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1.4px" |
지코눌프 | 지코 | 피에트로 | 아데마르 | 구아페르 |
과이마르 1세 | 과이마르 2세 | 기술프 1세 | 판둘프 1세 | 판둘프 2세 | |
만소 조반니 1세 |
조반니 2세 | 과이마르 3세 | 과이마르 4세 | 판둘프 3세 | |
기술프 2세 | }}}}}}}}}}}} |
Guaimar II | ||
생몰년도 | 미상 ~ 946년 | |
출생지 | 살레르노 | |
사망지 | 살레르노 | |
재위 기간 | 901년 - 946년 |
1. 개요
살레르노 공국 7대 대공.2. 행적
살레르노 공국 6대 대공 과이마르 1세와 스폴레토 공국의 공작 귀도 4세의 여동생 이타(Itta)의 아들이다. 893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살레르노 공국을 다스렸으며, 895년 아버지가 베네벤토 섭정을 맡으러 가던 중 동로마 황실에 의해 가스탈다토(Gastaldato: 특정 지역의 군사 및 사법 분야에서 활동하도록 위임받은 관료)로 선임된 아벨리노의 아델페리오에게 사로잡혀 실명형에 처해진 뒤 귀도 4세에게 구출될 때까지 공국을 단독으로 다스렸다.895년 아나스타시우스 2세의 지원을 받은 친 나폴리 파벌이 살라르노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그가 토벌대를 이끌고 출진해 가까스로 진압했다. 이후 실권은 과이마르 2세에게 넘어갔고, 과이마르 1세는 명목상의 권위만 있었다. 901년 아버지가 은퇴한 뒤 대공으로서 완전한 권력을 행사했다. 통치 초기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받고 충성을 바친 아버지의 노선을 따라 동로마 제국과의 동맹을 이어갔고, 카푸아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카푸아 백작 아테눌프 1세의 딸 가이텔그리마(Gaitelgrima)와 결혼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첫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로틸다를 란둘프 1세의 아들인 아테눌프 3세와 결혼시켰다.
915년 가에타, 나폴리, 카푸아, 베네벤토, 라치오, 스폴레토, 로마, 그리고 동로마 제국과 연합해 남부 이탈리아에서 활개치는 사라센을 상대로 원정을 단행했다. 그해 6월, 스폴레토 공작 알베리크 1세가 총사령관을 맡은 연합군은 캄포 바카노, 비아 카시아, 티볼리 및 비코바로 등지에서 무슬림군을 연이어 격파했다. 이에 알리쿠(Alliku)가 이끄는 무슬림군은 가릴리아노 강 인근의 요충지인 트레토로 철수했다. 연합군은 트레토를 포위하여 3개월간 맹공을 퍼부었고, 동로마 함대는 해상에서 구원군이 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3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식량이 바닥난 무슬림들은 포위망을 뚫고 시칠리아로 도피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전원 죽거나 사로잡혔다.
929년 동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고 베네벤토 대공 란둘프 1세와 연합해 934년까지 동로마 제국령 아풀리아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동로마 제국은 935년 파트리스 직책을 맡고 있던 코스마스에게 11척의 함대를 이끌고 슬라브 함선 7척과 함께 아풀리아로 파견했지만 혼란 수습에 실패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베네벤토와 살레르노 대공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탈리아 국왕 우고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의 전쟁에서 별다른 이득을 챙기지 못한 과이마르 2세는 스폴레토 공작 테오발트 1세와 동맹을 맺었지만 역시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동로마 제국에 도로 충성을 맹세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과이마르 2세는 살레르노 궁전을 재건축하고 산 피에트로의 팔라티노 교회 옆에 종탑을 세우는 등 토목 사업을 단행했고, 오랫동안 끊어진 금화 주조를 재개했다.또한 조부 구아페르가 설립한 산 마시모 수도원에 거액의 기부금을 냈고, 말년에 클뤼니 수도원 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에게 지원금을 제공했다. 943년 아들 기술프 1세에게 실권을 양도했고 946년 6월 4일 사망했다. 사후 기술프 1세가 살레르노 대공에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