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01:28:57

견양검

후백제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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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후백제 견훤의 왕자
견양검 | 甄良劍
출생
(음력)
연대 미상
사망
(음력)
936년(?)[1]
묘소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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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본관 전주 견씨
양검(良劍) / 겸뇌(謙腦)(?)
국적 백제(百濟) 고려(?)
부모 부왕 견훤
모후 상원부인
형제자매 견신검
남동생 견용검, 견금강, 견능예
누이 견애복
삼사 태사(太師)
직위 강주 도독(康州 都督) }}}}}}}}}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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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삼국시대 후백제 왕족으로 견훤의 둘째아들이자 아자개의 둘째손자. 이름은 견양검(良劍)으로 이제가기에는 겸뇌(謙腦)라는 기록이 있는데 뇌(腦)는 누리의 음차, 견양검의 량(良)은 나라의 음차로 추정되므로 연관성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형으로는 견신검이 있고 아우로는 견용검, 견금강, 여동생 애복(哀福), 막내동생 능예(能乂) 등이 있었다고 한다.

2. 생애

924년 7월 견훤은 견양검 등을 보내 조물성(曹物郡,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혹은 의성군으로 추정)을 공격했는데 장군 애선(哀宣)을 전사시키기는 했지만 고을 사람들이 굳게 지켜 이득없이 돌아갔다.

훗날 견훤이 형들을 제쳐두고 넷째아들 견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이찬인 능환의 말에 따라 견용검과 함께 견신검을 설득하여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이복아우인 견금강을 살해한 후 견신검을 왕으로 세우는데 일조하였으며 강주 도독으로 있었다.

고려군의 공격으로 일리천 전투에서 패하자 견신검, 견용검과 함께 고려에 항복하였으며 견용검과 함께 진주로 유배를 떠났다가 처형되었다.[2]

3. 대중매체에서

  •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 어린 시절 양검은 배우 윤동원[3], 성인 양검은 주민준[4]이 연기했다. 작중 비중은 견용검과 같이 견신검 밑의 동생 정도인데 그나마 견용검은 늦게 나왔어도 조물성 전투에서 고려의 장수장을 죽이는 모습을 보여주며 활약하기도 하나 견양검은 그런 것도 없다. 실제로 조물성에서 활약한 인물이 양검인데 용검에게 그 역할도 빼앗겨버렸다. 그저 보여주는 모습은 형인 견신검에게 의지만 하는 나약함 뿐으로 능력은 별로지만 동복형인 견신검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이복동생 견금강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해서 견신검의 쿠데타 때 "견금강은 자기 손으로 죽이고 싶다"고 벼르기도 했다. 극의 클라이맥스인 일리천 전투에서는 고려로 망명하고 직접 선봉에 나서 병사들을 동요시키고 항복하게 만드는 견훤의 모습에 멘붕하여 "아버지가 아니라 원수"라고 절규하는가 하면 견신검에게 떠밀려 견용검과 함께 싸우러 나섰다가 유금필을 보자 기겁하여 다시 도망치더니 항복 후에는 능환, 능애, 파달 등이 처형당하는걸 보자 견용검과 같이 살려달라고 왕건과 견훤에게 빌어 견훤은 "명색이 백제의 태자들이 이렇게 비굴할 수가 있냐."며 탄식하고서 왕건에게 죽이라고 간청하나 왕건은 진주로 귀양보내며 살려줘 자식들을 죽여 자신의 복수를 이루길 원했던 견훤은 등창이 악화되어 쓰러져 옮겨지고 사망한다. 하지만 내레이션에서는 사료에서처럼 귀양보내고 난 후 견양검과 견용검을 처형했다고 언급된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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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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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be673><colcolor=#fbe673> 생애 및 활동 <colbgcolor=#fff,#1f2023> 생애 · 일리천 전투
가족 부친 아자개
아내 상원부인
장남 견신검 · 차남 견양검 · 3남 견용검 · 4남 견금강 · 7남 견능예
관련 문서 후백제 · 검교태위 · 신라 서면도통
매체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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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에서는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양검을 살려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일설에는 죽였다는 각주도 덧붙이고 있어 생몰년도가 확실치 않다. [2] 그러나 유배를 보낸 이후에 바로 처형당하지 않았고 몇 년 후에 숙청당하는데, 상황상 곧바로 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견훤의 귀순과 그로 인한 내부 세력의 분열로 인해 후백제가 멸망하기는 했지만 아직 그 세력이 상당수 남아 있었기에 왕건 입장에서는 그들을 성공적으로 포섭하는 것이 필요했고 그렇기 때문에 곧바로 견씨 왕족을 죽이는 것과 같은 행위는 하기 힘들었다. [3] 당시 윤동원은 발음을 비롯한 전반적인 연기가 심하게 어색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4] 당시 본명 이영호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