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04:56:58

노무라 슈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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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村秋介

1935년 2월 14일 - 1993년 10월 20일

1. 개요2. 일화3. 그 외

1. 개요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우익 민족주의 논객이자 활동가. 도쿄시에서 태어나 요코하마에서 자랐다. 젊은 시절, 폭력배로 생활하다 감옥에 수감. 미카미 다쿠(三上 卓)[1]의 문하생을 만난 것을 계기로 우익 운동의 길에 뛰어든다. 급진적인 우익 활동가로 고노 이치로 저택 방화사건, 경단련습격 사건등을 일으켰으며, 1986년에는 필리핀 민족 해방전선에 납치된 사진가 이시카와 나오키를 구출하는데 힘쓰기도 했다. 제1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도 비례대표로 출마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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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93년 10월 20일. 아사히 신문이 자신이 이끌던 우익단체 '바람의 모임'을 비난한 것에 대해 분노하여 아사히 신문 본사에 난입, 경영진의 사죄를 촉구하며 권총 자살했다. 그러나 하필 자살한 당일이 미치코 상황후의 59번째 생일날이라 뉴스가 죄다 그것에 묻혀버렸고, 할복에 가까운 자살이 딱히 사회적인 어떤 반향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2. 일화

  • 1963년 7월 15일, 자민당의 고노 이치로의 저택에 침입하여 가족과 고용인 등을 모두 밖으로 내보낸 후[2] 고노 저택에 불을 질렀다. 방화 동기는 고노 이치로의 파벌정치에 항의를 하는 뜻이었다고 하며 더불어 노무라는 고노가 나스의 황실별장 근처에 별장과 목장을 지으면서 수만평에 달하는 산림을 훼손한 것에 대해 매우 분노하였다고 한다. 노무라는 이 사건으로 징역 12년의 판결을 받았는데 가석방없이 형기를 다 채워야 했다.
  • 고노 이치로 저택 방화사건으로 감옥에 투옥되었을때, 같이 생활하던 좌익 재일 조선인이 성실한 근무 태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자 관리 부장에게 항의했다. 조선인은 1개월도 지나지 않아 가석방 되었다고 한다. 이에 감사를 표하는 조선인에게 노무라는 "나의 힘은 없다. 그대 자신의 삶의 방식 이랄까 자세가 나를 감동시키고 관리 부장도 감동시켰다" 라고 대답했다.
  • 일반적으로 일본 '신우익'으로 분류되는 인물이지만 본인은 이러한 평가에 반대했다. 스스로를 '신 낭만주의자'라고 칭했다.
  • 아사히 신문사에서 자결했을 때 동행 한 당시 18 세였던 아들에게 "지금까지는 엄마가 너를 지켰다. 이제 네가 엄마를 지켜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3. 그 외

일본의 명배우인 스가와라 분타와 말년까지 교류하고 있었음이 최근 밝혀졌다. 다만, 스가와라는 오히려 철저한 반우익 성향을 고수했던 만큼, 이는 단순히 사적인 친분에 불과했다고 여겨진다[3].

노무라가 이끌던 단체 '바람의 모임'의 직원 중에 훗날 말뚝테러 사건을 일으키는 스즈키 노부유키가 있었다.

미시마 유키오와 함께 현대 일본의 반미 우익에게 깊은 존경을 받는 인물로, 사후 일년 뒤인 1994년부터 매년 그를 기리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

NHK 극우 경영위원 하세가와 미치코 사이타마대 명예교수가 노무라 슈스케의 자살로 우리 천황폐하가 다시 살아있는 신이 됐다.는 망언을 해 물의를 일으켰다.


[1] 일본의 군인. 해군 중위로 5.15 사건, 삼무 사건에 가담했으며, '쇼와 유신의 노래( 청년일본의 노래)'의 작사. 작곡가이기도 하다. [2] 고노는 메이신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중이었다. [3] 이상할 건 없는 것이, 원래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끼리 친분을 맺는 일은 매우 흔하기 때문이다. 퇴임 후의 빌 클린턴이 역시 퇴임한 조지 워커 부시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나, 극우 성향인 윤서인 좌파 성향인 주호민과 친분이 있는 것, 그리고 진보 성향의 시사평론가인 김어준이 보수 정치인인 홍준표와 친분이 있는 것이 그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