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5 11:22:19

기술프 2세(살레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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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코눌프 지코 피에트로 아데마르 구아페르
과이마르 1세 과이마르 2세 기술프 1세 판둘프 1세 판둘프 2세
만소
조반니 1세
조반니 2세 과이마르 3세 과이마르 4세 판둘프 3세
기술프 2세 }}}}}}}}}}}}

Gisulf II
생몰년도 1030년경 ~ 1090년 또는 1091년
출생지 살레르노
사망지 사르노
재위 기간 1052년 - 1077년(살레르노 대공)
1088년 - 1089년(아말피 공작)

1. 개요2. 행적

1. 개요

살레르노 공국 16대 대공이자 마지막 대공.

2. 행적

1030년경에 살레르노 공국 14대 대공 과이마르 4세와 카푸아 귀족 란둘프의 딸인 게마의 아들로 태어났다. 1042년 아버지에 의해 공동 통치자로 임명되었고, 노르만족을 중용해 남이탈리아를 제패하는 아버지의 후계자로서 무탈하게 살아갈 듯했다. 그러나 1052년 6월 초 과이마르 4세가 아말피 해안가를 걷고 있던 중 아내 게마의 형제 아테눌프와 란둘프를 비롯한 4명의 암살자에게 공격받고 36번이나 칼에 찔러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과이마르 4세의 형제 판둘프도 피살되었고 과이마르 4세의 아들 기술프 등 가족들은 투옥되었지만, 동생 귀도는 가까스로 탈출했다.

과이마르 4세를 살해한 처남 아테눌프와 란둘프는 테라노 백작 판둘프 6세의 아들이며 자신들과 함께 과이마르 4세를 처단한 판둘프 3세를 새 공작으로 옹립했다. 귀도는 아베르사로 피신해 노르만인들에게 과이마르 4세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알렸고, 노르만인들은 즉각 군대를 일으켜 살레르노로 진격했다. 암살자들은 순식간에 제압되었고, 감옥에 갇혀있던 과이마르 4세의 아들 기술프가 구출되었다.

귀도는 암살자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살려주려 했지만, 노르만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과이마르 4세의 몸에서 발견된 자상의 수에 근거해 판둘프 3세 등 암살자 4명을 36차례 찔러 죽였다. 이후 과이마르 4세의 아들 기술프가 기술프 2세로서 살레르노 대공에 선임되었다.

기술프 2세는 노르만인들이 지역민들을 핍박하고 교회 재산에 손을 대는 것에 반감을 품었기에, 아버지와는 달리 노르만족을 적대했다. 살레르노 공국을 섬기던 노르만인들은 자신들을 노골적으로 멸시하는 대공에 반감을 품고 반기를 들었다. 칼라브리아의 산 마르코 성에 자리를 잡은 로베르 기스카르는 살레르노 공국에 속한 여러 마을을 공략했고, 아베르사 백작 리샤르 1세도 독립했다. 그는 이에 맞서고자 아말피 공화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 후 로베르 기스카르의 이복 형제인 기욤이 소렌토 공작 귀도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고 살레르노 공국에 있는 귀도의 모든 영지를 물려받은 뒤 기술프 2세를 적대했다. 이에 기술프 2세는 기욤과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던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접근해 1058년 자신의 딸 시켈가이타를 로베르 기스카르와 결혼시켰다.

이후 로베르 기스카르가 전쟁을 통해 세력을 급격하게 팽창하자, 기술프 2세는 위협을 느끼고 1071년경 카푸아 대공 리샤르와 함께 아풀리아에서 로베르 기스카의 조카들인 오트빌의 아벨라르, 오트빌의 헤르만, 그리고 몇몇 소영주들의 반란을 지원했다. 또한 아말피와 피사를 상대로 해적 행위를 벌여 군자금 확보에 진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분노를 사고 노르만족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아말피와 피사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드는 악수였고, 살레르노 공국은 이로 인해 고립되었다.

1076년 5월, 로베르 기스카르는 군대를 일으켜 살레르노를 포위 공격했다. 기술프 2세는 수 개월간 항전했지만 12월 13일 시민들이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하자 요새로 후퇴해 1077년 5월까지 항전했다. 그러나 식량이 완전히 바닥나면서 성이 함락되었고, 살레르노 전역이 노르만인들에게 심하게 약탈당했다. 기술프 2세는 카푸아로 도주한 뒤 그들이 로베르 기스카르를 적대하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곳에서 곧 쫓겨난 뒤 로마로 피신해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살레르노의 참상을 알리며 노르만인들을 파문에 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의 분쟁에서 승리하려면 노르만인들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요청을 묵살했다.

1088년 3월 노르만족의 침략에 직면한 아말피 공화국은 기술프 2세를 공작으로 추대해 맞섰지만 1089년 4월 20일 항복했다. 그 후 여동생 가이텔그리마가 안착한 사르노 성채에서 여생을 보내던 기술프 2세는 1090년 또는 1091년에 사르노에서 사망해 그곳에 안장되었다. 가이텔그리마는 1091년 형제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카바 데 티레니 성 삼위일체 수도원에 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