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2:49:42

노량: 죽음의 바다/역사 재현성



개봉 전 정보 등장인물 줄거리 평가 흥행 역사 재현성

1. 개요2. 전투 이전
2.1. 고증2.2. 고증오류
3. 전투 전반
3.1. 고증3.2. 고증오류
4. 전투 후반
4.1. 고증4.2. 고증오류
5. 총평

1. 개요

영화 〈 노량: 죽음의 바다〉의 역사 재현성을 정리한 문서.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2. 전투 이전

2.1. 고증

  • 영화에서 진린이 이순신에게 아들 이면을 죽인 왜병들이라고 왜병들을 끌어내고 이순신이 꿈을 떠올리는 모습은, 어우야담에 실린 야사에서 이순신의 꿈에 이면이 나타나 나를 죽인 자들이 지금 아버지에게 잡혀있다고 호소하여 이순신이 전날 붙잡은 포로들을 심문하니 과연 이면을 죽인 자가 그 중 있어 이순신이 직접 참수했다는 야사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는 이순신은 이 자들이 아니라며 복수를 포기하고 참수는 대신 진린이 하는 것으로 나온다.
  • 진린 등 명나라 측 인물들의 대사가 현대 표준중국어[2]가 아닌 명나라 당시의 근세 중국어로 나온다. 기사[3] 예고편 공개 당시 중국인들이 못 알아듣는다며 외국어 연기가 어색하다는 지적이 나왔는데, 시대가 수백 년이나 다른 근세 시절 중국어라 그런 것이었다. 물론 이럴 거면 한국어도 후기 중세~근대 국어로 해야 했을 텐데 그런 건 또 아니어서 아무래도 고증에 헛심 쓴 듯하기도 하다. 배우들이 연기에는 전문가지만 옛 외국어에 능한 것은 또 아니어서 결과적으로 이래저래 어색해졌다.

2.2. 고증오류

  •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둥그런 모양의 장식 투구를 최광제 배우가 연기한 데라자와 히로타카가 쓰고 나오는 고증 오류가 있다. 구글에서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검색만 해봐도 그 특유의 투구가 나오는데, 고증에서 상당히 아쉬운 부분.
  • 고니시가 이순신을 반드시 죽이기 위해 시마즈와 협공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용맹하게 출정하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 고니시는 참전할 의지가 없이 지켜만 보다가 시마즈가 대패하는 것을 보고 부산으로 도망갔다.[4][5]
  • 모든 조선 수군 장수들이 똑같은 색의 갑옷을 입고 나오는데 당시는 직급이나 직종에 따라 다른 색으로 착용했다.[6] 또한 당시 조선 갑옷은 대부분 긴 가운처럼 생긴 포형 갑옷이고 상하의가 분리된 갑옷은 기병용으로 일부 사용되었는데 작중에서는 이순신을 비롯 대부분의 조선 수군 장수들이 상의는 흑철색 찰갑이나 두정갑, 하의는 붉은색 두정갑으로 상하의 분리 갑옷을 입고 나온다.
  •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인 소 요시토시도 순천에 고립된 고니시를 구원하기 위해 참전하였으나 영화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 영화에선 1597년 이순신 장군이 진린과 회의 도중에 막내 아들 이면의 사망 소식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진린과 대면하고 조명연합수군을 결성한 건 이듬해 1598년 7월 16일이다.[7]
  • 초반 선조와 윤두수가 독대하는 장면에서 윤두수의 사모뿔이 조선 초기의 가늘고 긴 사선 형태인데, 성종 때를 전후로 수평의 타원형 모양으로 바뀌었으므로 적절하지 않다.
  • 선조와 윤두수가 독대하는 장면에서 자막으로 선조의 휘를 "균(鈞)"으로 표기했다. 즉위 이전인 하성군 시절의 이름이므로 선조 개인의 이름은 맞으나, 엄밀하게는 임금으로 즉위한 이후의 휘인 "연(昖)"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 임금의 휘 자체를 함부로 말해서도 안되지만, 하성군 시절의 이름으로 부른다면 임금을 능멸한 죄로 참수를 당할 수도 있는 중대 범죄다.
  • 조선 수군이 쓰는 지도의 지명 표기가 한자와 한글로 병기되어 있는데, ㅅ계(치음) 뒤 y[ j ]계 이중 모음 표기를 살리는 듯 전반적으로 당시 표기를 살리려 한 듯하다. 그러나 '南海島'의 한글 표기가 '남해도'로 되어 있는데 당대 한자 표기에 따르면 'ㅐ'가 아니라 'ㆎ( 아래애)'를 쓴 '남ᄒᆡ도'가 옳다.

3. 전투 전반

3.1. 고증

3.2. 고증오류

  • 명량에서도 지적된 사항이지만 본 영화에서도 조총은 왜군만 사용하고 조선군, 명군은 사용하지 않는다. 실제 역사에서 조선은 임진왜란 개전 1년 만에 조총 복제에 성공했고 본 영화 시점의 전쟁 말기에는 전군에 보급되어 수군들도 상당수가 조총을 사용했다. 명군도 실제 역사에서는 조총을 다수 운용하였으나 영화에서는 삼안총통을 사용한다.
  • 시리즈 공통으로 지적된 사항으로, 조선군이 중~소형 총통류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여러 개인화기로 만들어진 여러 총통들이 있었지만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 판옥선 선수 함포 사격과 신기전 발사 장면[8]이 등장한다. 판옥선이 3줄로 서서 교대하며 싸우는 장면도 연출되었다. 다만 판옥선의 가장 큰 강점인 닻을 내리고 멈춰 서서 360도로 함포를 발사하는 장면은 전작들과 달리 본작에서는 빠졌으며, 함포들이 판옥선 좌우로 이동하며 발사하는 장면은 아쉬운 부분이다.[9]
  • 거북선 노량 해전 당시에는 운용되지 않았다. 거북선은 앞서 칠천량 해전에서 세 척 모두 격침되었고, 당장 제식 전투함인 판옥선 건조하기에도 바빠 거북선을 건조할 여력이 없어 이순신은 거북선을 재건조하지 않았다. 거북선을 건조했다거나 노량해전에 투입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10]
  • 영화에선 조선 수군이 거북선을 닥돌시켰다가 일본군의 집중포화에 침몰하는 장면까지 나오는데, 거북선 돌격장이 이미 왜군의 포격이 거북선에 집중되는 상황이라 복귀하기엔 늦었다고 판단하여 대장선을 잡기 위해 돌격하다 침몰한다. 그런데 진짜로 거북선을 침몰시켰다면 그 상징성 때문에라도 일본군 측에서 언급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또 당시 왜군이 해전에서는 화포를 그리 많이 운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라, 화포가 아니라면 왜군이 거북선을 침몰시킬 방법은 많지 않다.] 실제 역사와 비교한 설명 영상 개봉 이후 공개된 미공개 영상에서는 이운룡이 이순신에게 판옥전선을 뜯어다 급조해 만들었기에 이전의 구선보다 튼튼하지 못할 것라는 보고를 하는 부분과, 곧이어 또한 구선을 굳이 출전시켜야 하냐는 아들 이회의 질문에 이순신이 구선은 조선군에게 의지가 될 것이라는 대답을 하는 부분이 있었다. 감독이 거북선 출전을 위해 의도적으로 각색을 한 장면이다. 전작과는 달리 전투 초반 거북선들이 쉽게 침몰하는데 개연성을 부여하는 장면이었지만 영화 본편에서는 삭제되었다. 또 일본군이 노획한 조선군 화포로 거북선을 공격해 격침시키는데 그런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노량 해전에서 거북선이 출전했다는 기록도, 적의 화포에 침몰되었다는 기록도 없다. 게다가 노획한 조선군의 화포를 영화처럼 실전, 그것도 해전에서 바로 대량으로 사용하기에는 힘든 것이, 일단 일본군 함대는 세키부네가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안택선은 대장들의 기함으로 주로 사용되었으며, 안택선에 탑재된 화포는 유럽산 전장식 화포나 불랑기포 1~2문 정도로 조선의 총통류와는 위력과 사거리, 화약량 등이 상이하다. 게다가 일본군은 그때까지 화포를 운용한 경험이 많지 않았다. 석화시라는 화포가 1570년대 일본에 도입되어 실전에 투입되기도 했지만, 조선에 비해 화포기술이나 운용능력이 떨어져 잘 사용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일본의 화포 사용은 1614년~1615년 오사카 전투 당시 도쿠가와 막부가 네덜란드에서 화포를 사들여 전장에 동원한 것이다. 가뜩이나 흔들리는 배 위에서는 화포를 운용하기 쉽지 않고 명중률과 사거리가 격감하는데 제대로 운용해 본 적도 없는 노획한 조선의 화포를 대량으로 사용해 거북선을 격침한다? 상상하기 힘들다. 차라리 대조총을 여럿 사용해 내부 인원을 사살하는 전개면 모를까 노획한 조선군 포를 사용하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 전투 중반까지 등자룡을 제외한 나머지 명나라군은 미적거리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조선 복병 함대가 선제공격을 한 후 시마즈 함대가 돌진해올 때 곧바로 죽도 부근에 매복하고 있던 명군이 참전하였다. 명군이 분전하였고 전공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왜선에 비해 사선이나 호선이 전투력 면에서 우위에 있지 않기에 전투를 주도한 것은 분명 판옥선을 보유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지리에 익숙한 조선 수군이었을 것이다.[11] 그럼에도 영화에서는 명나라군이 지나치게 소극적인 모습으로 나온다. 또 이순신이 등자룡에게만 판옥선을 선물하는데 실제로는 진린에게도 판옥선을 줬으며 두 사람 모두 장군선으로 운용했다.
  • 영화에선 김성규가 연기한 항왜 준사가 백병전에서 생포 위기에 처한 진린을 구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실제로는 진린의 판옥선이 왜선들에 둘러싸이자 이순신 장군이 포격을 가해 왜선들을 격침시키고 구해냈다. 또 작중에서는 준사가 사망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난중일기에서 명량해전 당시 활약했다는 기록 한 줄이 끝이다.
  • 데라자와 마사시게가 불타는 배 구조물에 깔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도망쳐서 1633년까지 장수했다.
  • 영화에선 명나라 장군 진잠과 심리가 전투 중 전사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노량해전 이후 조선에 주둔하다가 명나라로 돌아갔다.
  • 포를 매달아 쏘는 것에 대해 명량 때 삭제영상부터 계속 논란이 있었다. 조선전역해전도라는 그림에 그 묘사가 나오는데 해당 그림은 고증 오류가 많아 학계에서는 취급하지 않는다.
  • 준사만 맹선이나 방패선 또는 협선으로 보이는 소형선을 타고 활약하는데 실제로는 판옥선 한 척마다 배정되어 하나의 조를 이루었다. 이 소형선들은 수색정찰, 전투에도 투입한 다용도 전선이었는데 한 척만 등장한 부분이 아쉽다. 그래도 이순신 장군의 승리에 큰 부분이었던 첩보전은 잘 묘사했다. 실제로 장군은 전쟁 기간 동안 해상 뿐만 아니라 육지에도 첩보원을 두었고 피난 온 백성들의 보고도 빠짐 없이 수집하고 교차 검증할 만큼 치밀하게 정보를 수집했다.
  • 진린이 초중반에 너무 소극적으로 관망만 하다가 한참 뒤늦게 나서는데다, 부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돌격하다가 시마즈에게 너무 손쉽게 제압되는데, 실제로는 명군은 이순신의 본대가 참전하기 전부터 초반 교전을 하고 있었다. 조선 복병 함대가 선제 사격을 퍼붓고, 왜군이 조선 선봉대의 수가 적음을 보고 돌격해갈 때, 이미 명군은 매복을 풀고 진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등자룡이 먼저 돌격해 들어간 점만이 실제 역사와 일치하나, 영화에서는 이 등자룡의 돌격 시점도 한참 뒤로 나온다. 그리고 진린이 시마즈의 총공세에 위기를 맞다가 이순신 함대에 구원받은 것이 역사적 사실이기는 하나, 영화에서는 너무나 무력하게 당한 감이 있다. 명나라 배들도 화포의 조준이 부정확하거나, 후퇴하다가 자기들끼리 부딪히는 등 훈련 수준이 높아보이지 않았다. 왜군이 비웃을 정도. 물론 고니시의 말만 믿지 않고 전황을 살펴보다 고니시의 말과 달리 양상이 너무 격렬하자, 적의 진의를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시끄럽게 진격하며 마냥 생각없이 속고 있기만 하지는 않는 면모와, 협공할 때 뒤로 물러나지 않고 이순신의 왜군 허리를 끊는 공격에 맞추어 같이 돌격하는 용맹성도 보여주기는 했다. 그런데 적당히 거리를 두며 싸우려 했던 기존 예정과 달리 적에게 돌격을 명했다면 그에 따른 방책도 있어야 했는데, 명군의 낮은 훈련 수준과 사선-호선의 열세, 왜군의 정교한 진법에 무대책으로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리며 빛이 바랬다. 진린이 왜교성 전투 때 죽을 뻔하다 이순신의 도움으로 살아난 이후 가급적 왜군과의 전면전을 피하려고 하고, 고니시에게 뇌물을 받거나 연락선을 보내주거나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진린의 망설이는 심정을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주려고 명군의 전투 참여 시점을 늦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연출 때문에 조선 복병 함대와 함께 불랑기포와 호준포를 쏘며 공격한 등자룡과 명군의 초반 활약이 상당 부분 삭제되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휘하 함대도 없이 등자룡의 판옥선만 단독으로 돌격해갈 리가 없다. 명색이 명군 부도독인데...
  • 본래 전투 양상은 조선 복병 함대가 선제포격을 하고 죽도 부근에서 매복하던 명군이 합류했으며, 이를 따돌리고 고니시에게 가려던 일본 함대의 허리를 관음포 쪽에서 매복하다가 옆에서 등장한 이순신의 본대가 끊어버려서 일본 함대에 대혼란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궁지에 몰린 일본 함대가 명군 쪽으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조선 수군의 구원으로 실패하고, 바뀐 물살을 이용해 도망가려다 관음포 만에 갇히고, 관음포 입구를 포위한 조명연합군과 탈출하려는 일본 함대의 처절한 결전이 벌어진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명군은 계속 방관만 하고, 조선 함대 단독으로 계속해서 포격전을 벌이다, 시마즈가 빈 바다 방향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빠져나가 이순신을 유인하자고 해서 나아가다, 관음포 만에 갇힌 뒤에서야 뒤늦게 명군이 이순신의 부탁으로 관음포 입구를 막고, 이를 뚫어내려는 일본 함대의 허리를 이순신이 끊어내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이후에도 명군은 계속 두들겨 맞는 모습만 나온다. 결과적으로 명군의 활약이 상당히 축소되었다.[12]
  •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반복된 오류인데 충청수사로 재직했던 권준은 노량해전에 참전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심지어 노량해전 직전 충청수사는 오응태였다.[13]
  • 조선군이 승자총통을 사용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명군이 사용하는 삼안총이 나온다. 그래도 총통이 나온 것 만으로도 의미 있는 부분이다.

4. 전투 후반

4.1. 고증

  • 이순신(과 이회)의 북소리가 끊이지 않자 시마즈 요시히로가 귀를 틀어막고 괴로워하는 모습은, 실제 역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말년에 치매에 걸려 제정신이 아닐 때에도 가신들이 북을 울리면 잠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일화를 반대로 뒤튼 것으로 보인다.

4.2. 고증오류

  • 이순신이 노량해전 중에만 두 차례나 총탄(작중 첫 번째는 북채에, 두 번째는 이순신 본인의 몸에 맞는걸로 묘사된다.)에 맞는 걸로 묘사했는데[14] 이충무공전서 조선왕조실록에는 해당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15] 이순신을 그린 다른 작품들[16]에서도 앞선 사천해전에서 한 발, 노량해전에서 한 발 맞은 것으로 묘사했다. 아마 이미 뻔히 알려진 이순신의 최후에 약간의 반전을 주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이순신이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다만 그게 어느 타이밍에 등장하냐는 것인데 일부러 페이크를 주어 관객의 안도를 이끌어낸 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총탄 소리가 들리며 그가 사망했음을 암시하는 장면은 공포영화의 점프스케어 기법과 비슷하다. 그 외 이순신의 최후에 대해서는 안방준의 '은봉전서'를 참고한 듯하다.
  • 이순신이 끝까지 싸워야 함을 강조하며, 일본을 가리켜 '열도'라고 언급하는 부분[17]도 사실상 오류라고 볼 수 있다. 당대 조선에서는 일본을 열도로 지칭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아도 열도(列島)라는 용어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세종실록과 광해군일기에 각각 1번씩 언급되고는 있는데, 세종실록에서는 학포열도를, 광해군 일기에서는 풍해도를 설명하며 언급된 말에 불과하다. 즉, 조선시대 내내 일본을 열도로 지칭한 1차 사료는 거의 없다.
  • 이순신의 전사 후 안보현이 연기한 첫째 아들 이회가 이어서 북을 치는데 실제로는 손문욱이 대신 북을 치며 장군선을 지휘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18]
  • 영화 엔딩부에 일본군이 2만 명의 전사자를 냈고 조명연합군도 많은 손실을 입었고 특히 명나라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는 것으로 묘사된다.[19] 이는 반만 맞는데 정확히는 이순신이 이끌었던 조선 수군이 참전했던 해전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며[20][21],
  • 이규형이 연기한 아리마 하루노부는 영화와 달리 임진왜란에서 죽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측에 가담하여 서군 측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를 공격한다. 또 영화에선 비참하게 죽은 아라마의 시체를 고니시가 애써 외면하면서 떠나지만 실제로는 1600년 11월 6일 세키가하라 전투 후 처형당한 고니시 유키나가보다 12년 뒤에 뇌물 사건으로 이에야스에게 처형당한다. 할복을 명받으나 기리시탄의 기록에는 거부하고 참수형을 받았다고도 한다.
  • 거북선이 접전을 벌이던 중 손쉽게 격침되는 등 명군이나 조선군의 피해가 다소 크게 묘사된 듯하다. 일본 측 기록을 따르더라도 명나라 배의 피해는 2척, 조선 수군의 피해는 4척인데 과장일 확률도 높으며 사실이라 하더라도 판옥선이 아닌 방패선이나 협선, 명나라 호선에서 발생한 피해였을 확률이 높다. 심지어 조선이나 명나라 측 기록에는 조선의 함선 손실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5. 총평

전체적인 고증 상태가 엉망이다. 전반적인 전투 전개, 전투 위치 고증은 실제 역사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거북선의 사용, 준사의 활약은 영화적 각색이라 하더라도 조선군 복장 고증과 화기류 고증은 전혀 안 되어 있다. 이순신 함대가 시마즈 함대의 옆을 치며 사용한 진법은 첨자찰진(삼각형의 돌격형)임에도 그저 늘어서서 돌격한다. 또한 조선군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명나라군이 지나치게 무능하게 묘사된다. 이 정도면 역사 영화가 아니라 판타지로 봐야 할 정도.
임용한 박사가 본 영화의 고증 감별을 하기도 하였다.


[1] 그 이전에는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노량해전 당시 일본군 최고 수장으로 묘사되거나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최고 수장으로 등장하는 등 지속적으로 고증 오류가 있었다. [2] 애초에 진린 광둥어를 쓰는 광둥성 출신이라 오늘날 베이징 기준의 표준중국어를 쓰는 걸로 나왔으면 고증 오류였다. [3] 기사에는 편의상 ‘ 고대 중국어’라고 서술됐지만 당연히 근세 중국어이다. [4] 영화에도 나오지만 싸울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이순신에 의해 고립당해 식량난에 처했고 장도 해전에선 무려 40여 척의 전선을 잃는다. [5] 여담이지만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선 고니시가 퇴각하다 길목마다 배치된 조선 수군에게 매복당하고 먼 발치에서 이순신에게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하는 걸로 나오는데 그 역시 사실이 아니다. [6] 보통 오방색을 기준으로 제작된다. [7] 이로부터 3일 후 절이도 해전이 있었다. [8] 소신기전 중신기전 발사 장면이 한 차례씩 등장한다. [9] 당시 판옥선에는 전후좌우 모두 포를 설치해 운용했다. 포에 바퀴가 달린 것도 포 자체의 위치를 바꾸기 위해서라기 보다 조선 수군이 다양한 포를 운용했기 때문에 포의 종류를 바꾸기 위한 용도로 보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10] 조선 측 기록으로는 침몰된 조선 함선에 대한 언급이 없고, 시마즈 측에서 4척을 침몰시켰다고 하지만 거북선이란 언급은 없다. [11] 등자룡은 실제로 노량 해전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용맹히 싸웠다. 참고로 영화에서는 시마즈 대장선에 월선하여 월도를 휘두르다 전사하지만, 실제론 자신이 타고 있던 판옥선에서 월선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명 수군이 함포 조준을 실수해 등자룡의 판옥선에 불을 냈는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시마즈군이 집중 공격을 퍼부어 결국 침몰하게 되었다. [12] 전투의 격렬함이나, 어떻게든 탈출하려는 일본 함대와 어떻게든 1명이라도 더 붙잡아 죽이려는 조명연합군의 모습에서 영화보다 실화가 더 치열하다. [13] 오응태도 참전하지 않았는데 충청수사가 굳이 참전했다는 묘사보다는 차라리 이순신이 충청수사로 하여금 고니시를 견제해서 고니시가 협공을 시도 못 한 것처럼 각색하는 편이 더 나을 뻔 했다. [14] 첫 번째 총탄 공격 직후 망가진 북채가 나오는 장면과 주위의 송희립 등 다른 휘하 장병들이 이순신의 몸을 치료하거나 지혈하는 장면이 없기 때문에 첫 번째 총탄이 북채에 맞은 것임을 알 수 있다. [15] 다만 노량해전에서 총탄을 맞고도 생존한 다른 장수는 여럿 있다. [16] 대표적으로 불멸의 이순신, 징비록(드라마) [17] 이렇게 적들을 살려보내서는 올바로 이 전쟁을 끝낼 수 없다. 반드시 열도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기어이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어야 한다 [18] 선조실록에 이덕형 권율이 교차로 보고했고, 군공청(전쟁의 무공을 조사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조직)도 이처럼 기록했다. 그런데 인조가 반정으로 집권한 후 선조수정실록을 작성하며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 지휘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완이 북을 쳤다는 기록은 전쟁 당시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손문욱이 광해군파였기 때문에 인조반정 후 그의 군공을 줄이려 한 것으로 해석된다. [19] 과장이 있지만 진린은 거의 생포될 뻔한 상황을 겪는다. [20] 조명연합수군의 피해는 500~800명 가량이었던 반면 일본군은 최소 1만명을 크게 상회하는 피해(기록마다 다르지만 전력의 2/3 이상을 잃은 것이 교차검증된다.)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21] 이순신은 철저한 준비와 전략을 통해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사상자 수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적었다. 거의 궤멸 직전까지 갔던 조선 수군을 겨우 수습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치른 명량해전의 전사자는 10명이며, 한산도 대첩의 전사자는 2명에 그쳤다. 조선 수군 사상 최대 피해를 입은 건 바로 원균이 지휘한 칠천량 해전으로, 이쪽은 전사자가 7~8000명대로 추정되며 수많은 함선을 잃으면서 명량해전 전까지 조선 측이 남해안의 재해권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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