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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봉연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2. 고교~대학 시절
7남 4녀(11남매) 중 6번째로 출생, 어린 시절 몸이 아파서 학교를 2년 늦게 입학했다.[1] 초등학교 3학년때 야구를 시작했는데 타고난 운동신경[2]과 부단한 노력으로 군산상고와 연세대의 붙박이 4번타자로 활동했다.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봉연이 술회하길 초등학교 3학년때 야구를 시작한 계기는 야구부원인 형의 야구 연습이 끝나면 항상 하교를 같이 했는데 어느 날 형이 보이지를 않자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보니 야구부원들이 짜장면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래 이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야구부 지도 교사의 눈에 들기 위해 김봉연 본인 앞에 굴러온 야구공을 일부러 교사쪽으로 몇 번 던졌고 야구공의 속도에 놀란 교사가 김봉연을 데리고 오라고 해서 그 날부로 야구부원이 되었다. 운동신경이 좋아서 전북 전주시의 전주북중학교[3]에서 야구와 농구를 같이 했고 군산상고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 군산상고 유니폼을 입었다.
창단 4년차인 1972년 제26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부산고를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둘 때 4번타자였다. 상업고등학교 선수들은 일반적으로 실업야구 실업팀 또는 은행팀에 입단하나 교사의 꿈이 있어서 학창시절에 영어와 한문 공부를 꾸준히 했고 연세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한다.[4]
연세대에서도 투수 겸 4번타자였으며 발도 빨라서 김재박과 함께 대학야구 도루 랭킹 1, 2위를 다퉜다. 1975년 육군 경리단 야구단으로 입대하여 1977년 제대 전까지 뛰었으며 연세대로 복학했다. 연세대 시절 비거리가 긴 홈런을 날리기로 유명했는데 공대 옆 운동장에서 친 홈런이 백양로를 가로질러 학생회관에 떨어진 일화도 있다.
당시 고려대학교 축구부 차범근과 함께 잡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으며 덥수룩한 머리, 고무신, 촌스러운 옷 등을 하고도 '저 촌놈이 어떻게 야구를 저렇게 잘하냐'고 연세대 학생들로부터 호평을 들었다고 술회했다.
3. 실업야구 시절
육군 경리단(1975 ~ 1977년)에서 뛸 당시 백호기 최초로 3연타석 홈런을 치는 등 활약했고 연세대에 복학하여 1년을 보낸 뒤 1979년에 한국화장품 야구단에 입단했다. 입단 후에도 실업야구의 거포이자 스타플레이어로 실업야구를 대표했으며 1982년에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30세의 나이로 고향팀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다.[5]당시 야구 선수들의 평균 은퇴 나이가 30대 초반임을 감안하면 거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프로에 뛰어들었는데, 해태에서의 활약은 한 마디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김봉연이 술회하길 실업야구에 남을 것인가 프로야구에 뛰어들 것인가를 놓고 김준환과 장충단 공원 근처 포장마차에서 술을 먹으면서 고민하다가 둘 다 프로야구행을 결정했다고 한다.[6]
실업야구 시절 대스타였기에 프로야구 출범때 모든 프로 선수들의 대표격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특급 선수들의 연봉은 김봉연을 기준으로 설정해 계약금 2000만원 연봉 2400만원으로 책정되었다. 이덕분에 백인천과 박철순이 특급 선수 연봉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김봉연 자신은 돈이 없다고 강짜를 부리는 해태 구단 때문에 A급 선수 연봉인 1800만원을 받았다.
4. 해태에서의 활약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1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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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원년 해태 타선은 주로 1번 김일권, 2번 차영화, 3번 김성한, 4번 김봉연, 5번 김준환, 6번 김종모가 출전했는데, 선수의 대부분이 김씨라서 김씨왕조라고 불렸으며[7], 위의 김씨들은 모두 일발 장타가 있었다. 당시 코칭스탭간의 불화와 모기업의 지원 부족, 그리고 총원 18명의 초미니 선수단으로 해태는 4위에 그쳤지만, 해태의 3, 4, 5번은 공포의 클린업 트리오였다.[8]
히스토리 08 '촌놈' 김봉연의 '원조 홈런왕' 이야기
김봉연은 초대 주장 겸 4번 타자로서 22개의 홈런으로 원년 홈런왕에 등극했다.[9] 홈런 수도 대단하지만, 홈런 22개 치는 동안 삼진은 겨우 16개에 그쳤을 정도로 타석에서의 심리전에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원년 홈런왕 레이스에서 1위를 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부상당했고, 당시 백인천이 계속 이를 추격하자,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타를 자청, 홈런을 쳐냈다. 이때 절룩거리면서 베이스를 돈 것은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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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한국시리즈 MVP 수상장면 |
이 교통사고로 인해 코 밑부분을 무려 300바늘 이상을 꿰매게 되자 상처를 가리기 위해 콧수염을 길렀다. 수염을 기른 운동선수가 생소하던 시절 그의 콧수염은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상처가 아문 후부터 면도를 하게 되어 오랫동안 볼 수는 없었지만 콧수염은 김봉연을 상징하는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11] 아이러니하게도 콧수염을 깎은 84시즌과 85시즌은 2할대 중반의 타율로 공갈포로 전락했다. '탈모왕', '헛방망이', '병살타왕'이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별명을 이 때 얻게 되었다. 홈런왕 타이틀을 목표로 홈런만을 노리고 온 힘을 모아 어퍼스윙을 해서 모자가 자주 벗겨졌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김응용 감독이 '헬멧을 끈으로 묶고 나가라'고 했을 정도다. 결국 홈런을 포기한 '공심'(마음을 비우다) 타법을 선언하며 안타 위주의 스윙을 해나갔고 안타뿐만 아니라 홈런 숫자도 증가하면서 예전 기량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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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초창기 통산 100호 홈런 선착 경쟁을 벌인 이만수와 김봉연 |
히스토리 13 이만수 vs 김봉연 '최초 100호 홈런 전쟁'
1986년에는 이미 프로야구 시대의 홈런왕으로 위상을 굳혀가던 삼성의 이만수와 최초의 통산 100개 홈런 경쟁을 벌이지만, 최초 100호 홈런의 영광은 이만수가 차지했다. 대신 김봉연은 이 해에 프로리그에서의 두 번째 홈런왕을 차지하는 것으로 만회했다.[12] 당시 22개로 홈런왕이 되어 적게친것 같지만, 1986년은 역대 최고의 투고타저 시즌으로 리그 전체 방어율이 3점대 초반으로 압도적 꼴지 청보가 팀방어율 3.99을 기록하지 않았으면 리그 방어율이 2점대가 나올뻔한 시즌이였고, 홈런 10개만 쳐도 홈런순위 9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그런 시즌에 22개의 홈런을 기록했으니 압도적이라 불리울만 했다. 이때의 나이가 35세다. 당시로 보면 평균 은퇴나이가 한창 지난 시기였다.
결국 이듬해인 1987년부터 시즌 홈런이 10개 미만으로 줄었고, 1988년에도 홈런이 10개를 못 넘겼다. 자신의 최대 강점인 홈런이 줄어들자, 1988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13] 김봉연 본인은 더 뛰고 싶었으나 김응용 감독이 은퇴를 권유했다. 선수 시절 말년에는 김준환과 함께 해태의 플레잉 코치로 뛰었다.
야구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욕심이 많았다. 동기생 김준환, 후배 김일권, 김성한과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배팅 케이지에서 연습을 더 하려고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출근을 하거나, 배팅볼을 한 개라도 더 치기위해 '너 이제 (배팅 케이지에서) 그만 나와'하면서 서로 다투느라 후배들은 정작 배팅볼을 때릴 기회조차 없었다고 이건열이 술회했다.[15] 또, 본인의 인터뷰에서는 프로야구 원년에 감독인 김동엽의 지시도 없었는데 멋대로 9회 대타로 출장하여 홈런을 날린 일도 회고했다.
[1]
그렇다 보니 73학번으로 연세대학교에 입학, 조기입학한 55년생인
김준환과 군산상고 동기생이다.
[2]
김재박과 함께 대학야구 도루 랭킹 1, 2위를 다퉜다고 한다.
[3]
전주고등학교와 형제학교로 현재는
폐교됐다.
[4]
이 당시는 체육특기생이 전공을 선택할 수 있어서 대부분
법학과,
경영학과 등을 택했다.
[5]
당시 실업리그는 거의 프로 리그처럼 운영되었으며, 한국 시리즈(당시 명칭으로는 코리안 시리즈)도 있었다.
[6]
실업팀에 있으면 일자리와 직책이 어느 정도 보장되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결정이다. 이때문에 당시 대부분 30대 야구선수들이 프로에 가지 않았다.
[7]
그 다음 83년에는 2번 김종윤/
김일환과 그 해에 합류한
재일교포 포수 7번
김무종까지 더하면 9명 라인업 중 7명이 김씨. 거기다 선발투수가
김용남이 나오면 10명 중 8명이 김씨. 그 당시 KKK타선이라고도 불렸다.
[8]
그도 그럴것이 간단히 말해도 3번 김성한이 타점왕, 4번 김봉연은 홈런왕, 5번 김준환은 홈런 공동 2위였다.
[9]
원년 1982년에는 각팀 경기 수가 80경기에 불과했으니, 거의 나흘에 한개 꼴로 홈런을 친 셈이다. 만약 팀당 경기 수가 지금과 같은 144경기였다면 거의 40개에 달하는 홈런을 때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10]
1983년 6월 28일(이 당시 올스타전은 6월 30일에 예정되어 있었다.) 친구의 자가용을 함께 타고 여수 여행을 다녀오던 길에
남해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차를 운전하던 김봉연의 친구가 화물트럭을 추월해 앞서가려다 맞은편 차선에서 버스가 나타났고 그 버스를 피하려고 핸들을 꺾다가 가로수를 정면으로 들이받은 사고였다. 이 사고로 김봉연은 전남대병원에서 5시간이 넘는 수술을 받은 뒤 의식을 회복했지만 같은 차에 탔던 친구와 친구의 아들은 중상을 입었고 친구의 아들을 안고있던 친구의 부인은 아들을 보호하고자 머리를 찧어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다. 이 때 김봉연은 부인과 자녀를 대동하고 여행을 떠났는데 나머지 가족들은 다른 차를 타고 있어서 화를 면했다고 한다.
[11]
김봉연 인생에서 콧수염을 기른 시절은 1983년 후반기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 활약과 그 콧수염에서 나오는 강렬한 인상 덕택에 콧수염을 기른 김봉연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12]
1986년 시즌을 마감할 때까지 프로통산 99개 홈런을 기록했고, 이듬해인 1987년 시즌의 첫 홈런이 100호 홈런이 되었다.
[13]
다행히 같은 해 한국시리즈에는 출전했다. 특히 최종 6차전에 주전 1루수로 나서 경기 막판인 8회초 승리에 쐐기를 박는 1타점 2루타를 기록하는 등의 활약을 펼치며 선수로서의 마지막 순간을 명예롭게 장식했다.
[14]
홈런 스킬은
일본프로야구의 대표적인 홈런타자인
오치아이 히로미츠와 비슷하다.
[15]
김종모는 모교 광주상고에 가서 후배들한테
배팅볼 투수를 부탁하고 연습 후 빵, 콜라 등을 사줬다고 한다. 김봉연도 팀 훈련이 끝난 뒤 후배들에게 저녁을 사줄테니
배팅볼 투수를 부탁하고 귀가하면 집에 그물망을 설치해놓고 티배팅을 쳤다고 하며 공 때린 횟수를 세보면 하루에 1,000개씩은 때린 것 같다고 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