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3:25

김춘추(대왕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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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작중 행적
2.1. 프롤로그2.2. 어린 시절2.3. 성년

1. 개요

파일:external/pds23.egloos.com/e0017672_50597a22af6ae.jpg

2012년 KBS 드라마 < 대왕의 꿈>의 주인공으로, 배우 최수종(아역: 채상우[1])이 연기했다. 최수종의 KBS 대하드라마 세 번째 주역이며 2023~2024년에 방영된 고려 거란 전쟁 강감찬 이전까지 그의 마지막 KBS 대하드라마 출연 캐릭터다.

이 드라마에서 김유신과 함께 양대 주인공이며 어린 시절 만난 김유신을 형처럼 따른다.

보라궁주라는 부인(추소영 분)이 있는데, 대야성에서 죽는 딸 고타소가 이 부인의 소생으로 설정한 듯하다. 그러나 이는 《 화랑세기》의 기록이고, 《 삼국사기》에서 고타소는 분명히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의 소생이다.

여담으로 그동안 최수종이 연기 했던 군주 캐릭터들은 모두 인간흉기급 무예실력을 지녔었는데[2] 여기선 같은 주인공이 김유신이라 무예실력이 그렇게 특출나 보이진 않는데 여기서 괴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꽤 있는 모양이다. 딱 풍월주가 될 수 있는 수준 정도.

하나 또 재미있는 사실은 최수종이 연기한 왕건은 경순왕 항복 후 그를 고려 왕실에 받아들였는데 경순왕은 태종 무열왕의 딸의 후손이기도 하다.

2. 작중 행적

2.1. 프롤로그

김유신이 백제 멸망 후 나당 동맹을 파기할 것을 요구하며 군사를 몰고 왕궁 앞으로 쳐들어오자, 그와 대치하면서 칼부림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2.2. 어린 시절

파일:external/pds23.egloos.com/e0017672_50597a24d7626.jpg
극중에서 총명한 것으로 묘사하며 알천 등 개혁파 신료들에게, 왕자가 없는 진평왕의 후계자로 지지받는다. 그러나 폐왕(진지왕)의 손자로서 진골 신분이라는 약점이 있다. 또한 총명한 것을 넘어 이상주의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사도태후 앞에서 진지왕의 폐위는 옳지 못하다고 말하는 등 목숨이 위태로운 발언을 서슴치 않아 후덜덜하다. 이 때문에 사도태후나 국반 갈문왕, 상대등 숙흘종 등 기득권 세력들은 폐왕의 손자이자 진골인 김춘추를 큰 위협이라 생각하여 종종 목숨을 노린다.

덕만과 국반 갈문왕의 국혼 문제를 두고 반발하여 화랑들을 모아 반대 시위를 벌이는데, 이에 동참해줄 것이라 믿었던 김유신이 자신을 배신하고 시위를 진압해버리자, 김유신에게 크게 실망을 하게 된다. 아버지인 용춘으로부터 김유신이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신의를 저버렸다는 것을 알고 이해는 하지만, 삼한일통의 맹세를 한 석물을 깨버리면서 김유신과 삼한일통의 대의를 함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서라벌을 떠난다.

2.3. 성년

파일:대왕의 꿈 김춘추 첫 등장.jpg
파일:대왕의 꿈 김춘추.jpg
10년 후, 다시 돌아와서, 김유신과 헤어졌던 그 자리에서 다시 그와 재회한다. 이전의 앙금은 씻었는지 다시 삼한일통의 대의를 이루자며 의기투합한 뒤 서라벌로 돌아왔고, 진평왕이 그를 사정부의 관리로 임명했다. 이 때도 돌직구 성정은 여전해서, 소금 밀매로 이익을 챙기는 집단을 적발해 내고 위기를 맞지만 김유신과 귀문의 도움으로 무사히 구출. 그러나 승만왕후가 손을 써 집에 화재가 발생하여 임신한 보라궁주가 죽을 뻔하고, 염전 비리에 상대등 숙흘종이 연루된 증좌를 도난당한다.

문명왕후와의 만남은 김춘추의 사정부와 김유신의 화랑도가 서로 축국을 한 뒤 신나게 술을 마시고 김유신이 춘추를 자신의 집에 데려갔다가 그 자리를 문희가 들어와 사고를 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문희가 임신을 했음이 밝혀지고, 그 와중에 왕후로 간택되다가 회임을 밝히고, 김유신이 문희를 화형시키려고 하는 찰나에 김춘추가 나타나 자신이 정인임을 밝혀 살려내는 것으로 이뤄진다. 이후 극중 고타소의 생모인 보라궁주가 산고로 죽고, 문희가 김춘추의 정실이 된다.

이후로 덕만공주와 함께 백제와의 화친을 추진하여 삼한의 화평을 도모하려하지만 승만왕후 및 귀족 세력의 반대 공작으로 실패하고, 승만의 섭정 즉위를 반대하다 처형 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와병을 위장했던 진평왕 덕분에 살아남고, 이어 승만이 백제와 뒷거래를 했다는 증좌를 찾아내어 폐후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연이어 승만의 난, 이를 진압하고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한 비담의 전횡[3] 때문에 집에서 아이들에게 세속오계를 가르치는 서생 역할에, 왜국으로 쫓기고 정변에 휘말리는 등 고생이 끝나지 않는다.

비담의 난을 진압한 후 드디어 이찬에 오르며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서고, 이 때 당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부터 적극적인 친당 정책을 천명하며 친우 김유신을 비롯한 많은 이들로부터 신망을 잃게 된다. 더 나아가 국왕 즉위 이후로는 굉장히 성질을 많이 낸다. 아무래도 진평왕 때부터 거문대족들이 왕권을 흔들어대는 것을 신물나게 겪어온지라 왕명에 반하는 것에 노이로제라도 걸린 같은 반응이다.

'삼한일통의 대의'를 이루기 위해 당나라의 힘을 빌린다는 방향을 두고 김유신을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 대부분과 대립한다. 기본적으로는 친당 스탠스이긴 하되, 조정이 친당과 반당으로 갈려 반목하는 것을 경계하며, 반당파인 금강을 상대등으로 등용하는 등의 내정을 챙긴다. 그리고 당나라가 신라까지 노릴 시 당과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김유신에게 피력하고 나서는 김유신의 협조를 얻어 백제 정벌에 나서고, 끝내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 백제를 멸망시킨다. 이후로는 당군의 행패에도 사사건건 친당파와 당나라를 옹호하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던 눈만 굴릴 뿐 전혀 굽힐 줄 모르며, 기어이 당군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백성들의 떼죽음까지 외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4] 결국 김유신과 태자 법민이 반란을 일으키는 지경까지 가서야 김유신과 화해한 후, 태자를 섭정으로 임명하여 친당파와 반당파의 화합을 도모한다.

마지막 등장인 67화에서 과거의 자신과 만나는데, 여기서도 "당신은 옛날의 대의를 잊고 삼한 땅을 당나라에게 팔아넘기고 있다"라 극딜을 겪는다. 그래도 굽히지 않자 태종 무열왕을 눈물 서린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대왕의 높은 대의가 백성들을 구제할 것입니다"라 하고 사라지는데, 이후 한반도 위가 당나라의 영토로 편입된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봐도 비꼬기다.(...)
젊은 김춘추(이하 김춘추): 대왕께서 젊은 시절 꿈꿨던 삼한일통의 꿈이 고작 당 황제의 군사들을 끌어들여 삼한을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는 것이었소이까?
태종 무열왕(이하 무열왕): 수백 년 동안 전란의 고통 속에서 살아온 삼한 백성들을 구제하려는 내 뜻을 어찌 곡해하는 것인가? 당 황제가 중원을 일통하고 삼한을 호시탐탐 노리는 상황에서 삼한을 일통하고 당의 기미주가 되는 것을 막을 방도는 당 태종과 나당 동맹을 맺는 것이 최선책이었음을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김춘추: (고개를 저으며) 허나 대왕께서는 삼한일통을 이루겠다는 야심으로 당 황제의 군사들을 끌어들여 삼한을 당 황제에게 바치려했다는 오명을 씻지는 못할 것이오.
무열왕: 나는 고통받는 삼한 백성들을 피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면 그 어떤 치욕도 감수할 것이네. 신라와 고구려, 백제로 갈라져 살던 백성들이 삼한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내 결단을 후회하지 않네.
김춘추: 대왕께서는 정녕 그런 세상이 올 것이라 믿소?
무열왕: 내 생애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내 아들이, 또 내 손자가 내 뜻을 받들어 삼한일통의 위업을 이루실 것이라고 믿네.
김춘추: (탄복하며 고개를 숙인 뒤) 대왕의 그 높은 대의와 빛나는 결단이 삼한의 화평을 이루고 삼한 백성들을 하나로 묶는 초석이 될 것이오. 대왕께서는 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군주로 기록되고 추앙받을 것이오.

자신의 젊은 시절 환영이 사라진 뒤, 지병으로 쓰러져 눕고, 곧 김유신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서거한다.
서기 661년 음력 6월, 신라의 29대 국왕 김춘추가 향년 59세로 눈을 감았다.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삼한을 아우를 성군의 자질을 보였다고 전해지는 김춘추는 평생의 동지이자 충성스런 신하였던 김유신과 손을 잡고 신라 최초로 진골 출신으로 국왕에 올랐다. 제국이 중원을 통일한 세계사적 격동기에 삼한일통의 포부를 품고 타고난 외교술로 당 태종과 나당 동맹을 맺고 백제를 정벌하여 삼한일통의 초석을 놓았다. 김춘추는 우리 역사 상 최초로 삼국으로 분열된 삼한의 통일된 왕조를 세우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군주이자 우리 민족을 하나의 동질성으로 묶어 세운 위대한 정치 지도자였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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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1년 SBS 드라마 <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강채윤 아역, 2011년 JTBC 드라마 < 인수대비>에서는 단종 역, 2013년 개봉한 영화 < 관상>에서도 단종 역. [2] 태조 왕건의 왕건은 수달을 가볍게 제압하였고 대조영은 말할 것도 없다. [3] 의자왕이 신라와의 화친을 포기함으로써 백제와의 화평을 관짝으로 집어넣은 결정적인 원인이 비담의 공작 때문이었다. [4] 다만 김춘추 역시 삼한을 집어삼키려는 당의 야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고구려가 무너지고 당이 삼한을 집어삼키려 하면 당과 일전을 겨룰 것이라고 김유신을 비롯한 반당파에 여러 차례 공언했다. 사실 이건 반당파, 특히 그들의 수장 김유신이 백제 반군이 일어난 상황데다가 고구려 멸망도 이륙하기 전에 당과 일전을 치뤄야 한다며 고집을 부린 탓도 있다. 김유신과 김법민을 위시한 반당파는 아무리 당나라가 야욕을 드러낸다지만, 백제 반군이 일어나고 고구려 정복도 아직 못 이룬 상황에서 새로 부임한 웅진도독부 도독을 쏘아 죽인다던가, 당군에 시비를 건 병사들을 방치하거나, 백제 반군과 내통하는 등 나당동맹에 금이 갈 행동들을 골라 한 바람에 나당동맹에 큰 위협이 된 것. 김춘추가 반당파가 벌여온 이 행동들을 수습하려다 보니 자연스레 친당파의 손을 들어주고, 끝내 신라 백성을 외면하고 당군을 구원하는 지경에 간 것이다. 거기다 본인이 병으로 인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자 자신이 살아있을 때 삼한일통을 완수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면서 독선적이 된 것 또한 친당 대 반당 갈등이 반란까지 가는 데 한 몫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