히 좋아하지 않았다. 체력적인 문제와 부상을 달고 복귀했기 때문. 2008/09 세리에 A에서는 짧은 기간에 18경기나 출전했지만 그 여파로 정작 2009 MLS에서는 11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게다가 2009/10시즌 겨울, 다시 세리에 A에 임대로 가서 11경기에 출전했지만 2010 MLS에서는 또 그 여파로 7경기밖에 뛰지 못한게 그 예시이다.

2.4. 파리 생제르맹 FC

그렇게 차후 행선지를 저울질하며 입단 타진을 하고 있던 중 아스널 선수들과 같이 훈련을 하게 됐는데, 언론에서는 베컴이 아스날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는 기사를 써댔다. 베컴은 아스날 그리고 아르센 벵거 감독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MLS가 쉬는 겨울마다 아스날에 합류해 훈련을 해왔지만, 맨유의 서포터이자 레전드로서 맨유의 라이벌인 아스날의 유니폼을 입을 수는 없기에 아스날 입단설을 일축했다. 아르센 벵거 감독 역시 베컴은 아스날에 몸을 만드는 중이며, 아스날은 베컴에게 이러한 편의를 제공할 뿐이라고 입단설을 부인했다. 그리고 베컴은 자신 대신 아들인 로미오를 아스날의 유스팀에 입단 시키는 것으로 대신했다(...).[21] 그리고 신흥 강호로 떠오르는 파리 생제르맹 FC 입단한다는 기사가 떴다. 빅토리아 베컴의 명품수집을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있더라

PSG는 1일(이하 한국시각)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베컴과 올해 6월 30일까지 계약을 했다"고 공식발표했다. 연봉 등 구체적인 계약 조건은 밝히지 않았으나, 주급은 15만 파운드(약 2억5000만원) 수준이며 5개월 이후 1년 계약 연장을 하는 조건이 첨부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젠 파리에서 택배크로스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베컴의 연봉 실수령액은 0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베컴은 PSG 입단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5개월치 주급 전부를 어린이를 위한 자선사업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베컴의 계약 조건은 일단 6월 30일까지 5개월 계약한 뒤 이후 1년 계약 연장 여부를 논의하는 방식이다. 베컴은 첫 5개월의 급여를 모두 기부하겠다는 뜻이다. 박찬호가 국내 프로야구에서 뛰었던 2012 시즌 연봉을 모두 기부한 것과 닮았다. 베컴의 5개월치 급여는 50억원이 넘을 전망이다.

2013년 2월 24일, 베컴은 마르세유와의 리그 1 홈 경기에서 76분에 교체로 들어가 파리 생제르맹 데뷔전을 치렀다. 그에 따라, 베컴은 psg의 400번째 출전 선수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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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5월 12일, 베컴은 파리 생제르맹이 리옹을 상대로 1-0 으로 이기면서 리그 1 우승을 확정지었으며 4개국 1부 리그 우승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5월 16일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은퇴 발표 후 이틀 뒤인 5월 18일, 베컴은 브레스투아와의 리그 최종전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를 뛰었다. 이 경기에서, 베컴은 마튀이디의 골을 코너킥으로 어시스트하였으며, 80분 동안 경기장을 누비다가 교체되었다. 교체되면서 동료 선수들과 감독과 포옹했고, 서포터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한편, 파리 생제르맹은 이 경기에서 3-1로 이겼다.

2.5. 은퇴

BBC기사

BBC, AP통신 등을 통해 2012-13 시즌을 끝으로 현역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다고 밝혔다. 베컴도 2000년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별들과 함께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은퇴 이후에는 FA의 홍보대사를 하고싶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기사도 돌고 있다. 2013년 5월 16일부로 은퇴.

2007년 LA갤럭시로 이적할 당시, 데이비드 베컴은 MLS의 프랜차이즈를 인수할 권리를 부여받았았는데 2014년 2월, 권리를 실현하여 미국 메이저 리그 사커 마이애미(가칭)의 구단주 취임이 확정되었다. 2016년 또는 2017년에 본격적으로 리그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구장 문제 등이 금방 해결되지 않아 리그 참여가 더 늦어질 뻔 했지만 2015년 7월 경기장 문제가 해결이 되었고 이후 2~3년안에 MLS에 진입할 예정이다.

참고로 인터뷰에서 은퇴를 결심한 순간을 ' 리오넬 메시에게 제쳐졌을 때'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인터뷰어가 게리 네빌이었기에 농담조이긴 했지만. 다큐멘터리에서 좀 더 진지하게 얘기했을때는 PSG에서 뛸 당시 몸이 예전만하지 않다는 게 너무 잘 느껴졌다고 한다. 경기를 뛰고나면 다음날 온몸이 피로에 젖어있어서 정말 힘들었다고.

3. 국가대표 경력

2000년대 잉글랜드 황금세대 안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존재였다.[22] 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상당수의 국대 주요 선수들은 클럽팀 축구를 우선으로 생각하여 국가대표 차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클럽팀에서의 라이벌리 감정을 국대 소집 기간 도중에도 떨쳐내지 못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은 구성원 각각의 훌륭한 면면과는 달리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는데, 베컴만큼은 그야말로 애국자의 전형을 보여주며 국가대표 차출을 늘 커리어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고, 그 영광에 보답하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베컴의 초정밀 킥과 크로스는 잉글랜드의 상징인 킥 앤 러쉬 스타일에 반드시 필요한 옵션으로, 브리키커와 대형 스트라이커가 없는 잉글랜드 대표팀의 강력한 공격 수단 중 하나였다.

베컴처럼 정밀한 크로스를 올릴 윙어와 이를 높은 확률로 득점으로 연결해줄 타겟 스트라이커 조합이 갖춰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공격 옵션이 된다. 때문에 대형 스트라이커 부재에 시달리는 잉글랜드 대표팀으로선[23] 베컴의 프리킥과 더불어 크로스는 세계 무대에서 통할 몇 안되는 유효한 공격 수단이었다. 하지만 모든 잉글랜드의 공격 패턴이 베컴의 킥에서부터 시작되는 부작용 또한 컸기 때문에,[24] 베컴의 크로스를 두고 지금 당장 잉글랜드에 가장 필요하지만 장기적으로 잉글랜드의 경기력 개선을 위해선 점차 사라져야 하는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몇 년째 잉글랜드에서 그보다 확실한 플레이를 하는 선수는 없다. 말썽 많았던 폴 개스코인이라는 잉글랜드 역사에 남을 테크니션이 아웃되고나서 잉글랜드 공격진, 혹은 전방 중원 미들진은 창조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조 콜 폴 개스코인의 뒤를 이을 천재라고 평가 받았지만 잦은 부상으로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고, 중원에 스티븐 제라드 프랭크 램파드가 창조성이 있긴 있지만 서로 겹치는 스타일과 동선 때문에 활약이 미미했다. 폴 스콜스도 일찌감치 대표팀 조기 은퇴.

그런 상황에서 베컴만큼은 순간의 시간만 있으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크로스 혹은 땅볼 패스 혹은 중거리를 때려 버린다. 흔히 베컴이 크로스만 날린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땅볼 패스 역시 명품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크로스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을 뿐. 이런 베컴의 발끝은 1998년부터 10여년간 잉글랜드의 가장 확실하게 보장된, 유일한 창조적인 공격 수단이었다.

1996년 9월 1일, 몰도바와의 프랑스 월드컵 유럽예선에서 글렌 호들 감독에 의해 잉글랜드 대표팀에 첫 선발되어 A매치에 데뷔했다. 이후 꾸준하게 대표팀에 선발되어 기회를 받은 베컴은 잉글랜드 선수 중 유일하게 유럽 예선 전 경기에 출전하며 팀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들어가면서 생애 첫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되었다. 그런데 잉글랜드 감독 글렌 호들이 대회 시작 전 방송 인터뷰에서 베컴이 대회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대놓고 저격한 것을 시작으로 까판을 펼쳐주고 삐걱댔으며, 호들이 조별리그 1차전 튀니지전과 2차전 루마니아전에서 베컴을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시키는 만행까지 저지른다. 그러나 베컴은 루마니아전에서 골에 관여하는 등 실력으로 본인을 증명했고, 콜롬비아와의 조별리그 3차전에서는 선발로 출전해 환상적인 프리킥골을 기록하며 잉글랜드의 2-0 승리와 16강 진출을 이끌었다.

그러나...

16강 아르헨티나전에서 그는 디에고 시메오네의 계속된 거친 플레이와 도발에 넘어가 주심이 바로 보는 앞에서 시메오네의 다리를 걸고 퇴장을 당하는 대형 사고를 쳐버렸다. 결국 잉글랜드는 아르헨티나와 2대 2로 대등하게 맞섰음에도 불구하고 팀 사기 저하로 인해 승부차기에서 탈락했으며, 베컴의 실수가 없었으면 승부차기까지 갈 일 없이 연장전 안으로 경기를 마칠 수 있다는 여론이 드셌기에 모든 어그로가 베컴에게 쏠려버렸다. 얼마나 오죽했으면 그 당시 영국 신문 헤드라인이 10명의 용감한 사자와 한 명의 멍청이.

여기에 글렌 호들 감독이 결정적으로 아르헨티나전 패배 직후 인터뷰에서도 베컴의 퇴장이 큰 타격을 줬다는 말을 하여[25] 베컴은 이후 몇 년간 잉글랜드 국민들로부터 상상하기도 힘든 수위의 공격과 비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호들은 월드컵 마무리 기자회견에서 뒤늦게 베컴을 희생양으로 삼지 말아달라는 인터뷰를 했으나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해 본인의 커리어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를 맞게된 베컴은 곧 이에 자극을 받아 이를 악물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 대표팀 모두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잡기 위해 분투했다. 그 결과 이후 UEFA 유로 2000을 끝으로 주장인 앨런 시어러가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자 베컴이 차기 주장으로 선정되면서 잉글랜드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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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올드 트래포드에서 본인의 흑역사를 완전히 씻는데 성공한다. 당시 잉글랜드는 2002 한일 월드컵 유럽예선에서 독일을 원정에서 5대 1로 털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중간중간 흔들리는 모습을 많이 보였고, 심지어는 마지막 경기인 2001년 10월 그리스전마저 1대 2로 뒤지고 있었다. 만일 이대로 패배하면 독일에게 본선 직행권을 넘겨줄 위기였으나[26], 베컴이 경기 종료 직전 동점 프리킥골을 성공시키면서 순식간에 판세는 뒤바뀌었다. 이 극적인 골로 잉글랜드를 본선에 합류시키고[27] 본인은 두 팔을 들고 감격에 찬 세리머니를 보였다. 그야말로 잉글랜드를 넘어선 월드 스타로서의 명성을 얻어내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2002 한일 월드컵을 두 달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데포르티보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뛰다가 알도 두스체르의 태클로 중족골 골절이라는 큰 부상을 입어 정작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서 제외될 위기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절박했던 베컴은 산소 캡슐까지 동원하는 등 초인적인 노력 끝에 간신히 회복하여 본선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결국 본선 첫 경기 스웨덴전에서 코너킥으로 선제골을 어시스트했고,[28] 2번째 경기인 아르헨티나전에서는 명배우가 얻어낸 결승골이 되는 페널티 킥을 성공시키며 승리로 이끌어 4년 전의 아픔을 말끔히 씻어 냈다. 이 때 반칙을 범해 페널티킥을 허용한 아르헨티나 수비수가 과거 토트넘 홋스퍼 FC의 감독이었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29] 물론 잉글랜드는 지역예선에서 독일을 대파하던 포스는 어디로 가고 정작 본선에서는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줬다.

실제로도 조별리그에서 이긴 경기라고는 논란의 PK골로 아르헨티나를 겨우 이긴 것 하나에 불과했으며,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나이지리아와도 0대 0 무승부를 하며 나이지리아의 유일한 승점을 챙겨주는 등 체면을 구겼다. 조별리그에서 꼴랑 두 골만을 넣었기에 토너먼트에서 가망이 없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잉글랜드 팀은 16강 상대인 덴마크를 전반 초반부터 밀어붙인다. 그리고 베컴은 선제골의 빌미가 되는 골키퍼의 실책을 유도하는 등 활약했고 헤스키의 추가골까지 어시스트 하며 팀이 일찌감치 승기를 잡게 해준다. 결국 전반전에 터진 세 골을 잘 지켜내며 8강에 진출했고, 8강 상대는 브라질이었다. 역대급 빅매치에서, 잉글랜드는 오언의 선제골에도 불구하고 1대 2로 역전패했다. 그러나 베컴은 이 경기에서도 공격의 선봉에 서며 마지막까지 분투했다.

UEFA 유로 2004에서도 베컴은 팀의 구심점이었다. 그러나 디펜딩 챔피언인 프랑스와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는 프리킥 세트피스 찬스에서 프랭크 램파드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해 앞서가는 중에 페널티 킥을 얻어냈지만 실축했고, 추가 시간에 벌어진 지네딘 지단의 3분 매직으로 1대 2로 역전패했다. 첫 경기부터 지단과 비교당하는 등 다소 심적인 고생을 했지만, 다행스럽게 다음 경기에서 팀이 스위스를 3대 0으로, 크로아티아를 4대 2로 각각 크게 잡아낸 덕분에 조 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그리고 8강 포르투갈전에서는 역시나 연장 후반에 한 골을 주고받는 등 접전 끝에 2대 2를 만들고, 승부차기에 다다랐지만 첫번째 키커로 나선 베컴이 엉킨 스텝으로 똥볼을 차버리면서 승부차기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 페널티킥은 런던 대공황 슛이라고 불리며 간간히 조롱당했지만, 이미 이전부터 잉글랜드 팀에 공헌한 바가 커서 그런지 여론은 오히려 베컴에게 수고했다고 위로하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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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독일 월드컵에서도 여전히 주장으로 조별리그부터 전경기를 모두 선발 출장하며 팀을 8강으로 이끌었다. 특히 16강 에콰도르전에서는 심하게 무더운 날씨에 경기 중 구토까지 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프리킥을 결승골로 만들며 1대 0으로 승리, 주장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16강전에서 무리한 것이 빌미가 되어 8강 포르투갈전에서 결국 후반전에 교체되었고, 잉글랜드는 지난 유로 대회에 이어 다시 한 번 승부차기에서 패하는 바람에 승부차기 징크스도 극복도 못하고 2년 전의 설욕 또한 실패한다.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못 하고 늘 8강이 한계였던 잉글랜드라 2006년 이후부터 베컴을 중심으로 한 전술에 한계가 왔다는 의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따라서 독일 월드컵 종료 후 새 감독으로 취임한 스티브 맥클라렌은 대표팀의 체질 개선을 위해 베컴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정말로 베컴 없이 대표팀을 꾸렸다. 주장 완장도 존 테리에게 넘긴 것은 덤. 그러나 전혀 개선된 것은 없었고, UEFA 유로 2008 예선전에서 잉글랜드는 크로아티아에게 0대 2로 패배하는 등[30] 죽을 쑤기 시작했다. 결국 할 수 없이 2007년 여름부터 베컴을 대표팀에 복귀시켰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결국 거스 히딩크가 이끌던 러시아에 유로 본선 진출권을 내어주고 만다.[31] 정말로 베컴 중심의 전술이 한계가 왔는지 여부는 둘째치고, 확실한 대안도 없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베컴을 배제한 댓가치곤 참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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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간으로 2008년 3월 27일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벌어진 프랑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A매치 100경기 출전을 달성해 센츄리 클럽에 가입했다. 당시 잉글랜드의 주장인 존 테리가 이 경기만큼은 베컴에게 주장 완장을 양보하려 했으나, 자신에게만 관심이 쏠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 베컴이 거절했다고 한다.

국제대회 우승에 대한 갈망 때문인지 이제 나이가 제법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표팀 승선을 원하고 있다. 맥클라렌의 후임인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유럽 무대에서 검증된 선수만 대표팀에 발탁한다는 입장이었고, 베컴은 MLS 오프시즌마다 AC 밀란으로 단기 임대를 가면서까지 카펠로의 눈도장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비록 둘은 레알 마드리드 시절 한때 껄끄러운 관계였지만 이후 카펠로가 베컴에게 사과하고 후반기에 재중용하여 리그 역전 우승을 이루면서 화해한 사이였다. 베컴의 노력에 화답하듯 카펠로는 월드컵 최종예선 10경기 중 9경기에 베컴을 출전시키며 베컴을 중용했다. 하지만 밀란에서 경기를 뛰던 도중 키에보 베로나와의 경기에서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해서 아쉽게도 2010 남아공 월드컵 국가대표에는 뽑히지 못했다.[32] 부상당한 순간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 출전의 꿈이 날아가버렸다는 것을 안 베컴이 오열하는 장면은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하지만 카펠로 감독이 어떤 형태로든 베컴을 본선에 데려가고자 했고, 결국 선수가 아닌 코칭스태프 보좌역으로 대표팀에 승선해 잉글랜드 대표팀의 경기를 벤치에서 지켜보았다. 이때 골키퍼 로버트 그린의 실책을 지켜보다 급정색하는 표정이 중계 카메라에 잡혀 화제가 되었다. 골키퍼 저걸 그냥 확! 그리고 현피 직전까지 갔던 스티븐 제라드 존 테리를 잘 다독여서 화해시키는 등 알게 모르게 많은 역할을 했다.

남아공 월드컵 이후 카펠로가 UEFA 유로 2012 플랜으로 새로운 대표팀 구성을 위해 더 이상 베컴을 발탁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대신 2010년 11월 프랑스와의 친선 경기 때 베컴의 대표팀 은퇴 경기를 열어주겠다고 제의했지만, 베컴은 대표팀에서 은퇴할 의사가 없으며 10경기가 되든 1경기가 되든 반드시 대표팀에 필요한 선수로 돌아가고 싶다며 카펠로의 제안을 거절했다.

2012 런던 올림픽의 영국 단일팀 출전을 열망했고, 와일드카드 최종 후보 명단에까지 올랐으나 끝내 최종 엔트리에는 발탁되지 못했다. 다시 한번 좌긱스 우베컴을 보고 싶어했던 전 세계의 축구팬들은 멘붕. 베컴 뛰었어도 우리나라가 영국 잡았으려나[33]

대표팀 감독이 로이 호지슨으로 교체되었고, 마침 베컴이 파리 생제르맹과 계약해 유럽 무대로 복귀하며 대표팀 복귀설이 나왔지만 호지슨 감독은 베컴을 뽑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이후 2013년 베컴이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역대 출전 3위 기록을 남겼다.


[1] 프리미어 리그 10주년 기념 베스트 골 10선에 포함되기도 한 환상적인 골. 여담으로 베컴은 이날 축구화를 급하게 다른 선수에게 빌린 것이라고 한다. [2] 당시 골 영상을 보면 골을 넣고 두 팔 벌려 세리머니하는 베컴을 볼 수 있는데 무슨 영화 배우 비주얼의 미소년을 볼 수 있다.. [3] 1998-99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만난 FC 바이에른 뮌헨과 맞대결에서 경기종료 직전 베컴에게 찾아온 2번의 코너킥은 정확히 테디 셰링엄 올레 군나르 솔샤르에게 연결되어 골로 연결되었고 맨유에게 챔스 우승을 안겨주었고 이는 캄 노우의 기적이라며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4] 뒤에 서술되는 2002년 중족골 부상 전까지는 정상급 윙어다운 다이나믹함을 보여 줬으나, 부상 이후 드리블 돌파 능력은 크게 떨어졌다. [5] 베컴에 부상을 입힌 피해자가 아르헨티나인 알도 두스체르였기에 나중에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가 그 해 FIFA 월드컵에서 맞대결을 펼칠 예정이기에 고의로 부상을 입혔다고 영국 언론으로부터 의혹이 제기되었다. [6] 챔피언스리그도 레버쿠젠과의 준결승전에서 원정 다득점으로 탈락했다. 해당 시즌 우승팀은 레알 마드리드 CF. 지단의 인생골이 나온 바로 그 시즌이다. [7] 다만 로이 킨은 이와는 상반되는 주장을 한다. 베컴이 아무리 일류 축구선수를 뛰어넘는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되었어도 축구에 대한 헌신은 여전했다고. 때문에 베컴이 축구 외적인 일을 하는 거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로이 킨은 선수들의 태도에 대해서 굉장히 깐깐한 인물인데 만약 베컴이 슈퍼스타가 되고 나서 축구를 약간이라도 등한시하였더라면 진작에 실컷 디스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8] 그도 그럴 것이, 베컴은 꾸준히 인터뷰를 통해 맨유가 아니면 다른 프리미어 리그 내의 팀으로는 갈 생각이 없다는 생각을 밝히며 맨유에 큰 애정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 바 있다. 이후 퍼거슨 감독과의 관계도 문제가 없었다. 퍼거슨을 직접 보기 위해 맨유 선수들과 런던으로 찾아갔던 것과, 이벤트 매치 때 맨유 선수로 참가하며 퍼거슨과 조우했던 것, 퍼거슨 감독 은퇴 당시에도 본인의 페이스북에 감사를 담은 장문의 글을 남긴 것이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퍼거슨 역시도 베컴이 은퇴하자 그에 대한 찬사를 보내며 화답했다. 이 둘의 깊은 관계 때문인지, 베컴의 은퇴에 퍼거슨의 은퇴가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 나오기도 했다. [9] 베컴은 뼛속까지 지단빠로 유명한데 그가 그렇게 좋아하는 선수가 원래 말수도 적고 영어를 잘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먼저 와서 유니폼 교환을 제안하며 자기랑 레알 마드리드에서 같이 뛰자고 하니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갔을 정도로 기뻤다고 한다. [10] 니키 버트, 게리 네빌, 그리고 폴 스콜스와 함께 [11] 긱스 왼쪽의 트로피를 들고 있는 사람이 이 선수들을 유스시절부터 키워낸 에릭 해리슨 코치다. 현지 시각으로 2019년 2월 13일, [12] 당시 유망주로 주목받았지만 약 4년간의 임대생활을 거쳐 결국 맨체스터 시티로, 거기서도 임대생활만 전전하다가 MLS 콜로라도 래피즈에서 겨우 정착해서 주전선수로 활약하고 2011년 은퇴했다. [13] 그 와중에 이 사진을 잘 보면 6명인데 실패한 유망주였던 쿠크는 빠졌다... [14] 여담으로 이 시즌 베컴 영입에 실패한 바르셀로나는 대신 호나우지뉴를 영입하였고 베컴의 원 소속팀이던 맨유가 지뉴를 대신해 영입한 선수는 다름 아닌 스포르팅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이다. [15] 이로 인해 바르셀로나 회장으로 새로 당선되었던, 베컴 영입을 선거의 주 공약으로 내놓은 주안 라포르타에게 씁쓸하게 큰 타격을 입혔다. [16] 7번을 달지 못하자 미국시장 공략을 염두에 두고 조던의 번호 23번을 고르라고 빅토리아가 조언했다고 한다. [17] 베컴은 미국에서의 축구 인기를 높이기 위해 LA 갤럭시에 갔다고 밝혔으며, 실제로 LA 갤럭시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관중이 상당한 수 늘어나는 등 미국 축구 리그 MLS를 어느 정도 부흥시키는데에 기여했다. 또한 유니폼 팔이도 평균의 3배 이상으로 다른 선수들과 비교를 불가하며, 아디다스의 인터뷰에 의하면 미국 최고의 농구선수인 르브론 제임스 등보다도 판매율이 높다고 한다. [18] 당시 LA 갤럭시 선수들은 베컴이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는 시간을 재봤는데 베컴이 그 시간동안 버는 돈이 팀의 다른 선수들이 1년동안 받는 돈의 몇 배가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19] 당시 맨유의 선발 스쿼드 명단에는 함께 한솥밥을 먹었던 사이나 다름없던 폴 스콜스 게리 네빌이 포함돼있었다. 여담으로 이 경기, 박지성 안드레아 피를로를 지워버린 그 명경기 맞다. [20] 전 레알 팀메이트인 라울 곤살레스가 캡틴이다. [21] 로미오는 열렬한 아스날의 서포터로서 맨유가 아닌 아스날의 유스팀에 입단했다. [22] 엄밀히 얘기하자면 잉글랜드의 황금세대는 80년 전후로 태어난 선수들(프랭크 램파드-78년생, 스티븐 제라드-80년생)이기 때문에 75년생인 베컴은 그들보다 반세대 정도 앞이다. [23] 웨인 루니가 있긴 하지만, 전형적인 타겟형 공격수 스타일은 아니였기에 베컴과 조합이 잘 맞지 많는다. 명실상부 월드 클래스 공격수인 해리 케인이라도 있었다면 잉글랜드의 메이저 대회 부진은 달라졌을지도... [24]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같은 대인 마크가 뛰어나고 활동량이 많은 선수에게는 지워지는 경기가 몇 번 있었다. 실제로도 베컴을 막는 전술 중에 하나이다. [25] 물론 베컴의 퇴장이 예상치 못한 엄청난 변수였던 것은 맞고 베컴 본인도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였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해당 발언 자체가 아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당시 불과 23살에 불과했던 어린 선수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지도 못할 망정 어떠한 필터링도 없이 책임을 돌리는 듯한 발언은 한 팀의 수장으로서 좋지 않은 행동이다. 또 베컴의 행동이 멍청했던 것과는 별개로 그의 퇴장을 유도해냈던 디에고 시메오네가 직접 인정했듯이 그것은 절대 퇴장감이 아니었으며 잉글랜드는 베컴 없이도 승부차기까지 끌고갔기 때문에 상황을 만회할수도 있었다. [26] 마지막 경기 전 잉글랜드와 독일은 똑같이 5승 1무 1패를 거둬 승점에서 동률이었고, 잉글랜드가 독일과의 상대전적에서 1승 1패 5득점 2실점으로 앞서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상대인 그리스를 상대로 잉글랜드는 실점을 한 반면, 독일은 핀란드를 상대로 0대 0으로 비기고 있었던 터라 언제 결승골이 터져서 순위가 뒤바뀔지 모르는 일이었다. [27] 독일은 핀란드를 상대로 0대 0으로 묶이며 주저앉았고, 우크라이나와의 플레이오프를 준비해야 했다. [28] 이 때 헤더로 선제골을 얻은 선수가 솔 캠벨이었다. 단, 후반전에 스웨덴이 알렉산드르손의 중거리 슛으로 동점을 만들며 결과는 1대 1 무승부가 되었다. [29] 잉글랜드전의 패전으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동점골을 넣은 에르난 크레스포눈물겨웠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투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과 비겨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굴욕을 겪었다. 이후 포체티노는 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그래서 아르헨티나 출신이 영국에서 지도자를 하고 있는 건가? [30] 이 경기에서 백패스를 폴 로빈슨 골키퍼가 헛발질로 자책골로 만들어버리는 최악의 실책이 나왔다. [31] 2000년 이후의 메이저 대회 중 잉글랜드가 유일하게 예선에서 탈락한 기록이다. [32] 당시 베컴의 월드컵 대표팀 발탁 가능성은 반반이었지만, 카펠로는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베컴을 뽑는 쪽으로 거의 마음먹고 있었다고 한다. [33] 저땐 폼이 확 떨어진 상태여서 베컴의 출전은 상징성 그 이상말고는 냉정히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저 때 팀 자체가 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 빠진 반쪽 단일팀을 감수할 정도로 고국에서 열린 올림픽 메달을 따고 말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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