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경복궁과 자금성을 비교하는 문서.2. 비교
과거에는 경복궁이 자금성에 비하여 비교도 안될 정도로 무척 작고 초라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자금성이 경복궁의 수십배 크기이며, 심하게는 경복궁이 자금성의 화장실 정도 크기라는 황당한 말까지 있었을 정도로 과장된 루머가 퍼져 있었다. 국공내전 이래로 1988년에 중국 관광이 이뤄지기 시작하기 전까지 일반인들은 중국을 왕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루머가 퍼져도 진실을 확인하기 어려웠던 것. 사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양국 정부 요인들 역시 1983년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 때까지 30년 동안 양국을 전혀 방문하지 않던 시절이었다.또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을 만든다면서 대다수의 전각들을 허물어버린 데다가, 상당 기간 동안 전후재건 탓에 문화재 보존 및 발굴이 후순위로 미루어져 경복궁 복원이 한동안 진척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소수의 전각만 남은 경복궁과 대부분의 전각이 남은 자금성을 비교해보면서 경복궁이 초라하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기는 했다.[1]
당시 자금성이 경복궁의 수십 배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는 루머는 주로 두 궁궐이 완공되었을 당시 칸 수를 비교한 것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경복궁은 처음에 지어졌을 때는 필수 건물만 지어진 매우 작은 규모로[2] 궁궐 담장조차도 없는 상태였다. 이후 경복궁은 세종 대에 대규모 증축을 거친 후 조선 전기 내내 지속적으로 전각을 새로 건축하며 대형화되었다. 고종 시절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했을 때의 규모는 처음 넓이의 20배 정도가 되었다. 이는 자금성의 60% 정도가 된다. 한편 자금성의 경우 처음에 지어질 때부터 대륙의 풍부한 물적,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엄청난 규모로 지어졌고[3] 처음 완공된 후 후원 조성 등 생활 편의시설을 보완한 것을 제외하면 전각 자체는 처음에 세팅된 것에서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2.1. 단순 면적
이 짤은 흔히 자금성과 경복궁의 넓이가 비슷하다는 논지에서 인용하는 이미지이다.
이 논의에 앞서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는데, 위의 사진에 빨간색으로 테두리 표시한 부분은 현대의 자금성이라고 부르는 부분이고 현대와 과거의 자금성이라 인식이 달랐다는 점이다 현대의 자금성이라 인식하는 부분은 이미지 빨간영역인 황성 내부의 궁성이며 초록색은 천안문으로 황성의 정문이다.
황성이라고 부르는 천안문을 정문으로 하는 성벽을 당대 사람들은 자금성이라고 불렀고 오문을 정문으로 하는 영역은 궁성이라고 불렀다. 위 사진으로 보면 제일 밑에 초록색으로 원으로 표시한 부분이 천안문으로, 빨간색 테두리 부분만 경복궁이랑 비교할게 아니라, 밑의 태묘와 사직 부분도 합쳐야한다. 또한 위 이미지에 없는 징산공원, 중난하이, 베이하이공원도 자금성의 시설이었다. 우리가 아는 자금성보다 실제 자금성은 몇 배는 더 컸으며, 따라서 경복궁과 비교해도 그만큼 컸다.
건물의 규모나 화려함, 격식 면에서도 자금성이 앞선다. 자금성은 면적 내에서도 건물이 빼곡한 데다가 화려한 멋이 있는 반면, 중국과의 대결을 피하고 안정을 우선시했던 조선은 제후국을 자처하였고, 주제(周制)라고 불리는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일반화된 궁궐의 법식에서 제후국의 형식을 채택했기에 천자국 형식을 택한 중국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최소한 궁성 부분만큼은 원형을 보존한 자금성과는 달리, 경복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각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던 시절도 있는 데다가 1980년대 이후로 복원 작업에 들어갔지만 전체 복원이 이뤄지려면 한참 남았다는 것도 크다. 실제로 고종 당시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의 경복궁은 자금성에 비하면 화려함과 섬세한 면에서 부족한 점이 있기는 했지만 결코 초라한 궁궐은 아니었다. 괜히 경복궁 중건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당백전 발행이 물가 상승을 초래했던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한가지 더 생각해 봐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한성 안에는 경복궁 뿐만 아니라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인경궁 등이 추가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 중 창덕궁은 경복궁 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조선왕조의 정궁 역할을 해왔던 곳이고, 경희궁이나 인경궁은 규모 면에서도 경복궁 보다 더 거대했던 궁궐들이다. 특히,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인경궁은 조선왕조의 궁궐들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곳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비교하자면 청의 황제들이 이용했던 심양의 이궁 같은 것들도 포함해서 비교해야 한다고 할 수도 있으나, 중국 황제들의 이궁은 아예 베이징 황성 밖, 다른 지역에 존재했던데 반해 조선의 이궁들은 한성 내에 위치해 있었다. 이는, 아래 후술하겠지만, 조선와 명청의 왕(황)성, 그리고 궁궐 구조 자체가 아예 다르기 때문인데, 굳이 자금성의 본래 영역인 황성의 개념으로 억지로 연결해서 비교하려 한다면, 조선의 경우 한성 내에 있는 저 이궁들 모두를 포함하는 한성 자체가 왕성이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당연히 더 크다고 할 수 있을까? 황성을 포함하는 자금성 면적은 690만㎡ 정도이다. 경복궁과 현재의 청와대 권역인 북원을 합한 것이 대략 80만㎡에 근접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한 면적도 대략 80만㎡이다. 덕수궁은 10만㎡ 정도이다. 합하면 170만㎡쯤 되는데 이게 자금성 황성보다 '당연히' 크려면 경희궁과 인경궁이 각각 경복궁보다 2배 이상은 넓어야 된다. 종묘나 사직의 면적을 포함해도 그렇다. 심지어 한양 5대궁은 동시기에 존재한 것도 아니다. 조선의 궁궐들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훌륭하고 규모면에서도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을 '당연히' 사실이라고 서술하는 태도는 반드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2.2. 삼문삼조
주례의 오문삼조(五門三朝), 삼문삼조(三門三朝) 원칙에 따라 자금성은 천자의 궁궐이므로 정전인 태화전까지 5개의 문을, 경복궁은 제후의 궁궐이므로 정전인 근정전까지 3개의 문을 두었다.오문삼조와 삼문삼조에서 정하는 문의 개수라는 건 궁궐 안을 나누는 문의 개수이며 궁궐의 정전까지 가면서 거치는 문의 개수이다. 오문삼조는 고문(皐門), 고문(庫門), 치문(稚門), 응문(應門), 노문(路門)이라는 5개의 문을 궁궐 경계에서부터 그 안에 두고, 그중 고문(皐門) 안을 외조(外朝)[4], 응문 안을 치조(治朝)[5], 노문 안을 연조(燕朝)[6]로 하여 궁궐 안을 세 구역(조)로 나누는 걸 말한다.
다시 말해, 궁에 5개의 문을 두고 안을 3개의 조로 나누는 것. 그리고 제후국의 삼문삼조라는 건 이 중 고문(庫門), 치문(稚門)을 빼고 3개의 문을 두어 3개의 조로 궁궐 안을 나누는 것이다.
흔히들 경복궁 광화문 좌우를 두르는 담을 궁장 또는 경복궁 궁장이라고 부르는 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경복궁 영견일기에 따르면 광화문 좌우의 담을 쌓는 것을 축성(築城)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궁성남문으로 부르는 기록도 있다.
즉 광화문은 자금성 황성의 대문인 천안문에 대응되는 경복궁의 방어시설인 궐(闕)의 정남문이다.
정도전이 광화문의 수축이 완료되기 전에 각 전각과 문의 이름을 정할 때 경복궁의 정문을 오문(午門)이라고 하였고, 오문은 세종 때에 이르러 홍례문이 되었다가, 고종 때 청나라 황제의 연호에 "홍(弘)"이 들어가 이를 피휘(避徽)하기 위해서 흥례문으로 바꾼 것인데, 외조와 치조의 경계이자 경복궁의 정문은 흥례문이다.
경복궁에 있어서 외조는 광화문광장에 있었던 육조거리인 궐외각사와 궁 내의 궐내각사들이다.
경복궁에서 치조의 문은 근정문이다.
삼문삼조의 마지막은 연조(燕朝)로서 정도전은 경복궁의 전각 이름을 정할 때 연조를 가장 먼저 정하면서 뜻 풀이를 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연조는 침전(寢展)과 동일시되었고, 이 연조는 법궁/정궁/이궁으로 궁궐을 구분할 때에 정궁(正宮)과 동일시 되는 것으로 경복궁에서는 강녕전이 침전이자 연조이고 정궁이기에, 치조와 연조의 구분은 향오문으로 구분한다.
"강녕전(康寧殿)·만춘전(萬春殿)·천추전(千秋殿)·연생전(延生殿)·경성전(慶成殿)·사정전(思政殿) 같은 것은 이른 바 정궁(正宮)이고, 함원전(咸元殿)·교태전(交泰殿)·자미당(紫薇堂)·종회당(宗會堂)·송백당(松栢堂)·인지당(麟趾堂)·청연루(淸燕樓)는 내가 세운 자그마한 집인데 정궁(正宮)이 아니니"
《세종실록》 세종 31년(1449) 6월 18일자 첫 번째 기사
《세종실록》 세종 31년(1449) 6월 18일자 첫 번째 기사
따라서 경복궁의 삼문삼조의 문은 흥례문, 근정문, 향오문이다.
2.3. 황성
박지원이 연행길 가던 시절에 청나라의 궁궐이라고 부른 영역은 가운데 빨간색의 자금성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분홍색 부분의 황성 전체를 얘기했다. 박지원은 현대에 자금성이라고 부르는 빨간색 부분은 궁성이라고만 불렀고, 천안문을 정문으로 하는 분홍색 부분, 지금의 황성 영역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자금성을 사용했다.
박지원이 설명한 자금성의 4문은 남쪽의 천안문, 동쪽 동안문, 서쪽 서안문, 북쪽 지안문이다. 즉 천안문 양옆으로 뻗어단 성벽에 둘라싸인, 이 문서에서 황성이라고 부르는 영역을 박지원은 청나라의 자금성으로 인식한 것이다.
황성까지가 자금성인데 황성이 헐려나가고 경산,사직,북해는 공원이 되고, 중난하이는 주석과 총리와 그 가족들의 관저로 쓰이고, 태묘는 공산당의 공연 시설로 사용되어 궁성만 남게 되면서 오늘날에는 궁성만을 자금성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영역 전체가 청나라 시대의 황성이다. 현재는 황성의 일부인 궁성만을 자금성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명· 청 시대의 황성은 지금은 사라진 대청문을 합쳐서 천안문, 단문, 오문, 태화문까지 5개의 문이 있다.
이 이미지 하단의 대청문(大淸門)과 천안문(天安門) 사이는 황성에 포함되지 않는다. 천안문이 황성의 정문이다. 이 두 문이 연결된 통로같은 것은 한국의 육조거리[7]에 해당하며, 이 통로 양편에는 정부 주요 부처가 자리하고 있었다. 현대에는 이것을 모두 헐어버리고 천안문광장이 들어서 있으며, 대청문 자리에 마오쩌둥 기념당이 세워져 있다.
자금성은 성이고 한양의 궁궐들은 궁이니 궁궐의 크기만 따지면 조선의 궁궐들이 더 크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며 경복궁의 경우 약 43 헥타르 정도인데, 이런식이면 중국 황제의 별궁인 원명원 장춘원 기춘원 이화원과 여름철 청 황제 거주지로 사실상 황궁 역할을 한 피서산장도 포함해야 한다. 원명원만 하더라도 자금성의 5배 크기인 320헥타르이며, 사실상 청나라 중기부터 자금성 역할을 대체하여 실질적인 황궁이었고, 이화원은 원명원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290 헥타르다. 피서산장은 여름철 수도로 약 560헥타르로 크기면에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한국의 궁과 비교하여 압도적으로 크다. 사실 자금성만 하더라도 아니라 황성 권역 전체가 황제 한 사람의 생활, 업무, 휴식 등을 위해 지어졌으므로, 베이징 성 내부에 위치한 황궁이라고 봐야 한다. 규모로도 단순히 황제의 거주 구역을 넘어서 하나의 '성시(城市)'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거대하고 방대하기도 하다. 역시 위에 서술했듯이 경복궁 하나와 여러 시설을 다 가진 황성을 비교할 수는 없다. 굳이 비교하려면 경복궁과 후원에 사직, 종묘, 왕족들의 잠저까지 다 합쳐서 베이징 황성과 비교해야 한다. 다만 이렇게 다 합쳐서 비교해도 황성이 더 거대하긴 하다
2.4. 한양성과 베이징성
베이징성과 한성은 아예 도시 구조부터가 다르다. 베이징성은 내성이 있고, 그 내성 안에 황성이 있으며, 내성 밑에 외성이 있는 구조에다가 평지성이다.그에 반해 한성은 평산성이며, 내외성 개념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구조이며, 추가로 도성 위 지역에 탕춘대성과 북한 산성이 이어져 있는 구조이다.[8]
양국의 문화나 방어 전략에 따른 차이로 도시 구조에서부터 큰 차이가 난다. 따라서 황성의 정문인 천안문을 한국 궁궐 혹은 도시 구조에서 어떤 문에 대응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그 무언가가 생길 수가 없다.
현대 경복궁은 청와대 영역을 빼놓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래 청와대가 있는 곳은 경복궁의 후원으로서, 중난하이나 북해 공원 같은 왕실 정원의 역할을 했다. 이러한 극명한 차이로 인해 일대일대응이 어렵다.
억지로 역할을 중심으로 따지자면 한양도성과 숭례문은 베이징 성의 내성과 정양문에 해당하고, 황성은 도성 내의 5대 궁궐과 청와대 지역 및 종묘, 사직단에 해당하며[9], 탕춘대성과 북한산성은 베이징성의 외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2.5. 건축물의 차이
경복궁에 있는 각 건물들의 크기가 자금성보다 작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경복궁은 면적이 넓을 뿐 경복궁 내부를 구성하는 건축물들은 작은 단층 목조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것에 불과하다. 자금성이 거대하게 느껴지는 건 그 자체만으로 거대한 석축 기반 위에 다시 거대한 목조 건물들을 지어 단순히 면적만 넓은 게 아니라 건물 자체도 위압감을 줄 정도로 거대하기 때문에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경복궁 답도 | 자금성 답도 |
경복궁 금천 | 자금성 금천 |
경복궁 동십자각 | 자금성 동십자각 |
이는 궁궐의 기타 요소들을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 계단 장식인 답도를 보면 근정전 계단의 답도는 간략하게 형식만 갖춘 반면 자금성의 답도들은 서양의 대리석 조각에 준하는 정도로 음각과 양각이 깊고 크기도 훨씬 거대함을 알 수 있다. 정전의 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의 크기도 다르고 궁궐의 벽을 지키는 망루인 십자각의 크기도 자금성 쪽이 더 거대하고 더 사치스럽다. 단순히 경복궁의 궁궐 면적만 자금성의 60% 수준으로 확보했다고 해서 두 궁궐의 크기가 비슷하다고 하는 건 적절치 못하다.
또한, 대문에 뚫린 구멍, 그러니까 통로의 갯수가 천자의 궁궐은 5개고 제후의 궁궐은 3개이다. 자금성의 정문인 천안문은 구멍이 5개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3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10] 문의 개수가 다른 이유는 제후국인 조선은 신하 - 왕 - 신하의 3문이면 족하지만, 천자국인 명나라와 청나라는 황제가 양 옆에 제후들을 거느리고 있어 신하 - 제후 - 황제 - 제후 - 신하와 같이 5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3. 결론
애국심의 발로에서 경복궁과 자금성을 견주려는 시도를 하는 이들이 이따금 있으나, 전세계 총생산의 30%를 차지하던 전근대 최고의 강대국인 중국의 궁궐과 조선 궁궐의 규모를 단순 비교하여 견주는 것은 어렵다.사실 인구가 중국의 10%가 채 되지 않았던 나라의 궁궐이 자금성만큼 호화스럽고 컸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은 개국 당시부터 검소함을 지향하는 성리학적 왕도 정치를 표방했기 때문에 궁궐의 장식이나 규모에서도 검소함을 지향했고, 유교 예법에 따라 제후국의 법도에 맞는 궁전을 지으려 했기 때문에, 단순한 면적과 전각의 수 등 웅장함으로만 따지면 자금성이 앞서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경복궁은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한국 고유의 궁궐 건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임진왜란 전의 경복궁은 자금성보다도 먼저 지어졌기 때문에 자금성을 모방했다고 볼 여지도 없으며, 흥선대원군 시절에 지어진 경복궁 역시 조선 시대를 관통하며 만들어진 한국 고유의 양식과 개성을 담아냈기 때문에 자금성과 전혀 다르다. 한국만의 개성으로 나타나는 단청의 색과 문양, 창덕궁만큼은 아니지만 경직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궁궐의 전체적인 배치 등은 북악산과 이루는 조화를 통해 자연과의 어우러짐을 보여주고 있다. 규모로 따질 수 없는 고유의 개성과 아름다움이 명확히 드러나며 그 완성도도 수준급이다.
단순히 규모로만 아름다움을 따지기에는 경복궁이 가지고 있는 세세한 아름다움이 매우 많다. 자금성은 자금성이고 경복궁은 경복궁인 것이다. 때문에 규모나 화려함 면에서는 자금성이 더 대단하지만, 서로의 장단점과 멋이 있는거지 무엇 하나를 까내려서는 안될 것이다.
4. 타국 궁궐과의 비교
위에서는 중국의 자금성과 한국의 경복궁을 비교해보았다. 그렇다면 중국을 제외하고도 다른 동아시아, 혹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궁궐들과 경복궁을 견주어 본다면 어떤 문화적 차이가 있을지 비교해보자.한국의 근정전 | 미얀마의 만달레이 왕궁 | 일본의 교토고쇼 |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왕궁 | 베트남의 후에왕궁 | 몽골의 복드 칸 겨울궁전 |
위의 사진들은 모두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궁궐 정전(正殿)을 나타낸 것이다. 모두 하나같이 국가들만의 나라 특색이 잘 어우러진 모습을 볼 수 있다. 경복궁과 자금성을 단순 크기 비교로 재단할 수 없듯이 이 경우에도 단순히 궁궐들 간의 규모와 화려함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하나하나 살펴보자면 제일 먼저 미얀마 꼰바웅 왕조의 만달레이 왕궁이 독특한 생김새로 눈에 띈다. 저 건물의 이름은 '대알현실'로 왕좌가 놓여있던 장소였고, 미얀마의 국조인 공작새를 모티브로 지어졌다. 옛날에는 비싼 티크 목재를 이용해 지었지만 태평양 전쟁 도중 전소했고, 현재 지어진 것은 조잡한 콘크리트 덩어리일 뿐이다. 지붕과 처마 끝에 노란색으로 장식들이 화려하게 붙어있던 것들도 옛날에는 모두 황금이었지만 현재는 정부의 예산 부족 때문에 모조품 노란색 페인트칠로 대신했다.
다음으로 일본의 교토고쇼의 정전인 시신덴(紫宸殿)의 경우 전형적인 일본식 미(美)를 보여주는 모습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천황 즉위식을 거행할 때 쓰는 어좌인 다카미쿠라(高御座)가 들어있다. 바로 앞에 펼쳐진 정원에는 일본식으로 하얀 자갈을 깔아놓았고 오른쪽에는 벚나무, 왼쪽에는 귤나무를 식수했다. 한국의 근정전과 다른 점이라면 황제국을 자처했던 일본이었기에 천자의 격식에 맞는 9칸으로 지었다는 것. 바로 인근의 중국의 압박 때문에 제후국의 양식을 따라야했던 한국의 근정전은 5칸이다. 또한 근정전은 지붕을 검은색 기와로 덮은 반면, 교토고쇼의 자신전은 노송나무 껍질을 벗겨 지붕을 이은 히와다부키 방식으로 지붕을 올렸다.[11] 전각 자체의 규모는 자신전이 더 크다. 근정전은 정면 30m, 측면 21m, 높이 22.5m이고 자신전은 정면 37m, 측면 26.3m, 높이 20.5m로 자신전의 규모는 경회루에 더 가까운 편. 다만 정전의 경우 전각만이 아니라 전각과 기단, 그리고 정전 권역의 뜰을 둘러싼 회랑이 자아내는 정전 권역 전체의 공간 연출을 볼 필요가 있으므로[12], 이런 전체적인 규모로 봤을때는 상당한 규모의 2층 석축기단과 탁 트인 정전 앞의 뜰, 그리고 인왕산을 끌어와서 연출된 근정전 권역이 더 거대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13].
건축학적으로는 자신전의 처마는 아래쪽으로 처져 차분히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주는 한편 근정전은 처마 끝을 약간 치켜올려 마치 날아오를 듯한 느낌을 주는 차이가 있다.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왕국의 왕궁을 살펴보면 기타 왕궁의 정전에 비해서 규모가 확연히 작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루앙프라방 왕궁이 지어진 시기가 이미 프랑스에 식민화당한 이후인 1904년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총독부가 라오스의 왕들을 위해 지어놓은 궁전이니 웬만한 주권국가의 왕궁에 비하면 규모가 훨씬 작은 편에 속한다. 그나마 프랑스 총독이 왕에 대한 예우를 해준답시고 이탈리아에서 직접 공수해온 대리석으로 계단과 기단들을 지었다는 것이 특징적인 점이다. 라오스의 전통 건축 양식과 프랑스 식민 양식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참고로 궁전의 규모나 크기는 경복궁은 당연하고 조선의 웬만한 행궁들보다도 작은 수준이다. 1975년에 국왕 일가가 왕궁에서 쫒겨난 이래로 박물관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베트남 후에왕궁의 정전 태화전(太和殿)은 동남아 국가의 왕궁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스러운 느낌이 많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바로 옆의 똑같은 동남아 국가인 라오스 왕궁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베트남 응우옌 왕조가 스스로를 차별화하기 위해 일부러 중국 문화를 수용하고 동남아 문화를 야만적으로 여기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 베트남은 황제국을 자처했고[14] 궁의 기와를 황색으로 덮었다. 후에 왕궁과 경복궁의 가장 큰 차이가 이 것이기도 하다. 후에 왕궁은 황제의 격식에 맞추어 9칸으로 건물을 지었고 정문에도 입구를 5개 냈다. 참고로 후에 왕궁은 한때는 아름다웠겠지만 베트남 전쟁으로 치명타를 입고 현재는 거의 모든 건물들이 소실됐다. 심지어 경복궁보다도 훼손 정도가 훨씬 심해 일부 건물을 제외하면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참고로 태화전 건물은 중층 건물인데, 비가 많이 내리고 습한 베트남의 기후 탓에 층간 간격이 거의 없고 붙어있는 게 특징이다. 그 때문에 똑같은 중층인 근정전보다 훨씬 높이가 작고 크기도 작아보인다. 다만 면적에 있어서는 630제곱미터대 1200제곱미터 가량으로 근정전보다 크다.[15]
가장 마지막으론 몽골의 복드 칸 겨울궁전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좀 경복궁과 단순 비교가 어려운 것이, 몽골은 애초에 유목 부족들의 집합에 가까웠던 탓에 고정된 궁전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고 궁전 건축에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궁전이 곧 나라의 얼굴과 다름없던 일반적인 국가들과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기 때문에 궁전의 규모나 화려함을 비교적으로 따지기는 어렵다. 복드 칸 겨울궁전은 1890년대에 몽골 최후의 칸이었던 젭춘담바 후툭투 8세를 위해 지어졌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굳이 경복궁과 다른 점을 찾아보자면 녹색 기와를 사용했다는 것과 정문이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대단히 복잡하고 화려하게 생겼다는 것 정도가 있다. 몽골의 궁전인데도 불구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국 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건축물들과도 비슷한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규모로만 비교하면 수원행궁 정도와 비슷하다.
참고로 위에서 아시아 5개국의 궁궐들과 경복궁의 모습을 어느 정도 비교해 봤으니 알겠지만 경복궁은 절대 작은 규모의 궁전이 아니다. 오히려 웬만한 아시아 국가들의 정궁들에 비하면 크기가 더 큰 편에 속하는 게 맞다. 비교 대상이 하필이면 넘사벽인 자금성이어서 그렇지 일반적으로는 어디 가도 꿇리지 않을 정도의 상당히 장중한 궁궐이라는 뜻이다. 물론 앞의 결론 문단에서 말했듯이 규모나 화려함이 그 궁궐의 전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규모 면으로 보아도 경복궁은 세계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절대 작은 크기의 궁궐이 아니다. 경복궁은 이미 한국적인 미와 검소함이라는 조선의 가치를 그대로 잘 담아내고 있는 아름다운 궁궐이며, 그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
자금성도 문화재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던
저우언라이가 아니었으면 허물어질 뻔 했다.
[2]
원리주의적으로 따지면 유교에서 말하는 "궁궐"이란 딱 3개의 건물이면 족하다. 각각 정전, 편전, 침전이다. 정전은 강당, 편전은 사무실, 침전은 숙소로, 다시 말해 경복궁에 딱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동궁(東宮)이라 해서 후계자가 머물 별도의 권역을 동쪽에 짓고, 황제는 문 5개, 제후는 문 3개를 앞에 세워 보안설비와 나인들의 침각을 지으면 그걸로 궁궐의 양식은 사실 끝이었다. 경복궁에 편전이 3개인 까닭은 한반도의 극심한 기온편차의 사계절 때문에
도무지 여름에 온돌 있는 건물에서 업무를 볼 수가 없어서 온돌, 마루, 대청을 가진 건물을 따로따로 지었기 때문이다.
[3]
당연한 소리지만 엄청난 인적, 물적 소모가 있었다. 역대 황제들조차 어지간한 일 아니면 궁궐 증축을 주저했던 이유. 청나라가 명나라가 쓰던 자금성을 그대로 쓴 이유도 명을 계승한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이민족 왕조에게 불만을 품은 한족 백성들을 새 궁궐 짓겠다고 동원했다가는 민심이 돌이킬 수 없을만큼 추락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4]
신하들이 바깥에서 집무를 보는 구간이다.
[5]
군주가 정치를 펼치는 구간이다.
[6]
군주 일가가 쉬는 구간이다.
[7]
지금의
세종대로와
광화문 광장이다.
[8]
조선시대
한양의 안팎을 구분하는
성저십리까지 포함한 기준이다.
[9]
중국은 황성의 정문인
천안문과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 사이에 사직단과 태묘가 있다. 즉, 황성 안에 사직단과 태묘까지 있다.
[10]
창덕궁 돈화문은 조금 다르다. 문서 참조. 고려의
만월대 승평문이 돈화문에 영향을 주었다고도 추정한다.
[11]
일본에서는 최고급의 격식을 갖춘 건축물을 히와다부키 방식으로 지었다. 기와 지붕은 그 다음이었다.
[12]
그 태화전의 경우도 거대한 3층 기단과 그 앞의 광활한 광장을 제외하고 보면 그저 커다란 전각이라는 것 이외의 특징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13]
참고로 일본의 경우 천황의 권력이 더 강했던 나라시대에 지어진 평성궁이 현재의 교토고쇼보다 좀 더 넓은 뜰을 가지고 있고, 더 정석적으로 구성된 정전 권역을 가지고 있으며, 고려 만월대의 경우 정전의 회경전 앞의 뜰은 입지 문제로 좁았지만 대신 정문쪽의 뜰인 구정이 거대했다.
[14]
이게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중국과의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조선처럼 중국이 코앞인 국가였다면 황제국을 자처하는 순간 중국이 휩쓸어버렸겠지만 베트남은 중국의 최남단에 붙어있던 터라 중국이 그 먼 데까지 원정군을 보내기도 어려워 건들지 않았다.
[15]
하지만 후에 왕궁의 태화전은 근정전보다 높이가 훨씬 작아서 내부 부피는 근정전의 3분의 2 수준이다. 태화전의 내부 높이는 약 4~5m지만 근정전의 내부 높이는 무려 15m가 넘는 수준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