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2 10:52:12

게토

Ghetto에서 넘어옴

1. 전근대 서유럽 도시의 유대인 구역 Ghetto
1.1. 나치 독일1.2. 현대
1.2.1. 미국
2. PC방 클라이언트3. 여담4. 창작물
4.1. 코드 기아스의 지역4.2. 주술회전의 등장인물
[clearfix]

1. 전근대 서유럽 도시의 유대인 구역 Ghetto

유대인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강제한 도시의 거리나 구역을 가리킨다. 모로코에도 이와 비슷한 멜라가 있었는데 게토보다는 한결 자유롭고 번화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Frankfurt_Am_Main-Fay-BADAFAMNDN-Heft_21-Nr_245-1904-Die_Judengasse_Suedseite.jpg
13세기 모로코에서 처음 등장했지만[1] 유럽 전역에도 14~15세기부터 이런 거주 제한 규정이 생겼다. 게토라는 이름은 1516년경 베네치아에서 처음 등장했다. 다만 널리 알려진 사실과 달리 게토의 원래 목적은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1090년대 말 십자군의 광기에 ( 하인리히 4세의 유대인 보호 칙령에도 불구하고) 신성 로마 제국 곳곳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자 12세기 슈파이어의 주교가 유대인 주거지에 성벽을 두르고 자치권을 주어 학살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다. 십자군은 주교궁에 숨은 유대인까지 가차없이 죽였기 때문이다. 물론 게토의 어원은 베네치아였고 최초의 게토라고 불린 곳도 베네치아 공화국의 유대인 강제수용 지역이 맞다. 베네치아 이전의 유대인 거주지는 차이나타운 류에 가까웠다.

게토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깥 사회와 격리되어 있었다. 게토에서는 유대인 공동체로서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했으나 시민권을 절대 주지 않았으며 게토를 나갈 때 유대인임을 증명하는 노란색 옷과 챙달린 뾰족모자를 걸치고 마크까지 달아야 했다. 해가 진 후에는 게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완전히 금지되고 기독교인들이 보초를 서고 게토를 감시했다.[2] 거주제한 때문에 게토의 유대인들은 건물을 높이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서유럽에서는 19세기부터 점점 없어져 1870년 로마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비슷한 개념으로 전근대 동유럽의 유대인 집중 거주 지대가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p_showing_percentage_of_Jews_in_the_Pale_of_Settlement_and_Congress_Poland%2C_c._1905.png

러시아에서는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던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강역을 따라 이른바 "정주제한선(Черта́ осе́длости(체르타 오세들로세티))"이라는 유대인 '집중거주구역'[3]을 설정하는 선을 긋고 이 지역 바깥으로의 유대인의 거주를 제한했으나 러시아 혁명 후 유대인들의 거주지 제한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 지역에는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마을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이를 이디시어로 슈테틀(שטעטלעך)이라고 했다.[4] '정주제한선' 안쪽에 거주하는 유대인 인구의 3/4가 슈테틀에 살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경제적 어려움과 러시아 제국 포그롬 때문에 2백만 명이 동유럽을 떠났고 결정적으로 홀로코스트 때문에 슈테틀은 사라졌다.

1.1. 나치 독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점령 하의 바르샤바 게토. 바르샤바의 여타 구역과는 벽으로 격리되어 있었다.[5] 일견 평화로워 보이지만 “유대인은 이쪽 길로 다닐 수 없다!”[6]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을 통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영상 속 유대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다수가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 폴란드 총독부를 비롯한 동유럽 점령지의 도시들에서 부활시켜 유대인을 몰아넣을 수용구역으로 이용하면서 악명을 떨쳤다. 바르샤바 게토가 수용인구 45만 명에 달해 가장 컸고 우치에 20만, 르비우에 15만, 빌뉴스에 8만, 크라쿠프에 7만 명이 수용되었으며, 이들 대도시 외에 여러 중소도시에도 게토가 세워졌다. 이 게토와 이전의 역사적 의미의 게토의 다른 점은 역사적 게토는 유대인들을 유럽의 다른 토착 기독교도들과 분리시키기 위해 좁은 구역에서 거주하게 한 반면 나치가 부활시킨 게토는 이후에 있을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를 위해 세웠다는 점이다. 당연히 이전의 게토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인구 밀도가 높고[7] 비위생적이었으며 사망률도 비할 수 없이 높았다. 게토에서 굶어죽거나 병사하지 않은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아우슈비츠 등의 절멸수용소로 끌려가서 학살당했다.

2차 대전 당시의 게토는 유럽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도 있었다. 상하이(上海) 등 일본군의 점령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도 일정 구역의 게토에 강제로 수용되었는데 이곳의 주거 환경도 유럽과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그나마 홀로코스트에 끌려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점점 패망하려 들자 폴란드의 게토에 있던 유대인들이 바르샤바 봉기를 시발점으로 무기를 밀수하여 그곳에 있던 나치 독일군들과 해방 전투를 벌였는데 아쉽게도 진압당하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민간인 유대인들도 나치 독일군들에게 희생당했다.

여담으로 영화 < 피아니스트>에서 당시 폴란드의 저명한 피아니스트였던 슈필만이 게토에서 생활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수용소 안에서 유대인들은 도저히 사람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나치 독일군들에게 핍박을 받거나[8] 돈을 별로 못 받아 먹을 걸 먹지 못한 나머지 아사(餓死)한 사람들도 많고 도리어 유대인들끼리 서로의 음식을 훔쳐먹거나[9] 나치군에게 뭐라도 얻어먹으려고 광대같은 짓을 하는 등 게토에서의 생활을 잘 표현했다. 당시 게토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영화를 찍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실제로 홀로코스트의 생존자 였기 때문에 당시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같은 시기를 다룬 영화 < 쉰들러 리스트> 에서도 초반에 비중있게 나온다. 독일인 군수사업가로서 유대인 인력을 이용하러 온 상황에서 고급 숙소를 제공받는 오스카 쉰들러와 열악한 환경에 내던져진 강제 이주 유대인들의 상황이 대비된다. 그나마 <피아니스트>의 슈필만 가족은 한 집을 단독으로 배정받았지만 여기선 아예 한 집에 서로 연고도 없는 여러 가구가 쑤셔넣어진 상황이 묘사된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독일은 게토를 끝장내고 여러번에 걸쳐 수색해 소개령에 응하지 않고 숨어있던 유대인들까지 철저히 학살했다.

1.2. 현대

현재는 그 의미가 "외국 출신 이민자들, 또는 특정 인종이 모여 사는 곳"으로 바뀌었다. 즉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특정 민족이 사회의 주류 민족과 고립되어 살아가게 되면 게토로 불린다. 첫 번째 문단의 내용으로부터 유래된 단어인 만큼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며 대표적인 사례로 서유럽, 북유럽 국가들에서의 무슬림 공동체가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던 흑인 거주 지역인 반투스탄도 특정 인종의 격리라는 측면에서 게토와 비슷하다.

북미의 코리아타운이나 차이나타운 등의 소수 민족 커뮤니티와 게토의 차이점은 주류 사회로부터 철저히 백안시당하고 주류 사회로 편입될 기회가 사실상 차단되어 있다는 점이다.[10]

1.2.1. 미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Chicago_ghetto.jpg

파일:external/th05.deviantart.net/ghetto___istanbul_by_nadersantina-d5calzc.jpg

보통 미국에서는 빈민 거주 지역을 의미하며 갱스터 랩 애청자들은 많이 들어 보았을 용어다. 일종의 속어지만 미국의 흑인 밀집 빈민가가 흑인 특유의 스웨거 문화와 맞물리며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했기에 미국에선 이미 고유명사화되었다. 이 게토 문화권에서 비롯된 독특한 음악 장르와 문화도 많은데 예를 들어 뉴욕 게토 브롱스에서 유래된 힙합이나 시카고 게토에서 유래된 게토 하우스-주크 하우스, 풋워크 등이 게토 문화권에서 창출된 음악 장르다.

싸구려 음식 앞에 "게토~"라는 접두사를 붙이거나[11] 허접한 물건으로 스웨거를 나타낸 경우 "that's ghetto"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미국의 래퍼 XXXTENTACION은 시끄럽고 음산한 느낌의 앨범을 만들어 제목을 “A Ghetto Christmas Carrol”이라고 짓기도 했다.

UC 버클리가 위치한 버클리에는 아시안 식당들이 모인 골목길인 아시안 게토가 존재한다.

파일:external/www.ghettofail.com/ghetto-wedding-dress1.jpg

위 사진처럼 앨런 아이버슨 유니폼을 리폼한 웨딩 드레스, 딸이 찍어준 매춘부 사진, 차체를 무지하게 올린 차 그리고 흑인들이 많이 피운다는 담배 브랜드 뉴포트 등의 게토 문화가 일종의 으로 자리잡아 아예 관련 자료들만 모아 둔 사이트가 있기도 하다.

2. PC방 클라이언트

대한민국의 PC방 클라이언트.

GETO라고 표기하며 트위치 대한민국 사업 철수 사건 이후 클라이언트 업데이트가 끊겼다.[12]

게토 애플리케이션도 존재한다.

3. 여담

  • GD&TOP이 2010년에 발표한 곡 ‘High High’에서는 게토의 알파벳을 하나씩 끊어 읽는다.
    "G H E T T O E L E C T R O

    미칠지 모르죠 말리지 마 HERE WE GO"

4. 창작물

4.1. 코드 기아스의 지역

코드 기아스의 등장하는 가상의 지역. 상위 항목의 의미 그대로 사용된다.[13] 다만 여기에서의 게토는 일정 지역을 지정한 게 아니라 조계 외부의 모든 지역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개념이다.

브리타니아-일본 전쟁의 승전으로 일본을 식민지화한 브리타니아는 구 일본의 주요 대도시 일부를 새로 개발하여 브리타니아인 전용 거주 지역으로 복구하였다. 이를 조계(租界)[14]라고 칭하는데 구 일본 국민들은 브리타니아에 충성을 맹세한 소수의 인원 외에[15] 조계 외부에 있는 게토로 쫓겨나 살아가게 되었다.

조계는 전쟁으로 초토화 된 도시 폐허를 치우고 처음부터 다시 도시를 지어 신 시가지가 구성되어 있지만[16] 게토는 전쟁 당시 폐허가 된 모습 그대로, 심지어 여러 종류의 잔해조차 치워지지 않은 상태. 이렇다보니 조계와 게토의 생활 수준 차이는 처참할 지경이다.

4.2. 주술회전의 등장인물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게토 스구루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 몇몇 이슬람 국가에서는 2차 대전 이후에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집단이주하기 전까지 남아 있었다. [2] 베네치아에서는 보초를 세우는데 필요한 돈을 유대인들이 내야 했다(...). [3] 물론 유대인 '집중거주구역'이라고 해서 유대인들 사는 동네는 절대로 아니었다! 이 지역도 러시아인, 폴란드인 등 슬라브인이 엄연히 다수 민족이었다. 독립 민족국가가 세워지면 유대인 거주구역이 죄다 쪼개져 버리니까. 유대인들의 이러한 불안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현실이 되었다. [4] 슈테틀은 정확히 말하면 읍 정도 되는 개념이었다. 렘베르크 같은 큰 도시는 슈토트(שטאָט), 작은 유대인 마을은 도르프(דאָרף)라고 불리었다. 독일어 비슷한 느낌이 들 텐데 동유럽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이디시어가 그 계통이라서 그렇다. [5] Das Judenviertel ist mit Mauern vom Übrigen Warschau abgesperrt. [6] “Benutzung dieser Straßenseite für Juden verboten!” [7] 바르샤바 게토의 경우 3.4㎢의 면적에 45만 명을 수용하여 인구밀도가 10만명/㎢을 넘었다. 인구 과포화로 악명 높은 현대 방글라데시의 인구밀도가 1,165명/㎢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얼마나 미친 짓인지 알 수 있다. 물리적으로 저 수준의 인구가 들어갈 수 있나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나치는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시 거주 환경을 보면 여러 명도 아니고 여러 대가족이 아파트 방 하나를 공유하는 막장이었다. [8] 영화 중 슈필만의 아버지가 감자를 가지고 돌아오던 도중에 나치 장교가 인사를 안했다고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9] 한 노파가 먹으려고 한 죽을 노인이 훔치려다가 그만 바닥에 쏟았는데 노인은 그것마저도 먹으려고 엎드려서 흙투성이인 죽을 먹으려고 핥았고 노파는 울며 막으려다가 울면서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10] 사실 차이나타운도 초창기에는 화교들을 몰아넣는 게토였다. 반화교 폭동과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11] 싸구려 냉동 부리토를 보통 Ghetto Burrito라고 부른다. [12] 대부분 PC방 클라이언트는 이 사태 이후 트위치가 치지직으로 바뀌었다. 대표적으로 피카플레이. [13] 다만 에리어 11 일본 외 다른 지역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인지는 불명. [14] 19세기~20세기 초 중국에 있던 외국인 전용 주거지역. [15] 이들을 '명예' 브리타니아 인으로 분류한다. [16] 심지어 조계 중앙부는 도시 구획을 몇 개 층으로 설계해두었다. 도시 면적만한 구조물이 수십 미터 솟아오른 모습은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