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회의원 ( 전라남도 광양군) | ||||
제헌헌법 공포 | → |
초대 김옥주 |
→ |
2대 엄상섭 |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김옥주 金沃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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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ed30><colcolor=#000> 출생 | 1915년 6월 3일 |
전라남도 광양군 진상면 지원리 지랑마을[1] | |
사망 | 1980년 9월 12일 (향년 65세) |
평양시 | |
학력 |
광양공립보통학교 (
졸업) 양정고등보통학교 ( 졸업) 와세다대학 전문부 ( 법률과 / 졸업) |
가족 | 형 김선주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제6대 국회의원 김선주가 그의 형이다.2. 생애
1915년 6월 3일 전라남도 광양군(現 광양시) 진상면 지원리 지랑마을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광양공립보통학교, 양정고등보통학교,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률과를 졸업하였다.[2]와세다대학 재학 시절 불온 학생으로 예비검속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귀국해 평안남도 순천시에 있던 조선화학공업주식회사에 입사하였는데, 사원으로 재직 중 조선인 노동자 대우 개선 투쟁을 전개하다가 반일사상 혐의로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 광양 진상국민학교 교사를 역임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전라남도 광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6월 대한민국 헌법 및 정부조직법을 기초할 때 기초위원으로 참여했고 10월 여순사건에 연루되었다.
1949년 3월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이듬해인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출옥하였는데, 그 해 7월 노일환 등과 함께 월북하였다.
이후 1957년 7월 재북평화통일협의회(在北平和統一協議會) 상무위원을 역임하다가 1959년 1월 숙청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지병인 위장병을 앓다가 1980년 9월 12일 북한 평양시에서 사망했다.
3. 제헌 국회 활동
- 1948년 6월 2일 헌법급정부조직법기초위원 30인 으로 뽑혔다.[3]
- 1948년 6월 15일 '울릉도어선피습 건'을 발의하였다.[4]
- 1948년 9월 5일 국무회의 없이 국회 사무총장 전규홍을 유엔 총회에 보낸것에 대하여 강도높게 비판했다.[5]
- 1948년 9월 21일 조종승 의원과 함께 내판역 열차 사건현장에 파견되었다.
- 1948년 9월 27일 김옥주 의원 징계에 관한 건의가 올라왔고 가결되었다.
- 1948년 10월 12일 조성환의 장례식에 참여할 의장,국회의원 2명을 보내자 주장하였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전남 광양군[6])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3,978표 (53.55%) | 당선 (1위) | 초선[7] |
[1]
#
[2]
아이러니하게도
국회 프락치 사건의 담당 검사가
와세다대학 재학 시절 동기동창이자
룸메이트였던
오제도였다.
[3]
류성갑,
김옥주,
김준연,
오석주,
윤석구,
신현돈,
백관수,
오용국,
최규옥,김명인,
이종린,
이훈구,
류홍렬,
연병호,
서상일,
조헌영,
김익기,
정도영,
김상덕,
이강우,
허정,
구중회,
박해극,
김효석,
김병회,
홍익표,서성달,
조봉암,
이윤영,
이청천.
[4]
김장열,
강기문,
김상순,
조영규,이성우,
류성갑,
오석주,
조옥현,
김옥주,
황두연,
황병규.
[5]
의장인
신익희에게는 법에 무지하다 발언하였으며 대통령
이승만에게는
전체주의,
독선주의,
독재주의라고 비판했다.
[6]
제7선거구
[7]
자격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