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3:02

김인(바둑)

<colbgcolor=#000><colcolor=#fff> 김인
金寅 / Kim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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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바둑기사
소속 한국기원
출생 1943년 11월 23일
전라남도 강진군
사망 2021년 4월 4일 (향년 77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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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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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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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입단 1958년
마지막 대국 2014년
단급 九단

1. 개요2. 생애3. 여담4.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5. 주요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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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바둑 기사이다.

2. 생애

1943년 전라남도 강진군 출생으로, 1958년 프로에 입단했고, 이후 1962~63년 일본으로 유학 가서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도장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 국수전 6 연패, 패왕전 7연패, 왕위전 7연패 포함 8회 우승을 달성하는 등 조남철 이후 한국 바둑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일본 바둑과 두 점 이상 차이가 났던 당시 한국 바둑계에서 그나마 조남철과 함께 정선 정도의 치수로 버틸 수 있는 기량을 보유한 프로 기사였다.[1] 1970년대 중반 이후로는 조훈현 서봉수에 밀려 점차 하락세를 보였다. 1983년 승단대회를 통해 九단으로 승단함으로써 한국 바둑 사상 두 번째 九단이 되었다.[2][3]

세계사이버기원 이사로 재직했으며, 그의 고향인 강진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국제" 아마추어 바둑대회인 '김인국수배 국제시니어바둑대회'가 매년 열리고 있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 여파로 다음 해로 연기되었을 때, 아래 서술하는 타계 소식으로 인해 2021년 말에 재개된 대회는 "국내" 아마추어 바둑대회로 형태가 바뀜과 동시에 추모대회로 진행됐다.

2021년 4월 4일 지병인 암이 악화되어 타계했다. 2011년 즈음에 위암 수술을 받았고 최근까진 간암으로 투병 중이었다고 한다. #

바둑TV에서는 추모하는 의미에서 4월 10일 밤 10시에 "영원한 국수, 김인"을 방영했다.

3. 여담

  • 술을 즐겼으며 동료 바둑 기사나 바둑 관계자뿐 아니라 고은, 김성동, 민병산, 박재삼, 신동문, 천상병 등 많은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숱한 일화를 남겼다.
  • 일본의 나카야마 노리유키(中山典之) 六단은 일본 유학 중인 김인과 1963년 4월 24일에 승단 시합에서 대결해 흑으로 승리한 바둑을 자기 일생의 걸작으로 꼽았다.
  • 1966년 2월 10일 제10기 국수 제1위전 도전기 4국에서 승리, 조남철 八단(당시)에게서 국수를 쟁취했다. 다음날 동아일보는 1면에서 '새 국수에 김인 五단, 조남철 기성(碁城) 10년 만에 붕괴'라는 제목 아래 최종국 총보와 함께 5단 크기의 지면을 할애해 대서특필했다. 3면 사회면에서도 ‘흑백의 각축 7시간’이란 제목으로 1면 기사의 3배에 달하는 해설 기사를 별도로 실었다. 바둑 관련 기사가 사람들의 시선을 끈 적은 몇 차례 있었지만 이처럼 1면과 사회면 톱을 장식한 경우는 이 제10기 국수전이 최초였다.
  • 신아일보가 주최하는 승발전에 출전, 1967년 12월 21일의 제11국부터 1968년 5월 26일의 제25국까지 15연승을 기록하여 2, 3, 4차 연승왕에 오르고 자진 사퇴했다.
  • 1968년 6월 26일 제6기 청소년배 결승 3번기 2국에서 김학수 四단(당시)에게 승리, 우승하면서 40연승을 기록하는 동시에 전 타이틀을 석권하고 초유의 7관왕( 왕위, 패왕, 국수, 청룡배최강위, 최고위, 왕좌, 청소년배)에 올랐다. 이후 7월 17일 제1기 명인전 본선리그 최종국에서 조남철 八단(당시)에게 패하면서 초대 명인을 넘겨줘 전관 독점도 무너지고 연승 기록도 중단됐다. 40연승은 1990년 이창호 四단(당시)의 41연승에 이은 세계 2위 연승 기록.
  • 1968년 12월 4일 동아일보의 초청으로 방한한 린하이펑(林海峰) 九단과의 비공개 대국에서 정선으로 3집을 승리했으나, 12월 6일의 공개 대국에서는 호선으로 흑6집반패를 당했다. 현직 혼인보 국수의 대결로 화제를 끌었던 대국. 12월 7일 조남철 명인과 린하이펑 혼인보의 공개 대국에서도 린 九단이 백으로 불계승을 거뒀다. 린 九단은 한국기원 이후락 이사장과 서정귀 이사와도 내한 기념 지도기를 두는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다. 세월이 흘러 2006년 5월 25일의 원로 대항전에서 다시 만나서는 흑으로 5와 3/4자승을 거두었다.
  • 1969년 7월 5일 제9기 최고위전 도전기 5국(최종국)에서 강철민 四단(당시)에게 80수만에 불계패를 선언, 좌중을 아연케 했다. 당시 도전기 최단수수 기록. 1988년 12월 24일 제28기 최고위전 도전기 1국에서 이창호 四단(당시)이 세계 최연소 도전자 (13세)로 등장해 조훈현 九단에게 80수만에 불계패해 동률 기록을 세웠고, 1997년 12월 8일 제15기 대왕전 도전기 1국에서 조훈현 九단이 이창호 九단에게 75수 만에 불계패하면서 비로소 기록이 경신됐다. 2001년 7월 25일 제35기 왕위전 도전기 3국에서 조훈현 九단이 이창호 九단에게 49수만에 불계패를 당하면서 도전기 최단수수 한국 기록을 다시 경신했다.
  • 1969년 12월 16일 제9기 패왕전 도전기 4국에서 김재구 五단(당시)에게 승리하여 패왕전 3 연패를 달성하고 패왕전을 주최하는 서울신문으로부터 국기(國棋) 칭호를 받았다.
  • 1970년 6월 27일 사카다 에이오(坂田栄男) 九단과의 친선 대국에서는 흑으로 불계패했다.
  • 1970년 11월 2일 4관왕( 왕위, 패왕, 국수, 명인)의 신분으로 제2회 한일 전문기사 교류 대국에서 주장전에 출전하였으나 구도 노리오(工藤紀夫) 八단(당시)에게 흑으로 3집반을 패했다. 제2회 한일 전문기사 교류 대국 전체 성적은 한국의 1승 8패로 끝났다.[4][5]
  • 1973년 7월 2일 JAL 서울- 도쿄간 첫 점보기 취항을 기념하기 위해 YWCA홀에서 열린 공개 대국에서 오히라 슈조(大平修三) 九단에게 백으로 불계패 했다. 7월 4일 부산 데파트 회의실에서 열린 대국에서 윤기현 七단(당시)도 오히라 九단에게 흑으로 불계패 했다.[6]
  • 1983년 7월 26일 제19기 패왕전 본선에서 김동명 六단에게 흑으로 43수만에 최단수수 불계승을 거두었다.
  • 1985년 미국에서 벌어진 중국의 1인자 녜웨이핑(聶衛平) 九단과의 친선 대국에서 흑으로 불계승 했다. 당시 미수교 상태인 한국-중국간의 민간 접촉으로 화제가 됐던 이벤트. 한국 1인자 조훈현 九단과 녜 九단은 같이 열린 친선 대국에서 1승 1패를 기록했다. 2006년 5월 26일에 원로대항전에서 녜 九단을 다시 만나서는 백으로 불계패 했다. [7]
  • "바둑의 날"이 법정 기념일로 지정된 2018년 11월 5일, 한국기원이 선정한 한국 바둑을 빛낸 국수 7인에 조남철, 조훈현, 조치훈, 서봉수, 이창호, 이세돌과 같이 포함됐다.
  • 통산 30회 우승, 22회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한국기원에 따르면 공식전 860승 5무 703패(비공식전 포함 919승 5무 741패)를 기록하였다.

4.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

강철민 八단 30:18
서봉수 九단 13:39
유창혁 九단 4:5
윤기현 九단 52:29
이창호 九단 1:5
조남철 九단 69:38:1 무승부
조훈현 九단 8:39
하찬석 九단 22:29

5. 주요 경력

  • 제10기 ~ 제15기 국수전 우승 (6 연패: 1966년-1971년)
  • 제6기 ~ 제12기 패왕전 우승 (7 연패: 1966년-1977년)
  • 제1기 ~ 제7기, 제9기 왕위전 우승 (7 연패 포함 8회: 1966년-1973년, 1974년)
  • 제8기, 제12기, 제13기 최고위전 우승 (2 연패 포함 3회: 1968년, 1972년-1973년)
  • 제2기 왕좌전 우승 (1968년)
  • 제1기 청룡배쟁탈최강자전 우승 (1968년)
  • 제6기 청소년배쟁탈전 우승 (1968년)
  • 제2기 명인전 우승 (1970년)
  • 제1기 백남배 우승 (1974년)
  • 제3기 기왕전 우승 (1977년)

[1] 한국에서 프로 입단 직후 일본으로 유학한 조훈현 九단의 경우, 처음에는 일본의 소년 기사들과 석 점 정도 실력 차가 났다고 한다. [2] 첫 번째는 조훈현, 세 번째는 추대를 받아 특별승단한 조남철. [3] 바둑 평론가 박치문씨의 회고에 따르면 원래는 김인 九단이 첫 번째 九단이 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승단대회에서 진작 승단 점수를 채웠지만 본인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고, 한국기원측의 행정 처리도 그리 체계적이지 않던 시절이라 조훈현이 이미 九단으로 승단한 이후에야 자기가 승단 요건을 충족했음을 알았다고... [4] 한일 전문기사 교류 대국은 한국측이 1회 2승 7패, 3회 1승 8패를 기록한 후 중단 [5] 대회 당시에는 공식 대국으로 분류되었으나 현 한국기원 웹사이트에는 비공식 대국에도 이 기록이 누락돼 있다. [6] 한국기원 웹사이트에는 이 기록들이 누락되어 있다. [7] 한국기원 웹사이트에는 이 모든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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