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06 14:04:17

부산포왜성

고바야카와 성에서 넘어옴

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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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E0529><colcolor=#fff> 부산포왜성
[ruby(釜, ruby=プ)][ruby(山, ruby=サン)][ruby(浦, ruby=ポ)][ruby(倭城, ruby=わじょう)] | Busan Japanese Fortress
파일:ImageView1.jpg
이칭 증산왜성(甑山倭城)
범천증산성(凡川甑山城)
소조천성(小早川城)
모성(母城)
형태 왜성
면적 약 80,000m² 이상
건설 1592년 (선조 25년)
모리 데루모토 모리 히데모토
폐성 1598년 (선조 31년)
주소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범일동

1. 개요2. 역사3. 위치 및 구조
3.1. 제4곽(四ノ郭) ・ 내성 정문(內大手口)3.2. 제3곽(三ノ郭)
3.2.1. 동측 제3곽3.2.2. 서측 제3곽
3.3. 제2곽(二ノ郭)
3.3.1. 치(雉) ・ 막힌 고구치(虎口)3.3.2. 스미야구라다이(隅櫓台)3.3.3. 정삼품통정대부부령김씨지묘(正三品通政大夫扶寧金氏之墓)
3.4. 제1곽(一ノ郭) ・ 천수(天守)
4. 데지로(出城)
4.1. 자성대왜성4.2. 박문구왜성4.3. 추목도왜성
5. 과거 모습6. 가치7. 교통8. 여담9. 외부 링크10.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좌천동에 걸쳐 있는 일본식 평산성. 임진왜란 당시 제7군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가 쌓았다. 부산포왜성은 현재 본성(本城)과 데지로(出城) 1개소가 남아 있는데, 본 문서에서는 본성인 증산왜성(甑山倭城)에 대해서 다루기로 한다.

2. 역사

파일:스크린샷 2025-01-01 215043.png
『1872년 지방지도』 「부산진지도」에 나타난 부산포왜성과 부산고기(釜山故基)
임진왜란 왜군 한반도에 1차적으로 지은 왜성들 가운데 하나로,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왜군의 총사령부, 구심점이자 최후의 보루로서 기능했던 성이다. 본래 이 지역은 부산진성(釜山鎭城)[1]이 있던 곳이다.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인 부산진 전투가 일어났던 곳으로, 정발(鄭撥) 장군이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몇 달 되지도 않은 선조 25년(1592) 9월 1일 이순신이 올린 장계에 이미 부산포왜성이 언급되었다.
咸聚釜山城內 官舍盡數撤去 築土造家己所巢穴多 至百餘戶 城外東西山麓 閭閣櫛比 連穡接屋 亦幾三百餘戶 皆是倭人 自作之家 其中大含層階 粉壁有若佛寺 原其所爲痛憤

부산진성 안을 취하여 관아를 모두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흙을 다져 지은 집이 많아 일백 호에 이르렀습니다.

성 밖 동쪽과 서쪽의 산기슭[2]에 집이 즐비한데 담장[3]을 이어 접한 가옥 또한 3백여 호입니다.

모두 왜인(倭人)이 스스로 지은 집인데,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층계 위에 들어선 것[4]은 벽에 분을 발랐고 마치 불당 같았습니다.

그곳을 보니 통분하였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선조 25년(1592) 4월 옛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곧바로 축성을 시작하여 불과 넉 달 만에 기본만 축성한 듯하다.[5] 그러나 일본 쪽 기록을 보면 축조는 선조 26년(1593) 3월부터 8월까지 약 5개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 성에는 왜군 1만여 명과 배 400여 척이 상시 주둔했는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주둔한 적도 있다고 한다.

선조 31년(1598) 8월 18일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워지자, 10월 15일 다섯 다이로(大老)는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앞으로 명령서를 보내 '울산이 공격당할 때는 서생포를 단단히 지킬 것, 비상시에는 서생포성을 버리고 부산성으로 빠져나갈 것'을 지시했다.

10월 27일, 다섯 다이로 중 하나이자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구로다에게 명령서를 내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협의 하에 서생포왜성에서 부산포왜성으로 퇴각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11월 24일 가토 구로다는 부산포왜성을 소각(燒却)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왜란이 끝난 후 현재 좌천동에 있던 부산포동첨절제사영(釜山浦同僉節制使營)은 부산포왜성의 데지로인 자성대왜성에 다시 설치되었고, 본래 부산포왜성의 본성이었던 증산(甑山)의 성곽은 버려졌다. 세월이 흘러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 한반도를 점령한 일본인들은 자기들 조상이 쌓은 것이니만큼 증산왜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었고, 1945년 광복 이후에도 큰 문제 의식 없이 유지됐다. 1963년 1월 21일에는 부산일본성(釜山日本城)이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35호로 등재되었다. 하지만 1969년 8월 1일 '보존가치가 없다.'는 사유로 사적 지정이 해제됐다. 그 이후 문화재 등급을 부여받지 못하고 별다른 보존조치 없이 대체로 방치되어 오다가, 현재는 산노마루 부분까지가 증산공원(甑山公園)이 되었다. 가장 아래의 곡륜(曲輪) 위에는 좌천시민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부산포왜성을 쌓은 산의 모습이 마치 떡시루나 솥뚜껑같이 생겼다고 하여 증산(甑山), 부산(釜山)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이곳의 포구 이름은 부산포(富山浦)였다. 왜란 직전 부산포(釜山浦)로 바뀌기 때문에 맞는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와전의 역사가 짧지 않은지, 고종 9년(1872) 지방지도에도 증산왜성이 부산고기(釜山故基)로 표기되었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은 부산(富山)이라는 이름이 고려시대 때부터 이곳에 있었던 부산 부곡(部曲)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3. 위치 및 구조

파일:J099-038-006-001.jpg
조선총독부 실측 부산지도 (1916)
파일:규슈제대 부산성도.jpg
규슈 제국대학 도서관 소장 『부산성도(釜山城圖)』
파일:스크린샷 2025-01-01 235219.png
부산포왜성 일대 위성사진 (1950)
한국에 남아 있는 왜성 중에서 범위가 가장 넓다. 동래왜성(東萊倭城), 박문구왜성(迫門口倭城),[6] 영도왜성(影島倭城), 자성대왜성을 지성(支城)으로 두었을 것이다. 지성을 제외하고서라도 좌천동 행정복지센터에서 구세군 부산영문교회 언저리까지 감싸는, 방대한 소토구루와(外郭)를 운용했다고 추정한다.

현재 남아 있는 증산왜성만 따지면 윤곽식 산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미 소실된 여러 데마루(出丸)와 데지로(出城)들을 합하면 평산성에 가깝다. 부산포를 끼고 자성대를 둘러싼 채 동천(東川) 하구까지를 긴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로 감싸 왜군 본영(本營)다운 규모이다. 대부분 내탁(內托)을 다졌으나, 니노마루와 산노마루의 북서측 방면은 협축으로 쌓아 긴 도베이(土塀)와 야구라(櫓)가 설치되었던 듯하다. 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에서 제작한 부산성도(釜山城圖)를 보면 본성의 서북측 바깥에 데지로(出城)를 설치했으므로, 북서쪽 육로로 쳐들어올 조명연합군의 동선을 고려한 것 같다. 이시가키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는 메쌓기(野面積み), 석축의 열을 맞추어 쌓은 줄눈쌓기(布積み) 기법을 취하였다.

그러나 구한말부터 도심으로 개발되어 이시가키가 많이 파괴되었고, 그마저도 1950년대 이후 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본성 이외의 부가적인 시설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또한 본성도 증산공원으로 꾸며지면서 협축(夾築)으로 쌓았던 부분을 삭평(削平)하거나 고구치(虎口)를 메워 버리는 등 상당히 변형되었다.

3.1. 제4곽(四ノ郭) ・ 내성 정문(內大手口)

파일:증산왜성 좌천어린이집 이시가키.jpg
부산포왜성의 상징이 된 고구치의 이시가키
파일:20211026_144615.jpg
좌천체육단련장 기단에 잔존하는 이시가키 측면
현재 좌천아파트와 좌천동 체력단련장이 들어서 있는 곳은 한때 증산왜성의 전면 방어를 맡았던 [[일본의 성/구루와|부곽(副郭)] 자리였다. 현재는 콘크리트 기초와 성토(盛土)로 인해 그 윤곽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지만, 좌천어린이집의 옆에 높이 5m가량 되는 이시가키(石垣)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이시가키는 제4곽으로 진입하는 전면부 마스가타 고구치(桝形虎口)의 우측 석축이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길이 좁아 꽤 위압감을 준다.

좌천체육단련장 콘크리트 기단 아래에는 제4곽의 우각부가 남아 있다. 왜성의 모서리에서 자주 보이는 산기즈미(算木積み)가 뚜렷하게 남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이곳은 작은 등산로의 옆으로 내려가야 볼 수 있는데, 밭으로 활용되는 부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답사에 주의해야 한다.

3.2. 제3곽(三ノ郭)

부산포왜성의 제3곽은 동측과 서측으로 나뉜다. 가운데의 제4곽에서 양쪽의 제3곽을 거쳐 제2곽으로 올라가는 구조이다. 동측 제3곽은 현재 좌성초등학교가 자리한 큰 골짜기를 감싸듯이 증산 동쪽 봉우리까지 길게 뻗어 이 골짜기가 일종의 해자(堀, ほり) 노릇을 하였다. 지금은 매립되었지만 이 골짜기는 좌천동의 이름의 유래가 된 좌자천(佐自川)이 발원하는 곳이기도 하다. 양측 제3곽의 끄트머리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와 부산포왜성의 외곽을 이루던 노보리이시가키는 현재 소실되었으나, 1950년 위성사진을 보면 당시까지는 육안으로 확인할 만큼 명확하게 유적이 남아 있었다.

3.2.1. 동측 제3곽

파일:20211026_164401.jpg
증산공원 게이트볼장 북동측의 고구치 흔적
파일:20210916_152951.jpg
동구도서관 기단에 잔존하는 이시가키
파일:20211028_154521.jpg
제3곽 남측 절벽의 이시가키
부산포왜성의 동측 제3곽은 그 흔적을 찾기 쉽지 않다. 성의 동쪽 부분으로 길게 돌출되어 동구도서관이 있는 봉우리의 정상까지 뻗어 있었던 부곽은 주차장과 동구도서관을 조성하며 그 이시가키가 대부분 묻혔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아데 그마저도 아주 유심히 봐야 알 수 있다.

동구도서관 방면의 증산공원 입구로 들어서면 우측에 게이트볼장으로 이용되는 제2곽으로 올라가는 나무 데크가 있는데, 그 나무 데크 기둥 아래에 완전히 수풀로 뒤덮여 석축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고구치의 좌측 이시가키가 남아 있다. ㄷ 자 모양으로 꺾인 협축 형태인데, 제3곽과 제2곽이 만나는 경계점이자 제3곽으로 들어오는 고구치의 기단 역할을 했다. 그리고 동구도서관 좌측에 있는 나무 데크를 타고 도서관 앞 전망데크로 나가면, 데크 아래 기단에 남아 있는 제3곽 끄트머리의 이시가키를 관찰할 수 있다.

동구도서관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 우측으로 꺾으면 풀이 무성하게 자란 등산로가 나오는데, 이쪽을 따라가다 보면 제3곽 남측 이시가키를 비교적 잘 관측할 수 있다. 제3곽의 흔적을 거의 온전하게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3.2.2. 서측 제3곽

파일:20210916_151042.jpg
족구장 기단을 이루는 이시가키
파일:20210916_155942.jpg
족구장 측 제3곽 고구치의 우각부 흔적
파일:20211116_145712.jpg
족구장 서측 이시가키
부산포왜성의 서측 제3곽은 현재 족구장으로 활용된. 석축 위로 족구장 주변을 도는 산책로와 나무 난간이 설치되었는데, 정말 일부지만 고구치의 우각부도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족구장의 서쪽에는 비교적 온전하고 높이도 꽤 높은 이시가키가 일부 구간 남아 있다. 그러나 이곳은 통하는 길이 없기 때문에 증산 둘레길 옆으로 빠져 수풀을 헤치면서 가야지만 볼 수 있다. 겨울에는 겨우겨우 볼 수 있겠으나 여름에는 우거진 수풀과 진드기, 거미가 득실대는 곳이며 경사도 꽤 있기 때문에 다칠 수가 있으므로 되도록이면 무리하지 않기를 추천한다.

3.3. 제2곽(二ノ郭)

파일:20210916_154342.jpg
파일:20211111_162832.jpg
공원 조성으로 일부 훼손된 제2곽 이시가키
부산포왜성의 제2곽은 현재 증산공원의 중심부로서, 게이트볼장, 원형 광장, 각종 운동기구 등이 올라앉아 있다. 이렇게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원래 제2곽 안쪽으로 마스가타(枡形)를 두었던 고구치를 새로 석축을 쌓아 막아버리고, 협축으로 쌓아올렸던 야구라다이(櫓台)와 도베이(土塀)의 기초를 삭평해버린 흔적이 곳곳에 있으나 대체로 이시가키가 다른 부분에 비해 제법 온전하다. 공원 위에서는 가장자리에 난간이 둘러져 있고 수풀이 우거졌기 때문에 관찰하기 어렵고, 제2곽을 한 바퀴 도는 증산 둘레길에서 장대한 이시가키를 관측할 수 있다.

3.3.1. 치(雉) ・ 막힌 고구치(虎口)

파일:20210916_155144.jpg
제2곽 북측의 치와 고구치 전경
부산포왜성에는 조선식 성곽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치(雉)가 서너 군데 존재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현재 부산포왜성의 치가 남은 곳은 제2곽 북측이 유일하다. 이러한 모습은 서생포왜성과 웅천왜성 등 여러 왜성들에서 나타난다. 본래 제2곽으로 들어가는 내승형(內枡形) 고구치의 좌측에 연이어 돌출되어 있는 치형 야구라다이(櫓台)는 현재도 그 모습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고구치는 공원의 조성과 함께 현대의 마름모꼴 석축으로 메워져 그 흔적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점은 왜성이 조선식 성곽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경관이라고 할 수 있다.

3.3.2. 스미야구라다이(隅櫓台)

파일:20210916_155520.jpg
바위 위에 위태롭게 자리한 야구라다이 우각부
제2곽의 서측 모서리에는 규모가 큰 야구라다이가 남아 있다. 증산 둘레길을 돌다 보면 이 야구라다이가 암반 위에 올라앉은 장대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이 부분도 부산포왜성의 상징과도 같은 모습으로, 증산왜성을 찍은 사진을 보면 자주 등장하는 시설이다. 이 역시 원래는 공원 바닥보다 높이 솟아 있었을 테지만 현재는 삭평된 채 남아 있다.

3.3.3. 정삼품통정대부부령김씨지묘(正三品通政大夫扶寧金氏之墓)

파일:KakaoTalk_20211119_170301838.jpg
니노마루에 위치한 묘역 전경
제2곽 위의 놀이터 한가운데에 뜬금없이 무덤이 한 기 조성되어 있다. 묘비에 적혀 있는 바에 따르면 명예관직인 통정대부(通政大夫)라는 직함을 받은 부령 김씨의 무덤인데, SBS 방송에 따르면 묘비의 주인은 부안 김씨 김재성이라 한다. 본래 무덤은 용두산공원 자리에 있었는데 1920년대에 그 자리를 개발하면서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고. 왜성들이 폐성이 되면서 이렇게 성 위에 무덤이 올라앉은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극단적인 예시 중 하나가 구포왜성인데, 성 위에 무연고자 묘가 90기가 넘게 자리를 잡았다. 오죽하면 파묘 및 이장을 권유하는 광고 플랜카드가 산 곳곳에 걸려 있을 정도.

3.4. 제1곽(一ノ郭) ・ 천수(天守)

파일:20210916_160717.jpg
부산포왜성 천수대
부산포왜성의 제1곽은 삭평되어 현재 너른 모래 운동장과 농구장이 자리하고 있다. 높이 솟아 있던 천수 기단이 깎여나가고 동남측의 고구치는 메워졌지만 제2곽과 마찬가지로 이시가키가 꽤 잘 남아 있는 편이고, 제2곽과 마찬가지로 서북측을 향해 도베이와 천수가 있었다.[7] 농구장이 있는 서측 귀퉁이가 천수 기단 터였는데 60년대까지 원형을 유지했다고 한다. 수백 명이 주둔할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데, 천수가 있었던 곳의 반대편을 향해 3층짜리 증산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전망대의 모습이 어딘가 일본 중세 성곽의 야구라(櫓)를 닮았다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

4. 데지로(出城)

부산포왜성은 최대 규모의 왜성이자 일본군의 최후방 본진이었으므로, 그 크기에 걸맞게 주위를 방어하고자 일종의 전진기지인 데지로[8]를 여러 곳 배치시켰다. 부산포를 호위하는 3곳의 데지로는 물론, 크게 보면 동래왜성 경상좌수영성까지도 부산포왜성의 데지로를 겸하는 중간기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오늘날 데지로에 해당하던 소형 보루들은 20세기에 부산 지역의 인구가 크게 불어나고 도시화와 난개발이 심하게 진행되면서 거의 멸실된 상태이다.

4.1. 자성대왜성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자성대왜성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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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박문구왜성

<colcolor=#fff> 박문구왜성
[ruby(迫, ruby=せ)][ruby(門, ruby=と)][ruby(口, ruby=ぐち)][ruby(倭城, ruby=わじょう)] | Bakmungu Japanese Fortress
파일:2022060209240140082_l.jpg
<colbgcolor=#BE0529> 이칭 중앙동왜성(中央洞倭城)
출기단성(出崎端城)
목창왜채(木廠倭寨)[추정]
형태 왜성
면적 미상
건설 1592년 (선조 25년)
모리 데루모토
폐성 1598년 (선조 31년)
주소 부산광역시 동구 동광동, 광복동, 중앙동
파일:스크린샷 2025-01-06 074645.png
『1872년 지방지도』「동래부지도」에 표현된
부산포 중심 지역과 중앙동 일대의 관계
파일:1921년 부산 중구 광복동 용미산신사.jpg
1921년 용미산신사의 모습
파일:PS01001001_duk006_2017_0512090608004_duk006251-00-012.jpg
파일:L20180102.22021000031i1.jpg
박문구왜성이 있었던 지역의 모습(『초량왜관도』) 18세기 채색 초량왜관도 중 관수가 부분 확대
현재의 롯데백화점 광복점 자리에 솟아 있었던 동산(東山)[9]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부산포왜성의 데지로이다. 1593년 7월 27일 모리 데루모토가 절영도왜성과 함께 축조했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다. 이미 17세기에 초량왜관이 들어섰고 19세기가 되면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로 변모했으며, 20세기에는 아예 부산부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시가지화되어 그 규모, 형태 등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다. 위치상 거제도 방면에서 다대포를 지나 부산포로 진입할 수 있는 절영도와 동산 사이의 해협을 차단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름의 박문구(迫門口)는 일본어로 세토구치(せとぐち), 즉 좁은 해협을 뜻하는 단어이다. 출기단성(出崎端城)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었는데 출기의 훈독은 데자키(でざき)로, 툭 튀어나온 곶이라는 뜻이며 곧 동산을 의미한다. 『조선일본도설』「사로왜채총도」에는 해당 위치에 목창왜채(木廠倭寨)라는 성채가 등장해서, 이것이 곧 박문구왜성을 묘사한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후대의 초량왜관을 묘사하는 다수의 회화자료에서 초량왜관의 수장이 거주하던 관수가(館首家) 뒤편에 방형의 축대가 관찰되는데 이것이 박문구왜성 천수대의 흔적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성이 있었다는 동산에는 용미산신사가 들어섰다가, 1932년 신작로를 닦으면서 사라졌다.

4.3. 추목도왜성

<colcolor=#fff> 추목도왜성
[ruby(椎, ruby=しい)][ruby(木, ruby=のき)][ruby(島, ruby=じま)][ruby(倭城, ruby=わじょう)] | Bakmungu Japanese Fortress
파일:5969967766_436be7769b_o.jpg
<colbgcolor=#BE0529> 이칭 동삼동왜성(東三洞倭城)
절영도왜성(絶影島倭城)
한산왜채(閑山倭寨)[추정]
형태 왜성
면적 미상
건설 1593년 (선조 25년)
모리 데루모토
폐성 1598년 (선조 31년)
주소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산 137
파일:스크린샷 2024-12-05 083855.png
부산지도에 묘사된 추목도왜성 석축 (1916)
파일:스크린샷 2025-01-06 090940.png
항공사진에 촬영된 석축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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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존하는 북서측의 석축 성돌로 추정되는 석축 잔해
절영도 동쪽 해발 약 74.2m의 일산봉(日傘峰)에 장방형으로 쌓은 데지로이다. 정상부는 대지상(臺地狀)을 이루고, 동쪽은 자연 경사면을 이루어 내려가다가 도로 부분에서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동북쪽 능선을 따라 바닷가의 암반으로 이어진다. 동북쪽의 수직 해자로 추정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경사가 급한 지형을 보이고 있다. 서쪽으로는 작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62.5m의 낮은 구릉이 있고, 남서쪽으로는 제1곽으로 추정되는 대지상의 지형과 연결되며 역시 구릉의 아래쪽은 급경사이다. 남쪽의 경우는 현재 태종대로 가는 도로에서 빌라로 들어오는 주 통로로 이곳을 제외하고는 역시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어 사방이 대체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1916년 부산지도는 이 위치에 2단의 장방형 석축을 그리고 있는데, 그 형상이 안골포왜성의 중심곽과 거의 동일하다. 지금은 그 흔적을 알아보기 어렵고, 북측면에 성돌로 보이는 석재를 쪼개어 후대에 쌓은 석축만이 높이 1.5m 정도 남아 있다. 이 대지의 남쪽 끝에 있는 쓰레기장 주변도 단을 이루고 있으며, 성벽 돌로 보이는 석재가 간간이 눈에 띈다. 대지의 동남쪽 끝은 약 2m 정도로 경사져 동북쪽으로 연속되며, 서북쪽은 빌라 건물이 들어서면서 일부 삭평된 것으로 보인다. 동북쪽의 급경사 지점까지는 현재 계단식 밭으로 개간되어 있는데, 붕괴된 단의 단면에는 자갈돌과 직경 40~50㎝ 크기의 석재들이 산재해 있다. 1999년 부산박물관이 진행한 지표조사에서 보고되었다.

추목(椎木, しいのき)는 모밀잣밤나무속의 상록수를 칭하는 이름인데, 왜 이 지역에 이런 명칭이 붙었는지는 불명이다. 추목도와 절영도를 따로 보아 추목도성의 위치를 한국해양대학교가 위치한 조도(釣島)로 비정하는 시각도 있으나, 20세기의 실측지도와 항공사진에서 명확하게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일산봉으로 비정하는 것이 적당하다. 또는, 현재 영선동의 영도초등학교가 들어선 부지에 남아있는 석축을 왜성의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도 있다. 일본의 성은 하나의 성에 여러 곳의 데지로가 딸린 경우가 흔하므로 모든 방향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박문구왜성이 위치했던 중앙동 일대가 거제도 방면에서 진입하는 조선 수군을 차단한다면, 추목도왜성이 위치한 일산봉은 반대편의 광안리 방면에서 진입하는 적을 차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 위에 올라서면 부산포, 감만포, 오륙도까지 절영도 동측 해로(海路)를 모두 조망할 수 있다. 현재는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어 접근성이 매우 떨어지고, 수풀이 어지럽게 자라난 밭 사이의 농로를 뚫고 등반하는 것 외에 진입로가 없는 상황이다.

5. 과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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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대박물관 소장 1956년 사진[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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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부산진지성 성지에서 본 출성[11] (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이하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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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부산진지성 본환에서 본 이환[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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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부산진지성에서 본 천수대와 본환[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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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부산진지성에서 본 본환과 이환

6. 가치

부산포왜성은 왜군의 병력과 물자보급 및 본국과의 연락 등 일본 본토와 조선을 잇는 중요한 병참 기지로서 왜성 중 가장 먼저 축조되었다. 본래 왜군의 헤드쿼터로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왜성이었으나, 지속적인 난개발로 인하여 현재는 극히 일부분밖에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그러나 좌천동 체력단련장 아래에 남아 있는 이시가키에서 정연하게 맞춰진 산기즈미(算木積み)의 모습을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고, 니노마루의 북측에 조선 성곽의 치(雉)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야구라다이(櫓台)가 남아 있는 등 왜성의 특징이 여실히 나타나므로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왜군이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이순신 부산포 해전이 있던 곳으로 의의가 크다.

7. 교통

지하철로 갈 경우 좌천역에 내려 5번 및 3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정공단을 지나 골목길을 거쳐 제일아파트까지 올라가면 거기서부터 증산공원까지 2차례에 걸쳐 경사형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다만 거기까지 올라가는 길은 부산 원도심의 여느 동네와 같이 산복도로가 나 있는 미친 듯한 경사를 자랑하기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버스를 탈 경우 일반버스 38번이나 22번을 타 금성고등학교, 문화아파트, 나웅하이빌 중 한 곳에 내리면 된다. 금성고등학교 및 문화아파트 정류장에 내리면 바로 경사형 엘리베이터를 타고 좌천어린이집이 있는 아래쪽 구루와로 올라갈 수 있고, 나웅하이빌 정류장에 내리면 마찬가지로 가파르지만 비교적 짧은 계단을 올라 동구도서관이 있는 산노마루로 올라갈 수 있다.

8. 여담

부산포왜성의 이시가키는 증산공원의 현대 석축과 뒤섞여 있기 때문에 알아보기 어려울 수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돌이 마름모꼴로 쌓아져 있거나, 모르타르가 심하게 발라져 있어 돌의 표면을 확인하기 어렵거나, 일정한 작은 크기의 돌이 거의 수직으로 쌓여 있는 석축은 대개 현대의 석축이며 왜성 유적이 아니다. 부산포왜성의 이시가키를 이루는 돌은 대개 큼직큼직해서 그 점만 알아둔다면 어느 것이 왜성의 석축인지 비교적 쉽게 구별해낼 수 있을 것이다.

9. 외부 링크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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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초기부터 왜란까지의 부산진성은 현재 일신기독교병원 주변을 감싸는 방형의 작은 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조선 후기의 성은 부산포왜성의 데지로인 자성대왜성(子城臺倭城)을 약간 개축하여 그대로 사용했다고 추정한다. [2] 조선 전기 부산진성 터로 추정되는 정공단(鄭公壇)의 동쪽에 자성대가, 서쪽에 증산이 존재한다. [3] 穡은 墻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4] 아마도 천수(天守)를 말하는 듯하다. [5] 웅천왜성(熊川倭城) 역시 축성에 4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6]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7가에 있었던 용미산(龍尾山)에 자리했다고 추정되나, 주변 지형이 깎여 나가 찾아볼 수 없다. [7] 여기에서 천수(天守)의 기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히메지 성, 오사카 성, 구마모토 성 등 유명한 일본의 성들을 보고 천수가 영주의 위세를 과시하는, 일종의 랜드마크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천수는 그저 중심의 대형 망루의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따라서 그 내부는 어둡고 난방도 되지 않아 주거에 적합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바와는 달리 다이묘(大名)가 거주하던 시설은 천수가 아니라 고텐(御殿)이었다. 만일 부산포왜성의 천수가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서북향이 아닌, 왜성의 안쪽을 향해 남향으로 지어졌어야 했다. 굳이 왜성 내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서북향을 택하였음은 서북쪽 방향에서 육로로 쳐들어올 조명연합군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다. [8] 한국어로는 지성(支城)이라는 개념으로 부르기도 한다. [9] 용미산(龍尾山)이라고도 불린다. [10] 정면에 보이는 흰색 부산일신기독병원의 배후산지에 왜성의 형태가 뚜렷하게 보인다. [11] 왜인지 제목이 거꾸로 달려 있다. 실제로는 데지로(출성)에서 본성을 바라본 사진이다. [12] 현재의 증산공원 중심부에서 동구도서관이 있는 동북측을 바라본 사진. [13] 현재의 성북고개 인근에서 증산공원이 있는 동남측을 바라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