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성 倭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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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E0529><colcolor=#fff> 부산포왜성 [ruby(釜, ruby=プ)][ruby(山, ruby=サン)][ruby(浦, ruby=ポ)][ruby(倭城, ruby=わじょう)] | Busan Japanese Fortr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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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칭 |
증산왜성(甑山倭城) 범천증산성(凡川甑山城) 소조천성(小早川城) 모성(母城) |
형태 | 왜성 |
면적 | 약 80,000m² 이상 |
건설 | 1592년 (선조 25년) |
모리 데루모토 • 모리 히데모토 | |
폐성 | 1598년 (선조 31년) |
주소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 범일동 |
[clearfix]
1. 개요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과 좌천동에 걸쳐 있는 일본식 평산성. 임진왜란 당시 제7군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가 쌓았다. 부산포왜성은 현재 본성(本城)과 데지로(出城) 1개소가 남아 있는데, 본 문서에서는 본성인 증산왜성(甑山倭城)에 대해서 다루기로 한다.2. 역사
|
『1872년 지방지도』 「부산진지도」에 나타난 부산포왜성과 부산고기(釜山故基) |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몇 달 되지도 않은 선조 25년(1592) 9월 1일 이순신이 올린 장계에 이미 부산포왜성이 언급되었다.
咸聚釜山城內 官舍盡數撤去 築土造家己所巢穴多 至百餘戶 城外東西山麓 閭閣櫛比 連穡接屋 亦幾三百餘戶 皆是倭人 自作之家 其中大含層階 粉壁有若佛寺 原其所爲痛憤
부산진성 안을 취하여 관아를 모두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흙을 다져 지은 집이 많아 일백 호에 이르렀습니다.
성 밖 동쪽과 서쪽의 산기슭[2]에 집이 즐비한데 담장[3]을 이어 접한 가옥 또한 3백여 호입니다.
모두 왜인(倭人)이 스스로 지은 집인데,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층계 위에 들어선 것[4]은 벽에 분을 발랐고 마치 불당 같았습니다.
그곳을 보니 통분하였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선조 25년(1592) 4월 옛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곧바로 축성을 시작하여 불과 넉 달 만에 기본만 축성한 듯하다.[5] 그러나 일본 쪽 기록을 보면 축조는 선조 26년(1593) 3월부터 8월까지 약 5개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 성에는 왜군 1만여 명과 배 400여 척이 상시 주둔했는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주둔한 적도 있다고 한다.부산진성 안을 취하여 관아를 모두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흙을 다져 지은 집이 많아 일백 호에 이르렀습니다.
성 밖 동쪽과 서쪽의 산기슭[2]에 집이 즐비한데 담장[3]을 이어 접한 가옥 또한 3백여 호입니다.
모두 왜인(倭人)이 스스로 지은 집인데,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층계 위에 들어선 것[4]은 벽에 분을 발랐고 마치 불당 같았습니다.
그곳을 보니 통분하였습니다.
선조 31년(1598) 8월 18일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워지자, 10월 15일 다섯 다이로(大老)는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앞으로 명령서를 보내 '울산이 공격당할 때는 서생포를 단단히 지킬 것, 비상시에는 서생포성을 버리고 부산성으로 빠져나갈 것'을 지시했다.
10월 27일, 다섯 다이로 중 하나이자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구로다에게 명령서를 내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협의 하에 서생포왜성에서 부산포왜성으로 퇴각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11월 24일 가토와 구로다는 부산포왜성을 소각(燒却)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왜란이 끝난 후 현재 좌천동에 있던 부산포동첨절제사영(釜山浦同僉節制使營)은 부산포왜성의 데지로인 자성대왜성에 다시 설치되었고, 본래 부산포왜성의 본성이었던 증산(甑山)의 성곽은 버려졌다. 세월이 흘러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 한반도를 점령한 일본인들은 자기들 조상이 쌓은 것이니만큼 증산왜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었고, 1945년 광복 이후에도 큰 문제 의식 없이 유지됐다. 1963년 1월 21일에는 부산일본성(釜山日本城)이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35호로 등재되었다. 하지만 1969년 8월 1일 '보존가치가 없다.'는 사유로 사적 지정이 해제됐다. 그 이후 문화재 등급을 부여받지 못하고 별다른 보존조치 없이 대체로 방치되어 오다가, 현재는 산노마루 부분까지가 증산공원(甑山公園)이 되었다. 가장 아래의 곡륜(曲輪) 위에는 좌천시민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부산포왜성을 쌓은 산의 모습이 마치 떡시루나 솥뚜껑같이 생겼다고 하여 증산(甑山), 부산(釜山)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이곳의 포구 이름은 부산포(富山浦)였다. 왜란 직전 부산포(釜山浦)로 바뀌기 때문에 맞는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와전의 역사가 짧지 않은지, 고종 9년(1872) 지방지도에도 증산왜성이 부산고기(釜山故基)로 표기되었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은 부산(富山)이라는 이름이 고려시대 때부터 이곳에 있었던 부산 부곡(部曲)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3. 위치 및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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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실측 부산지도 (1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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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 제국대학 도서관 소장 『부산성도(釜山城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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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왜성 일대 위성사진 (1950) |
현재 남아 있는 증산왜성만 따지면 윤곽식 산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미 소실된 여러 데마루(出丸)와 데지로(出城)들을 합하면 평산성에 가깝다. 부산포를 끼고 자성대를 둘러싼 채 동천(東川) 하구까지를 긴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로 감싸 왜군 본영(本營)다운 규모이다. 대부분 내탁(內托)을 다졌으나, 니노마루와 산노마루의 북서측 방면은 협축으로 쌓아 긴 도베이(土塀)와 야구라(櫓)가 설치되었던 듯하다. 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에서 제작한 부산성도(釜山城圖)를 보면 본성의 서북측 바깥에 데지로(出城)를 설치했으므로, 북서쪽 육로로 쳐들어올 조명연합군의 동선을 고려한 것 같다. 이시가키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는 메쌓기(野面積み), 석축의 열을 맞추어 쌓은 줄눈쌓기(布積み) 기법을 취하였다.
그러나 구한말부터 도심으로 개발되어 이시가키가 많이 파괴되었고, 그마저도 1950년대 이후 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본성 이외의 부가적인 시설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또한 본성도 증산공원으로 꾸며지면서 협축(夾築)으로 쌓았던 부분을 삭평(削平)하거나 고구치(虎口)를 메워 버리는 등 상당히 변형되었다.
3.1. 제4곽(四ノ郭) ・ 내성 정문(內大手口)
|
부산포왜성의 상징이 된 고구치의 이시가키 |
|
좌천체육단련장 기단에 잔존하는 이시가키 측면 |
좌천체육단련장 콘크리트 기단 아래에는 제4곽의 우각부가 남아 있다. 왜성의 모서리에서 자주 보이는 산기즈미(算木積み)가 뚜렷하게 남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이곳은 작은 등산로의 옆으로 내려가야 볼 수 있는데, 밭으로 활용되는 부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답사에 주의해야 한다.
3.2. 제3곽(三ノ郭)
부산포왜성의 제3곽은 동측과 서측으로 나뉜다. 가운데의 제4곽에서 양쪽의 제3곽을 거쳐 제2곽으로 올라가는 구조이다. 동측 제3곽은 현재 좌성초등학교가 자리한 큰 골짜기를 감싸듯이 증산 동쪽 봉우리까지 길게 뻗어 이 골짜기가 일종의 해자(堀, ほり) 노릇을 하였다. 지금은 매립되었지만 이 골짜기는 좌천동의 이름의 유래가 된 좌자천(佐自川)이 발원하는 곳이기도 하다. 양측 제3곽의 끄트머리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와 부산포왜성의 외곽을 이루던 노보리이시가키는 현재 소실되었으나, 1950년 위성사진을 보면 당시까지는 육안으로 확인할 만큼 명확하게 유적이 남아 있었다.3.2.1. 동측 제3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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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공원 게이트볼장 북동측의 고구치 흔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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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도서관 기단에 잔존하는 이시가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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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곽 남측 절벽의 이시가키 |
동구도서관 방면의 증산공원 입구로 들어서면 우측에 게이트볼장으로 이용되는 제2곽으로 올라가는 나무 데크가 있는데, 그 나무 데크 기둥 아래에 완전히 수풀로 뒤덮여 석축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고구치의 좌측 이시가키가 남아 있다. ㄷ 자 모양으로 꺾인 협축 형태인데, 제3곽과 제2곽이 만나는 경계점이자 제3곽으로 들어오는 고구치의 기단 역할을 했다. 그리고 동구도서관 좌측에 있는 나무 데크를 타고 도서관 앞 전망데크로 나가면, 데크 아래 기단에 남아 있는 제3곽 끄트머리의 이시가키를 관찰할 수 있다.
동구도서관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 우측으로 꺾으면 풀이 무성하게 자란 등산로가 나오는데, 이쪽을 따라가다 보면 제3곽 남측 이시가키를 비교적 잘 관측할 수 있다. 제3곽의 흔적을 거의 온전하게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3.2.2. 서측 제3곽
|
족구장 기단을 이루는 이시가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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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장 측 제3곽 고구치의 우각부 흔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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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장 서측 이시가키 |
3.3. 제2곽(二ノ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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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조성으로 일부 훼손된 제2곽 이시가키 |
3.3.1. 치(雉) ・ 막힌 고구치(虎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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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곽 북측의 치와 고구치 전경 |
3.3.2. 스미야구라다이(隅櫓台)
|
바위 위에 위태롭게 자리한 야구라다이 우각부 |
3.3.3. 정삼품통정대부부령김씨지묘(正三品通政大夫扶寧金氏之墓)
|
니노마루에 위치한 묘역 전경 |
3.4. 제1곽(一ノ郭) ・ 천수(天守)
|
부산포왜성 천수대 |
4. 데지로(出城)
부산포왜성은 최대 규모의 왜성이자 일본군의 최후방 본진이었으므로, 그 크기에 걸맞게 주위를 방어하고자 일종의 전진기지인 데지로[8]를 여러 곳 배치시켰다. 부산포를 호위하는 3곳의 데지로는 물론, 크게 보면 동래왜성과 경상좌수영성까지도 부산포왜성의 데지로를 겸하는 중간기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오늘날 데지로에 해당하던 소형 보루들은 20세기에 부산 지역의 인구가 크게 불어나고 도시화와 난개발이 심하게 진행되면서 거의 멸실된 상태이다.4.1. 자성대왜성
자세한 내용은 자성대왜성 문서 참고하십시오.4.2. 박문구왜성
<colcolor=#fff> 박문구왜성 [ruby(迫, ruby=せ)][ruby(門, ruby=と)][ruby(口, ruby=ぐち)][ruby(倭城, ruby=わじょう)] | Bakmungu Japanese Fortr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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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E0529> 이칭 |
중앙동왜성(中央洞倭城) 출기단성(出崎端城) 목창왜채(木廠倭寨)[추정] |
형태 | 왜성 |
면적 | 미상 |
건설 | 1592년 (선조 25년) |
모리 데루모토 | |
폐성 | 1598년 (선조 31년) |
주소 | 부산광역시 동구 동광동, 광복동, 중앙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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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지방지도』「동래부지도」에 표현된 부산포 중심 지역과 중앙동 일대의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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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용미산신사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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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구왜성이 있었던 지역의 모습(『초량왜관도』) | 18세기 채색 초량왜관도 중 관수가 부분 확대 |
이름의 박문구(迫門口)는 일본어로 세토구치(せとぐち), 즉 좁은 해협을 뜻하는 단어이다. 출기단성(出崎端城)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었는데 출기의 훈독은 데자키(でざき)로, 툭 튀어나온 곶이라는 뜻이며 곧 동산을 의미한다. 『조선일본도설』「사로왜채총도」에는 해당 위치에 목창왜채(木廠倭寨)라는 성채가 등장해서, 이것이 곧 박문구왜성을 묘사한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후대의 초량왜관을 묘사하는 다수의 회화자료에서 초량왜관의 수장이 거주하던 관수가(館首家) 뒤편에 방형의 축대가 관찰되는데 이것이 박문구왜성 천수대의 흔적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성이 있었다는 동산에는 용미산신사가 들어섰다가, 1932년 신작로를 닦으면서 사라졌다.
4.3. 추목도왜성
<colcolor=#fff> 추목도왜성 [ruby(椎, ruby=しい)][ruby(木, ruby=のき)][ruby(島, ruby=じま)][ruby(倭城, ruby=わじょう)] | Bakmungu Japanese Fortr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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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E0529> 이칭 |
동삼동왜성(東三洞倭城) 절영도왜성(絶影島倭城) 한산왜채(閑山倭寨)[추정] |
형태 | 왜성 |
면적 | 미상 |
건설 | 1593년 (선조 25년) |
모리 데루모토 | |
폐성 | 1598년 (선조 31년) |
주소 |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산 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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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도에 묘사된 추목도왜성 석축 (1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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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사진에 촬영된 석축 (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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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존하는 북서측의 석축 | 성돌로 추정되는 석축 잔해 |
1916년 부산지도는 이 위치에 2단의 장방형 석축을 그리고 있는데, 그 형상이 안골포왜성의 중심곽과 거의 동일하다. 지금은 그 흔적을 알아보기 어렵고, 북측면에 성돌로 보이는 석재를 쪼개어 후대에 쌓은 석축만이 높이 1.5m 정도 남아 있다. 이 대지의 남쪽 끝에 있는 쓰레기장 주변도 단을 이루고 있으며, 성벽 돌로 보이는 석재가 간간이 눈에 띈다. 대지의 동남쪽 끝은 약 2m 정도로 경사져 동북쪽으로 연속되며, 서북쪽은 빌라 건물이 들어서면서 일부 삭평된 것으로 보인다. 동북쪽의 급경사 지점까지는 현재 계단식 밭으로 개간되어 있는데, 붕괴된 단의 단면에는 자갈돌과 직경 40~50㎝ 크기의 석재들이 산재해 있다. 1999년 부산박물관이 진행한 지표조사에서 보고되었다.
추목(椎木, しいのき)는 모밀잣밤나무속의 상록수를 칭하는 이름인데, 왜 이 지역에 이런 명칭이 붙었는지는 불명이다. 추목도와 절영도를 따로 보아 추목도성의 위치를 한국해양대학교가 위치한 조도(釣島)로 비정하는 시각도 있으나, 20세기의 실측지도와 항공사진에서 명확하게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일산봉으로 비정하는 것이 적당하다. 또는, 현재 영선동의 영도초등학교가 들어선 부지에 남아있는 석축을 왜성의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도 있다. 일본의 성은 하나의 성에 여러 곳의 데지로가 딸린 경우가 흔하므로 모든 방향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박문구왜성이 위치했던 중앙동 일대가 거제도 방면에서 진입하는 조선 수군을 차단한다면, 추목도왜성이 위치한 일산봉은 반대편의 광안리 방면에서 진입하는 적을 차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 위에 올라서면 부산포, 감만포, 오륙도까지 절영도 동측 해로(海路)를 모두 조망할 수 있다. 현재는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어 접근성이 매우 떨어지고, 수풀이 어지럽게 자라난 밭 사이의 농로를 뚫고 등반하는 것 외에 진입로가 없는 상황이다.
5. 과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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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대박물관 소장 1956년 사진[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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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부산진지성 성지에서 본 출성[11] (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이하 동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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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부산진지성 본환에서 본 이환[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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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부산진지성에서 본 천수대와 본환[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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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부산진지성에서 본 본환과 이환 |
6. 가치
부산포왜성은 왜군의 병력과 물자보급 및 본국과의 연락 등 일본 본토와 조선을 잇는 중요한 병참 기지로서 왜성 중 가장 먼저 축조되었다. 본래 왜군의 헤드쿼터로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왜성이었으나, 지속적인 난개발로 인하여 현재는 극히 일부분밖에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그러나 좌천동 체력단련장 아래에 남아 있는 이시가키에서 정연하게 맞춰진 산기즈미(算木積み)의 모습을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고, 니노마루의 북측에 조선 성곽의 치(雉)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야구라다이(櫓台)가 남아 있는 등 왜성의 특징이 여실히 나타나므로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왜군이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이순신의 부산포 해전이 있던 곳으로 의의가 크다.7. 교통
지하철로 갈 경우 좌천역에 내려 5번 및 3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정공단을 지나 골목길을 거쳐 제일아파트까지 올라가면 거기서부터 증산공원까지 2차례에 걸쳐 경사형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다만 거기까지 올라가는 길은 부산 원도심의 여느 동네와 같이 산복도로가 나 있는 미친 듯한 경사를 자랑하기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버스를 탈 경우 일반버스 38번이나 22번을 타 금성고등학교, 문화아파트, 나웅하이빌 중 한 곳에 내리면 된다. 금성고등학교 및 문화아파트 정류장에 내리면 바로 경사형 엘리베이터를 타고 좌천어린이집이 있는 아래쪽 구루와로 올라갈 수 있고, 나웅하이빌 정류장에 내리면 마찬가지로 가파르지만 비교적 짧은 계단을 올라 동구도서관이 있는 산노마루로 올라갈 수 있다.
8. 여담
부산포왜성의 이시가키는 증산공원의 현대 석축과 뒤섞여 있기 때문에 알아보기 어려울 수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돌이 마름모꼴로 쌓아져 있거나, 모르타르가 심하게 발라져 있어 돌의 표면을 확인하기 어렵거나, 일정한 작은 크기의 돌이 거의 수직으로 쌓여 있는 석축은 대개 현대의 석축이며 왜성 유적이 아니다. 부산포왜성의 이시가키를 이루는 돌은 대개 큼직큼직해서 그 점만 알아둔다면 어느 것이 왜성의 석축인지 비교적 쉽게 구별해낼 수 있을 것이다.9. 외부 링크
10. 관련 문서
[1]
조선 초기부터 왜란까지의 부산진성은 현재 일신기독교병원 주변을 감싸는 방형의 작은 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조선 후기의 성은 부산포왜성의 데지로인 자성대왜성(子城臺倭城)을 약간 개축하여 그대로 사용했다고 추정한다.
[2]
조선 전기 부산진성 터로 추정되는 정공단(鄭公壇)의 동쪽에 자성대가, 서쪽에 증산이 존재한다.
[3]
穡은 墻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4]
아마도 천수(天守)를 말하는 듯하다.
[5]
웅천왜성(熊川倭城) 역시 축성에 4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6]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7가에 있었던 용미산(龍尾山)에 자리했다고 추정되나, 주변 지형이 깎여 나가 찾아볼 수 없다.
[7]
여기에서 천수(天守)의 기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히메지 성,
오사카 성,
구마모토 성 등 유명한 일본의 성들을 보고 천수가 영주의 위세를 과시하는, 일종의 랜드마크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천수는 그저 중심의 대형 망루의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따라서 그 내부는 어둡고 난방도 되지 않아 주거에 적합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바와는 달리 다이묘(大名)가 거주하던 시설은 천수가 아니라 고텐(御殿)이었다. 만일 부산포왜성의 천수가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서북향이 아닌, 왜성의 안쪽을 향해 남향으로 지어졌어야 했다. 굳이 왜성 내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서북향을 택하였음은 서북쪽 방향에서 육로로 쳐들어올 조명연합군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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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는 지성(支城)이라는 개념으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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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미산(龍尾山)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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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에 보이는 흰색 부산일신기독병원의 배후산지에 왜성의 형태가 뚜렷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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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지 제목이 거꾸로 달려 있다. 실제로는 데지로(출성)에서 본성을 바라본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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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증산공원 중심부에서 동구도서관이 있는 동북측을 바라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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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성북고개 인근에서 증산공원이 있는 동남측을 바라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