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8:15

견월광

국적 백제(百濟)
성씨 견(甄)
이름 월광(月光)
출생 미상
부왕 견훤(甄萱)
모후 불명
생몰연도 음력 미상
1. 개요2. 정체에 관한 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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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삼국시대 후백제 왕자 합천 해인사 고적에만 언급되는 인물. 삼국유사가 인용한 이제가기(이비가기)나 삼국사기, 고려사 등 기록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은 합천군 가야산에 주둔하고 백제왕자인 월광은 미숭산(美崇山: 경남 합천군 야로면 나대리에 위치한 산이다.]에 주둔해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왕건은 월광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다가 해인사에 기거하고 있던 승통 희랑(希朗)이 군대를 보내서 도왔고 월광이 항복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고 한다.

균여전에 의하면 후삼국시대 당시 해인사는 관혜공(觀惠公)과 희랑(希朗)이라는 화엄종 승려가 각각 후백제와 고려를 지지했는데, 후삼국통일 이후에도 관혜를 따랐던 승려들은 희랑을 따랐던 승려들과 화합하지 못했다가 균여가 활동한 고려 광종 시기에 이르러서야 화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말미암아 당대 해인사 불교계의 정치적 동향 및 분열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다.

2. 정체에 관한 가설

월광의 정체에 대해서는 924년 조물성 전투에 참가한 수미강( 견신검?/ 견금강?)이라는 설, 후백제 강주 도독으로 활동한 견양검이라는 설, 견훤의 또다른 왕자라는 설이 있다.

그외에도 견월광이 왕건에게 투항한 합천 전투가 후백제가 멸망한 936년 직후 벌어진 전투라는 설[1]이 제기되었다.[2]

[1] 허인욱 교수는 월광이 미숭산에서 웅거하다가 불리해졌음에도 다른 지역으로 도주하지 않고 투항한 점을 근거로 해당 전투가 후백제 멸망 직후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2] 출처: 후백제 멸망과 그 유민(2019), 허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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