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1 23:03:16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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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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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올타임 아티스트
81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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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 스톤이 2011년 독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투표로 뽑은 "가장 위대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이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러시 핑크 플로이드 제네시스 제쓰로 툴 킹 크림슨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예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TOOL 더 마스 볼타 드림 시어터
같이 보기: 아티스트, 프로그레시브 명반 }}}}}}}}}

파일:Ultimate Classic Rock 로고.png 선정 50대 프로그레시브 록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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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Ultimate Classic Rock이 2023년에 선정한 50대 프로그레시브 록 아티스트를 정리한 틀이다. 이는 음악 자체의 작품성 보다는, 얼마나 프로그레시브 록 스러운지, 프로그레시브 록에 미친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지 등을 기준으로 선정 되었다고 한다.[1]
<rowcolor=#fff,#000>1위 2위 3위 4위 5위
킹 크림슨 제네시스 예스 핑크 플로이드 프랭크 자파
<rowcolor=#fff,#000>6위 7위 8위 9위 10위
러시 젠틀 자이언트 제쓰로 툴 카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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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000>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캐러밴 Van der Graaf Generator 더 마스 볼타 마이크 올드필드
<rowcolor=#fff,#000>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프레미아타 포르네리아 마르코니 캔자스 오페스
21위부터는 링크 참조.
[1] 때문에 ELO 같은 아트 록 성향이 강한 밴드는 선정 되지 않았으며, 핑크 플로이드의 순위도 작품성에 비해 낮게 랭크 되어있다.
}}}}}}}}}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 bordercolor=#000> 파일:elp 로고.png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Emerson, Lake & Palmer
}}}
파일:Emerson, Lake & Palmer.jpg
▲ 왼쪽 부터 키스 에머슨, 그렉 레이크, 칼 파머
<colcolor=#fff><colbgcolor=#000>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결성 1970년
영국 잉글랜드 런던 크로이던
전 멤버 키스 에머슨 (1944~2016 / 피아노 · 키보드)
그렉 레이크 (1947~2016 / 기타 · 베이스 · 보컬)
칼 파머 (1950~ / 드럼 · 타악기)
장르 프로그레시브 록, 아트 록
활동 1970년 ~ 1979년
1991년 ~ 1998년
2010년
링크 공식 사이트
1. 개요2. 역사
2.1. 데뷔 (1969 ~ 1970)2.2. 전성기 (1971 ~ 1974)2.3. 쇠퇴기 / 해체 (1977 ~ 1979)2.4. 해체 이후2.5. 변형 라인업 활동 (1985 ~ 1989)2.6. 재결성 (1991 ~ 1998)2.7. 말기2.8. 두 멤버의 죽음
3. 평가4. 음반 목록
4.1. 스튜디오 앨범4.2. 라이브 앨범
5. 여담

[clearfix]

1. 개요

1970년에 결성돼서 1979년에 해체된 3인조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주로 ELP라는 약자로 불린다.

핑크 플로이드, 예스, 킹 크림슨, 제네시스, 제쓰로 툴 등과 함께 대표적인 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중 하나로 꼽힌다.

2. 역사

2.1. 데뷔 (1969 ~ 1970)

파일:Emerson, Lake & Palmer 1.jpg
1969년 킹 크림슨에서 베이스와 보컬을 맡았던 그렉 레이크는 킹 크림슨의 미국 투어 도중에 나이스라는 그룹을 이끌고 있던 키보디스트 키스 에머슨을 만난다. 당시 나이스에서 음악적인 한계에 다다랐던 에머슨은 그렉 레이크와 새 그룹을 결성하려는 논의를 했고, 이후 당시 떠오르던 신인인 아토믹 루스터의 드러머 칼 파머에게도 가입을 제안했다. 그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나중에 승낙한다.

그렇게 결성된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는 1970년대 중반에 데뷔 공연을 하여 하여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좋은 무대를 위해 좋은 음향 장비와 함께 록 콘서트 최초로 거대한 구조의 무그 모듈러 신디사이저를 도입 하였다. 그들의 공연에선 밴드에서 작곡된 곡들과 함께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의 록 버전이 최초로 연주됐고 공연 반응도 폭발적이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LP-ELP.jpg
이후 밴드는 아일랜드 레코드(영국), 애틀랜틱 레코드(미국)와 음반 계약을 하고 첫 음반인 셀프타이틀 음반 Emerson, Lake & Palmer를 발매하여 영국 차트 5위, 미국 차트 12위까지 진입해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특히 음반에 수록된 그렉 레이크의 곡 "Lucky Man"[1]이 인기를 끌었으며, 싱글 컷하여 빌보드 핫 100 차트 46위까지 진입했다.

2.2. 전성기 (1971 ~ 1974)

첫 음반 투어 이후 밴드는 잠시 휴식기를 가지면서 다음 음반 작업에 들어갔다. 에머슨은 이 시기에 파머의 드럼 연습 패턴을 기반으로 4분의 5박자 계열의 복잡한 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에머슨은 이 음악을 다음 앨범의 메인으로 염두에 두기 시작했고, 이 시기 레이크가 에머슨의 곡에 불만을 드러내면서 거의 밴드 해산 직전까지 갔지만, 다른 멤버들과 음반사 경영진의 설득으로 간신히 봉합되었고, 레이크는 이후 이 곡에 가사를 쓰고 일부 파트를 작곡하는 등 곡 완성에 기여했다. 이 음악은 "아르마딜로 탱크"라는 가상 전투 기계의 스토리를 담은 총 길이 20분으로 LP 한 면을 가득 채운 Tarkus라는 곡으로 탄생하게 된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073c08d47b3a5ebc3709cf5d4e461f82.jpg

이후 이 곡을 타이틀로 한 앨범 Tarkus를 1971년에 발표하는데, 이 앨범은 영국 차트 1위, 미국 차트 9위로 상업적으로 성공했고, 평론가들의 평가도 매우 좋았다. 특히 타이틀곡 Tarkus는 많은 키보디스트에게 영감을 줬으며[2] 중간에 4분의 5박자 부분은 이후 많은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에 영향을 줬다.

파일:Pictures at an Exhibition.jpg

이후 그들은 라이브 투어를 하면서 당시 라이브 세트리스트에 들어있던 전람회의 그림 실황이 해적판으로 나와 돌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해적판을 모두 회수하고 정식으로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 실황을 발매하여 미국 차트 11위, 영국 차트 3위를 기록한다.

원래 Tarkus보다 조금 더 일찍 발매될 예정이었지만, 레이크가 대중이 ELP를 나이스와 비교하게 될 것을 경계하면서 지지부진하다가 기존 음반보다 더 저렴하게 파는 것으로 타협했지만, 음반사가 이를 반대하면서 계속 음반 발매가 미뤄졌다.

1972년 또 다시 라이브 투어를 끝낸 밴드는 곧 바로 다음 음반 작업에 들어갔다. 같은 해 NME에서 ELP가 해체된다는 가짜 뉴스를 퍼트렸고, 밴드는 즉각 성명문을 발표했다. 원래 이 시기 에머슨이 재즈 장르의 솔로 앨범을 발표할 계획이었지만, 이 사건으로 결국 백지화되었다.

이 시기 밴드가 이전보다 음향 실험을 많이 하면서 작곡된 음악이 훨씬 디테일해졌고, 레이크가 녹음을 어려워하면서, 결국 오버 더빙이 많아졌다. 앨범 아트는 원래 살바도르 달리에게 부탁했지만 그가 대가로 거금 5만 파운드를 요구하여 무산되고 결국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의 앨범 아트로 유명한 힙노시스가 맡게 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rilogy_(Emerson,_Lake_%26_Palmer_album_-_cover_art).jpg

이렇게 발매된 음반 Trilogy는 영국 차트 2위, 미국 차트 5위를 기록하며 또다시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Trilogy는 밴드 앨범 중 가장 서정미가 돋보이는 작품인데, 그렉 레이크의 인터뷰에 따르면 자신은 보컬리스트로서 이 앨범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한다. 수록된 곡 중 그렉의 곡인 From the Beginning과 에런 코플런드의 발레 곡을 편곡한 Hoedown이 유명하다. 그렉이 가장 좋아하는 ELP 음반이라고 한다.

Trilogy 투어 이후 1973년, 원래 음반사와 갈등이 생기면서 만티코어[3]라는 자체 음반사를 설립했다.

새 음반사를 동시에 앨범 작업에도 착수했는데, 당시 남아있던 투어 일정과 무그 폴라포닉 앙상블 신디사이저[4], 퍼커션 신디사이저 등 새로운 장비들을 음악에 도입하는 등 여러 바쁜 일들로 인해 결국 9개월이나 걸려서야 앨범 작업이 끝난다.

당시 킹 크림슨에서 나온 작사가 피터 신필드가 합류하면서 이전에 그렉 레이크가 맡았던 가사에 비해 더욱 초현실주의를 띠었으며, 같은 해 밴드와 친분이 생긴 화가 H. R. 기거가 제작한 그림 작품 217번 : ELP I, 작품 218번 : ELP II[5][6]가 앨범 아트로 책정되었고, 최종본은 전자가 앞면이고 커버가 문처럼 열려져 후자가 나오는 구조로 구성되었다.[7]

파일:external/diffuser.fm/elp.jpg
그렇게 험난한 여정을 거친 다음 음반 Brain Salad Surgery는 영국의 국가인 예루살렘 알베르토 히나스테라의 피아노 협주곡 1번 4악장을 무그 신디사이저 음악으로 편곡한 Toccata[8], 그렉 레이크의 발라드 곡 Still.. You turn me on과 30분짜리 대곡 Karn Evil 9[9] 등이 수록되었다.

이 앨범은 처음에는 평론가들에게 엇갈린 평을 받았지만, ELP 최고의 앨범으로 재평가받으며, 출시 직후 영국 차트 2위, 미국 차트 11위까지 진입했다. 또한 최초로 폴리포닉 신디사이저를 사용한 음반이다.

파일:external/www.slate.com/1207_ProgSpring_Part3_ELPBrainSalad.jpg.CROP.original-original.jpg
Brain Salad Surgery 발매 후 그들은 다시 대규모 투어를 시작 했다. 이 투어는 역대 ELP 투어 중 가장 규모가 거대했는데, 원형 스크린에다가 키스 에머슨은 키보드 8대와 피아노 3대를 공연때 마다 무대에 배치했고, 칼 파머는 360도 회전하는 무대에다가 양쪽에다가 드럼, 퍼커션 신디사이저, 공 등 타악기들을 다 놓고 공연할 정도로 악기를 많이 사용하였다 또한 공연 중간에 키스 에머슨이 피아노를 공중에서 좌우로 돌리는 등 여러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또한 이시기 밴드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대규모 록 페스티벌 California Jam 1974에서 딥 퍼플과 공동 헤드라이너로 참가한다. 이 공연은 총 25만 명의 관객이 관람했으며 이글스, 블랙 사바스, 어스 윈드 앤 파이어 등 여러 밴드가 참여한 공연이었다.

파일:external/www.rockshowvideos.com/CAL_JAM_1974_poster2-720x465.jpg

그러나 멤버들은 계속되는 순회공연을 매우 힘들어했고 결국 1973년 ~ 1974년 투어를 담은 3 LP로 구성된 Welcome Back, My Friends, to the Show That Never Ends... Ladies and Gentlemen을 발매를 끝으로 ELP는 잠시 휴식기에 들어간다.

2.3. 쇠퇴기 / 해체 (1977 ~ 1979)

휴식기 동안 그렉 레이크는 75년에 "I Believe in Father Christmas", 키스 에머슨은 76년에 "Honky Tonk Train Blues"라는 싱글을 발매하는 등 솔로 활동을 시작했고 1976년, 다음 음반 제작을 위해 다시 작업에 착수 했다. 당시 영국의 고세율 정책으로 대부분의 녹음은 프랑스 파리와 스위스 몽트뢰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이 설립했던 음반사 만티코어가 문을 닫으면서 밴드는 다시 애틀랜틱 레코드로 돌아왔다.

파일:external/www.progarchives.com/cover_3122101112008.jpg
그렇게 1977년 3월에 발매된 Works Volume 1은 영국 차트 9위, 미국 차트 12위까지 진입해 상업적으로 성공했지만 평론가들에게 엇갈린 평을 받았다. 이 음반은 비틀즈 화이트 앨범과 유사하게 2 LP에 각각 한 면씩 멤버들의 개인 작품을 담고 있으며 나머지 면에 밴드의 곡을 담았다. 수록된 곡 중 그렉 레이크의 "C'est La Vie"[10] 에런 코플런드의 작품을 편곡한 "Fanfare For The Common Man"[11]이 유명하며, 특히 Fanfare For The Common Man는 싱글컷되어 영국 차트 2위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밴드의 싱글 차트 기록중 가장 높은 기록이다.

파일:Emerson, Lake & Palmer 2.jpg
밴드는 앨범 발표 이후 무려 130명이나 되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동원하여 투어를 진행했지만, 무려 약 3백만 달러나 손실을 보는 등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빠지면서 18번의 공연 이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포기했다. 이후 레이크와 파머는 인터뷰에서 에머슨이 오케스트라 동원을 계속 부추겼다며 재정 손실의 책임을 떠넘겼다. 에머슨 또한 인터뷰에서 오케스트라 동원은 모든 것이 잘못되었고, 밴드가 해체되는 큰 요인이었다고 말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동원한 마지막 공연은 1977년 8월 26일,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공연으로 78,000명의 관객이 관람했으며, 이는 ELP 단독 공연 중 가장 많은 관람객이었다. 이 공연 실황 영상은 1998년, DVD로도 제작되었다.

파일:external/ecx.images-amazon.com/41%2BBp0U6VHL.jpg
그렇게 투어를 진행한 후 그들은 11월에 후속 앨범인 Works Volume 2를 발매한다. 이 앨범은 수록곡 대부분이 Brain Salad Surgery 시절 싱글이나 휴식기 시절 발매된 멤버들의 솔로 곡이었고, 영국 차트 20위 미국 차트 37위까지 진입하는 등 이전에 비해 차트 성적이 좋지 않았다. 또한 평론가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몇몇 평론가들은 다른 ELP 음반과 다르게 다양한 장르가 두드러진다며 이 음반을 호평하기도 했다. 에머슨은 인터뷰에서 오케스트라 동원으로 생긴 재정 손실을 만회하려고 급하게 작업한 앨범이라고 언급했다. 이후 밴드는 오케스트라가 빠진 채로 1978년까지 Works 투어를 진행했다. 하지만 투어가 진행되면서 멤버들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계약상 앨범을 한 장 더 제작해야 했고, 결국 새 앨범 작업에 들어 갔다. 그들은 이전처럼 세금을 피할 목적으로 바하마에서 녹음했다. 당시 애틀랜틱 레코드는 상업적인 앨범을 만들도록 강요했으며, 이는 멤버들의 관계를 더욱 악화 시켰다. 바하마에 있는게 싫었던 레이크와 파머는 자신들의 파트 녹음을 마친 후 바로 섬을 떠나버렸고, 에머슨 혼자 마무리를 감당해야 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LP_Love_Beach_cover.jpg
그렇게 만들어진 앨범은 1978년 11월 Love Beach라는 제목으로 출시되는데 영국 차트 46위, 미국 차트 55위를 기록하여 상업으로 더 낮은 성적을 받았고, 평론가들은 물론 팬들에게도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졸작으로 전락했다. Love Beach라는 제목도 멤버들과 상의 없이 애틀랜틱 레코드에서 정한 제목으로 키스 에머슨은 이에 불만을 토로했지만 음반사에선 제목 변경을 거부했다. 심지어 커버도 그들의 이전 색채는 전혀 찾을수 없는 가슴을 벌거벗은 70년대 후반 디스코 스타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 또한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이후 1979년, 파머는 고별 투어를 열자고 제안했지만 멤버들과 의견 차만 생긴 채로 무산되었다. 이후 1977년 몬트리올 올림픽 스타디움 공연 실황을 담은 1 LP In Concert가 발매 되었다. 에머슨은 원래 더블 LP로 발매하길 원했지만, 애틀랜틱 레코드가 허락해주지 않아서 1 LP로만 발매되었다.

1979년 12월 ELP는 해체 성명문을 발표하고 공식 해체되었다.

2.4. 해체 이후

해체 이후 칼 파머는 PM 밴드를 결성해 1PM이라는 음반을 발매했다가, 예스의 스티브 하우, 제프 다운스와 킹 크림슨, UK에서 활동하던 존 웨튼과 함께 슈퍼그룹 아시아를 결성하여 활동한다. 그렉 레이크는 솔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키스 에머슨은 솔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영화 인페르노 등 몇몇 영화에서 영화 음악 작곡가로도 활동한다. 하지만 아시아를 결성한 칼 파머를 제외하곤 나머지 멤버들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나마 키스의 Nighthawks 사운드 트랙이 미국 차트 162위까지, 레이크의 첫 셀프 타이틀 앨범[12]이 영국 차트 64위까지 올라간 게 전부다.

2.5. 변형 라인업 활동 (1985 ~ 1989)

1983년, 아시아에서 존 웨튼이 갑작스럽게 나가버리면서 칼 파머는 대타로 그렉 레이크를 불러 합류 시켰다. 하지만 레이크는 아시아의 일본 무도관 콘서트만 함께하고 이후 아시아가 소속된 게펜 레코드의 방침에 실망해 음반 작업에 참여하지 않고 아시아를 탈퇴했다. 이후 아시아는 다시 존 웨튼이 합류한다.

1984년, 에머슨과 레이크는 재결합을 의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파머는 아시아 활동으로 참여할수 없었고, 대체 인물을 찾던 에머슨과 레이크는 당시 최고의 드러머라는 평가를 받았던 코지 파웰을 끌어들여 ELP라는 이니셜을 계속 유지했다. 그들은 이후 폴리도르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앨범 작업에 들어간다. 중간에 에머슨의 스튜디오가 트랙터에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하긴 했지만 녹음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파일:Emerson, Lake & Powell.jpg
파일:Emerson, Lake & Powell 2.jpg
그렇게 1986년 Emerson, Lake & Powell라는 셀프 타이틀 앨범을 발매한다. 이 음반은 평론가들에게 엇갈린 평가를 받았지만 영국 차트 35위, 미국 차트 23위, 일본 차트 19위에 진입해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주목받았고, 특히 수록곡 중 Touch and Go를 싱글컷하여 상업적으로 성공한다. 그러나 라이브 투어 도중 매니지먼트 불화가 발생하였고, 결국 코지 파웰의 블랙 사바스 합류로 에머슨 레이크 앤 파웰은 앨범 1장을 남기고 해산되었다.

파일:916C6104-C2FA-494A-BE2A-4F5A86F42320.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merson-Berry-Palmer.jpg
이후 키스 에머슨은 당시 아시아를 탈퇴한 칼 파머와 당시 프로그레시브 록을 좋아하던 젊은 뮤지션 로버트 베리와 함께 3라는 밴드를 결성하고 게펜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1988년에 To The Power of Three라는 앨범을 발표했다.

이 음반은 1980년대 아티스트인 베리의 영향으로 기존의 ELP 음반들 보다 훨씬 1980년대 음악, AOR, 라디오 친화적인 사운드를 담았으며, 에머슨이 작곡을 주도한 Desde la Vida가 팬들에게 사랑받았지만, 평론가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미국 차트 97위에 그치는 등 차트 성적도 좋지 않았다. 결국 3는 소형 라이브 홀 몇 군데에서 공연 후 해체되었다.

2.6. 재결성 (1991 ~ 1998)

이후 멤버들은 솔로 활동을 이어간다. 음반사들은 그들의 솔로 음반보다 ELP의 신보를 원했고, 결국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는 1991년 재결성해 빅터 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맺고,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파일:external/www.progarchives.com/cover_1924101112008.jpg
그렇게 1992년에 Black Moon 음반을 발표하는데, 이 시기 그렉 레이크의 목소리가 흡연으로 예전에 비해 매우 무거워지고, 디지털 사운드로 변화되면서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차트 성적도 미국 차트 78위, 일본 차트 16위를 기록하는 등 이전만큼 주목받지 못했다.

파일:Emerson, Lake & Palmer 3.jpg
하지만 유명 밴드가 10년 만에 재결합 했다는 점이 먹혔는지,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진행되었던 Black Moon 월드 투어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투어 중 영국 로열 앨버트 홀에서 가진 공연 실황이 1993년, Live at the Royal Albert Hall이라는 제목으로 발매 되었다.

하지만 이후 다음 음반 작업에 들어가기 직전 멤버들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파머는 수근관 증후군을 앓기 시작했고, 에머슨은 오른손에 수근관 증후군과 관절염으로 손목 신경을 전달하는 부분에 큰 압박을 받아 넷째 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았고 과거 퍼포먼스 때문인지 손목에도 이상이 생겼다. 결국 둘 모두 수술을 받고 에머슨은 오른손의 역할을 왼손으로 오버 더빙해야 했다.

결국 그렇게 만들어진 새 음반 In The Hot Seat은 빌보드 차트에도 오르지 못했고, Love Beach보다 더한 졸작이라는 조롱을 들었다.[13] 결국 에머슨과 파머의 건강 문제로 ELP는 잠시 휴식기에 들어간다. 파머는 이 앨범을 가리켜 끔찍하다고 표현했다. 또한 이 시기 에머슨은 아내와 이혼하고 살고 있던 집에 화재가 나면서 재정이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다.

이후 1996년 에머슨과 파머가 어느 정도 회복하면서 라이브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이전보다 작은 공연장에서 공연을 진행했고, 에머슨의 손목과 후덕해진 레이크[14]의 외모와 변한 목소리 때문인지 전성기만큼 인기를 끌지 못했다. 마지막 투어를 끝낸 1998년, 새 앨범을 준비하며 멤버들의 견해 차로 ELP는 결국 해체되었다.

2.7. 말기

이후 칼 파머는 아시아에 다시 들어가고, 그렉 레이크와 키스 에머슨은 각각 솔로 활동과 밴드를 만들어 활동했다.

2010년 밴드의 40주년 기념을 위해 런던의 High Voltage Festival에서 다시 재결합했다. 이 공연 실황은 음반, 영상화 되었으며, 동시에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다. 이 공연은 완전체 ELP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이후 에머슨과 레이크가 간간히 합동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2.8. 두 멤버의 죽음

2016년 3월 10일 키스 에머슨이 캘리포니아에 있는 그의 집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경찰은 에머슨의 머리에서 총상이 발견됐다며 자살이 확실해 보인다고 밝혔다. 원인은 그가 앓고 있던 우울증으로 경찰은 결론지었고, 여자친구 말에 따르면 손가락 질환으로 고통받던 키스가 팬들의 기대의 보답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울해했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으로 나머지 두 멤버들은 물론 그를 존경했던 수많은 뮤지션들도 큰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16년 12월 7일, 그렉 레이크 또한 암으로 세상을 떠나며 ELP의 멤버 중 칼 파머만이 유일하게 생존 멤버로 남았다.

3. 평가

클래식 음악을 기반으로 , 재즈, 포크 등 여러 장르의 요소를 흡수했으며[15], 프로그레시브 록/ 아트 록 음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당대 수준급 연주자가 뭉친 슈퍼밴드로, 멤버들 모두 록 음악계에서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키스 에머슨은 록 음악계 최고의 키보디스트를 논할 때 항상 릭 웨이크먼, 존 로드와 함께 상위권을 차지하며, 칼 파머 역시 드러머 분야에서 존 본햄, 닐 피어트와 함께 상위권을 차지한다. 그렉 레이크 또한 로버트 프립과 같이 기타를 배운 인물답게, 기타 실력도 수준급이며, 베이스 또한 수준급 실력으로 평가받는다.

다른 록 밴드들과는 다르게 좀비스처럼 기타가 아닌 키보드가 전면에 나선 몇 안되는 밴드였다.

명성과는 반대로 전성기 시절인 1970년대엔 일부 평론가들에게 굉장히 저평가받았다. 특히 몇몇 평론가들은 "단순히 고전 음악을 모방할 뿐"이라든가 "과도한 음 낭비"라고 이들을 평가절하했다.

4. 음반 목록

4.1. 스튜디오 앨범

  • Emerson, Lake & Palmer (1970)
  • Tarkus (1971)
  • Trilogy (1972)
  • Brain Salad Surgery (1973)
  • Works Volume 1 (1977)
  • Works Volume 2 (1977)
  • Love Beach (1978)
  • Black Moon (1992)
  • In the Hot Seat (1994)

4.2. 라이브 앨범

  • Pictures at an Exhibition (1971)
  • Welcome Back, My Friends, to the Show That Never Ends... Ladies and Gentlemen, (1974)
  • In Concert (1979)
  • Live at the Royal Albert Hall (1993)
  • Live at the Isle of Wight Festival 1970 (1997)

5. 여담

  • 데뷔 초 지미 헨드릭스에게 가입 제안을 했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지미 헨드릭스와 밴드의 인연은 백스테이지에서 잠깐 만나 대화를 나눈 게 전부다. ELP의 헨드릭스 영입설은 ELP가 당대 수준급 연주자들이 뭉친 슈퍼밴드라는 점과 헨드릭스의 이름을 합치면 HELP가 된다는 점 등 때문에 널리 퍼졌지만 완전한 루머로 그렉 레이크가 생전 이미 수 차례 부인한 바 있다. 다만 그와 별개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드러머 미치 미첼에게 합류를 요청한 건 사실이다.

[1] 참고로 Lucky Man은 그렉 레이크가 처음 기타를 배우고 기본적인 코드로 처음 쓴 곡이다. 그때 당시 나이가 놀랍게도 12세였다. [2] 드림 시어터의 멤버이자, 록 키보디스트 중 테크닉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조던 루데스도 이 음악을 듣고 프로그레시브 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하며, 본인 솔로 앨범에서 이 곡 전체를 커버하기도 했다. [3] Tarkus 앨범에서 타커스와 싸워서 이긴 동물. 곡 내용은 타커스와 만티코어가 싸워서 타커스가 패배하고 바다로 도망치면서 아쿠아타커스로 개조?된다는 내용. [4] Lyra라는 모노 신디사이저와 그아래 Apollo라는 폴리포닉 신디사이저, 그리고 Taurus라는 페달 신디사이저로 구성되어있는 시험판 신디사이저. 이후 1975년 출시된 Polymoog 신디사이저와 Taurus 폐달 신스의 프로토타입이다. [5] 전자는 해골과 기계로 둘러싸인 가운데 원에 여성의 입과 아래 남성 성기로 그려져 있었는데, 만티코어 사에서 음란물이라고 커버를 기각했고, 기거가 이 부분을 그림에서 빼기를 거부하면서, 다른 예술가가 빛처럼 보이게 살짝 가렸다. 후자는 철사 모양 머리카락을 지닌 여성의 모습이 그려졌다. [6] 이 그림들의 원본이 2005년 기거의 프라하 전시회에서 도난당해 소재가 불분명하다. [7] 초판과 일부 판본만 해당된다. 이후 1977년 애틀랜틱에서 재발매한 버전은 펼쳐지는 구조 없이 그냥 커버로 되어 있으며, 이후 재발매된 대부분의 판본이 이 형태이다. [8] 처음에는 클래식 출판사가 발매 승인을 해주지 않아서, 결국 에머슨이 직접 하나스테라의 집까지 직접 찾아가 들려주고 승인을 얻어온 곡이다. 하나스테라는 이 버전을 듣고 에머슨을 극찬했다고 한다. [9] Carnival의 애너그램. [10] 한국에서는 1970년대 말 인기가 있던 발라드로, 당대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 차트'에 자주 오르곤 했다. 밴드보다 노래가 더 유명한 케이스 중 하나. [11] 한국에서는 1980년대 KBS 뉴스 9의 주요 뉴스 테마로 유명하다. [12] 이 앨범에 게리 무어가 기타리스트로 참여하여 멋진 연주를 들려 주었으며, 이후 그렉 레이크와 함께 몇 차례 공연을 하였는데 이 공연 실황에서 그렉 레이크가 부른 Parisenne Walkways를 감상할 수 있다. [13]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마존에다가 이런 평을 썼다. Welcome Back My Friends To The Shame That Never Ends(번역: 끝나지 않는 부끄러움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들의 전성기 시절 라이브 앨범 Welcome Back, My Friends, to the Show That Never Ends... Ladies and Gentlemen의 제목을 비튼 것. [14] 전성기에도 어느 정도 얼굴이 통통하긴 했다. [15] 특히 이들의 전성기를 담은 3장짜리 라이브 앨범 "Welcome back my friends.."에 수록되어 있는 piano improvisation을 들어 보면 이들의 재즈 감각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쉽게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