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남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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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남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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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s-2|{{{#a78329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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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 ( 광주제일고등학교) |
→ |
김용남 (군산상업고등학교) |
→ |
김경문 ( 공주고등학교) |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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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1986 |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9번}}} | ||||
팀 창단 | → |
김용남 (1982~1986) |
→ |
조재환 (1987~1990) |
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34번 | ||||
장훈 (1986) |
→ |
김용남 (1987~1989) |
→ |
양용모 (1991~1993) |
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89번 | ||||
결번 | → |
김용남 (1990~1992) |
→ |
유승안 (1994~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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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남 金勇男 | Kim Young-n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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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8년 2월 26일 ([age(1958-02-26)]세) | |||
전라북도 군산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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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군산초 - 군산중 - 군산상고 - 한양대 | |||
포지션 | 투수 | |||
투타 | 우투우타 | |||
프로 입단 |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 |||
소속팀 |
한국화장품 야구단 (1981) 해태 타이거즈 (1982~1986) 빙그레 이글스 (1987~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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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
빙그레 이글스 2군 투수코치 (1990~1992) 쌍방울 레이더스 2군 투수코치 (1993)[1] 쌍방울 레이더스 1군 투수코치 (1993~1994)[2] 쌍방울 레이더스 2군 투수코치 (1994~1995)[3] 신일고등학교 야구부 투수 인스트럭터 (1997~1999)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3~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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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 | 예술체육요원[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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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8년생. 영남에 최동원, 김시진이 있다면, 호남에는 이 투수가 유명했다. 명문 군산상고 출신으로 70년대 중반 고교야구 트로이카 중 한명. 김성한과 함께 군산상고 팀을 이끌었으며, 묵직한 구위의 직구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활약은 특히 1976년에 빛났는데, 군산상고를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시키고 우수투수가 되면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2. 선수 경력
한양대학교와 한국화장품 야구단을 거쳐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멤버로 들어갔다. 당시 해태는 김성한이 투잡을 뛸 정도로 투수진이 부실했던 상황에서 175이닝을 던져 9승 방어율 3.09를 기록하며 해태의 원년 에이스로 활약했다.[5] 1983년에는 20승에 방어율 2.67의 에이스 이상윤에 이어 13승에 방어율 2.83을 기록하며 2선발로 활약하여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고교시절 트로이카였던 김시진, 최동원에 비하면 한끗 부족한 활약임은 틀림없었다. 그래도 해태에서 제 몫을 다했던 투수였는데, 1984년 이후 성적이 삐끗하기 시작했다. 규정이닝을 채웠지만 에이스라기엔 어려운 수준이었고, 평균자책점도 3~4점대로 오르는 등 점차 성적이 나빠졌다. 1986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가 우승하고 김용남도 투수로 함께했지만, 이해에는 부상 및 신예들에게 밀리는 등으로 인해 13경기 30.2이닝 출전에 그쳤으며 이후 1987년에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하여 1989년에 은퇴했는데 1990~1992년까지는 빙그레, 1993~1995년까지는 고향 팀이기도 한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고 그 이후 프로야구계와 인연을 끊었다. 고교야구계로 돌아가 신일고 코치, 군산상고 감독을 맡기도 했다.[6]
김성한이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언급하기를 현재는 야구와 거리를 두고 군산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7] 김성한과는 중학교 동기이며 김성한이 유급을 하여 김용남이 고교 1년 선배다고 덧붙이면서 최동원은 연세대, 김시진과 김용남은 한양대로 진학했는데 한양대가 아닌 동국대로 진학해서 왕 노릇을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한편, 데뷔전(82년 3월 31일 MBC전)에서 완봉승을 거두어 천창호[8]와 동시에 KBO 최초 완봉승 투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3.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투수)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82 | 해태 | 33 |
175 (7위) |
9 (9위) |
12 | 0 | 0 | 0.429 |
3.09 (9위) |
177 | 12 | 51 |
85 (7위) |
83 | 60 | 1.251 |
1983 |
35 (10위) |
181⅓ (8위) |
13 (5위) |
10 | 1 | 0 | 0.565 |
2.83 (10위) |
171 | 12 | 35 |
80 (8위) |
67 | 57 | 1.108 | |
1984 | 31 | 132⅔ | 7 | 11 | 1 | 0 | 0.389 | 3.05 | 133 | 10 | 20 | 68 | 58 | 45 | 1.146 | |
1985 |
43 (4위) |
134⅔ |
11 (7위) |
6 |
8 (3위) |
0 | 0.647 | 4.48 | 147 | 14 | 29 | 74 | 74 | 67 | 1.285 | |
1986 | 13 | 30⅔ | 0 | 0 | 2 | 0 | 0.000 | 4.70 | 45 | 2 | 6 | 22 | 19 | 16 | 1.663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87 | 빙그레 | 16 | 87⅔ | 4 | 5 | 0 | 0 | 0.444 | 4.72 | 111 | 8 | 21 | 37 | 48 | 46 | 1.483 |
1988 | 27 | 122⅔ | 8 | 6 | 1 | 0 | 0.571 | 4.11 | 150 | 9 | 27 | 41 | 67 | 56 | 1.427 | |
1989 | 1군 기록 없음 | |||||||||||||||
KBO 통산 (8시즌) |
198 | 864⅔ | 52 | 50 | 13 | 0 | 0.510 | 3.61 | 934 | 67 | 189 | 407 | 416 | 347 | 1.273 |
역대 기록(타자)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사구 | 삼진 |
1982 | 해태 | 1 | 1 | 0.00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1 |
KBO 통산 (2시즌) |
2 | 2 | 0.00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1 |
완투, 완봉 기록 | ||
연도 | 완투 | 완봉 |
1982년 |
8완투 (3위) |
1완봉 (8위) |
1983년 |
6완투 (10위) |
3완봉 (4위) |
1984년 |
6완투 (10위) |
2완봉 (3위) |
1985년 | 1완투 | 0완봉 |
1987년 | 4완투 | 0완봉 |
1988년 | 1완투 | 0완봉 |
KBO 통산 | 26완투 | 6완봉 |
4. 관련 문서
[1]
~5월 16일
[2]
1993년 5월 17일~1994년 6월 12일
[3]
6월 13일~
[4]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
[5]
1982년은 팀당 80경기로 144경기를 뛰는 지금과 비교하면 경기 수가 60%도 되지 않았다.
[6]
전임 감독이었던 나창기가 호원대 야구부 창단감독으로 가면서 2002년 12월에 취임했다. 그러나 2004년 9월 김성한에게 지휘봉을 넘겨준다.
[7]
연락이 안된다고 했으며 해태 타이거즈 OB모임 총무를 20년 가까이 맡으며 OB모임 연락처를 다 가지고 있는
송유석도 김용남과 연락이 끊긴지 오래됐다고 덧붙였다.
[8]
데뷔전에서
OB 베어스와 맞붙어 완봉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