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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10년 4월 8일 |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북내동 | |
사망 | 몰년 미상 |
사망지 미상 | |
학력 | 김해공립농업학교 (퇴학)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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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10년 4월 8일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북내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2년 2월 2일 김해공립농업학교에 재학 중 동기생 배기두(裵基斗)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행하여였고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김해경찰서에 체포되어 1주일 간 구류되었고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김해청년동맹, 김해농민조합 청년부 등에 가입하여 김해 일대의 독립운동을 주도했으며, 노재갑(盧在甲) 등과 함께 김해농민조합 청년부 내에서 독서회를 조직하여 대한민국 독립 및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농민조합을 확대 강화할 방안을 모색했다.그러나 1932년 7월 4일 독립운동 활동이 발각되면서 또다시 김해경찰서 고등계에 체포되었고 8월 22일 노재갑, 허성도(許晟道)[1] 등 4명의 동지와 함께 검찰로 송치되었다. 1933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4년 칙령 제19호에 의거해 징역 10개월 24일로 감형되었으며, 같은 해 3월 18일 만기 출소했다.
이후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김해농민조합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김해농민조합이 해산된 뒤 김해농민조합 재건을 꿈꾸던 배종철(裵鍾哲)과 힘을 모아 일제에 대항하는 혁명적 농민조합을 기획했다.
1934년 5월 10일 김해군 김해읍 북내동에서 송세준(宋世譐), 임금덕(林今德) 등과 회합한 그는 향후의 독립 실천운동을 위해 튼튼한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이후 노재갑과 허성도 등이 출옥하자 그들과 자주 회합하면서 김해군 내 대저, 가락, 진영 등 각 방면의 집단농장 농민의 생활 실태를 조사했으며, 1936년 6월 하순 이래 김권태 등과 회합하여 그 해 내에 독립운동 조직체를 결성하기로 결의했다.
한편, 강영갑은 1935년 6월에 김권태와 함께 50명 가량의 여성 청년회원을 둔 김해여자친목회(金海女子親睦會)를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36년 5월 중순경 중앙일보사 김해지국에서 주최하는 소인연극의 공연을 도와 연극을 통해 대중을 계몽할 것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감해읍 회현리에 거주하는 허규룡(許奎龍)의 집에 모여 황찬숙(黃贊淑), 신말찬(申末贊) 등과 함께 구체적으로 협의했다. 그리고 8월 7일부터는 김해군 명지면에 거주하는 노재감의 집에 농민교양기관을 설치하고 동지들과 함께 농민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얼마 후 경상남도 경찰부 고등과에게 일련의 활동이 발각되고 말았고, 그는 1936년 9월 25일 이래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1937년 1월 25일 일제하 검찰로 송치되었고, 1938년 3월 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일제하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9년 8월 16일에 출옥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강영갑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