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庚子字. 1420년 주자소(鑄字所)에서 만든 동(구리)활자로 금속활자이다.기존의 계미자(癸未字)가 가진 단점을 보완해서 만든 두 번째 동(구리)활자이다. 중세 한국사의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금속활자 사용을 본격적으로 활성화시킨 금속활자라 할 수 있다.
조선 활자의 최종 버전인 갑인자의 모체가 된다.
2. 상세
고려 때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었지만(직지) 조선초 까지 아직 활성화 되지 못했던 듯 하다. 그래서 선대왕이었던 태종 3년에 태종의 명에 따라서 주자소에서 새로운 활자를 만들었는데 그 활자가 바로 계미자(癸未字)였다.그런데 계미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활자의 모양이 큰데다 가지런하지 못하고 거기다 거칠어 인쇄를 하는 도중에 활자가 미친듯이 흔들렸던 것. 때문에 하루에 고작 몇 장 인쇄가 한계였었고 그냥 붓 잡고 서책을 필사하는 것이 훨씬 더 나았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결국 세종은 새로운 활자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주자소에 새로운 활자주조를 명하게 된다. 기존활자의 문제점은 밀랍을 이용해서 활자를 고정시키는 방법이였는데 문제는 밀랍은 접착성이 상당이 떨어졌던 것. 밀랍으로 고정을 하면 접착도 잘 안될 뿐만 아니라 밀랍 양에 따라 활자의 높낮이가 제각각이었던 것도 한몫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공조참판이었던 이천
세종 2년인 1420년, 새로운 타입의 금속활자가 완성되었다. 이전 활자들이 고정방식으로 썼던 밀랍을 통한 고정방식을 과감하게 버렸고, 그 대신에 조립방식을 채택하여 대나무를 이용한 조립을 통해 활자들이 빠지거나 흔들리지 않게 꽉 잡아 고정시키면서 효율을 올렸다.
3. 평가
경자자. 세종 2년, 1420년. 조선엔 새로운 활판 인쇄술이 탄생했다.
1234년 고려는 금속활자를 개발했으나, 크게 실용화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태종 3년, 태종의 지시에 따라 계미자를 만들었으나, 이 또한 밀랍으로 활자를 고정하는 방식을 취해 활자의 안정성과 인쇄 속도에 결함이 있어 크게 실용화되진 못했다.
경자년에 개발됐다하여 이름붙여진 바로 이 경자자는, 계미자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대나무를 이용한 조립식 방식을 채택했으니,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인쇄기술이라 할 것이다.
경자자는 후일 세종 16년 서기 1434년, 조선이 개발한 가장 아름다운 활자인 갑인자의 모체가 됐을 뿐 아니라, 갑인자가 개발되기 전까지 집현전을 비롯한 조정에서 쏟아지던 수많은 문화적, 정치적 성과들을 빠르게 인쇄하여 조선 곳곳으로 전파하는, 이른바 조선문화발전의 혈관 노릇을 톡톡히 수행하게 된다.
경자자. 이것은 우리 5천년 역사 그 최고의 시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세종의 시대를 여는 첫 신호탄이라 할 것이다.
드라마 《대왕 세종》 50회 中
1234년 고려는 금속활자를 개발했으나, 크게 실용화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태종 3년, 태종의 지시에 따라 계미자를 만들었으나, 이 또한 밀랍으로 활자를 고정하는 방식을 취해 활자의 안정성과 인쇄 속도에 결함이 있어 크게 실용화되진 못했다.
경자년에 개발됐다하여 이름붙여진 바로 이 경자자는, 계미자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대나무를 이용한 조립식 방식을 채택했으니,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인쇄기술이라 할 것이다.
경자자는 후일 세종 16년 서기 1434년, 조선이 개발한 가장 아름다운 활자인 갑인자의 모체가 됐을 뿐 아니라, 갑인자가 개발되기 전까지 집현전을 비롯한 조정에서 쏟아지던 수많은 문화적, 정치적 성과들을 빠르게 인쇄하여 조선 곳곳으로 전파하는, 이른바 조선문화발전의 혈관 노릇을 톡톡히 수행하게 된다.
경자자. 이것은 우리 5천년 역사 그 최고의 시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세종의 시대를 여는 첫 신호탄이라 할 것이다.
드라마 《대왕 세종》 50회 中
능률상승에 대한 기록은 제각각이다. 《세종실록》에서는 몇백지라 하였고, 다른 기록에서는 몇십여지라고 되어있다.
경자자가 새롭게 개발되면서 이전과는 다르게 인쇄양이 비약적으로 상승함에 따라 서책을 더 효율적으로 인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서책의 대량 보급에는 여전히 부족할 수밖에 없어 조선 시대 내내 문화, 행정과 교육 발전의 발목을 잡았다. 오죽하면 조선 효종 때 명재상 김육도 사재를 털어 주자소 발전에 미력이나마 보탰으며 대체 의학 서적이나 애들 교과서 등의 인쇄를 위해 사설 인쇄소도 따로 차려야 했을 정도. 조선 활자의 계발은 공식적으로 선조 대가 마지막이다.
근대 제국주의 열강들은 물론, 오스만 투르크,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서류의 양은 실로 산을 이룰만큼 엄청났던 점을 생각해 본다면, 조선이라 할지라도 호패법, 대동법, 군역 등 광범위한 행정력을 가졌던 탓에 활자 인쇄의 완전 적용은 커녕 종이, 먹 등 물자를 대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테니 활자 인쇄가 필사(筆寫)를 완전 대체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울러 활자의 계발이 없었더라면 서책의 인쇄 및 보급도 대국 의존도가 크게 높아졌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무리 한계가 있었다 한들 조선 활자의 계발과 이용을 폄훼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