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凌煙閣勳臣당태종 이세민과 그를 도운 24명의 공신들의 초상화를 걸어두었던 누각을 말한다. 643년에 당태종의 명령으로 만들어졌고, 당태종은 자주 신하들과 능연각을 구경했다고 한다. 비슷하게 광무제의 운대 28장이 있지만, 능연각 24공신이 훨씬 유명한 편.
국내에서 일반적인 인지도야 모두 떨어지지만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고대무장으로 등장하기도 하고,[1] 고구려 정벌전에 참여한 인물들도 있어 나름 인지도가 있는 사람들도 있다.
당태종부터가 2대 군주이지만, 장기화될 수도 있었던 수말당초를 10년 내로 컷해버린 엄청난 군공이 있어 다른 왕조 같으면 창업군주의 역할도 같이 있기 때문에, 이 능연각 멤버 중에서는 진양 거병 - 통일전쟁 단계에서 역할을 했던 말 그대로 '개국'공신도 있는 반면, 현무문의 변 - 이후 내정 - 고구려 침공에서 주로 공을 세운, 공신은 맞지만 '개국'공신은 아닌 경우도 같이 섞여 있다는 특징이 있다.
수말당초를 헤쳐온 공신들인데다 시대 분위기가 武를 중시하던 시절이라, 이 멤버 대부분에게 무관/장군 경력이 포함되어 있고 순수 문관은[2] 위징, 두여회, 방현령, 우세남 정도이다.
'능연각'이라는 표현 자체가 이후 중국과 한국의 왕조에서 나라의 공신으로써 명예를 떨치게 되는 걸 비유하는 관용구로도 쓰이게 되었다. 일종의 ' 명예의 전당' 같은 개념으로 쓰인 셈인데, 어떤 사람을 찬양할 때 '능연각에 초상화가 걸리게 될 것'이라거나 '그 공은 능연각 훈신들에 뒤지지 않는다' 등의 싯구나 표현이 종종 보일 정도.
하지만 그 유명세에 걸맞지 않게 24인 중 의외로 말로가 좋은 인물이 드물고 처형당한 사람도 많다. 근데 또 그 원인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죽을 만 해서 죽었다.
2. 목록
능연각 24 공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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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공 장손무기 |
하간왕 이효공 |
내국공 두여회 |
정국공 위징 |
양국공 방현령 |
신국공 고사렴 |
악국공 울지경덕 |
위국공 이정 |
|
송국공 소우 |
포국공 단지현 |
기국공 유홍기 |
장국공 굴돌통 |
|
운국공 은개산 |
곽국공 시소 |
비국공 장손순덕 |
운국공 장량 |
|
진국공 후군집 |
담국공 장공근 |
노국공 정지절 |
영흥군공 우세남 |
|
유국공 유정회 |
거국공 당검 |
영국공 이적 |
호국공 진숙보 |
}}}}}}}}}}}}}}} |
사진은 후대의 것
화상 |
관직 작호 이름 |
개략 |
사도 (司徒) 조국공 (趙國公) 장손무기 (長孫無忌) |
능연각 공신 중 가장 첫 번째로 화상이 올려져 있었다. 태종의 오랜 친구이자 태종의 처남이다. 정관의 치에 많은 이바지를 하였으나 당고종 때에 측천무후가 권력을 잡은 후 사천으로 좌천되어 자살하였다. | |
사공 (司空) 하간왕 (河間王) 이효공 (李孝恭) |
이 중 유일하게 황족이고, 그런 이유로 나머지 멤버들의 타이틀은 공(公)인데 유일하게 왕이다.[3] 수나라 시대 대장군을 지낸 이안(李安)의 아들이자 당고조의 5촌조카로 자연스레 당태종과는 6촌이 된다. 이정과 함께 파촉 공략을 주도해서 소량을 자칭한 소선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보공우를 격파하는 등의 무공을 세웠다.[4] | |
사공 (司空) 내국공 (莱国公) 두여회 (杜如晦) |
명 정치가. 태종 때 벼슬 자리에 올라 여러 요직을 거쳤으며 방현령과 함께 정관의 치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 |
사공 태자태사 정국공 (鄭國公) 위징 (魏徵) |
당나라의 가장 유명한 정치가 중 한명. 수나라 말기 이밀에게 협력하다 당고조에게 귀순하여 태자 이건성의 측근이 되었다. 이후 이건성이 후계자 싸움에서 이세민에게 패한 후 위징의 인격에 끌린 태종에게 발탁되어 재상에까지 이르렀다. | |
사공 양국공 (梁国公) 방현령 (房玄齡) |
당나라가 일어나자 바로 이세민의 세력에 가담하여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두여회와 함께 공평하고 옳은 정치를 펴서 정관의 치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 |
사도 병주도독 (幷州都督) 신국공 (申國公) 고사렴 (高士廉) |
본명은 검. 젊었을 때 문사를 두루 섭렵했고, 민첩했으며 기억력이 좋았다. 정관의 치를 이끄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 |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 악국공 (鄂國公) 울지경덕 (尉迟敬德) |
당태종의 가장 뛰어난 용장. 당나라의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현무문의 정변 때도 참가하여 이세민이 권력을 잡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도가에서는 진경와 함께 잡귀를 쫓는 신으로 여겨진다. | |
특진 (特進)[5] 위국공 (衛國公) 이정 (李靖) |
당나라 초기의 가장 뛰어난 장군. 수많은 공을 세웠으며, 이위공문대를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위작 논란이 있다. | |
특진 송국공 (宋國公) 소우 (萧瑀) |
양나라 황제의 후손으로 태종대에 재상을 지냈다. | |
보국대장군 (輔國大將軍) 포국공 (褒國公) 단지현 (段志玄) |
뛰어난 장수로 당나라 건국에 많은 공을 세웠다. | |
보국대장군 기국공 (夔国公) 유홍기 (劉弘基) |
이세민의 휘하에서 활약한 장수로 많은 공을 세웠다. | |
상서좌복야 (尙書左僕射) 장국공 (蔣國公) 굴돌통 (屈突通) |
수나라의 장수였으나 당군에게 포로가 된 후 귀순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이 인물은 사실 550년대생으로, 당고조보다도 연배가 10년 가까이 앞선다. 수나라 시절에 지낼 만한 벼슬은 이미 다 지냈다. | |
섬동도행대 우복야 (陝東道行臺 右僕射) 운국공 (隕國公) 은개산 (殷開山) |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당나라 건국에 이바지했으나 622년 두건덕의 잔존 세력인 유흑달을 토벌하러 가던 중 병사했다. 서유기에서는 삼장법사의 외조부라는 설정이다. | |
형주도독 (荆州都督) 곽국공 (霍國公) 시소 (柴绍) |
당고조의 딸인 평양공주와 왕조 개창 전 수나리 시절에 결혼한, 당고조의 사위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마누라가 더 대단하다. | |
형주도독 (荊州都督) 비국공 (邳國公) 장손순덕 (長孫順德) |
이세민 밑에서 큰 공을 세운 유능한 장수이지만 탐욕스러웠다. 어느 날 장손순덕이 뇌물을 받았는데, 태종은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단을 내려 장손순덕을 부끄럽게 만들었다고 한다. | |
낙주도독 (洛州都督) 운국공 (鄖國公) 장량 (張亮) |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 때 수군을 지휘하였다. | |
이부상서 (吏部尙書) 진국공 (陣國公) 후군집 (侯君集) |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당 개국 후에는 서역 원정을 나가 상당수 지역을 평정하는 큰 공을 세워 재상직까지 오르나 태자교체와 관련되어 처형당했다.(자세한 사항은 당고종참조) 당 태종은 후군집의 처우를 결정할 때 능연각에 몇 번이나 가서 바라보면서 아쉬워했다고 한다. | |
좌효위대장군 (左驍衛大將軍) 담국공 (郯國公) 장공근 (張公謹) |
당태종의 신하. 정관 7년 양주 도독으로 있던 장공근이 죽자 태종은 친히 교외로 행차하여 장공근의 죽음을 슬퍼하며 곡을 하여 조상했다. | |
좌령군대장군 (左領軍大將軍) 노국공 (盧國公) 정지절 (程知節) |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서돌궐에서 내란이 발생하자 행군총관에 임명되어 공을 세웠다. 민간에서는 '정교금(程咬金)'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데, 정지절은 개명한 이름이다. 수말당초를 다룬 소설인 <수당연의>에서 도끼를 쓰는 맹장으로 그려져서 중국 드라마 등에서는 도끼를 쓰는 무장으로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삭(마상창)의 명수였다고 한다. | |
예부상서 (禮部尙書) 영흥군공 (永興郡公) 우세남 (虞世南) |
수나라의 양제를 받들었으나 그리 중용되지는 않았다. 태종에게 신임을 받아 은청광록대부에 이르렀으며 왕희지의 서법을 익혀 구양순, 저수량과 함께 당나라 초의 3대가로 일컬어진다. 특히 해서의 1인자로 알려져 있다. | |
호부상서 (戶部尙書) 유국공 (渝國公) 유정회 (劉政會) |
실력있는 정치가로 이세민에게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 |
호부상서 거국공 (莒國公) 당검 (唐儉) |
돌궐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고 역사서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 |
병부상서 (兵部尙書) 영국공 (英國公) 이적 (李勣) |
본래 이름은 서세적이지만, 이씨를 사성받아서 이세적이 되었고, 당태종 이세민의 이름을 피휘해서 이적이라고 기록되었다. 매우 유명한 장군이다. 돌궐을 격파하는 공을 세웠고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에도 종군했다. 고종 때의 고구려 원정에도 참가하여 평양을 함락시키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 |
좌무위대장군 (左武衛大將軍) 호국공 (胡國公) 진숙보 (秦叔寶) |
일반적으로 진경(秦瓊)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당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웠고 현무문의 정변 때도 참가하여 이세민이 권력을 잡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도가에서는 울지경덕과 함께 잡귀를 쫓는 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
[1]
그래봐야 겨우 울지경덕, 이적, 진경. 이마저도
삼국지 12에서 삭제.
[2]
물론 군무와 정말 하나도 상관 없는 순수 문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삼국지로 따지면
순욱이나
가후 같이 본인이 장수로서 갑주 입고 전선에 직접 나서지는 않고 거의 전적으로 모사,
참모로만 있던 포지션.
[3]
삽화에 성인 李가 온데간데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왕조 시대 동아시아에서
국성은 해당 왕조 한정으로 일종의
기본값의 역할을 하기 때문. 소위
동성제후니
이성왕이니 하는 것도 다 국성을 기준으로 같은지(동성), 다른지(이성) 하는 표현이다.
[4]
사실 이효공은 당대에 당태종을 능가하는 명성이 있었다. 이효공은
두복위,
보공석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으며 소선의 양나라 정권도 평정했다. 구당서 종실전에 따르면 이런 기록이 있다. “대업 말부터 군웅이 다투어 일어났으나 모두 태종이 평정했다. 모신과 맹장이 다 그의 지휘 아래에 있어 따로 공을 세운자가 드물었는데 오직 이효공만이 공을 세워 (당대에) 명성이 자자했다.” 그만큼 이효공이 얼마나 유능한 인물인지 알수있는 기록이다.
[5]
이것도 관직명이다. 삼공보다는 아래로, 수당대에는 명예직으로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