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Arcaea/스토리
스토리 |
|
Act I Creation |
Act II Catastrophe |
파일:Arcaea_Act II_Part II.png |
1. 개요
Arcaea 스토리의 Act II: Catastrophe의 첫 번째 파트를 기록한 문서.2. Main Story
2.1. 마야
2.1.1. 해금 조건
{{{#fff 스토리 #}}} | 진행 순서 |
''' 해금 조건 '''
|
||
15-1 | Lasting-1 | Rise of the World 클리어 | ||
15-2 | Lasting-2 | 마야로 WAIT FOR DAWN 클리어 | ||
15-3 | Lasting-3 | 마야로 Raven's Pride 클리어 | ||
15-4 | Lasting-4 | 마야로 Rise of the World 클리어 | ||
15-5 | Lasting-5 | 마야로 UNKNOWN LEVELS 클리어 | ||
15-6 | Lasting-6 | 마야로 Abstruse Dilemma 클리어 |
2.1.2. Lasting Eden
=====# 15-1 #=====그녀는 별빛 아래에서 두 번째로 탄생한 자.
한때 새하얗던 아르케아의 세계엔 끝없는 낮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밤의 장막이 내려오고 빛과 어둠의 경계가 그어졌다.
그리고 밤의 하늘에서 두 새로운 영혼이 유성처럼 땅으로 내려앉았다. 첫 번째를 닮은 그 소녀는, 두 번째였다.
어두운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달이 뜨지 않는 밤…
마야가 눈을 떴을 때 보인 광경이었다. 눈물을 가득 머금은 두 눈. 의식과 감각이 돌아온 순간 그녀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차 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유리의 세계로 오는 모든 이들은 무지의 축복 아래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이후 발견된 이 장소는 어딘가 망가져있었다. 완벽에 가까워지고 싶어 하지만, 근본부터 망가져버린 장소…
이곳에서 소녀는 모든 것을 안은 채 깨어났다.
한때 새하얗던 아르케아의 세계엔 끝없는 낮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밤의 장막이 내려오고 빛과 어둠의 경계가 그어졌다.
그리고 밤의 하늘에서 두 새로운 영혼이 유성처럼 땅으로 내려앉았다. 첫 번째를 닮은 그 소녀는, 두 번째였다.
어두운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달이 뜨지 않는 밤…
마야가 눈을 떴을 때 보인 광경이었다. 눈물을 가득 머금은 두 눈. 의식과 감각이 돌아온 순간 그녀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차 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유리의 세계로 오는 모든 이들은 무지의 축복 아래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이후 발견된 이 장소는 어딘가 망가져있었다. 완벽에 가까워지고 싶어 하지만, 근본부터 망가져버린 장소…
이곳에서 소녀는 모든 것을 안은 채 깨어났다.
=====# 15-2 #=====
소녀는 어둠이 좋았다. 고요함이 좋았다.
유리 조각에 반사된 빛을 볼 때마다, 끔찍한 색채로 일렁이는 섬광이 그녀의 눈을 침범했다.
폐허가 된 건물이 삐걱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칠판을 긁는 듯한 쇳소리와 함께 지면 저 아래에서 올라온 그르렁대는 고동이 칼바람처럼 그녀의 귀를 쏘아붙였다.
고요한 밤의 침묵이 깨질 때마다, 마음의 심연 속에서 기어 올라온 기억이 소녀를 괴롭혔다.
소녀는 존재해서는 안 됐다. 그럼에도, 이 세계는 그녀를 동정했다.
두 색채를 품은 머리칼과 눈. 마야는 울면서 잠들기 일쑤였다.
아르케아는 그런 마야를 불쌍히 여겼다. 그러나 그녀는 유리 조각이 두려웠다.
소녀는 끝나지 않는 밤에 흐르는 고요한 분위기를 좋아했지만 유리 조각과 너무 자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기에, 숨을 곳을 찾기로 하였다.
마야는 무너져 내린 건물과 어두운 동굴을 전전하며 그 몸을 뉘었다.
어딜 가나 유리 조각은 있었지만, 밤하늘의 별빛이 없는 장소에서는 그 끔찍한 광채를 발하지 않았으며, 어차피 소녀는 도저히 유리 조각을 직시할 수 없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고요함만을 찾아 산과 들을 넘고 잊힌 도로와 칠흑처럼 어두운 터널을 가로질렀다.
그림자가 드리운 복도를 걸어 빠져나온 어느 날, 그녀는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그어진 낮과 밤의 경계를 보았다.
유리 조각에 반사된 빛을 볼 때마다, 끔찍한 색채로 일렁이는 섬광이 그녀의 눈을 침범했다.
폐허가 된 건물이 삐걱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칠판을 긁는 듯한 쇳소리와 함께 지면 저 아래에서 올라온 그르렁대는 고동이 칼바람처럼 그녀의 귀를 쏘아붙였다.
고요한 밤의 침묵이 깨질 때마다, 마음의 심연 속에서 기어 올라온 기억이 소녀를 괴롭혔다.
소녀는 존재해서는 안 됐다. 그럼에도, 이 세계는 그녀를 동정했다.
두 색채를 품은 머리칼과 눈. 마야는 울면서 잠들기 일쑤였다.
아르케아는 그런 마야를 불쌍히 여겼다. 그러나 그녀는 유리 조각이 두려웠다.
소녀는 끝나지 않는 밤에 흐르는 고요한 분위기를 좋아했지만 유리 조각과 너무 자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기에, 숨을 곳을 찾기로 하였다.
마야는 무너져 내린 건물과 어두운 동굴을 전전하며 그 몸을 뉘었다.
어딜 가나 유리 조각은 있었지만, 밤하늘의 별빛이 없는 장소에서는 그 끔찍한 광채를 발하지 않았으며, 어차피 소녀는 도저히 유리 조각을 직시할 수 없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고요함만을 찾아 산과 들을 넘고 잊힌 도로와 칠흑처럼 어두운 터널을 가로질렀다.
그림자가 드리운 복도를 걸어 빠져나온 어느 날, 그녀는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그어진 낮과 밤의 경계를 보았다.
=====# 15-3 #=====
그녀의 귀를 찢어발기던 그 소음은 사람의 비명이었다. 그녀의 눈앞에 스쳐 지나가던 광경이 비명의 원인이었다.
눈 부신 빛의 기둥이 하늘에서 내려와 대지를 갈랐다. 수 초 안에 끝나기를 기도했던 악몽은 몇 시간이고 계속되며 소녀의 고향을 불태웠다.
세상의 반대편에 사는 친구들이 모조리 죽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에 울리던 상관의 명령조차 이윽고 침묵했다. 몇 시간에 걸쳐 느리고 무자비하게 그녀와 세계를 잇던 끈이 하나둘씩 끊어져 갔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후, 그녀는 이곳, 아르케아에서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저 경계선은 마치 일몰, 아니, 화염에 휩싸인 세계와 같았다.
마야는 주저앉았다. 환각과 환청이 그녀를 찾아왔다.
몸을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흘렸다. 마치 말뚝이 심장을 꿰뚫는 듯한 격통.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쥐어틀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도저히 짊어질 수 없는 공포, 그중에서도 하나의 생각이 특히나 무겁게 마야를 짓눌렀다. 그녀의 목을 조르는 단 하나의 진실.
‘나만 남아버렸어.’
소녀의 고통이, 부서진 마음이, 울음에 담겨 울려 퍼졌다. 아르케아는 묵묵히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눈 부신 빛의 기둥이 하늘에서 내려와 대지를 갈랐다. 수 초 안에 끝나기를 기도했던 악몽은 몇 시간이고 계속되며 소녀의 고향을 불태웠다.
세상의 반대편에 사는 친구들이 모조리 죽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에 울리던 상관의 명령조차 이윽고 침묵했다. 몇 시간에 걸쳐 느리고 무자비하게 그녀와 세계를 잇던 끈이 하나둘씩 끊어져 갔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후, 그녀는 이곳, 아르케아에서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저 경계선은 마치 일몰, 아니, 화염에 휩싸인 세계와 같았다.
마야는 주저앉았다. 환각과 환청이 그녀를 찾아왔다.
몸을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흘렸다. 마치 말뚝이 심장을 꿰뚫는 듯한 격통.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쥐어틀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도저히 짊어질 수 없는 공포, 그중에서도 하나의 생각이 특히나 무겁게 마야를 짓눌렀다. 그녀의 목을 조르는 단 하나의 진실.
‘나만 남아버렸어.’
소녀의 고통이, 부서진 마음이, 울음에 담겨 울려 퍼졌다. 아르케아는 묵묵히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 15-4 #=====
어둠과 빛의 경계선에 주저앉은 소녀는 귓속에 울려 퍼지는 소음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할 수 있다면 생각조차 그만두고 싶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이미 저지른 실수. 이미 행해진 파괴행위… 모두, 이미 일어나버린 일.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저 마음은 아직 고칠 수 있는 걸까? 울고 있는 이 소녀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걸까?
유리 조각 하나가 하늘하늘 내려왔다. 그리고 또 하나, 다시 또 하나. 천천히 내려오는 유리 조각의 비가 모이자, 소녀의 주변을 둘러싸는 벽이 되어 보이지 않는 태양의 빛을 가렸다.
마음을 빼앗을까? 아니, 불가능해.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릴까? 이미 자기 내면에 과하게 몰입한 상태라 불가능해. 어떡할까? 어떡하면 좋을까… 어떡하면…
유리 조각이 발하던 빛이 전에 없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소녀를 둘러싼 유리 벽이 마치 천처럼 접혀 그녀를 완전히 감쌌다.
유리 조각은 바보같이, 자기가 비단처럼 부드럽다고 믿는 모양이다. 마야는 한 번 몸을 움찔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유리 조각에 비추는 기억들이 보였다.
다른 이들의 기억. 슬픔과 고통과 실수의 기억. 아르케아가 지금 소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이런 기억들뿐이었다. 소녀는 잠자코 그 기억을 바라보았다.
…유혈사태, 싸움, 전쟁이 아닌 또 다른 기억.
…그럼에도 고통받고, 그 고통을 알아주는 이가 곁에 없는 사람들의 기억. 완전히 홀로 남은 이들의 슬픈 기억…
울부짖는 남자와 여자, 소녀와 소년. 삶의 끝에 다다라 빛바랜 사진을 손에 쥐고 희미하게 미소 짓는 사람들.
소녀는 생각했다.
이 세계가 소녀에게 전하고 싶은 바는 그런 것이다.
다시는 웃지 못할지도 몰라. 모든 걸 그만두고 싶어질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서는 어떤 의미가 있지?
과거는 과거지만, 그로 인해 입은 상처는 지울 수 없어. 그중 일부는… 어쩌면, 대부분은 네가 스스로 새긴 흉터겠지.
하지만 넌 아직 남아있어. 너의 세계는 사라져 버렸지만, 넌 아직 여기 남아있어.
…
부탁이야.
떠나지 말아줘.
=====# 15-5 #=====
“‘떠나지 말라고’...?”
들려오는 속삭임에 대답하는 소녀의 속삭임. 소녀가 아르케아에서 처음으로 내뱉는 단어를 실은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건조하고 따가운 목으로, 소녀는 들려왔던 속삭임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눈을 찌푸리며 어금니를 물었다. 이를 갈았다.
이 세계가 소녀에게 보여준 연민에 대한 그녀의 답은…
…분노였다.
소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유리의 벽을 바라보았다. 유리가 일렁이며 비추는 풍경을 바꿨다. 고요하고 잔잔한 슬픔의 기억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른 기억이 채웠다.
유리벽의 한 면이 물결쳤다. 마야는 그곳에 비추는 기억을 바라보았다.
눈 밑에 짙게 어둠이 드리운 남자의 기억. 밤바다에 발을 담근 여자의 기억. 그녀는 잠시 손에 쥔 목걸이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바다로 흘려보냈다.
검은 정복을 입은 아이의 기억. 아이의 언니가 손을 잡아주려는 듯 뻗은 팔을 아이는 말없이 뿌리쳤다.
마야는 미소 지었다.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만약 이 기억들에 자신의 마음이 동하고 있는 거라면 어찌나 끔찍하고, 어찌나 웃기는 일일까.
실제로, 소녀의 마음은 움직이고 있었다.
동정하려 내미는 손 따위에는… 침을 뱉어주고 싶었다.
뒤틀리고 망가진 마음이 더더욱 뒤틀리고 망가지자, 그녀의 비애가 유리 조각에게 더욱 생생하게 다가가는 듯했다.
조각들은 서로에게 더욱 가까이 엉겨 붙더니, 하나둘씩 뒷면으로 뒤집어져, 반대면과는 다른 기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망가진 삶을 살았던 이들의 또 다른 기억.
유리 조각들이 점점 더 밝게 빛났다. …그들의 삶이 망가지게 된 순간의 기억들이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마야는 그들이 겪은 재난과, 실패와, 실수의 기억에 사로잡혔다. 마야는 불타오르던 자신의 세계의 기억에 사로잡혔다. 마야는 유리 조각에게 사로잡혔다.
조각들은 소녀의 몸을 기어올라가 구속하듯 감싸고 조이며, 반짝이는 사슬처럼 서로를 잇더니 그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목을 짓눌렀다.
마야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주 약하게, 심장이 고동쳤다… …하지만 그건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유리 조각이 부들거리더니, 이윽고 마치 파도처럼 물결쳤다. 순식간에 유리 조각이 머금고 있던 빛이 사라졌다. 사슬이 소녀의 몸을 더더욱 강하게 조여왔다.
그 순간, 어디선가 뿜어져 나온 검은빛 가루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불더니, 그녀를 조이던 유리 조각의 사슬이 서서히 바스러졌다.
소녀는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일몰의 빛이 또다시 저 멀리에서 그녀를 비추었다.
마야는 밤의 하늘을 올려다본 뒤, 빛나는 경계선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뭐야…?”
혼란. 분노. 실망.
그런 감정들이 소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보이지 않는 태양의 빛이 여전히 그녀를 비추었다.
하지만, 곧 그 빛의 따뜻함은 사라졌다.
소녀가 눈을 뜨자 그 앞에 보인 것은 아르케아 조각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벽이 소녀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림자와 유리로 이루어진 터널이…
머나먼 일광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들려오는 속삭임에 대답하는 소녀의 속삭임. 소녀가 아르케아에서 처음으로 내뱉는 단어를 실은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건조하고 따가운 목으로, 소녀는 들려왔던 속삭임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눈을 찌푸리며 어금니를 물었다. 이를 갈았다.
이 세계가 소녀에게 보여준 연민에 대한 그녀의 답은…
…분노였다.
소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유리의 벽을 바라보았다. 유리가 일렁이며 비추는 풍경을 바꿨다. 고요하고 잔잔한 슬픔의 기억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른 기억이 채웠다.
유리벽의 한 면이 물결쳤다. 마야는 그곳에 비추는 기억을 바라보았다.
눈 밑에 짙게 어둠이 드리운 남자의 기억. 밤바다에 발을 담근 여자의 기억. 그녀는 잠시 손에 쥔 목걸이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바다로 흘려보냈다.
검은 정복을 입은 아이의 기억. 아이의 언니가 손을 잡아주려는 듯 뻗은 팔을 아이는 말없이 뿌리쳤다.
마야는 미소 지었다.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만약 이 기억들에 자신의 마음이 동하고 있는 거라면 어찌나 끔찍하고, 어찌나 웃기는 일일까.
실제로, 소녀의 마음은 움직이고 있었다.
동정하려 내미는 손 따위에는… 침을 뱉어주고 싶었다.
뒤틀리고 망가진 마음이 더더욱 뒤틀리고 망가지자, 그녀의 비애가 유리 조각에게 더욱 생생하게 다가가는 듯했다.
조각들은 서로에게 더욱 가까이 엉겨 붙더니, 하나둘씩 뒷면으로 뒤집어져, 반대면과는 다른 기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망가진 삶을 살았던 이들의 또 다른 기억.
유리 조각들이 점점 더 밝게 빛났다. …그들의 삶이 망가지게 된 순간의 기억들이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마야는 그들이 겪은 재난과, 실패와, 실수의 기억에 사로잡혔다. 마야는 불타오르던 자신의 세계의 기억에 사로잡혔다. 마야는 유리 조각에게 사로잡혔다.
조각들은 소녀의 몸을 기어올라가 구속하듯 감싸고 조이며, 반짝이는 사슬처럼 서로를 잇더니 그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목을 짓눌렀다.
마야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주 약하게, 심장이 고동쳤다… …하지만 그건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유리 조각이 부들거리더니, 이윽고 마치 파도처럼 물결쳤다. 순식간에 유리 조각이 머금고 있던 빛이 사라졌다. 사슬이 소녀의 몸을 더더욱 강하게 조여왔다.
그 순간, 어디선가 뿜어져 나온 검은빛 가루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불더니, 그녀를 조이던 유리 조각의 사슬이 서서히 바스러졌다.
소녀는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일몰의 빛이 또다시 저 멀리에서 그녀를 비추었다.
마야는 밤의 하늘을 올려다본 뒤, 빛나는 경계선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뭐야…?”
혼란. 분노. 실망.
그런 감정들이 소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보이지 않는 태양의 빛이 여전히 그녀를 비추었다.
하지만, 곧 그 빛의 따뜻함은 사라졌다.
소녀가 눈을 뜨자 그 앞에 보인 것은 아르케아 조각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벽이 소녀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림자와 유리로 이루어진 터널이…
머나먼 일광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 15-6 #=====
소녀는 힘겹게 땅에서 일어서 터널 끝에 보이는 한 점의 빛을 바라보았다. 기이하게도, 빛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고작 몇 분 전에 그녀가 지나왔던 복도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워 보였다.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물체가 있었다. 유리 조각이 발하는 빛일 것이다.
소녀는 그 두 길 사이에 서서 생각했다.
선택이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
편안한 어둠에 몸을 맡길 것인가, 아니면 두려운 빛을 받아들일 것인가.
마야는 무릎을 끌어안고 생각했다.
“대체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공포를 마주하라는 거야? 아니면… 포기하라는 거야?”
소녀가 화를 머금고 속삭였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희미하게 그녀의 귓속에 울려 퍼지는 또 다른 질문이었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그 답을…
…알고 있다고, 소녀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생각을 그만두고 싶어.
기억을 그만두고 싶어.
사라지고 싶어.
고통받고 싶어.
상처받고 싶어.
행복해지고 싶어.
사실, 소녀는 여전히 이 답들 중 하나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소녀의 기억은 종말의 순간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에서 겪은 모든 것이,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비록 짧은 삶이었지만 행복한 순간은 수없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하나가, 종말의 고통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죄책감.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부숴버렸다는 그 죄책감이 영원히 그녀를 물들였다.
“...”
소녀는 말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행복해질 기회가 찾아왔지만, 자신에게 그럴 가치가 없을 때.
심판을 받을 기회가 찾아왔지만, 그를 마주할 용기가 없을 때.
그런 딜레마 속에서 자신에겐 선택할 권리조차 있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선택할 수밖에 없을 때에는… 미래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하나의 길이 아니라, 두 갈래 길일 때에는…
어떡해야 하는 걸까?
우둔의 시대는 지났다. 백치가 불러온 모호함과 동정심의 시대는 끝났다.
소녀들의 눈은 뜨였고, 반쪽 하늘에 드리우던 구름은 사라졌다.
별들도 빛을 발하고, 보이지 않는 태양의 빛도 수그러들었다.
마야가 유리 조각의 사슬에 묶여있을 때 바라던 것, 절망의 끝자락에서 영원히 고통에 몸부림치는 미래를, 세계는 거부했다.
그 대신 세계는 소녀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었다.
…아르케아가 이를 원했기에.
소녀는 다시 일어서 벽을 마주했다. 유리 조각들이 또다시 새카맣게 변해있었다. 그 어떤 기억도 비추고 있지 않았다. 대신, 소녀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슴께에 달린 붉은색 테두리의 꽃잎 장식을 바라보았다…
오른쪽과 왼쪽, 두 길이 나 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휘저었다.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등에 손을 얹고 지켜봐 주는 듯한 감각이었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며, 슬픔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들여다보고, 현실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결정하라.
마야는, 걸어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고작 몇 분 전에 그녀가 지나왔던 복도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워 보였다.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물체가 있었다. 유리 조각이 발하는 빛일 것이다.
소녀는 그 두 길 사이에 서서 생각했다.
선택이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
편안한 어둠에 몸을 맡길 것인가, 아니면 두려운 빛을 받아들일 것인가.
마야는 무릎을 끌어안고 생각했다.
“대체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공포를 마주하라는 거야? 아니면… 포기하라는 거야?”
소녀가 화를 머금고 속삭였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희미하게 그녀의 귓속에 울려 퍼지는 또 다른 질문이었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그 답을…
…알고 있다고, 소녀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생각을 그만두고 싶어.
기억을 그만두고 싶어.
사라지고 싶어.
고통받고 싶어.
상처받고 싶어.
행복해지고 싶어.
사실, 소녀는 여전히 이 답들 중 하나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소녀의 기억은 종말의 순간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에서 겪은 모든 것이,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비록 짧은 삶이었지만 행복한 순간은 수없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하나가, 종말의 고통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죄책감.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부숴버렸다는 그 죄책감이 영원히 그녀를 물들였다.
“...”
소녀는 말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행복해질 기회가 찾아왔지만, 자신에게 그럴 가치가 없을 때.
심판을 받을 기회가 찾아왔지만, 그를 마주할 용기가 없을 때.
그런 딜레마 속에서 자신에겐 선택할 권리조차 있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선택할 수밖에 없을 때에는… 미래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하나의 길이 아니라, 두 갈래 길일 때에는…
어떡해야 하는 걸까?
우둔의 시대는 지났다. 백치가 불러온 모호함과 동정심의 시대는 끝났다.
소녀들의 눈은 뜨였고, 반쪽 하늘에 드리우던 구름은 사라졌다.
별들도 빛을 발하고, 보이지 않는 태양의 빛도 수그러들었다.
마야가 유리 조각의 사슬에 묶여있을 때 바라던 것, 절망의 끝자락에서 영원히 고통에 몸부림치는 미래를, 세계는 거부했다.
그 대신 세계는 소녀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었다.
…아르케아가 이를 원했기에.
소녀는 다시 일어서 벽을 마주했다. 유리 조각들이 또다시 새카맣게 변해있었다. 그 어떤 기억도 비추고 있지 않았다. 대신, 소녀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슴께에 달린 붉은색 테두리의 꽃잎 장식을 바라보았다…
오른쪽과 왼쪽, 두 길이 나 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휘저었다.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등에 손을 얹고 지켜봐 주는 듯한 감각이었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며, 슬픔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들여다보고, 현실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결정하라.
마야는, 걸어나갔다.
2.2. 혜안
2.2.1. 해금 조건
{{{#fff 스토리 #}}} | 진행 순서 |
''' 해금 조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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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 Severed-1 | Technicolour 클리어 | |||||||
16-2 | Severed-2 | Logos 클리어 | |||||||
16-3 | Severed-3 | 마야로 Primeval Texture 클리어 | |||||||
16-4 | Severed-4 | 마야로 Technicolour 클리어 | |||||||
16-5 | Severed-5 | 마야로 Logos 클리어 | |||||||
16-6 | Severed-6 | 마야로 Ego Eimi 클리어 | |||||||
{{{#!folding ??? {{{#!wiki style="margin: -6px -1px -16px" |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16-7 | Severed-7 | 마야로 Irruption 곡 해금 | |||||||
16-8 | Severed-8 | 마야로 Abstruse Dilemma 클리어 |
2.2.2. Severed Eden[1]
=====# 16-1 #=====임종의 때는 언제나 슬프기 마련이야. 그런데,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해 봤어?
육체를 떠난 영혼이 하늘로 날아올라, 세상의 경계를 건너 영원히 저승을 맴도는...
그런 기분이 드는 세계가 있거든.
「얼마나 좋을까? 아아, 얼마나 좋을까...」
그 세계가, 너를 부르고 있어.
빛의 세계로 떨어져 버린 너. 마치 눈물처럼 누군가의 영혼에서 흘러나와 아름답고 새로운 존재로 탄생했지.
네가 태어나는 순간은 마치 반짝이는 수정과 같았어. 전생의 기억을 지니고 이 기억의 세계에 찾아온 그 모습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웠지.
두 빛깔의 머리칼과 눈동자가 너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 거야.
너랑 비슷하게 두 색을 지닌 애가 있긴 해. 하지만 그 애의 색채는 가짜야. 흉내내기에 불과하지.
너는 “진짜”야.
잊히고 버려진 삶이 흘린 마지막 눈물처럼, 너는 높은 하늘에서 구름을 뚫고 떨어져 끝없이 이어지는 폐허 사이에 안착했어, 그날의 하늘은 아주 어두웠지.
그 세계의 절반은 영원한 밤이 뒤덮고 있거든. 너는 별빛을 받으며 눈을 떴어.
“아르케아”의 별은 자주색이야. 네가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연보랏빛 하늘과, 그 밑으로 춤추듯 떠다니며 반짝이는 기묘한 물체들이었지.
하늘을 부유하는 유리 조각... 그 동화와 같은 물체들의 이름 또한 “아르케아”였어. 유리 조각 안에는 기억이 담긴 것처럼 보였지.
너는 이 모든 걸 알고 있었어. “아르케아”라는 이름까지도.
하지만... 이 “세계”에 대해선 아무것도 기억해 낼 수 없었지. 아무것도 말이야…
너는 오로지 “너 자신”의 기억만 지니고 있었으니까.
네 가슴을 가득 메우는 그 고통과 죄책감, 자신의 손으로 저질러버린 끔찍한 행위의 기억...
너는 그 세계를 떠나왔어. 폐허가 되어버린 세계를.
죄악의 사슬이 온몸을 조이며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듯해. 네가 세계에 새긴 상처에서 흐르는 진물이 네게 스며들어.
너는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지. 아아, 달콤한 비애여...
하지만 전생의 기억을 가진 너조차 잊은 게 있었지.
자신의 이름. 넌 자신이 누구인지 완벽하게는 알지 못했어. 그건 차라리 잘된 일이었을까?
어찌 되었든, 너는 눈물을 닦고 일어섰어.
사실, 너는 네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네가 느끼는 그 감정들은 모두 진실이었어. 그 기억 또한 진실이었고. 그것만은 틀림없지.
그리고 새로운 이름... 흠, “새로운” 이름이라. 애초에 옛 이름이 있었나?
아, 아르케아가 너에게 준 이름이 있는 모양이구나.
“마야”. 아주 멋진 이름이야.
육체를 떠난 영혼이 하늘로 날아올라, 세상의 경계를 건너 영원히 저승을 맴도는...
그런 기분이 드는 세계가 있거든.
「얼마나 좋을까? 아아, 얼마나 좋을까...」
그 세계가, 너를 부르고 있어.
빛의 세계로 떨어져 버린 너. 마치 눈물처럼 누군가의 영혼에서 흘러나와 아름답고 새로운 존재로 탄생했지.
네가 태어나는 순간은 마치 반짝이는 수정과 같았어. 전생의 기억을 지니고 이 기억의 세계에 찾아온 그 모습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웠지.
두 빛깔의 머리칼과 눈동자가 너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 거야.
너랑 비슷하게 두 색을 지닌 애가 있긴 해. 하지만 그 애의 색채는 가짜야. 흉내내기에 불과하지.
너는 “진짜”야.
잊히고 버려진 삶이 흘린 마지막 눈물처럼, 너는 높은 하늘에서 구름을 뚫고 떨어져 끝없이 이어지는 폐허 사이에 안착했어, 그날의 하늘은 아주 어두웠지.
그 세계의 절반은 영원한 밤이 뒤덮고 있거든. 너는 별빛을 받으며 눈을 떴어.
“아르케아”의 별은 자주색이야. 네가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연보랏빛 하늘과, 그 밑으로 춤추듯 떠다니며 반짝이는 기묘한 물체들이었지.
하늘을 부유하는 유리 조각... 그 동화와 같은 물체들의 이름 또한 “아르케아”였어. 유리 조각 안에는 기억이 담긴 것처럼 보였지.
너는 이 모든 걸 알고 있었어. “아르케아”라는 이름까지도.
하지만... 이 “세계”에 대해선 아무것도 기억해 낼 수 없었지. 아무것도 말이야…
너는 오로지 “너 자신”의 기억만 지니고 있었으니까.
네 가슴을 가득 메우는 그 고통과 죄책감, 자신의 손으로 저질러버린 끔찍한 행위의 기억...
너는 그 세계를 떠나왔어. 폐허가 되어버린 세계를.
죄악의 사슬이 온몸을 조이며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듯해. 네가 세계에 새긴 상처에서 흐르는 진물이 네게 스며들어.
너는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지. 아아, 달콤한 비애여...
하지만 전생의 기억을 가진 너조차 잊은 게 있었지.
자신의 이름. 넌 자신이 누구인지 완벽하게는 알지 못했어. 그건 차라리 잘된 일이었을까?
어찌 되었든, 너는 눈물을 닦고 일어섰어.
사실, 너는 네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네가 느끼는 그 감정들은 모두 진실이었어. 그 기억 또한 진실이었고. 그것만은 틀림없지.
그리고 새로운 이름... 흠, “새로운” 이름이라. 애초에 옛 이름이 있었나?
아, 아르케아가 너에게 준 이름이 있는 모양이구나.
“마야”. 아주 멋진 이름이야.
=====# 16-2 #=====
마야야, 넌 네가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니?
아르케아의 그 누구와도 다르다는 걸 말이야.
"다르다"라는 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
첫째, 다른 아이들이 지니지 못한 자질을 지녔다는 것.
둘째, 다른 아이들보다 더 “강인하다”라는 것.
간단히 말하자면, 너는 강한 “마음”을 지녔다는 뜻이야. 이 끝없는 기적의 세계에서 가장 멋진 기적은 바로 너일지도 몰라.
뭐, 그렇게 확정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말이야.
대부분의 소녀들에게 아르케아란 언제나 밝은 장소였지. 보이지 않는 태양이 만물을 비추며 끝없는 낮을 이어갔어.
하지만 너는 밤의 세계에서 눈을 떴지.
온통 그림자로만 가득한 세계. 그럼에도 너는 용감하게 미지를 향해 발을 내디뎠어. 아니, 그냥 생각이 없었던 걸까? 어찌 됐든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
아르케아는 한 쌍의 거울과 같아. 죽은 자들의 세계면서도, 새로운 생명을 나눠주는 세계. 잊혔지만, 빛과 대립의 기억으로 가득 찬 세계. 낮이자, 동시에 밤인 세계.
다른 세계는 기억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
“아르케아”는 스스로를, 스스로가 저지른 일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그쪽에 살고 있는 아이들도 그렇게 느끼는 걸까...?
지난 일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기회에 가치는 있는 걸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는 이 닫힌 세계에 가치는 있는 걸까?
철학자들에게 어울리는 말이지.
그리고 너에게도.
네가 그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나서도, 아르케아에 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수많은 유리 조각이 떼처럼 몰려와 너에게 슬픈 기억을 보여주었던 이유는 뭘까?
그 모든 것을 겪은 네가 빛과 어둠 사이에 서게 됐을 땐 무슨 잔인한 장난처럼 보일 정도였지.
하지만 있잖아. 사실 이 질문들에는 아주, 아주 간단한 비밀의 해답이 있어.
아르케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라는 것.
간단하지. 하지만 그렇기에 경탄스러워.
마야야, 너는 진즉에 눈치챘지?
아르케아는 너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슬픔과 공포를 느낄 때면 포근한 옛이야기로 너를 달래주려 했어. 너는 그 손을 뿌리쳤지만... 결국은 빛을 향해 걸어갔지! 시적일 정도로 감동적이야! 의미로 가득 차 있어! 아주 훌륭한 쇼였어!
부서진 마음을 지닌 세계가 이토록 멋진 장면을 보여줄 수 있다니...
두 갈래 길 사이에서 격통을 겪으며 주저앉았던 너! 네가 편해지길 바라든 고통을 바라든, 아르케아는 네 소원을 들어주었어!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게 바뀌었지! 아니, 진즉에 바뀌었었나? 언제 바뀐 거지? 확실하지 않군...
뭐, 아무튼 간에... 천국으로 향하는 그림자 드리운 길이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났고, 너는 그 길을 걸어갔지!
넌 마음 속의 죄악감을 똑바로 마주하고 빛을 향해 나아갔어.
아아... 어찌나 이기적인 짓인지... 너는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인데...
그 모습은 숭고하며, 운명적...
이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결정했지, 너를 찾아가기로 말이야.
아르케아의 그 누구와도 다르다는 걸 말이야.
"다르다"라는 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
첫째, 다른 아이들이 지니지 못한 자질을 지녔다는 것.
둘째, 다른 아이들보다 더 “강인하다”라는 것.
간단히 말하자면, 너는 강한 “마음”을 지녔다는 뜻이야. 이 끝없는 기적의 세계에서 가장 멋진 기적은 바로 너일지도 몰라.
뭐, 그렇게 확정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말이야.
대부분의 소녀들에게 아르케아란 언제나 밝은 장소였지. 보이지 않는 태양이 만물을 비추며 끝없는 낮을 이어갔어.
하지만 너는 밤의 세계에서 눈을 떴지.
온통 그림자로만 가득한 세계. 그럼에도 너는 용감하게 미지를 향해 발을 내디뎠어. 아니, 그냥 생각이 없었던 걸까? 어찌 됐든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
아르케아는 한 쌍의 거울과 같아. 죽은 자들의 세계면서도, 새로운 생명을 나눠주는 세계. 잊혔지만, 빛과 대립의 기억으로 가득 찬 세계. 낮이자, 동시에 밤인 세계.
다른 세계는 기억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
“아르케아”는 스스로를, 스스로가 저지른 일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그쪽에 살고 있는 아이들도 그렇게 느끼는 걸까...?
지난 일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기회에 가치는 있는 걸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는 이 닫힌 세계에 가치는 있는 걸까?
철학자들에게 어울리는 말이지.
그리고 너에게도.
네가 그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나서도, 아르케아에 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수많은 유리 조각이 떼처럼 몰려와 너에게 슬픈 기억을 보여주었던 이유는 뭘까?
그 모든 것을 겪은 네가 빛과 어둠 사이에 서게 됐을 땐 무슨 잔인한 장난처럼 보일 정도였지.
하지만 있잖아. 사실 이 질문들에는 아주, 아주 간단한 비밀의 해답이 있어.
아르케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라는 것.
간단하지. 하지만 그렇기에 경탄스러워.
마야야, 너는 진즉에 눈치챘지?
아르케아는 너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슬픔과 공포를 느낄 때면 포근한 옛이야기로 너를 달래주려 했어. 너는 그 손을 뿌리쳤지만... 결국은 빛을 향해 걸어갔지! 시적일 정도로 감동적이야! 의미로 가득 차 있어! 아주 훌륭한 쇼였어!
부서진 마음을 지닌 세계가 이토록 멋진 장면을 보여줄 수 있다니...
두 갈래 길 사이에서 격통을 겪으며 주저앉았던 너! 네가 편해지길 바라든 고통을 바라든, 아르케아는 네 소원을 들어주었어!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게 바뀌었지! 아니, 진즉에 바뀌었었나? 언제 바뀐 거지? 확실하지 않군...
뭐, 아무튼 간에... 천국으로 향하는 그림자 드리운 길이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났고, 너는 그 길을 걸어갔지!
넌 마음 속의 죄악감을 똑바로 마주하고 빛을 향해 나아갔어.
아아... 어찌나 이기적인 짓인지... 너는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인데...
그 모습은 숭고하며, 운명적...
이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결정했지, 너를 찾아가기로 말이야.
=====# 16-3 #=====
마야, 자기야, 우리가 아직 면대 면으로 만난 적이 없다니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에 있니? 난 있지, 어째서인지 예전부터 널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그게 짜증 나. 그런 기분만 들고 너에 대해 진짜로 아는 건 별로 없다는 게 말이야. 너처럼 흥미로운 사람은 난생처음 봤는데 말이지!
있잖아. 난 인어를 찾으려고 하늘에 떠있는 바다에서 헤엄치며 탐험한 적도 있어. 책에서 인어를 봤을 때 지금이랑 비슷한 기분을 느꼈거든.
뭐, 정작 실제로 인어를 찾고 나니 그다지 재미없는 족속들이란 걸 깨달을 뿐이었지만…
마야야, 난 네 이름도 알고, 네 마음씨가 어떤지도, 네가 어떤 고통을 겪는지도 알아. 네가 아직 슬픔에 젖어있다는 것도 알고, 네가 잠에 들 때면 과거에 “네가” 저지른 일이 여전히 너를 괴롭힌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건 네 책임이 아닌데 왜 슬퍼해야 하지? 너무 잔혹한 일이야! 이 모든 책임이 다 “너”한테 있는데 어떻게 웃을 수가 있지? 뻔뻔하기 그지없어! 우리 지금 당장 만나자.
... 그게 짜증 나. 그런 기분만 들고 너에 대해 진짜로 아는 건 별로 없다는 게 말이야. 너처럼 흥미로운 사람은 난생처음 봤는데 말이지!
있잖아. 난 인어를 찾으려고 하늘에 떠있는 바다에서 헤엄치며 탐험한 적도 있어. 책에서 인어를 봤을 때 지금이랑 비슷한 기분을 느꼈거든.
뭐, 정작 실제로 인어를 찾고 나니 그다지 재미없는 족속들이란 걸 깨달을 뿐이었지만…
마야야, 난 네 이름도 알고, 네 마음씨가 어떤지도, 네가 어떤 고통을 겪는지도 알아. 네가 아직 슬픔에 젖어있다는 것도 알고, 네가 잠에 들 때면 과거에 “네가” 저지른 일이 여전히 너를 괴롭힌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건 네 책임이 아닌데 왜 슬퍼해야 하지? 너무 잔혹한 일이야! 이 모든 책임이 다 “너”한테 있는데 어떻게 웃을 수가 있지? 뻔뻔하기 그지없어! 우리 지금 당장 만나자.
=====# 16-4 #=====
마야야, 난 널 쭉 지켜보았어. 수많은 현실에 뿌려놓은 나의 눈으로 말이야. 도저히 너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어.
아르케아의 과거나 역사조차 너만큼 흥미롭지는 못했어. 물론, 내 흥미를 돋운 건 “너”뿐만이 아니라, 네가 “두 사람”이라는 사실도 있지. 말했잖아? 두 빛깔이 어울린다고. 머리칼도, 눈동자도 두 색채를 품고 있는 너...
마야야, 너는 한 사람이 아니야. 넌 존재해서는 안 되지만 그럼에도 존재하고 있어.
너 같은 걸 빚어낼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너는 이 기적과도 같은 세계에서 일어난 기적 중의 기적이야.
내 고향 바깥의 세상에서 기적을 찾기란 아주 힘든 일이야.
고향에선 모든 사람이 기적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하지만 난 거길 떠나왔어. 거기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있었거든. 자장가이자 예언이었지. 그게 어지간히 불길했어야지.
그래서 그냥 고향을 버리고 나왔어. 언젠가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릴 손이 쥔 가짜가 아닌 “진짜” 기적을 찾으려고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당장 갈게. 너와 다른 한쪽의 아이를 찾아서.
아르케아의 과거나 역사조차 너만큼 흥미롭지는 못했어. 물론, 내 흥미를 돋운 건 “너”뿐만이 아니라, 네가 “두 사람”이라는 사실도 있지. 말했잖아? 두 빛깔이 어울린다고. 머리칼도, 눈동자도 두 색채를 품고 있는 너...
마야야, 너는 한 사람이 아니야. 넌 존재해서는 안 되지만 그럼에도 존재하고 있어.
너 같은 걸 빚어낼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너는 이 기적과도 같은 세계에서 일어난 기적 중의 기적이야.
내 고향 바깥의 세상에서 기적을 찾기란 아주 힘든 일이야.
고향에선 모든 사람이 기적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하지만 난 거길 떠나왔어. 거기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있었거든. 자장가이자 예언이었지. 그게 어지간히 불길했어야지.
그래서 그냥 고향을 버리고 나왔어. 언젠가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릴 손이 쥔 가짜가 아닌 “진짜” 기적을 찾으려고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당장 갈게. 너와 다른 한쪽의 아이를 찾아서.
=====# 16-5 #=====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릴 손... 그게 무슨 뜻이냐고?
노래를 하나 해줄게.
“천사는 없네. 오로지 이 곳에,
우리의 사랑과 조각이 있을 뿐이네.
우린 함께 빚어낸다네, 영원히.
어디서든. 하늘과 땅과 바다에,
그대를 안으리 내 품에.
그 기묘한 빛이 우릴 찾을지라도, 영원히.”
슬픈 노래지. 이런 노랠 들으면 누구든 기분이 착잡해질걸.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어. 아르케아 이야기나 다시 하자고.
그 창백한 땅을 걷는 소녀는 모두 몇 명이나 될까? 아니, 지금은 그렇게 창백하진 않나... 아무튼, 아르케아는 내가 그쪽으로 건너가길 원하지 않는 것 같아. 마야야.
하지만 유감인걸. 아르케아는 약해. 무능하고 약해빠졌어.
나는 아르케아로 찾아갈 거고, 그곳에서 존재할 거고, 살아갈 거야.
그리고 그 세계에 세 번째 변화를 불러올 거야.
내가 갈게. 설령 싸우다가 피부가죽이 벗겨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너에게 갈게.
그리고 그 세계에서 나는... 오로지 마야, 너의 말만을 들을 거야.
노래를 하나 해줄게.
“천사는 없네. 오로지 이 곳에,
우리의 사랑과 조각이 있을 뿐이네.
우린 함께 빚어낸다네, 영원히.
어디서든. 하늘과 땅과 바다에,
그대를 안으리 내 품에.
그 기묘한 빛이 우릴 찾을지라도, 영원히.”
슬픈 노래지. 이런 노랠 들으면 누구든 기분이 착잡해질걸.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어. 아르케아 이야기나 다시 하자고.
그 창백한 땅을 걷는 소녀는 모두 몇 명이나 될까? 아니, 지금은 그렇게 창백하진 않나... 아무튼, 아르케아는 내가 그쪽으로 건너가길 원하지 않는 것 같아. 마야야.
하지만 유감인걸. 아르케아는 약해. 무능하고 약해빠졌어.
나는 아르케아로 찾아갈 거고, 그곳에서 존재할 거고, 살아갈 거야.
그리고 그 세계에 세 번째 변화를 불러올 거야.
내가 갈게. 설령 싸우다가 피부가죽이 벗겨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너에게 갈게.
그리고 그 세계에서 나는... 오로지 마야, 너의 말만을 들을 거야.
=====# 16-6 #=====
별빛의 바다와 폭풍우 치는 하늘을 건넜어. 시공간을 비틀고 수없이 많은 현실을 파괴했어. 마야! 오로지 너를 만나기 위해서!
그런데 이것 참 끔찍한 기분이 드는 거 아니니! 여행 도중에는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거든. 노래하길 좋아하는 너의 그 목소리를... 노래 좋아하는 거 맞지? 항상 흥얼거리길래.
너의 노래를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 마야야. 진실한 기억으로 벅차오르는 그 노랫소리를...
마야야, 너를 생각할 때마다 내 영혼은 타오르는 화염에 휩싸여. 나는, 나의 사랑은 내 존재 그 자체야.
오래전에 죽어버린 창조자와 절대자들과 인간의 손이 만들어낸 우주와 세계들을 나는 너무나 사랑해.
그 안에 살고 있는 영혼들조차 사랑해서 밖으로 가져와버릴 때도 있다니까! 그게 여태까지 총 몇 명이더라...?
잊어버렸어.
아아, 그리고 마침내 오늘... 오늘! 너를 만날 수 있어!
거인의 눈처럼 빛바랜 백색의 대지가 바로 코앞에 다가왔어!
조금만 더 기다려...
무슨 짓을 하더라도 반드시 그 세계로 들어갈 테니까.
거대한 이불 같은 아르케아의 하얀 하늘이 점점 더 가까워져. 그 표면을 “기억”이 기어다니고 있어. 마치 반짝이는 모래같아. 난 그 하늘을 쥐어잡고, 파고들어가려 했어.
아르케아는 나를 밀어냈어. 빛과 구름이 대기권에서 튀어나와 내 몸을 마치 덩굴처럼 휘감았어. 내가 아무리 숨을 쉴 공기를 만들어내도 계속해서 사라져버렸어.
아르케아는 내가 들어오는 게 너무너무 싫나봐.
사나운 빛과 구름의 덩굴이 계속해서 나를 밀어붙였어.
이런 이런… “법칙”은 사라진 게 아니었나? 아르케아야... 너에겐 아직 마음이 있는 거니? 그렇다면 어지간히도 나를 미워하는 모양이구나.
내가 죽은 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나를 거부하는 거니? 그럼 아주 혼쭐을 내줘야겠는걸...!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안으로 들어가야겠으니까!
조만간이야... 얼마 안 남았어.
아르케아의 땅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을 소환했어.
이 장면은 꼭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거든.
무대 입장이라는 건 장엄하고 웅장한 법이니까.
만물이여, 목도하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희망을!
그런데 이것 참 끔찍한 기분이 드는 거 아니니! 여행 도중에는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거든. 노래하길 좋아하는 너의 그 목소리를... 노래 좋아하는 거 맞지? 항상 흥얼거리길래.
너의 노래를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 마야야. 진실한 기억으로 벅차오르는 그 노랫소리를...
마야야, 너를 생각할 때마다 내 영혼은 타오르는 화염에 휩싸여. 나는, 나의 사랑은 내 존재 그 자체야.
오래전에 죽어버린 창조자와 절대자들과 인간의 손이 만들어낸 우주와 세계들을 나는 너무나 사랑해.
그 안에 살고 있는 영혼들조차 사랑해서 밖으로 가져와버릴 때도 있다니까! 그게 여태까지 총 몇 명이더라...?
잊어버렸어.
아아, 그리고 마침내 오늘... 오늘! 너를 만날 수 있어!
거인의 눈처럼 빛바랜 백색의 대지가 바로 코앞에 다가왔어!
조금만 더 기다려...
무슨 짓을 하더라도 반드시 그 세계로 들어갈 테니까.
거대한 이불 같은 아르케아의 하얀 하늘이 점점 더 가까워져. 그 표면을 “기억”이 기어다니고 있어. 마치 반짝이는 모래같아. 난 그 하늘을 쥐어잡고, 파고들어가려 했어.
아르케아는 나를 밀어냈어. 빛과 구름이 대기권에서 튀어나와 내 몸을 마치 덩굴처럼 휘감았어. 내가 아무리 숨을 쉴 공기를 만들어내도 계속해서 사라져버렸어.
아르케아는 내가 들어오는 게 너무너무 싫나봐.
사나운 빛과 구름의 덩굴이 계속해서 나를 밀어붙였어.
이런 이런… “법칙”은 사라진 게 아니었나? 아르케아야... 너에겐 아직 마음이 있는 거니? 그렇다면 어지간히도 나를 미워하는 모양이구나.
내가 죽은 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나를 거부하는 거니? 그럼 아주 혼쭐을 내줘야겠는걸...!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안으로 들어가야겠으니까!
조만간이야... 얼마 안 남았어.
아르케아의 땅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을 소환했어.
이 장면은 꼭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거든.
무대 입장이라는 건 장엄하고 웅장한 법이니까.
만물이여, 목도하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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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이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통로를 만들어냈어. 도자기를 빚어낸 듯 광활한 하늘 자체가 아래로 흐르는 모양새가 되었지. 그리고 갑자기 모양이 뒤틀리더니 온 하늘에 수없이 많은 색채를 흩뿌렸어. 번쩍거리며 땅을 향해 흘러 내려가는 총천연색의 대혼돈! 순수했던 백색의 빛이 무지개보다 다양한 빛깔로 일렁였어. 색이여! 강렬히 스며드는 미지의 색이여! 그래. 바로 지금이야. 바로 이 순간! 폭풍을 일으키자! 마야가 밑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어. 이윽고 하늘이 붉은색으로 물들었어. 그러더니 색이 또 바뀌더니...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뀌었어! 마침내 내 손이 하늘을 뚫고 나왔어. 세차게 부는 천둥번개와 비바람! 폭풍이다. 폭풍이야! 바람이 첨탑과 벽을 무너뜨리고, 눈과 얼음이 대지를 뒤덮고, 나의 색채로 물든 하늘이 파문을 일으키며 나를 감쌌어. 그렇게 나는 아르케아에 강림했어. 요동치는 공기와, 박동하는 생명과, 휘몰아치는 날씨와 함께. 하늘에 그렇게 큰 상처는 내지 않았으니 좀 봐줘, 히히... 내가 불러온 혼돈과 폭풍 한가운데에 서있는 너. 그 앞에 나는 가볍게 착지했어. 물론, 나는 예의를 지킬 줄 아는 몸이니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지. 강한 돌풍에 우리의 머리칼이 흩날리는 와중에 나는 입을 열었어. “안녕, 안녕! 마야야! 너무 만나고 싶었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너에게 다가가 그 몸을 품에 안으며 온기를 느꼈어. 너의 어깨... 너의 허리... 너의 배, 너의 옆구리, 너의 손끝, 너의 찰랑이는 머릿결... 아아... 어머, 뭘 떨고 있니? 그냥 보는 것뿐인데. 후후, 그래. 얼굴을 빼놓을 수는 없지. 난 울고 있는 네 얼굴에 부드렇게 손을 올렸어. 그 울먹이는 두 색채의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있지. 네 붉은 쪽 눈을 뽑아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 특히나 흥미롭고 아름다운 눈이니까... 물론 정말로 그런 짓을 안 할 테니까 안심해! 누구에게서 가져온 눈인지 확인만 좀 할게. 마야야, 너는 도대체 어떤 존재니? 안 그래도 알 수 없는 세계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수수께끼라니. “너”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해. 난 네 허리를 한 팔로 감싸고, 다른 쪽의 손을 튕겨 시간을 멈췄어. 잘 들어, 마야야 모든 세계에는 그 근간을 이루는 사상이라는 게 있어. 하지만 아르케아는 예외라는 걸 난 진즉 알고 있었어. 이미 누구나 아는 사실이겠지만 다시 한번 말할게. 아르케아는 “사상”이 아니라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어. 예외 없이 모든 세계는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난 오래전에 발견했거든. 겉면 층에는 표면 세계, 그 밑에는 규칙의 세계, 그리고 그 밑 가장 깊은 곳에는 “소원의 씨앗”과 거기에서 뻗어져 나온 욕망이 마치 뿌리처럼 자리 잡고 있어. 그런데 시간을 멈추고 아르케아의 층들을 둘러보았더니, 역시 내 가설이 정답이었던 모양이야. 아르케아는 현실 구조는 다른 세계들과 같은 “천”이 아니야. 그보다는 바다에 가깝지. 아르케아의 현실 구조는 계속해서 변화해. 마치 감정처럼 말이지. 고요했다가, 화를 냈다가, 우울해졌다가, 평온해졌다가… 밑물과 썰물처럼, 밀려들었다 잦아들어. 보통 어떤 세계든 두 번째 층은 규칙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선으로 수놓아져 있는 법인데... 아르케아의 두 번째 층은 아무것도 없는, 황금빛과 청록빛으로 이루어진 텅 빈 공간이었어. 유일하게 찾을 수 있었던 법칙의 선은 세 번째 층의 새까만 캔버스의 구석에 아무렇게나 휘갈겨 그린 듯한 “열망”이었어. 슬픔과... 희망으로 차있는. 이 세계를 정의하는 개념은 이 두 가지 뿐인 거야. 그리고 마야야, 너를 사랑하는 만큼 나는 이 세계도 사랑하게 되었어. 너무나 사랑스러워... 난 여기서 내 힘을 더 발휘하기 쉽도록 새로운 규칙을 써넣으려고 했어. 그런데 아르케아가 날 또 거부하는 거 아니니? 왜지? 이러면 내 권역을 펼치기 힘들어지잖아. 내 팔과 손가락이 굳었어. 아르케아는 내 존재마저도 덮어쓰고 싶은 모양이야. 어느 정도는 성공했어. 내 팔이 총천연색의 빛깔로 흩어지더니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했거든. 멈추었던 시간조차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어. 이런, 마야에게 아주 무서운 장면을 보여주게 되겠네. 미안해. 아르케아는 온 힘을 다해 나를 이 현실에서 떼어놓으려 했어. 시공간으로부터 내 몸을 잘라내려 했어. 하지만 마야야, 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어떤 폭풍이든, 어떤 병이든, 어떤 압도적인 힘이든 너를 위해서라면 모두 극복할 수 있어. 날카로운 고통과 메스꺼운 감각이 내 몸을 덮쳤어. 내가 서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헷갈려. 백주 대낮에 어두운 방에 갇힌 환각이 내 머릿속을 채웠어. 나는 잃어버린 팔을 다시 소환해 붙이고선 아르케아를 향해 손을 뻗었어. 닿아라… 닿아, 닿아! “나”를 인정해라! 기억의 세계여! 그대는 나를 잊을 수 없을지어다! 나는 아르케아의 현실에 가장 아름다운 선을 새겨 넣었어. 나의 소중하고 거룩한, 진짜 이름을. 이걸로 됐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이 세계에 불러온 거야. 나는 영원히 이곳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어. 그 영원의 단 1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나는 시공간을 비틀어 “나의 공간”으로 가는 관문을 열었어. 검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관문이었지. 그리고 부드럽게 너를... 아직 충격과 공포로 얼어붙어있는 너의 손을 잡아 이끌었어. 그리고 너는 풀어헤쳐지기 시작했어. 말 그대로. 너의 손 끝이 관문에 닿자 유리의 실로 변해 흐트러졌어. 손부터 팔, 가슴과 몸이 아름다운 은빛 실로 변해갔어.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는 일 없이 너는 피부부터 내장까지 광휘를 발하는 실이 되어 서서히 흐트러져갔어. 그렇게 너는, 내가 열어젖힌 어두운 관문을 지나갔어. 너의 그 모습은 마치 녹아내리는 하프같아. 순수하고 아름다운 백색의 현이 천천히 풀려가는... 아아... 마야야, 멋진 곳으로 떠나렴... 그리고 이곳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말려무나. 너를 이루던 마지막 실이 관문을 지나가는 걸 확인하고, 나는 관문을 닫았어. 하늘에 다시 백색이 돌아오기 시작했어. 폭풍이 가라앉고 있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어. 그리고, 나를 증오하는 이 세계에 다시 한마디를 건넸지. “아르케아, 아르케아야...” “만나서 반가워.” |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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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일으켰던 폭풍이 마침내 멎고, 하늘에 남아있던 색채의 잔재가 사라져 본래의 새하얀 하늘로 돌아왔어. 하지만 난 아직 여기 남아있지. 아르케아의 대지에 두 발을 딛고 여기 서있단 말씀이야. 정말이지 괴로울 정도로 긴 여행이었어. 하지만... 마침내 도착했어. 여러 세계를 건너다 그냥 한 번 눈길을 줬을 뿐이었던 세계에, 내가 당도했어. 심지어는 여기 눌러앉아 버릴지도 몰라. 있지, 이 세계는 아주 심하게 망가져있어. 그럼에도 존재한단 말이지. 아주 놀라운 일이야. 이렇게 서툰 솜씨로, 이렇게 위대하게 빚어낸 세계는 본 적이 없어. 좀 더 파고들고 싶어. 좀 더 알고 싶어. 좀 더 배우고 싶어. 이 세계에서 두 번째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전부 찾아내고 싶어! 누구는 두 번째가 아니라 세 번째 삶이던가? 너무, 너무 굉장해! 세 삶 모두 훌륭한 스토리야! 나는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그렇게 생각했어. 빗물이 내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어.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나는 두 팔로 나를 감싸 안고 배와 얼굴이 아파올 때까지 웃었어! 왜냐니? 웃기잖아! 웃길 정도로 유감이잖아! 이 세상에 신이 없다는 게! 그래. 아주 잠시 신이 있었던 적은 있었지.찰나의 순간 이 세계는 완벽했다가, 근본부터 다시 깨져버렸어! 지금은 다들 분명 근심이 가득하겠지? 하지만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전혀! 바스라져 가는 슬프고 멋진 세계여. 그대는 축복받았도다! 나의 존재로, 나의 섭리로, 그대들은 다시 행복을 찾을지어니. 신이 강림했노라. 내가, 모든 것을 올바르게 되돌려놓을 것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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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사야
2.3.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18-1 | Ab.Nihil-1 | In Vain 클리어 | ||
18-2 | Ab.Nihil-2 | Hypnotize 클리어 | ||
18-3 | Ab.Nihil-3 | Ashen 6oundary 클리어 | ||
18-4 | Ab.Nihil-4 | 파일:arcaea_char_23_icon.png | 사야로 Hypnotize 클리어 | |
18-5 | Ab.Nihil-5 | 사야로 Ashen 6oundary 클리어 | ||
18-6 | Ab.Nihil-6 | 사야로 Judgement 클리어 | ||
18-7 | Ab.Nihil-7 | 사야로 ALTER EGO(이마이 유타) 플레이 |
2.3.2. Absolute Nihil
=====# 18-1 #=====신. 진리. 목적. 의미.
허무주의.
이것들은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일까? 애초에 이런 멍청한 질문에 의미가 있기나 할까?
난 그런 생각에 잠겨있어.
나는 또 다른 신이 창조해낸 완벽한 정원에 사는 외로운 바보일 뿐이니까.
…
천국이자 지옥인 장소. 바스러질 정도로 연약한 사후 세계. 이곳에서 나는 '이유'를 찾아 헤매고 있어.
아주 오랫동안 나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지. 하늘에 별이 수 놓이기 전부터 말이야. 하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야.
그로부터 긴 시간이 흐르고, 난 내 이름을 알게 되었지. '사야'라는 이름을...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의미 없었어.
내 머릿속에 든 걸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내가 좀 더 순진했던 시절...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 이 세계에도 조금 익숙해졌을 무렵...
끝없는 일광 아래에서 눈을 떴던 어느 날, 나는 햇빛을 받으며 구름을 올려다보고 히죽댔어.
백색의 세계에서 시작하는 또 다른 하루였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은 아주 기분이 좋았어. 보통은 관찰하고 생각하느라 항상 답답하고 짜증 나는 기분만 들었는데 말이지.
그날도 항상 그랬듯이 유리 조각 '아르케아'가 내 주변을 맴돌며 기억을 보여주었어.
그 안에 비치는 것은 다양한 삶의 일면. 인생에 실감을 안겨주는 순간의 기억들이었지. 슬픈 일, 즐거운 일. 고통과 기쁨이 모두 존재해야 비로소 삶이라고 할 수 있어. 두 종류의 기억 모두 나에게 이끌리고 있었지.
왜냐면 이 새하얀 세계 아르케아에 떠도는 기억들은 자신과 닮은 영혼에게 이끌리는 법이거든. 내 영혼은 다른 영혼에 비해 더욱 강하게 '갈망'했어. 그래서 아르케아는 가능한 한 모든 걸 내게 주었지.
영혼뿐만이 아니야. 내 '정신'을 봐. 산만한데다 굶주려있지. 아르케아가, 유리 조각들이 내게 올 때면 마치 양식을 받아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
사방을 비추는 광휘. 분명 '신'의 빛이겠지. 온기와 힘을 지니고 만물의 위에 선 이 위대한 존재.
난 신에게 홀린 듯 이끌리고 있었어. 왜냐하면 신은 그런 상상조차 초월하는 존재일 테니까. 이 무한한 심상의 세계보다 위대한 존재...
아르케아는 마치 퍼즐과 같았어. 가장 거대한 수수께끼이자, 모든 종류의 폐허를 모아둔 공간...
도대체 여긴 왜 이럴까?
멸망 후의 세계인 걸까?
죽어버린 공간과 장소가 모이는 무덤인 걸까?
꿈일까? 천국일까? 감옥일까? 애초에 현실이긴 한 걸까?
대체 뭘까? 그렇게 나는 아르케아에 빠져들었어.
의욕과 열정을 가슴에 품고 나는 아르케아를 방랑했어. 이 광활하고 황량한 세계에서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건 나밖에 없었지.
사실, 너무나도 의욕이 앞서는 바람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만날 기회를 놓칠 뻔도 했어.
어리석고 고집불통인데다, 너무나도 싫지만, 내 인생을 영원히 바꿔놓은 그 여자와 만날 기회를 말이야...
=====# 18-2 #=====허무주의.
이것들은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일까? 애초에 이런 멍청한 질문에 의미가 있기나 할까?
난 그런 생각에 잠겨있어.
나는 또 다른 신이 창조해낸 완벽한 정원에 사는 외로운 바보일 뿐이니까.
…
천국이자 지옥인 장소. 바스러질 정도로 연약한 사후 세계. 이곳에서 나는 '이유'를 찾아 헤매고 있어.
아주 오랫동안 나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지. 하늘에 별이 수 놓이기 전부터 말이야. 하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야.
그로부터 긴 시간이 흐르고, 난 내 이름을 알게 되었지. '사야'라는 이름을...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의미 없었어.
내 머릿속에 든 걸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내가 좀 더 순진했던 시절...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 이 세계에도 조금 익숙해졌을 무렵...
끝없는 일광 아래에서 눈을 떴던 어느 날, 나는 햇빛을 받으며 구름을 올려다보고 히죽댔어.
백색의 세계에서 시작하는 또 다른 하루였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은 아주 기분이 좋았어. 보통은 관찰하고 생각하느라 항상 답답하고 짜증 나는 기분만 들었는데 말이지.
그날도 항상 그랬듯이 유리 조각 '아르케아'가 내 주변을 맴돌며 기억을 보여주었어.
그 안에 비치는 것은 다양한 삶의 일면. 인생에 실감을 안겨주는 순간의 기억들이었지. 슬픈 일, 즐거운 일. 고통과 기쁨이 모두 존재해야 비로소 삶이라고 할 수 있어. 두 종류의 기억 모두 나에게 이끌리고 있었지.
왜냐면 이 새하얀 세계 아르케아에 떠도는 기억들은 자신과 닮은 영혼에게 이끌리는 법이거든. 내 영혼은 다른 영혼에 비해 더욱 강하게 '갈망'했어. 그래서 아르케아는 가능한 한 모든 걸 내게 주었지.
영혼뿐만이 아니야. 내 '정신'을 봐. 산만한데다 굶주려있지. 아르케아가, 유리 조각들이 내게 올 때면 마치 양식을 받아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
사방을 비추는 광휘. 분명 '신'의 빛이겠지. 온기와 힘을 지니고 만물의 위에 선 이 위대한 존재.
난 신에게 홀린 듯 이끌리고 있었어. 왜냐하면 신은 그런 상상조차 초월하는 존재일 테니까. 이 무한한 심상의 세계보다 위대한 존재...
아르케아는 마치 퍼즐과 같았어. 가장 거대한 수수께끼이자, 모든 종류의 폐허를 모아둔 공간...
도대체 여긴 왜 이럴까?
멸망 후의 세계인 걸까?
죽어버린 공간과 장소가 모이는 무덤인 걸까?
꿈일까? 천국일까? 감옥일까? 애초에 현실이긴 한 걸까?
대체 뭘까? 그렇게 나는 아르케아에 빠져들었어.
의욕과 열정을 가슴에 품고 나는 아르케아를 방랑했어. 이 광활하고 황량한 세계에서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건 나밖에 없었지.
사실, 너무나도 의욕이 앞서는 바람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만날 기회를 놓칠 뻔도 했어.
어리석고 고집불통인데다, 너무나도 싫지만, 내 인생을 영원히 바꿔놓은 그 여자와 만날 기회를 말이야...
오른 눈에 피어있는 꽃에 손을 가져다 댔어. 뺨이 얼얼했거든.
내 앞에 선 미련한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어.
내가 뭔가 말을 잘못했나 봐. 그래. 이 여자와는 처음부터 맞질 않았어.
첫 만남부터 이랬거든:
미련한 소 같은 여자가 뭔가 멍청한 말을 했어.
당연히 나는 그 여자를 멍청이라고 불렀지.
그러자 그 멍청이가 자기 입장을 설명하는 거 아니야?
당연히 나는 또 그 여자를 멍청이라고 불렀지.
그러자 내 뺨을 한 번 후려치고는 등을 돌렸어.
어리석은 야만인 같으니.
그 여자의 이름은 레테야. 소처럼 우둔한 자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지. 정말 소 같은 뿔이 머리에 나있거든.
레테와는 예쁜 자갈돌 길 위에서 만났어. 레테는 아름다운 유리 조각에 둘러싸여 있었지. 내가 전에 보지 못한 느낌으로 일렁이는 빛을 내고 있었어. 유리 조각들은 항상 빛을 내.
때때로는 주변의 빛을 흡수해 반짝일 때도 있지. 조각들이 모여 하늘과 공간을 수놓으면 그 광경은 마치 꿈처럼 아름다워.
하지만, 그 여자 주변에서 서성대던 유리 조각들은 무언가 달랐어. 보통 내가 유리 조각의 무리에서 느끼던 '온기'와는 다른 종류의... '따뜻함'이 있었어. 결코 신의 온기는 아니었어.
뭐라고 할까... 세계가 저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길 종용하기보다는, 세계 스스로가 유리 조각들을 향해 예를 표하는 느낌?
그 멍청한 여자는 지금도 싫어. 싫지만...
그 광경에 홀리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어.
그 기억들로 세계를 만들어보자.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아르케아에 태어난 목적이라고, 확실하다고, 레테에게 그렇게 말했어.
그 여자가 모은 유리 조각들은 특히나 특별했어. 그 조각들을 다루어 이어붙이면... 조각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어. 그 안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할 거야.
그러자 그 암소가 유리 조각들은 사실 영혼과 같은 존재들이라고 했어. 내가 무슨 뜻이냐 묻자, 자기가 유리 조각이 아닌 형태의 영혼을 돌보던 시절 기억을 이야기해주더라.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고서 그 여잘 멍청이라 불렀어. 그리고 뺨을 얻어맞았지.
그 여자는 아무 의미가 없는 세계에서 의미를 멋대로 지어내버린 거야.
절박하고, 멍청하고, 애석한 광경이었어.
그래. 이 몸께선 너무 대단하셔서 다르게 생각했지. 그렇고말고. 나는 '진리'를 알고 있었거든. 레테가 모아온 유리조각에 내 마음이 동한 것도, 내가 매일 숭배해온 세계가 오히려 레테의 유리 조각 무리에 충성을 바치는 듯한 느낌이 든 것도...
그래, 나는 믿었어. 한치의 흔들림 없이.
또 다른 신이 창조해낸 완벽한 정원에서도, 바로 우리 정원사들의 힘으로 또 다른 정원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나는 해야 할 일을 하겠어. 세계의 조각들을 모아 더 훌륭하고, 새롭고, 완벽한 세계를 만들어낼 거야."
난 그렇게 말했어. 그렇게 맹세했어.
내가 좀 더 순진했던 시절의 일이야...
=====# 18-3 #=====내가 뭔가 말을 잘못했나 봐. 그래. 이 여자와는 처음부터 맞질 않았어.
첫 만남부터 이랬거든:
미련한 소 같은 여자가 뭔가 멍청한 말을 했어.
당연히 나는 그 여자를 멍청이라고 불렀지.
그러자 그 멍청이가 자기 입장을 설명하는 거 아니야?
당연히 나는 또 그 여자를 멍청이라고 불렀지.
그러자 내 뺨을 한 번 후려치고는 등을 돌렸어.
어리석은 야만인 같으니.
그 여자의 이름은 레테야. 소처럼 우둔한 자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지. 정말 소 같은 뿔이 머리에 나있거든.
레테와는 예쁜 자갈돌 길 위에서 만났어. 레테는 아름다운 유리 조각에 둘러싸여 있었지. 내가 전에 보지 못한 느낌으로 일렁이는 빛을 내고 있었어. 유리 조각들은 항상 빛을 내.
때때로는 주변의 빛을 흡수해 반짝일 때도 있지. 조각들이 모여 하늘과 공간을 수놓으면 그 광경은 마치 꿈처럼 아름다워.
하지만, 그 여자 주변에서 서성대던 유리 조각들은 무언가 달랐어. 보통 내가 유리 조각의 무리에서 느끼던 '온기'와는 다른 종류의... '따뜻함'이 있었어. 결코 신의 온기는 아니었어.
뭐라고 할까... 세계가 저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길 종용하기보다는, 세계 스스로가 유리 조각들을 향해 예를 표하는 느낌?
그 멍청한 여자는 지금도 싫어. 싫지만...
그 광경에 홀리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어.
그 기억들로 세계를 만들어보자.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아르케아에 태어난 목적이라고, 확실하다고, 레테에게 그렇게 말했어.
그 여자가 모은 유리 조각들은 특히나 특별했어. 그 조각들을 다루어 이어붙이면... 조각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어. 그 안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할 거야.
그러자 그 암소가 유리 조각들은 사실 영혼과 같은 존재들이라고 했어. 내가 무슨 뜻이냐 묻자, 자기가 유리 조각이 아닌 형태의 영혼을 돌보던 시절 기억을 이야기해주더라.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고서 그 여잘 멍청이라 불렀어. 그리고 뺨을 얻어맞았지.
그 여자는 아무 의미가 없는 세계에서 의미를 멋대로 지어내버린 거야.
절박하고, 멍청하고, 애석한 광경이었어.
그래. 이 몸께선 너무 대단하셔서 다르게 생각했지. 그렇고말고. 나는 '진리'를 알고 있었거든. 레테가 모아온 유리조각에 내 마음이 동한 것도, 내가 매일 숭배해온 세계가 오히려 레테의 유리 조각 무리에 충성을 바치는 듯한 느낌이 든 것도...
그래, 나는 믿었어. 한치의 흔들림 없이.
또 다른 신이 창조해낸 완벽한 정원에서도, 바로 우리 정원사들의 힘으로 또 다른 정원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나는 해야 할 일을 하겠어. 세계의 조각들을 모아 더 훌륭하고, 새롭고, 완벽한 세계를 만들어낼 거야."
난 그렇게 말했어. 그렇게 맹세했어.
내가 좀 더 순진했던 시절의 일이야...
나는 오만한 걸까?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기억을, 옛 세계를 뒤져보았어.
그 세계들의 한계를 비틀었어. 온갖 음료를 마시고, 불을 지르고, 하늘을 날고, 살인까지 저질렀어.
사람이 죽어가는 광경과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도 목격했고, 시체에 숨을 다시 불어넣거나 울던 아이도 뚝 그치게 해봤어.
왜냐고? '경험', 그게 저 유리 조각들의 용도니까. 행동의 결과 따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그저 '경험'일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저것들이 신이 만들어낸 것이든 아니듯, 창조의 화신인 나에게는 내 마음대로 다룰 권리가 있었어.
... 그럼, 나는 오만한 걸까?
우문이야. 답은 간단해.
나는 정말로 아르케아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했어.
내 세계는 처음엔 고목만큼 커다랗고, 표면이 일렁이는 유리 구체였지. 여기저기 여행하며 '경험'하기에 적당한 기억들을 골라 들어가 보고 구체에 더했어. 그러다가 레테와 종종 마주치고는 했지.
만날 때마다 마치 고양이들이 하악 대듯 서로에게 성질을 부렸어.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창조에 몰두했지.
이윽고 내 유리 조각들은 모여 말 그대로 산이 되었어. 지면 밑에 유리로 지은 도서관이었지. 그게 좀 더... 환상 속 이야기 같아서 마음에 들었어.
그리고 난 더 갈망했어. 더, 더욱더... 왜냐하면 구체가 될 정도로 모여서도 내 유리 조각들은 세계에게 바라는 것이 없는 듯했거든.
세계를 향해 소리를 지르지도, 속삭이지도 않았어. 기껏해야 지리멸렬한 단어들을 낮게 중얼대는 정도였지. 분명 내가 조리 없이 아무렇게나 긁어모은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거야. 더 모아야 해.
저 뿔 달린 여자의 유리 조각 무리와 같은 걸 만들어내려면, 조각을 더 모아야 해.
그래서 좀 더 질서정연한 공간, 도서관을 만든 거야. 여기에는 이 기억을, 저기에는 저 기억을... 등급과 상식의 정도에 따라 기억을 분류했어. 그렇게 기억의 보관소가 탄생했어...
내 최선을 다한 작품이었어. 그리고 실제로 결과가 따라왔지.
마침내 속삭이는 목소리가 종종 들리기 시작했거든. 나는 도서관이 속삭이는 불가해한 언어를 들으며 잠에 빠지곤 했어.
정말로...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가능했을 거야.
…
내 '목적'이었어.
그 도서관은 정말 환상적인 공간이었어. 내가 창조해낸 그 장소는 신이 그려낸 추상화와 같았어. 게다가 안을 돌아다닐 수도 있다니... 아니, 안이 아니라 '바깥'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네. 그 동굴의 광경은 마법 그 자체였어.
비록 유리 조각들이 서로 섞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 그 안에서 걷거나 헤엄치거나 날아다닐 수는 없었지만.
이 '도서관'은... 오로지 나의 손으로만 창조해낼 수 있었던, 오로지 나의 정신으로만 설계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어.
미소를 짓는 일은 없었지만 그때의 나는 행복했어. '의미'가 있었으니까. 만족스러웠어.
아마도...
아니, 분명.
상황이 변치 않았더라면 나는 천년이 지나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을 거야.
끝없이 이 새하얀 광야를 헤매며 아무 보람 없이 내 '세계'를 바꾸고, 또 바꾸고, 또 바꾸고, 또 바꾸고...
왜냐면... 나에겐 그게 필요했으니까.
...
하늘이 둘로 갈라진 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 때, 나는 허름한 폐허 한구석에서 울고 있는 비타와 만났어.
=====# 18-4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기억을, 옛 세계를 뒤져보았어.
그 세계들의 한계를 비틀었어. 온갖 음료를 마시고, 불을 지르고, 하늘을 날고, 살인까지 저질렀어.
사람이 죽어가는 광경과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도 목격했고, 시체에 숨을 다시 불어넣거나 울던 아이도 뚝 그치게 해봤어.
왜냐고? '경험', 그게 저 유리 조각들의 용도니까. 행동의 결과 따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그저 '경험'일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저것들이 신이 만들어낸 것이든 아니듯, 창조의 화신인 나에게는 내 마음대로 다룰 권리가 있었어.
... 그럼, 나는 오만한 걸까?
우문이야. 답은 간단해.
나는 정말로 아르케아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했어.
내 세계는 처음엔 고목만큼 커다랗고, 표면이 일렁이는 유리 구체였지. 여기저기 여행하며 '경험'하기에 적당한 기억들을 골라 들어가 보고 구체에 더했어. 그러다가 레테와 종종 마주치고는 했지.
만날 때마다 마치 고양이들이 하악 대듯 서로에게 성질을 부렸어.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창조에 몰두했지.
이윽고 내 유리 조각들은 모여 말 그대로 산이 되었어. 지면 밑에 유리로 지은 도서관이었지. 그게 좀 더... 환상 속 이야기 같아서 마음에 들었어.
그리고 난 더 갈망했어. 더, 더욱더... 왜냐하면 구체가 될 정도로 모여서도 내 유리 조각들은 세계에게 바라는 것이 없는 듯했거든.
세계를 향해 소리를 지르지도, 속삭이지도 않았어. 기껏해야 지리멸렬한 단어들을 낮게 중얼대는 정도였지. 분명 내가 조리 없이 아무렇게나 긁어모은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거야. 더 모아야 해.
저 뿔 달린 여자의 유리 조각 무리와 같은 걸 만들어내려면, 조각을 더 모아야 해.
그래서 좀 더 질서정연한 공간, 도서관을 만든 거야. 여기에는 이 기억을, 저기에는 저 기억을... 등급과 상식의 정도에 따라 기억을 분류했어. 그렇게 기억의 보관소가 탄생했어...
내 최선을 다한 작품이었어. 그리고 실제로 결과가 따라왔지.
마침내 속삭이는 목소리가 종종 들리기 시작했거든. 나는 도서관이 속삭이는 불가해한 언어를 들으며 잠에 빠지곤 했어.
정말로...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가능했을 거야.
…
내 '목적'이었어.
그 도서관은 정말 환상적인 공간이었어. 내가 창조해낸 그 장소는 신이 그려낸 추상화와 같았어. 게다가 안을 돌아다닐 수도 있다니... 아니, 안이 아니라 '바깥'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네. 그 동굴의 광경은 마법 그 자체였어.
비록 유리 조각들이 서로 섞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 그 안에서 걷거나 헤엄치거나 날아다닐 수는 없었지만.
이 '도서관'은... 오로지 나의 손으로만 창조해낼 수 있었던, 오로지 나의 정신으로만 설계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어.
미소를 짓는 일은 없었지만 그때의 나는 행복했어. '의미'가 있었으니까. 만족스러웠어.
아마도...
아니, 분명.
상황이 변치 않았더라면 나는 천년이 지나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을 거야.
끝없이 이 새하얀 광야를 헤매며 아무 보람 없이 내 '세계'를 바꾸고, 또 바꾸고, 또 바꾸고, 또 바꾸고...
왜냐면... 나에겐 그게 필요했으니까.
...
하늘이 둘로 갈라진 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 때, 나는 허름한 폐허 한구석에서 울고 있는 비타와 만났어.
"... 어린애인가?"
그래. 나는 반쪽짜리 금발에 루비색 눈을 가진 조그마한 인간을 '어린애'라고 부르는 부류의 사람이야.
훌쩍대는 소리가 들리길래 그 바보 레테인가 싶어서 와봤더니, 아니었어.
비타는 나를 보더니 눈물을 다시 삼키려고 했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천천히 다가갔어.
"언니는... 진짜예요?" 비타가 물었어.
"눈물 닦아. 이런 세계에서 울면 못쓰지." 내가 대답했지.
저... 저는... 그... 너무..."
무서워서, 그렇게 말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비타는 말을 잇지 못했어. 다시 울기 시작했거든.
나는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빠지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어. 이 상황에 대해서, 이 세계를 거니는 모든 소녀들에 대해서.
레테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 세계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 몰랐거든. 레테를 만나고 나서도, 내게 있어 그 여자는 최악의 경우엔 적, 최선의 경우에조차 갈피를 못 잡는 우둔한 멍청이 소대가리일 뿐이었지.
분명 레테 외에도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어. 나와 레테만큼 신념이 강한 사람들이...
하지만 내 앞에 있던 건 그저 조그만... 어린애였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고칠 의무를 짊어진 일꾼이... 어린애라고?
... 정말인가?
나는 팔짱을 끼고 비타 옆에 있는 벽에 몸을 기댔어. 내가 두른 기다란 망토가 비타의 귀에 쓸리자 그 애는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어.
"닦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비타는 잠시 머뭇거린 뒤 망토에 얼굴을 묻어 눈물을 닦고 코를 팽하고 풀었어.
…그 그림자 진 흙투성이 폐허에서 나는 적당한 기억을 찾아 눈을 굴렸어. 되도록이면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기억으로.
딱 맞는 게 하나 있었어. 그걸 우리 쪽으로 불러냈어.
"일어나." 내 말에 비타는 벌벌 떨며 일어났어. 나는 우리 둘 사이로 유리 조각을 치켜올렸어.
"손잡아." 그렇게 지시하자 비타는 또 시킨 대로 했어. 그렇게 우리는 유리 속 기억으로 떠났어.
그 기억에서,
... 우리의 기억에서,
따스하고 고즈넉한 여관의 식당에 앉아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어. 거기서 비타가 자기 이름을 알려줬지.
그때는 나도 내 이름을 알아낸 지 얼마 안 된 참이라, 나는 깜짝 놀랐어.
"뭐 먹고 싶어?" 내가 물었어.
"뭐 하러요? 이건 기억일 뿐이잖아요." 비타가 대답했지.
비타의 대답에 나는 또 놀랄 수밖에 없었어. 조금 눈썹이 움찔댔어. 그래도 또다시 물었지.
"이 기억의 주인들은 뭘 먹었지?"
비타는 정확하게 대답했어. 기억에 들어오는 순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 둘 다 알고 있었거든.
그리고 나는 또다시 질문했어.
"그럼, 네가 먹고 싶은 건 뭐야?"
"다른 걸 시키면 어떻게 되는데요?"
"직접 해봐. 그러면 알겠지."
"기억이 망가질까요...?"
"왜 그렇게 생각해?"
"왜냐면 이 기억엔 다른 요리를 시킨 기억이 없으니까..."
"그게 무섭니?"
"아뇨, 그냥..."
"그냥 뭐?"
"... 그냥 아직은 이 기억이 끝나는 게 싫어서요."
...
과연 그 말대로, 우린 기억을 거기서 끝내지 않았어.
나는 그날 비타에 대해, 많지는 않지만 그 애가 알고 있는 걸 여러 가지 들었어.
물론, 그 꼬마 녀석도 나에게 질문했지. 아주, 아주 많이.
흐음.
기억이 끝난 후 우리는...
폐허를 뒤로하고 떠나갔어.
둘이서, 함께.
=====# 18-5 #=====그래. 나는 반쪽짜리 금발에 루비색 눈을 가진 조그마한 인간을 '어린애'라고 부르는 부류의 사람이야.
훌쩍대는 소리가 들리길래 그 바보 레테인가 싶어서 와봤더니, 아니었어.
비타는 나를 보더니 눈물을 다시 삼키려고 했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천천히 다가갔어.
"언니는... 진짜예요?" 비타가 물었어.
"눈물 닦아. 이런 세계에서 울면 못쓰지." 내가 대답했지.
저... 저는... 그... 너무..."
무서워서, 그렇게 말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비타는 말을 잇지 못했어. 다시 울기 시작했거든.
나는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빠지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어. 이 상황에 대해서, 이 세계를 거니는 모든 소녀들에 대해서.
레테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 세계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 몰랐거든. 레테를 만나고 나서도, 내게 있어 그 여자는 최악의 경우엔 적, 최선의 경우에조차 갈피를 못 잡는 우둔한 멍청이 소대가리일 뿐이었지.
분명 레테 외에도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어. 나와 레테만큼 신념이 강한 사람들이...
하지만 내 앞에 있던 건 그저 조그만... 어린애였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고칠 의무를 짊어진 일꾼이... 어린애라고?
... 정말인가?
나는 팔짱을 끼고 비타 옆에 있는 벽에 몸을 기댔어. 내가 두른 기다란 망토가 비타의 귀에 쓸리자 그 애는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어.
"닦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비타는 잠시 머뭇거린 뒤 망토에 얼굴을 묻어 눈물을 닦고 코를 팽하고 풀었어.
…그 그림자 진 흙투성이 폐허에서 나는 적당한 기억을 찾아 눈을 굴렸어. 되도록이면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기억으로.
딱 맞는 게 하나 있었어. 그걸 우리 쪽으로 불러냈어.
"일어나." 내 말에 비타는 벌벌 떨며 일어났어. 나는 우리 둘 사이로 유리 조각을 치켜올렸어.
"손잡아." 그렇게 지시하자 비타는 또 시킨 대로 했어. 그렇게 우리는 유리 속 기억으로 떠났어.
그 기억에서,
... 우리의 기억에서,
따스하고 고즈넉한 여관의 식당에 앉아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어. 거기서 비타가 자기 이름을 알려줬지.
그때는 나도 내 이름을 알아낸 지 얼마 안 된 참이라, 나는 깜짝 놀랐어.
"뭐 먹고 싶어?" 내가 물었어.
"뭐 하러요? 이건 기억일 뿐이잖아요." 비타가 대답했지.
비타의 대답에 나는 또 놀랄 수밖에 없었어. 조금 눈썹이 움찔댔어. 그래도 또다시 물었지.
"이 기억의 주인들은 뭘 먹었지?"
비타는 정확하게 대답했어. 기억에 들어오는 순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 둘 다 알고 있었거든.
그리고 나는 또다시 질문했어.
"그럼, 네가 먹고 싶은 건 뭐야?"
"다른 걸 시키면 어떻게 되는데요?"
"직접 해봐. 그러면 알겠지."
"기억이 망가질까요...?"
"왜 그렇게 생각해?"
"왜냐면 이 기억엔 다른 요리를 시킨 기억이 없으니까..."
"그게 무섭니?"
"아뇨, 그냥..."
"그냥 뭐?"
"... 그냥 아직은 이 기억이 끝나는 게 싫어서요."
...
과연 그 말대로, 우린 기억을 거기서 끝내지 않았어.
나는 그날 비타에 대해, 많지는 않지만 그 애가 알고 있는 걸 여러 가지 들었어.
물론, 그 꼬마 녀석도 나에게 질문했지. 아주, 아주 많이.
흐음.
기억이 끝난 후 우리는...
폐허를 뒤로하고 떠나갔어.
둘이서, 함께.
내게 남은 이름은 '사야'뿐이야. 그리고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후로, 우리는 전에 있던 존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사야는 죽었어. 그리고 사야는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어.
그 사실에 딱히 놀라지는 않았어. 어렴풋이 여긴 어떤 형태의 사후세계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거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이 모든 것에 이유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죽은 사람 모두가 이곳에 온 건 아니야. 아르케아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끝을 향해 걸어가. 우린 모두 다른 소원을 지니고 있지.
하지만 그 소원 때문에 이곳으로 끌려온 것은 아니야. 보통 죽어가는 사람은 살고 싶다 염원하는 법이지만, 그런 소원을 지닌 사람은 여기엔 거의 없어.
소원 없이 존재하는 사람도 있어. 예를 들어 비타의 마음속엔 그 어떤 소원도 들어있지 않아. ' 코우'의 마음속도 그래.
우리가 여기로 온 건 소원 때문이 아니야.
운명도 아니고.
사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야.
'신'때문이야. '신'의 기분대로 우리는 이 세계에서 깨어난 거야.
그 신은 웃지도 미소를 짓지도 않아.
그 신에겐 얼굴조차 없을 지도 모르니까.
비타와 함께한 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어. 조수... 아니, '동료'라고 부를 정도의 관계가 되었지.
힘든 시간이었어. 비타는 걱정이 많아서 툭하면 울곤 했거든
잘 때엔 나한테 꼭 붙어서 자고, 스스로 답을 찾기보다는 질문하기를 좋아했어.
재채기 소리는 엄청나게 커. 보기보다 몸무게는 나가는 편이고. 아주 날카로운 통찰력을 갖고 있어.
힘든 시간이었어. 하지만 난 단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아.
내가 후회하는 건...
…
나는 후회해. 그리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어.
"사야 언니, 저게 뭐예요...?"
종말의 순간에 비타가 내게 물었어.
대지에서 빛이 솟아오르고, 생명이 하늘로 빨려올라가는 모습을 함께 바라보았어.
아르케아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숨을, 그 생명력이 머나먼 어딘가에 있는 어느곳으로 모이는 모습을.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
다만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사건의 결과, 끔찍한 미래.
그런 미래가 도래할 것이란 걸 우리 둘 다 느낄 수 있었어.
나를 보고 저게 뭐냐고 물은 비타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했어.
"...특이현상이야. 이 세계에선 흔히 일어나는 특이현상."
그 후로 나는 더 필사적으로 내 세계를 완성시키려고 했어. 빛, 아르케아의 '종말'과 함께 대지가 무너지기 시작했거든.
처음엔 조금씩... 그러다가 더욱 격렬하게... 대지가 마치 모래성처럼 무너져 아래의 '무無'를 향해 떨어졌어.
영원히 세계의 끝자락을 할퀴는 심연의 공간...
공허를 향해.
...
내가 만들어낸 기억의 보관소는 여전히 안정적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안정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했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게 아니었어.
뭔가 더 필요했어. '저 너머'의 무언가가.
삶을 영위할 제대로 된, 완벽한 장소가 필요했어.
그런 장소를 만드는 건 더이상 나라고는 할 수 없겠지.
... 언제부터 나는 다시 '염원'하기 시작한 걸까.
가끔, 하루치 여행을 끝내고 나서, 그 꼬마 녀석이 나조차도 답을 모르는 질문을 할 때가 있었어.
질문, 질문, 질문...
하지만 이제 질문에 어울려줄 시간은 없었어.
그런 불편한 침묵 속에서는, 마음속으로 빈 소원조차 동굴에 울려 퍼지는 비명처럼 들리는 법이야.
하지만 종말 전에도 나는 염원하고 있었어. 나 스스로가 지닌 의문에 대한 답을…
...
나는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어. 오로지 스스로에게 되뇌일 뿐.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말라붙은 바다와 기울어진 언덕과 무너져내린 산처럼, 기억해 주는 이 없이. 알아주는 이 없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죽어갈 거야.
마지막에는, '허무'만이 남겠지. 공허하고, 허세로 가득 찬,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이야기. 화자 외에는 아무도 듣지 못한 이야기.
타인의 기회조차 뺏어버린 이야기. 집착의 끝에 소중한 사람을 익사시켜버린 이야기가...
알려줘. 나는 오만한 걸까?
답은 '그렇다'야.
난 나 자신을 믿어.
한계를 뛰어넘은 곳에 있을 발견을,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리라는 의지를, 무엇이든 '한다'라는 의미를.
미래를 믿어.
그리고, 미래를 염원해.
어디로 가든 나를 따라오며 똑같은 발자국을 밟는 소녀와 함께 이 대지를 걸으며…
나는 내 소원이 울려 퍼지길 원하고 있어. 비록 도저히 입 밖에 낼 수는 없지만.
마지막 저항, 이 세계가 머리를 조아리도록 만든 그 유리 조각의 무리를 믿어.
신이여, 레테, 그리고 비타...
나를 천국에서 추방해 지옥으로 떨어뜨려주오.
... 뿔쟁이 여자의 손에서 유리 조각을 빼앗아올 테니.
=====# 18-6 #=====사야는 죽었어. 그리고 사야는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어.
그 사실에 딱히 놀라지는 않았어. 어렴풋이 여긴 어떤 형태의 사후세계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거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이 모든 것에 이유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죽은 사람 모두가 이곳에 온 건 아니야. 아르케아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끝을 향해 걸어가. 우린 모두 다른 소원을 지니고 있지.
하지만 그 소원 때문에 이곳으로 끌려온 것은 아니야. 보통 죽어가는 사람은 살고 싶다 염원하는 법이지만, 그런 소원을 지닌 사람은 여기엔 거의 없어.
소원 없이 존재하는 사람도 있어. 예를 들어 비타의 마음속엔 그 어떤 소원도 들어있지 않아. ' 코우'의 마음속도 그래.
우리가 여기로 온 건 소원 때문이 아니야.
운명도 아니고.
사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야.
'신'때문이야. '신'의 기분대로 우리는 이 세계에서 깨어난 거야.
그 신은 웃지도 미소를 짓지도 않아.
그 신에겐 얼굴조차 없을 지도 모르니까.
비타와 함께한 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어. 조수... 아니, '동료'라고 부를 정도의 관계가 되었지.
힘든 시간이었어. 비타는 걱정이 많아서 툭하면 울곤 했거든
잘 때엔 나한테 꼭 붙어서 자고, 스스로 답을 찾기보다는 질문하기를 좋아했어.
재채기 소리는 엄청나게 커. 보기보다 몸무게는 나가는 편이고. 아주 날카로운 통찰력을 갖고 있어.
힘든 시간이었어. 하지만 난 단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아.
내가 후회하는 건...
…
나는 후회해. 그리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어.
"사야 언니, 저게 뭐예요...?"
종말의 순간에 비타가 내게 물었어.
대지에서 빛이 솟아오르고, 생명이 하늘로 빨려올라가는 모습을 함께 바라보았어.
아르케아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숨을, 그 생명력이 머나먼 어딘가에 있는 어느곳으로 모이는 모습을.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
다만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사건의 결과, 끔찍한 미래.
그런 미래가 도래할 것이란 걸 우리 둘 다 느낄 수 있었어.
나를 보고 저게 뭐냐고 물은 비타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했어.
"...특이현상이야. 이 세계에선 흔히 일어나는 특이현상."
그 후로 나는 더 필사적으로 내 세계를 완성시키려고 했어. 빛, 아르케아의 '종말'과 함께 대지가 무너지기 시작했거든.
처음엔 조금씩... 그러다가 더욱 격렬하게... 대지가 마치 모래성처럼 무너져 아래의 '무無'를 향해 떨어졌어.
영원히 세계의 끝자락을 할퀴는 심연의 공간...
공허를 향해.
...
내가 만들어낸 기억의 보관소는 여전히 안정적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안정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했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게 아니었어.
뭔가 더 필요했어. '저 너머'의 무언가가.
삶을 영위할 제대로 된, 완벽한 장소가 필요했어.
그런 장소를 만드는 건 더이상 나라고는 할 수 없겠지.
... 언제부터 나는 다시 '염원'하기 시작한 걸까.
가끔, 하루치 여행을 끝내고 나서, 그 꼬마 녀석이 나조차도 답을 모르는 질문을 할 때가 있었어.
질문, 질문, 질문...
하지만 이제 질문에 어울려줄 시간은 없었어.
그런 불편한 침묵 속에서는, 마음속으로 빈 소원조차 동굴에 울려 퍼지는 비명처럼 들리는 법이야.
하지만 종말 전에도 나는 염원하고 있었어. 나 스스로가 지닌 의문에 대한 답을…
...
나는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어. 오로지 스스로에게 되뇌일 뿐.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말라붙은 바다와 기울어진 언덕과 무너져내린 산처럼, 기억해 주는 이 없이. 알아주는 이 없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죽어갈 거야.
마지막에는, '허무'만이 남겠지. 공허하고, 허세로 가득 찬,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이야기. 화자 외에는 아무도 듣지 못한 이야기.
타인의 기회조차 뺏어버린 이야기. 집착의 끝에 소중한 사람을 익사시켜버린 이야기가...
알려줘. 나는 오만한 걸까?
답은 '그렇다'야.
난 나 자신을 믿어.
한계를 뛰어넘은 곳에 있을 발견을,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리라는 의지를, 무엇이든 '한다'라는 의미를.
미래를 믿어.
그리고, 미래를 염원해.
어디로 가든 나를 따라오며 똑같은 발자국을 밟는 소녀와 함께 이 대지를 걸으며…
나는 내 소원이 울려 퍼지길 원하고 있어. 비록 도저히 입 밖에 낼 수는 없지만.
마지막 저항, 이 세계가 머리를 조아리도록 만든 그 유리 조각의 무리를 믿어.
신이여, 레테, 그리고 비타...
나를 천국에서 추방해 지옥으로 떨어뜨려주오.
... 뿔쟁이 여자의 손에서 유리 조각을 빼앗아올 테니.
"비가 오네요..."
파일:Arcaea/Story/18-6_1.png
비타가 유리 도서관의 구석에 있던 나를 찾아와 말했어.
밝으면서도 어두운 동굴 안. 나는 앉은 채 한 번 비타를 올려다보고 고개를 돌렸어.
비...
아르케아에서 지낸 몇 년간, 단 한 번도 비를 본 적은 없었어.
하지만 이제는 지평선 너머로 비와 눈, 천둥과 번개를 보는 건 별난 일이 아니게 되었지.
지금은 비가 내리고 있었어.
나는 일어서며 말했어.
"비타... 가자. 따라올 때엔 뒤에 숨으면서 따라와."
"가자니... 어디로요?"
"레테한테." 나는 주저 없이 말했어. "그 여자를 죽일 거야."
나는 말없이 비타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
산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출구로 향했어.
비타는 머뭇거리다가, 시킨 대로 날 따라왔지.
"... 죽인… 뭐라고요?! 안 돼요!"
비타가 빗속으로 걸어가는 나의 뒤를 종종 따라오며 소리쳤어.
비타는 항의를 멈추지 않았어.
망토를 붙잡혔어. 나는 망토를 잡아당겨 뿌리쳤어.
돌을 집어 들어 내 등으로 던졌어.
그래도 난 멈추지 않았어.
"대체 왜요?!" 비타가 마침내 소리를 질렀어.
끝임없이 쏟아지는 비. 나는 등을 돌려 비타를 마주봤어.
비타는 반짝이는 붉은색과 하얀색의 눈동자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어.
"비타... 이 세계는 죽어가고 있어." 내가 말했어.
"알아요..." 비타가 작은 소리로 대답하자 나는 그때 깨달았어. 아, 비타도 알고 있구나.
"그래서... 그래서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려는 거예요?!"
"그 여자가 모은 유리 조각에서 무언가를 느꼈어.
우리가 만들어낸 이 도서관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한 무언가를." 나는 설명했어.
"모두를... 구하려면, 그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내야 해. 그리고 빼앗아 이용해야 해.
그게 있으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낼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레테는 날 이해하지 못해. 그리고 이제 그 여자를 설득할 시간은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아."
"레테의 신념이...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거짓말이 설득의 여지조차 허락하지 않아.
그 여자의 마음속엔 불이 타오르고 있어. 그리고 그 불은 나를 향해 솟구칠 거야.
우린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야."
"그렇다고 설득할 시도조차 안 하겠다고요?" 비타가 나를 책망했어. 내 입이 비릿한 미소로 일그러졌어.
"말을 해보기는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비타는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어.
그리고, 다시 등을 돌렸어.
빗줄기가 점점 약해지다가 마침내 그쳤어.
나는 가볍게 말했지.
"그래. 한 번 이야기해볼 테니 안전한 거리에서 잘 보고 있어."
나는 유리 조각을 잔뜩 챙겨 레테가 있는 곳으로 향했어.
그곳에 가까워지자 레테의 유리 조각과 내 유리 조각들이 거의 닿을 뻔했지만,
두 무리가 결코 섞이지는 않았어.
절벽의 끝자락. 아주 밝은 곳이야. 유리의 빛으로 환하게 비치고 있어.
그 밑에 서있는 레테는 그림자에 감싸여 있어.
절벽 너머에서는 공허가 입을 벌리고 있어.
"야, 사신." 여자를 불렀어. "하찮은 다툼은 그만두자. 네 도움이 필요해."
"도와달라고?!" 레테가 쏘아붙였어. "이런 짓을 해놓고 할 말이야?!"
아.
핵을 부숴서 세상을 이 꼴로 만든 게 나라고 착각하고 있구나.
나를 향한 평가가 너무 박한걸.
나는 등 뒤를 보고 비타가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뒤,
다시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레테를 향해 고개를 돌렸어.
그 후의 '대화'는 생각했던 대로 흘러갔어. 참담하게 말이야.
귀가 떨어져라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내뱉고,
레테의 칼날이 번쩍거리고...
오른 눈에 핀 꽃 덕분에 쓸 수 있는 능력으로 나는 조각과 조각 사이를 이동하며 레테의 공격을 피했어.
자제했어. 아무것도 안 하고 레테의 주변을 맴돌기만 했어. 정말. 정말 노력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제는 한계야.
나는 레테를 향해 반드시 유리 조각을 빼앗겠다고 맹세했어.
레테는 나를 향해 아르케아의 조각난 핵을 고치겠다고 맹세했어.
역겹기 짝이 없어...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
유리에 칼날이 부딪히자 물방울이 촤악 튀었어. [2]
나와 레테가 자아내는 격렬하고 악랄한 춤.
나를 죽이려는 목적으로 낫을 휘두르는 레테.
그 얼굴을 향해 빛나는 유리 조각을 날리는 나.
머릿속이 울려. 역겨워서 뱃속이 뒤틀리는 것 같아.
나는 실패했어. 내가 여기서 뭘 하든 아무런 의미가 없어.
=====# 18-7 #=====파일:Arcaea/Story/18-6_1.png
비타가 유리 도서관의 구석에 있던 나를 찾아와 말했어.
밝으면서도 어두운 동굴 안. 나는 앉은 채 한 번 비타를 올려다보고 고개를 돌렸어.
비...
아르케아에서 지낸 몇 년간, 단 한 번도 비를 본 적은 없었어.
하지만 이제는 지평선 너머로 비와 눈, 천둥과 번개를 보는 건 별난 일이 아니게 되었지.
지금은 비가 내리고 있었어.
나는 일어서며 말했어.
"비타... 가자. 따라올 때엔 뒤에 숨으면서 따라와."
"가자니... 어디로요?"
"레테한테." 나는 주저 없이 말했어. "그 여자를 죽일 거야."
나는 말없이 비타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
산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출구로 향했어.
비타는 머뭇거리다가, 시킨 대로 날 따라왔지.
"... 죽인… 뭐라고요?! 안 돼요!"
비타가 빗속으로 걸어가는 나의 뒤를 종종 따라오며 소리쳤어.
비타는 항의를 멈추지 않았어.
망토를 붙잡혔어. 나는 망토를 잡아당겨 뿌리쳤어.
돌을 집어 들어 내 등으로 던졌어.
그래도 난 멈추지 않았어.
"대체 왜요?!" 비타가 마침내 소리를 질렀어.
끝임없이 쏟아지는 비. 나는 등을 돌려 비타를 마주봤어.
비타는 반짝이는 붉은색과 하얀색의 눈동자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어.
"비타... 이 세계는 죽어가고 있어." 내가 말했어.
"알아요..." 비타가 작은 소리로 대답하자 나는 그때 깨달았어. 아, 비타도 알고 있구나.
"그래서... 그래서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려는 거예요?!"
"그 여자가 모은 유리 조각에서 무언가를 느꼈어.
우리가 만들어낸 이 도서관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한 무언가를." 나는 설명했어.
"모두를... 구하려면, 그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내야 해. 그리고 빼앗아 이용해야 해.
그게 있으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낼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레테는 날 이해하지 못해. 그리고 이제 그 여자를 설득할 시간은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아."
"레테의 신념이...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거짓말이 설득의 여지조차 허락하지 않아.
그 여자의 마음속엔 불이 타오르고 있어. 그리고 그 불은 나를 향해 솟구칠 거야.
우린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야."
"그렇다고 설득할 시도조차 안 하겠다고요?" 비타가 나를 책망했어. 내 입이 비릿한 미소로 일그러졌어.
"말을 해보기는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비타는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어.
그리고, 다시 등을 돌렸어.
빗줄기가 점점 약해지다가 마침내 그쳤어.
나는 가볍게 말했지.
"그래. 한 번 이야기해볼 테니 안전한 거리에서 잘 보고 있어."
나는 유리 조각을 잔뜩 챙겨 레테가 있는 곳으로 향했어.
그곳에 가까워지자 레테의 유리 조각과 내 유리 조각들이 거의 닿을 뻔했지만,
두 무리가 결코 섞이지는 않았어.
절벽의 끝자락. 아주 밝은 곳이야. 유리의 빛으로 환하게 비치고 있어.
그 밑에 서있는 레테는 그림자에 감싸여 있어.
절벽 너머에서는 공허가 입을 벌리고 있어.
"야, 사신." 여자를 불렀어. "하찮은 다툼은 그만두자. 네 도움이 필요해."
"도와달라고?!" 레테가 쏘아붙였어. "이런 짓을 해놓고 할 말이야?!"
아.
핵을 부숴서 세상을 이 꼴로 만든 게 나라고 착각하고 있구나.
나를 향한 평가가 너무 박한걸.
나는 등 뒤를 보고 비타가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뒤,
다시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레테를 향해 고개를 돌렸어.
그 후의 '대화'는 생각했던 대로 흘러갔어. 참담하게 말이야.
귀가 떨어져라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내뱉고,
레테의 칼날이 번쩍거리고...
오른 눈에 핀 꽃 덕분에 쓸 수 있는 능력으로 나는 조각과 조각 사이를 이동하며 레테의 공격을 피했어.
자제했어. 아무것도 안 하고 레테의 주변을 맴돌기만 했어. 정말. 정말 노력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제는 한계야.
나는 레테를 향해 반드시 유리 조각을 빼앗겠다고 맹세했어.
레테는 나를 향해 아르케아의 조각난 핵을 고치겠다고 맹세했어.
역겹기 짝이 없어...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
유리에 칼날이 부딪히자 물방울이 촤악 튀었어. [2]
나와 레테가 자아내는 격렬하고 악랄한 춤.
나를 죽이려는 목적으로 낫을 휘두르는 레테.
그 얼굴을 향해 빛나는 유리 조각을 날리는 나.
머릿속이 울려. 역겨워서 뱃속이 뒤틀리는 것 같아.
나는 실패했어. 내가 여기서 뭘 하든 아무런 의미가 없어.
이 싸움은 두 실력자의 장렬하고 근엄한 혈투 같은 게 아니야.
레테와 나는 발버둥 치고 있을 뿐이야.
내가 이기더라도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야.
내가 지더라도 아무것도 잃지 않을 거야.
알 수 있어.
우리는 더 나은 결말이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그릇된 믿음을 가진 두 여자일 뿐이야.
그런 결말 따위 어디에도 없는데도.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의 인생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래도 난 발버둥 쳐보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자 속이 메스꺼워.
레테가 한 번 물러섰다가, 초인적인 힘으로 낫을 끌고 다시 나에게 달려와,
그걸 보고 내가 유리 조각을 들어 올려 레테의 가슴을 향해 내려친 순간-
우리 둘 사이에 손가락이 하나 나타났어. 그리고 싸움이 멈췄어.
"?!"
"뭐...?!"
장갑을 낀 가느다란 손가락이 두 칼날이 부딪히려던 곳에 사뿐히 내려앉았어.
그 순간, 온몸에 격통이 엄습했어. 쓰러질 것만 같아.
내 유리 조각은 부서지고, 레테는 낫을 놓쳤어.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아 뒤로 날아갔어.
마치 거대한 막대가 두드리는 북처럼 대지 그 자체가 울리고 있어.
우리는 공중에 멈춰 섰다가...
대기가 격렬하게 움직이며 다시 우리를 빨아들이듯 땅으로 내동댕이쳤어.
땅에 부딪히는 순간 레테의 낫이 내 옆구리를 깊게 베어내고 내 뒤로 미끄러졌어.
레테의 왼팔에는 내 유리 조각이 몇 개 박혔어.
쓰러짐과 동시에, 우리는 머리를 조아리는 자세로 무릎을 꿇렸어.
몸이 전부 찢겨나갈 것 같은 고통이지만...
나는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 올렸어. 숙일까보냐.
길고 창백한 머리를 늘어뜨리고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을 지닌,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가 우리 사이에 서 있었어.
여자는 미소가 걸린 얼굴로
나를 한 번 보고, 고개를 돌려 레테를 보았어.
"어휴, 너희 둘, 적당히 하렴." 여자가 입을 열었어.
"너무 거칠게 놀다가는 소중한 걸 부숴버릴지도 모르잖니?"
나는 힘을 쥐어짜내 일어서려고 했지만 쉽게 일어설 수가 없어.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야.
숨이 점점 더 거칠어졌어.
저 말투... 불길한 예감이 들어.
여자는 다시 그 눈으로 나를 바라봤어.
"자, 그럼... 안녕, 이 고집불통들아." 여자가 말했어.
"만나서 안 반가워."
3. Side Story
3.1. 레테
3.1.1. 해금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18-I | NULL APOPHENIA-1 | 파일:Arcaea/NULL APOPHENIA.jpg | 레테로 NULL APOPHENIA 클리어 | |
18-II | NULL APOPHENIA-2 | 레테Apophenia로 Genesis 클리어 | ||
18-III | NULL APOPHENIA-3 | 파일:Arcaea/NULL APOPHENIA.jpg | 레테Apophenia로 NULL APOPHENIA 클리어 |
3.2. Ambivalent Vision
====# 18-I[3] #====그 여자다. 틀림없다. 그 여자가 왔다.
레테는 낫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침을 삼켰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시 떠올리고서 각오를 다졌다.
그녀의 삶은 끝났을지라도, 의무는 끝나지 않았다.
하늘이 유리로 반짝인다. 그녀가 무릎 꿇은 고원의 땅이 흔들린다. 이윽고 뿔 달린 사신은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일어섰다.
그리고서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해하려 노력조차 하지 않는구나.” 여자가 말했다.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괜히 애쓰는군.” 레테가 대답했다.
“말은 아직 연습 중이야. 예전보단 꽤 잘하게 된 것 같은데.”
“별로. 여전히 못하는걸.” 레테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여자는 말없이 평온한 얼굴로 땅을 바라보았다.
“내가 어지간히 싫나봐?”
레테는 말없이 낫을 꽉 쥐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유감이야…” 여자가 레테 쪽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난 너한테 전혀 관심 없는데.”
“네가…” 레테는 깨문 어금니 사이로 말하더니,
“날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 상관 없어!” 이윽고 소리쳤다.
여자가 말없이 레테를 바라보았다. 마치 “상관있으면서.”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런 식으로… 영혼을 더럽히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어!” 레테가 소리쳤다.
“영혼이라고? 저걸 영혼이라고 생각해? 영혼을 가진 건 우리들이고, 저것들은 죽은 자들의 기억일 뿐이야.”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삐죽삐죽한 “구름”이 머리 위로 기이하게 일렁였다.
“못 알아듣겠지만…” 여자가 중얼거리며 다시 레테의 눈을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줄게. 저것들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야. 우리는 저것들을 이용하기 위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거라고.”
“입 다물어!”
레테가 낫을 높이 들고 여자에게 달려든 뒤 내려쳤다.
하지만 그 칼날은 잔상을 가를 뿐이었다.
“이 장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유리를 ‘이용’하지도 못하는 거야.”
그녀의 왼쪽 귀가 움찔거렸다. 뒤로 돌아보자 여자가 고원의 반대편에 생겨난 빛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네가 대체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조각들을 모아 새로운 세계를 만들 거야.”
얼굴에 손을 얹은 채, 여자는 자세를 고치고서 사신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손을 거두자,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반짝이는 꽃이 보였다.
“왜냐면 지금조차 나는…” 여자, 사야가 자신을 증오하는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모두 이 세계에서 맡아야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당연히 너는 빼고.”
분노한 레테는 다시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분노.
둘 사이에 공통된 감정은 그것이었다.
레테는 낫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침을 삼켰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시 떠올리고서 각오를 다졌다.
그녀의 삶은 끝났을지라도, 의무는 끝나지 않았다.
하늘이 유리로 반짝인다. 그녀가 무릎 꿇은 고원의 땅이 흔들린다. 이윽고 뿔 달린 사신은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일어섰다.
그리고서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해하려 노력조차 하지 않는구나.” 여자가 말했다.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괜히 애쓰는군.” 레테가 대답했다.
“말은 아직 연습 중이야. 예전보단 꽤 잘하게 된 것 같은데.”
“별로. 여전히 못하는걸.” 레테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여자는 말없이 평온한 얼굴로 땅을 바라보았다.
“내가 어지간히 싫나봐?”
레테는 말없이 낫을 꽉 쥐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유감이야…” 여자가 레테 쪽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난 너한테 전혀 관심 없는데.”
“네가…” 레테는 깨문 어금니 사이로 말하더니,
“날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 상관 없어!” 이윽고 소리쳤다.
여자가 말없이 레테를 바라보았다. 마치 “상관있으면서.”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런 식으로… 영혼을 더럽히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어!” 레테가 소리쳤다.
“영혼이라고? 저걸 영혼이라고 생각해? 영혼을 가진 건 우리들이고, 저것들은 죽은 자들의 기억일 뿐이야.”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삐죽삐죽한 “구름”이 머리 위로 기이하게 일렁였다.
“못 알아듣겠지만…” 여자가 중얼거리며 다시 레테의 눈을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줄게. 저것들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야. 우리는 저것들을 이용하기 위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거라고.”
“입 다물어!”
레테가 낫을 높이 들고 여자에게 달려든 뒤 내려쳤다.
하지만 그 칼날은 잔상을 가를 뿐이었다.
“이 장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유리를 ‘이용’하지도 못하는 거야.”
그녀의 왼쪽 귀가 움찔거렸다. 뒤로 돌아보자 여자가 고원의 반대편에 생겨난 빛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네가 대체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조각들을 모아 새로운 세계를 만들 거야.”
얼굴에 손을 얹은 채, 여자는 자세를 고치고서 사신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손을 거두자,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반짝이는 꽃이 보였다.
“왜냐면 지금조차 나는…” 여자, 사야가 자신을 증오하는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모두 이 세계에서 맡아야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당연히 너는 빼고.”
분노한 레테는 다시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분노.
둘 사이에 공통된 감정은 그것이었다.
====# 18-II #====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는 하늘이 하나였다.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는 하늘의 절반이 밤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들이 만날 때마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레테의 반감은 더욱 커져갔고, 결국 마음 속에서 들끓던 그 감정은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망자들을 납치하러 왔다.
줄곧 목적은 그것뿐이었다.
영혼을 하나 수집할 때마다, 인격을 하나 수집할 때마다…
저 여자는 신이 된 듯한 전능감에 젖는다. 망자들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망자의 안식은 신성한 것이다.
사신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 레테가 담담하게 서 있는 여자에게 돌진하자 여자는 또다시 사라졌다.
내가 여기에 서 있는 이유를 기억하라. 나를 구원한 게 무엇인지 기억하라.
유리 조각이 두 사람 주변에서 소용돌이친다. 그 와중에도 사야는 가만히 레테를 관찰하고 있었다.
심장의 아픔을 기억하라. 축복을 기억하라.
그 감정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명심하라.
레테의 공격이 땅에 박힌다. 저 멀리서, 사야는 레테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 감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저 여자는 신념에 매달리고 있을 뿐이다.
“레테…” 사야가 말했다.
그러자 레테가 멈추었다.
“그게 네 이름인 건 알고 있어?”
레테가 등을 돌려 사야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나는 알고 있어… 기억에서 봤거든.” 사야가 말했다.
“거, 거짓말…”
“이름이 네 안에서 공명하는 느낌이 들어?”
레테가 움찔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 내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마음속에서 그게 울려 퍼지는 느낌을 받았어.
우리 말고도 다른 아이들이 있는 건 알고 있어?
너는 그 아이들과는 달리 옛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레테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기분이 밀려 올라왔다. 레테는 애써 그 느낌을 눌러 담았다.
“난 네가 가야 할 방향을 잘못 잡은 순진한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해왔어.
기억에서 너를 보고 나서야 네가 그렇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아.
너, ‘자신’을 기억하고 있지? 그렇지? 아주 희귀한 사례야.”
“입 다물어.”
“...”
사야는 레테를 바라보았다.
“내 목소리조차 증오하는 거야?” 사야가 물었다.
“널 증오한다는 말은 한 적 없어.”
“말할 필요도 없었어. 뻔한걸.”
잠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레테를 지나치고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곧,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어떤지 안다는 거야? 네가? 하하! 정작 자기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운 주제에,
네가 다른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알아!”
사야는 자신이 밟고 있는 대지를 바라보았다.
“... 알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맣게, 사야가 속삭였다.
“뭐?”
“안다고.” 사야가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레테를 바라보며 확실하게 말했다.
“난 마음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고 있어.”
“... 정말이냐?” 레테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네 마음이 텅 비어있다는 증거 아니야?”
사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레테를 바라보았다.
“그 눈 대신 달린 꽃 뒤에 뭐가 있는지 상관하지 않는다고, 저번에 말했었지.” 레테가 말을 이었다.
“널 멈추고 말 거야.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면, 네가 이 장소의 망자들을 더럽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란 것도 알겠지.”
사야는 여전히, 말없이 레테를 바라보았다.
“그게 내 의무니까.” 레테가 단언했다.
그 의무가 자신을 지탱한다고, 레테는 그렇게 느꼈다.
그녀는 낫을 돌려 잡아, 다시 공격할 자세를 잡았다.
“네 목적이 뭐든 간에, 너를 막고야 말겠어.”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는 하늘의 절반이 밤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들이 만날 때마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레테의 반감은 더욱 커져갔고, 결국 마음 속에서 들끓던 그 감정은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망자들을 납치하러 왔다.
줄곧 목적은 그것뿐이었다.
영혼을 하나 수집할 때마다, 인격을 하나 수집할 때마다…
저 여자는 신이 된 듯한 전능감에 젖는다. 망자들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망자의 안식은 신성한 것이다.
사신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 레테가 담담하게 서 있는 여자에게 돌진하자 여자는 또다시 사라졌다.
내가 여기에 서 있는 이유를 기억하라. 나를 구원한 게 무엇인지 기억하라.
유리 조각이 두 사람 주변에서 소용돌이친다. 그 와중에도 사야는 가만히 레테를 관찰하고 있었다.
심장의 아픔을 기억하라. 축복을 기억하라.
그 감정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명심하라.
레테의 공격이 땅에 박힌다. 저 멀리서, 사야는 레테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 감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저 여자는 신념에 매달리고 있을 뿐이다.
“레테…” 사야가 말했다.
그러자 레테가 멈추었다.
“그게 네 이름인 건 알고 있어?”
레테가 등을 돌려 사야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나는 알고 있어… 기억에서 봤거든.” 사야가 말했다.
“거, 거짓말…”
“이름이 네 안에서 공명하는 느낌이 들어?”
레테가 움찔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 내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마음속에서 그게 울려 퍼지는 느낌을 받았어.
우리 말고도 다른 아이들이 있는 건 알고 있어?
너는 그 아이들과는 달리 옛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레테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기분이 밀려 올라왔다. 레테는 애써 그 느낌을 눌러 담았다.
“난 네가 가야 할 방향을 잘못 잡은 순진한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해왔어.
기억에서 너를 보고 나서야 네가 그렇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아.
너, ‘자신’을 기억하고 있지? 그렇지? 아주 희귀한 사례야.”
“입 다물어.”
“...”
사야는 레테를 바라보았다.
“내 목소리조차 증오하는 거야?” 사야가 물었다.
“널 증오한다는 말은 한 적 없어.”
“말할 필요도 없었어. 뻔한걸.”
잠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레테를 지나치고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곧,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어떤지 안다는 거야? 네가? 하하! 정작 자기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운 주제에,
네가 다른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알아!”
사야는 자신이 밟고 있는 대지를 바라보았다.
“... 알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맣게, 사야가 속삭였다.
“뭐?”
“안다고.” 사야가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레테를 바라보며 확실하게 말했다.
“난 마음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고 있어.”
“... 정말이냐?” 레테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네 마음이 텅 비어있다는 증거 아니야?”
사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레테를 바라보았다.
“그 눈 대신 달린 꽃 뒤에 뭐가 있는지 상관하지 않는다고, 저번에 말했었지.” 레테가 말을 이었다.
“널 멈추고 말 거야.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면, 네가 이 장소의 망자들을 더럽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란 것도 알겠지.”
사야는 여전히, 말없이 레테를 바라보았다.
“그게 내 의무니까.” 레테가 단언했다.
그 의무가 자신을 지탱한다고, 레테는 그렇게 느꼈다.
그녀는 낫을 돌려 잡아, 다시 공격할 자세를 잡았다.
“네 목적이 뭐든 간에, 너를 막고야 말겠어.”
====# 18-III #====
하늘에서 유리가 빛났다. 레테가 모아온 영혼, 사야가 모아온 기억들이 부딪히지만, 결코 섞이지는 않는다.
수천 개의 잊힌 삶이, 이곳에서 기억되고 있었다. 사신은 영혼의 우물을 떠올렸다.
이 길을 걷고 싶은 이유가 뭐라고 설명했지?
여전히, 그때 당시의 답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레테는 새로운 답을 내놓았다.
옳은 일이니까. 그것 외에 다른 이유는 필요 없었다.
그럼에도…
“—!? 너…!”
또다시, 레테는 사야를 향해 낫을 휘둘렀다. 이에 사야는 손가락을 들었다. 그 위에 놓인 유리 조각이 칼날을 받았다.
몸을 숙인 레테는 사야를 올려다보며 얼굴을 구겼다.
사야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레테를 내려다보았다. 이토록 영혼의 존엄을 경시하는 행위에, 레테는 분노가 몸을 가로지르는 것을 느꼈다.
“너…!” 레테가 포효했다.
“내 영혼들을 빼앗아가서 네가 얻는 게 뭐야?!”
레테를 막으며, 사야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얻는 것…?”
사야의 손끝에 놓인 유리 조각이 반짝였다. 그녀의 꽃이 한 번 더 반짝이더니, 또다시 사야의 모습은 잔상이 되었고,
레테의 낫은 허공을 갈랐다. 멀리 떨어진 빛에서 사야가 다시 나타났다.
“이렇게까지 함께 했으면 진작에 눈치챘어야 할 텐데. 난 단 한 번도 거짓말 한 적 없어.”
사야의 꽃이 다시 반짝였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뒤, 확실하게 강조했다.
“내가 이걸로 ‘얻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난 개인적인 이유로 움직이는 게 아니야.”
그 말이 진실임을 알고 있음에도, 레테는 믿기를 거부했다.
“네가 안다면… ‘나’를 안다면…” 사야가 계속해서 말했다.
하늘에서 유리 조각 열 개가 내려와 사야의 등과 어깨를 감싸고 반짝였다.
“미안해, 지금 좀 감정적이야. 그런데 정말로…”
사야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고서, 그 차가운 눈빛으로 레테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왜 나를 방해하는 거야?”
“몰라서 물어?!” 레테가 소리쳤다. “이제 진짜 자기가 신이라도 됐다는 거야?”
“신이 되겠다는 말은 한 적 없어.”
“신처럼 행동하려 들잖아! 안그래?”
“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야.”
사야가 천천히 손을 들어 레테를 가리켰다.
“이미 말했을 텐데. 이 세상엔 너와 나 외에 다른 아이들도 있다고.”
둘 사이에 침묵이 가라앉는다.
둘 사이에 펼쳐진 땅은 잿빛이었다.
“원한다면 이 세계가 죽도록 내버려둬.” 사야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난 이제 죽음은 지긋지긋해. 마지막으로 단 한 번, 무언가 죽어야 한다면… 너의 목숨으로 하겠어.”
사야의 주변을 감싸던 유리들 또한 레테를 가리켰다.
“기억들을 내놔, 사신. 그러지 않으면 강제로 뺏겠어. 이제 시간이 얼마 없거든.”
영혼을 내놓으라는 협박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세계가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어. 어떻게든 고칠 방법을 찾을 거야.” 레테가 대답했다.
“멍청한 놈.” 사야가 저주했다.
“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놈… 이제 네가 하는 말도 지긋지긋해졌어.”
레테가 웃었다.
“우연이네, 나도 네가 하는 말은 더 이상 못 듣겠거든.”
레테는 일어서 낫을 들었다.
이 차갑고 매정한 여자를…
다음 공격으로, 반드시 죽일 것이다.
수천 개의 잊힌 삶이, 이곳에서 기억되고 있었다. 사신은 영혼의 우물을 떠올렸다.
이 길을 걷고 싶은 이유가 뭐라고 설명했지?
여전히, 그때 당시의 답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레테는 새로운 답을 내놓았다.
옳은 일이니까. 그것 외에 다른 이유는 필요 없었다.
그럼에도…
“—!? 너…!”
또다시, 레테는 사야를 향해 낫을 휘둘렀다. 이에 사야는 손가락을 들었다. 그 위에 놓인 유리 조각이 칼날을 받았다.
몸을 숙인 레테는 사야를 올려다보며 얼굴을 구겼다.
사야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레테를 내려다보았다. 이토록 영혼의 존엄을 경시하는 행위에, 레테는 분노가 몸을 가로지르는 것을 느꼈다.
“너…!” 레테가 포효했다.
“내 영혼들을 빼앗아가서 네가 얻는 게 뭐야?!”
레테를 막으며, 사야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얻는 것…?”
사야의 손끝에 놓인 유리 조각이 반짝였다. 그녀의 꽃이 한 번 더 반짝이더니, 또다시 사야의 모습은 잔상이 되었고,
레테의 낫은 허공을 갈랐다. 멀리 떨어진 빛에서 사야가 다시 나타났다.
“이렇게까지 함께 했으면 진작에 눈치챘어야 할 텐데. 난 단 한 번도 거짓말 한 적 없어.”
사야의 꽃이 다시 반짝였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뒤, 확실하게 강조했다.
“내가 이걸로 ‘얻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난 개인적인 이유로 움직이는 게 아니야.”
그 말이 진실임을 알고 있음에도, 레테는 믿기를 거부했다.
“네가 안다면… ‘나’를 안다면…” 사야가 계속해서 말했다.
하늘에서 유리 조각 열 개가 내려와 사야의 등과 어깨를 감싸고 반짝였다.
“미안해, 지금 좀 감정적이야. 그런데 정말로…”
사야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고서, 그 차가운 눈빛으로 레테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왜 나를 방해하는 거야?”
“몰라서 물어?!” 레테가 소리쳤다. “이제 진짜 자기가 신이라도 됐다는 거야?”
“신이 되겠다는 말은 한 적 없어.”
“신처럼 행동하려 들잖아! 안그래?”
“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야.”
사야가 천천히 손을 들어 레테를 가리켰다.
“이미 말했을 텐데. 이 세상엔 너와 나 외에 다른 아이들도 있다고.”
둘 사이에 침묵이 가라앉는다.
둘 사이에 펼쳐진 땅은 잿빛이었다.
“원한다면 이 세계가 죽도록 내버려둬.” 사야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난 이제 죽음은 지긋지긋해. 마지막으로 단 한 번, 무언가 죽어야 한다면… 너의 목숨으로 하겠어.”
사야의 주변을 감싸던 유리들 또한 레테를 가리켰다.
“기억들을 내놔, 사신. 그러지 않으면 강제로 뺏겠어. 이제 시간이 얼마 없거든.”
영혼을 내놓으라는 협박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세계가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어. 어떻게든 고칠 방법을 찾을 거야.” 레테가 대답했다.
“멍청한 놈.” 사야가 저주했다.
“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놈… 이제 네가 하는 말도 지긋지긋해졌어.”
레테가 웃었다.
“우연이네, 나도 네가 하는 말은 더 이상 못 듣겠거든.”
레테는 일어서 낫을 들었다.
이 차갑고 매정한 여자를…
다음 공격으로, 반드시 죽일 것이다.
3.3. 카나에
3.3.1. 해금 조건
[anchor(AI[UE]OON)]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17-1 | Sunset-1 | 카나에로 Chelsea 클리어 | ||
17-2 | Sunset-2 | 카나에로 AI[UE]OON 클리어 | ||
17-3 | Sunset-3 | 카나에로 A Wandering Melody of Love 클리어 | ||
17-4 | Sunset-4 | 카나에로 Tie me down gently 클리어 | ||
17-5 | Sunset-5 | 카나에로 Valhalla:0 클리어 | ||
17-6 | Sunset-6 | 카나에로 Hotarubi no Yuki 클리어 |
3.3.2. Sunset Radiance
=====# 17-1 #=====숨이 막힐 정도로 만연한 새하얀 결정이 발밑에서 부드럽게 부서졌다.
아르케아에 내리는 눈, 조금은 기묘하고, 조금은 흥미로운 현상. 눈이 만들어낸 조그마한 언덕, 그 사이로 소녀의 발자국이 이어졌다.
새카만 하늘 아래, 세상은 마구 흩날리는 눈의 하얀색으로 뒤덮여있었다.
그곳에서 카나에는 목적지를 다시 확인했다.
“분명…” 카나에가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속삭였다.
“저기랑… 저기였지.”
카나에의 시선이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검은 장막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훑었다.
그 와중에도 눈은 아랑곳없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왈츠와 같은 리듬으로 춤추고 있었다.
카나에는 고개를 내려 앞을 바라보았다.
절벽 너머의 계곡,
오로지 추위만이 채우고 있는 텅 빈 공간.
새하얀 눈이 보라색 별빛으로 반짝이며 머나먼 지평선 위로 아지랑이를 피워내는 듯했다.
이 밋밋한 공간을 덧칠하는 보랏빛 광채.
상황이 달랐다면, 카나에는 멈춰서 이 풍경을 잠시 즐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소녀는 묵묵히 결의에 찬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뽀드득, 하는 발소리와 춤추는 바람이 고요한 밤공기를 장식했다.
새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이 시야를 가리며 얼굴을 데웠다.
카나에는 이 풍경의 그 무엇에도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라보며 감탄할 것이다.
아르케아에 내리는 두 번째 눈을.
아르케아에 내리는 눈, 조금은 기묘하고, 조금은 흥미로운 현상. 눈이 만들어낸 조그마한 언덕, 그 사이로 소녀의 발자국이 이어졌다.
새카만 하늘 아래, 세상은 마구 흩날리는 눈의 하얀색으로 뒤덮여있었다.
그곳에서 카나에는 목적지를 다시 확인했다.
“분명…” 카나에가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속삭였다.
“저기랑… 저기였지.”
카나에의 시선이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검은 장막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훑었다.
그 와중에도 눈은 아랑곳없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왈츠와 같은 리듬으로 춤추고 있었다.
카나에는 고개를 내려 앞을 바라보았다.
절벽 너머의 계곡,
오로지 추위만이 채우고 있는 텅 빈 공간.
새하얀 눈이 보라색 별빛으로 반짝이며 머나먼 지평선 위로 아지랑이를 피워내는 듯했다.
이 밋밋한 공간을 덧칠하는 보랏빛 광채.
상황이 달랐다면, 카나에는 멈춰서 이 풍경을 잠시 즐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소녀는 묵묵히 결의에 찬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뽀드득, 하는 발소리와 춤추는 바람이 고요한 밤공기를 장식했다.
새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이 시야를 가리며 얼굴을 데웠다.
카나에는 이 풍경의 그 무엇에도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라보며 감탄할 것이다.
아르케아에 내리는 두 번째 눈을.
=====# 17-2 #=====
칼바람에 코가 빨개지는 것이 느껴진 카나에는 한 번 어깨를 털며 눈을 찡그렸다.
그렇게 조금 구겨진 표정으로 얼어붙은 코를 살짝 매만졌다. 낮과 밤을 가르는 경계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탓에 어느샌가 주변은 조금 더 어두워져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계곡을 채우는 바람의 속삭임과 고함, 그리고 눈발이 더욱 거세게 카나에를 덮쳤다.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카나에는 즉시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의 희미한 반짝임을 응시했다.
그러나 카나에게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량이 너무 적었다.
천천히, 소녀는 손을 들어 올렸다.
조그맣게 반짝이던 빛들이 점점 더 강해지더니, 이윽고 시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던 외로운 빛들은 확실하게 그 모양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찬란한 빛을 뽐내기 시작했다.
그 빛들은 유리 조각, 일곱 개로 나누어진 아르케아의 조각이었다.
조각들이 카나에에게 다가와 제각각의 속도로 천천히 빙글대다 공중에 멈추어 섰다. 눈밭에 스며들던 보랏빛을 그 조각들도 머금고 있었다.
카나에는 천천히 조각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카나에가 눈에 담은 것은 조각 안의 기억이 아니라, 이 일곱 개의 조각이 이루는 하나의 형태였다.
카나에가 손가락을 굽혔다. 펼치자 조각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재빨리 어떤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처음엔 얼굴이었다가, 그리고 검이었다가, 방패였다가, 휘감는 덩굴줄기였다.
구체적이진 않지만, 알아보기에는 충분한 모양들을 조각들이 공중을 춤추며 자아내고 있었다.
이윽고 하나의 조각을 제외한 여섯 개의 조각의 빛이 점점 약해졌다.
카나에는 그 조각을 바라보고서는 천천히 다가갔다.
카나에의 기묘한 힘과, 그로 말미암아 탄생한 더욱 기묘한 길잡이.
아니, 길잡이는 바로 카나에 본인이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가짜 별과 별빛을 이용해 앞길을 밝혀줄 ‘나침반’을 만들어내는 힘.
카나에는 이 세상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줄곧 이 힘을 갖고 있었다.
조각이 가리키는 길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는, 카나에는 다시 전진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주변을 몰아치는 바람이, 조금 더 매서워졌다.
그렇게 조금 구겨진 표정으로 얼어붙은 코를 살짝 매만졌다. 낮과 밤을 가르는 경계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탓에 어느샌가 주변은 조금 더 어두워져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계곡을 채우는 바람의 속삭임과 고함, 그리고 눈발이 더욱 거세게 카나에를 덮쳤다.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카나에는 즉시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의 희미한 반짝임을 응시했다.
그러나 카나에게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량이 너무 적었다.
천천히, 소녀는 손을 들어 올렸다.
조그맣게 반짝이던 빛들이 점점 더 강해지더니, 이윽고 시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던 외로운 빛들은 확실하게 그 모양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찬란한 빛을 뽐내기 시작했다.
그 빛들은 유리 조각, 일곱 개로 나누어진 아르케아의 조각이었다.
조각들이 카나에에게 다가와 제각각의 속도로 천천히 빙글대다 공중에 멈추어 섰다. 눈밭에 스며들던 보랏빛을 그 조각들도 머금고 있었다.
카나에는 천천히 조각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카나에가 눈에 담은 것은 조각 안의 기억이 아니라, 이 일곱 개의 조각이 이루는 하나의 형태였다.
카나에가 손가락을 굽혔다. 펼치자 조각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재빨리 어떤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처음엔 얼굴이었다가, 그리고 검이었다가, 방패였다가, 휘감는 덩굴줄기였다.
구체적이진 않지만, 알아보기에는 충분한 모양들을 조각들이 공중을 춤추며 자아내고 있었다.
이윽고 하나의 조각을 제외한 여섯 개의 조각의 빛이 점점 약해졌다.
카나에는 그 조각을 바라보고서는 천천히 다가갔다.
카나에의 기묘한 힘과, 그로 말미암아 탄생한 더욱 기묘한 길잡이.
아니, 길잡이는 바로 카나에 본인이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가짜 별과 별빛을 이용해 앞길을 밝혀줄 ‘나침반’을 만들어내는 힘.
카나에는 이 세상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줄곧 이 힘을 갖고 있었다.
조각이 가리키는 길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는, 카나에는 다시 전진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주변을 몰아치는 바람이, 조금 더 매서워졌다.
=====# 17-3 #=====
카나에는 자신의 앞에 놓인 폭풍을 아랑곳하지 않고 헤쳐 나갔다.
귓불을 때리는 바람과 흐트러지는 머릿결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눈보라 안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을 향해 전진할 뿐이었다.
카나에는 옷을 더 단단하게 여미고는 잠시 눈을 감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다.
미간을 구긴 채 자신의 앞과 위를 맴도는 유리 조각의 대형에서 결코 눈을 떼지 않았다.
강한 바람에 밀려 길을 잘못 잡을 것 같았다.
무릎 위까지 쌓인 눈이 걸음을 방해했다.
옷이 점점 더 얕아지는 듯한 느낌.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점점 더 얕아졌다.
마치 바람이 귀를 잘라내는 듯, 코가 얼어붙은 듯했다.
그럼에도 나아갔다.
“정말… 갈 수 있을까?” 카나에가 자신에게 물었지만, 그 목소리는 가혹하게 불어오는 눈보라에 묻히고 말았다.
“가야만 해.” 그래도 카나에는 다시금 의지를 다졌다.
그런 카나에의 의지에도 바람은 무심하게 카나에를 내려쳤다. 무릎이 꿇렸다. 반사적으로 뻗은 한 손이 눈 속으로 쑥 파묻혔다. 새하얀 결정의 무리가 어깨까지 닿았다.
옷의 소매 안으로 눈이 들어와 팔을 감사며 재빠르게 체온을 빼앗아 갔다. 튀어나오는 기침과 함께 얼굴에 묻었던 눈이 떨어졌다.
완전히 눈으로 덮여버린 카나에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려 해보았지만, 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일어서…” 카나에가 힘겹게 말했다.
“일어서야 해…!” 끈질기게.
그렇게 일어선 카나에는 갑작스레 기력을 너무나 쓴 탓인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쉬고 싶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따뜻한 입김을 느끼며, 카나에는 왼쪽 눈을 감았다.
오른쪽 눈으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의식이 있었다. 아직, 생각할 수 있었다…
그 눈에 자유로이 떠다니는 유리 조각의 모습이 보였다.
카나에는 입을 닫고 코로만 숨을 쉬며, 벌벌 떠는 몸을 움직여 그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작은 가능성, 아주 조그마한 가능성이었지만…
제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믿었기 때문에, 카나에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모든 게 괜찮을 것이라 카나에는 맹세했다. 그렇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다.
카나에가 손을 뻗자…
…유리 조각이 다가오며 기억의 새하얀 빛으로 소녀를 감쌌다.
카나에의 눈앞에 새로운 장소가 펼쳐졌다. 다만 시간대는 새롭지 않았다. 창밖으로 밤의 장막이 내려온, 어딘가의 산장. 카나에는 그 바닥 위에 누워있었다. 가파른 숨. 따뜻해지는 얼굴과 귀… 따뜻하다고?
카나에가 고개를 들자, 벽난로가 타닥거리며 새빨갛게 장작을 태우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과 머리에 점점 온기가 돌자 눈이 크게 뜨였다. 따뜻한 감각을 비롯해 모든 게… 너무나도 생생했다.
마치 진짜인 것처럼… 그래, 이건 진짜다.
몸에 생기가 돌아온 카나에는 벽난로 쪽으로 기어가 그 불 앞에 앉았다.
“...”
불로 몸을 데우는 카나에의 입술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눈보라 한가운데에서 찾아낸 기억 속에 놓인, 고요한 밤의 고요한 산장…
시적인 광경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지 않은가.
조그마한 기적 속에 앉은 카나에는 자신이 이 여정을 시작한 이유를 다시 되새겼다.
귓불을 때리는 바람과 흐트러지는 머릿결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눈보라 안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을 향해 전진할 뿐이었다.
카나에는 옷을 더 단단하게 여미고는 잠시 눈을 감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다.
미간을 구긴 채 자신의 앞과 위를 맴도는 유리 조각의 대형에서 결코 눈을 떼지 않았다.
강한 바람에 밀려 길을 잘못 잡을 것 같았다.
무릎 위까지 쌓인 눈이 걸음을 방해했다.
옷이 점점 더 얕아지는 듯한 느낌.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점점 더 얕아졌다.
마치 바람이 귀를 잘라내는 듯, 코가 얼어붙은 듯했다.
그럼에도 나아갔다.
“정말… 갈 수 있을까?” 카나에가 자신에게 물었지만, 그 목소리는 가혹하게 불어오는 눈보라에 묻히고 말았다.
“가야만 해.” 그래도 카나에는 다시금 의지를 다졌다.
그런 카나에의 의지에도 바람은 무심하게 카나에를 내려쳤다. 무릎이 꿇렸다. 반사적으로 뻗은 한 손이 눈 속으로 쑥 파묻혔다. 새하얀 결정의 무리가 어깨까지 닿았다.
옷의 소매 안으로 눈이 들어와 팔을 감사며 재빠르게 체온을 빼앗아 갔다. 튀어나오는 기침과 함께 얼굴에 묻었던 눈이 떨어졌다.
완전히 눈으로 덮여버린 카나에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려 해보았지만, 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일어서…” 카나에가 힘겹게 말했다.
“일어서야 해…!” 끈질기게.
그렇게 일어선 카나에는 갑작스레 기력을 너무나 쓴 탓인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쉬고 싶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따뜻한 입김을 느끼며, 카나에는 왼쪽 눈을 감았다.
오른쪽 눈으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의식이 있었다. 아직, 생각할 수 있었다…
그 눈에 자유로이 떠다니는 유리 조각의 모습이 보였다.
카나에는 입을 닫고 코로만 숨을 쉬며, 벌벌 떠는 몸을 움직여 그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작은 가능성, 아주 조그마한 가능성이었지만…
제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믿었기 때문에, 카나에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모든 게 괜찮을 것이라 카나에는 맹세했다. 그렇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다.
카나에가 손을 뻗자…
…유리 조각이 다가오며 기억의 새하얀 빛으로 소녀를 감쌌다.
카나에의 눈앞에 새로운 장소가 펼쳐졌다. 다만 시간대는 새롭지 않았다. 창밖으로 밤의 장막이 내려온, 어딘가의 산장. 카나에는 그 바닥 위에 누워있었다. 가파른 숨. 따뜻해지는 얼굴과 귀… 따뜻하다고?
카나에가 고개를 들자, 벽난로가 타닥거리며 새빨갛게 장작을 태우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과 머리에 점점 온기가 돌자 눈이 크게 뜨였다. 따뜻한 감각을 비롯해 모든 게… 너무나도 생생했다.
마치 진짜인 것처럼… 그래, 이건 진짜다.
몸에 생기가 돌아온 카나에는 벽난로 쪽으로 기어가 그 불 앞에 앉았다.
“...”
불로 몸을 데우는 카나에의 입술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눈보라 한가운데에서 찾아낸 기억 속에 놓인, 고요한 밤의 고요한 산장…
시적인 광경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지 않은가.
조그마한 기적 속에 앉은 카나에는 자신이 이 여정을 시작한 이유를 다시 되새겼다.
=====# 17-4 #=====
충분히 잠과 휴식을 취한 카나에는 광휘에 휩싸여 유리 조각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새로운 풍경이 조용히 그 눈앞에 펼쳐졌다. 카나에가 기억 안에서 쉬는 동안 여기까지 날아온 모양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아주 깊은 균열이 보였다. 눈과 얼음이 반짝거리며 대지를 덮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위를 새롭게 덮을 눈은 내리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밤의 어둠이 조금은 밝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카나에는 등을 돌려 자신을 품어주었던 유리 조각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마치 그 말에 만족하기라도 한 듯, 유리 조각은 훌훌 떠나갔다. 그리고 카나에는 자신의 충신 일곱 조각을 불러냈다.
아직 눈보라가 멎어 든 것은 아니었다. 카나에는 ‘친구’에게 실려 그 밖으로 나왔을 뿐.
등 뒤로 여전히 세차게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카나에를 집어삼킬 뻔했던 거대하고 칠흑 같은 눈의 소용돌이는 여전히 멈출 기색이 없었다.
카나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 일곱 조각의 대형을 움직여 가장 밝게 빛나는 조각을 바라보았다.
‘나침반’이 가리키기를, 카나에는 저기 보이는 균열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생각한 것이 그대로 입으로 나왔다. 이제 그 목소리를 묻을 칼바람은 없었다.
카나에는 계곡 밑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면을 타고 내려갔다.
대지가 만들어낸 자연의 회랑. 카나에는 자신을 인도하는 조각이 발하는 빛으로 돌벽에 그림자가 지는 것을 바라보며, 가야 할 길을 따라 걸어갔다.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눈앞이 팽하고 돌았다. 공기가 무거워지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카나에는 시선을 내려 이 여정의 목적, 자신이 찾던 ‘그것’을 바라보았다.
유리 조각들이 그것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변의 돌벽들이 부자연스럽게 흔들렸다. 낮게 울리는 소리가 마치 세상 만물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이 현상의 원인은 자리에 부동 없이 서서, 마치 기쁘다는 듯 주변의 공간을 마음껏 주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한 것보다는 미약한 힘이었다…
마치 상처를 입은 것처럼.
정말로 그렇다면, 정말로 저것이 힘을 잃은 것이라면, 안전할지도 모른다.
…
저 변칙적인 조각이 바로 카나에의 목적이었다.
저 미력한 조각이…
카나에는 개의치 않고,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새로운 풍경이 조용히 그 눈앞에 펼쳐졌다. 카나에가 기억 안에서 쉬는 동안 여기까지 날아온 모양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아주 깊은 균열이 보였다. 눈과 얼음이 반짝거리며 대지를 덮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위를 새롭게 덮을 눈은 내리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밤의 어둠이 조금은 밝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카나에는 등을 돌려 자신을 품어주었던 유리 조각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마치 그 말에 만족하기라도 한 듯, 유리 조각은 훌훌 떠나갔다. 그리고 카나에는 자신의 충신 일곱 조각을 불러냈다.
아직 눈보라가 멎어 든 것은 아니었다. 카나에는 ‘친구’에게 실려 그 밖으로 나왔을 뿐.
등 뒤로 여전히 세차게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카나에를 집어삼킬 뻔했던 거대하고 칠흑 같은 눈의 소용돌이는 여전히 멈출 기색이 없었다.
카나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 일곱 조각의 대형을 움직여 가장 밝게 빛나는 조각을 바라보았다.
‘나침반’이 가리키기를, 카나에는 저기 보이는 균열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생각한 것이 그대로 입으로 나왔다. 이제 그 목소리를 묻을 칼바람은 없었다.
카나에는 계곡 밑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면을 타고 내려갔다.
대지가 만들어낸 자연의 회랑. 카나에는 자신을 인도하는 조각이 발하는 빛으로 돌벽에 그림자가 지는 것을 바라보며, 가야 할 길을 따라 걸어갔다.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눈앞이 팽하고 돌았다. 공기가 무거워지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카나에는 시선을 내려 이 여정의 목적, 자신이 찾던 ‘그것’을 바라보았다.
유리 조각들이 그것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변의 돌벽들이 부자연스럽게 흔들렸다. 낮게 울리는 소리가 마치 세상 만물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이 현상의 원인은 자리에 부동 없이 서서, 마치 기쁘다는 듯 주변의 공간을 마음껏 주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한 것보다는 미약한 힘이었다…
마치 상처를 입은 것처럼.
정말로 그렇다면, 정말로 저것이 힘을 잃은 것이라면, 안전할지도 모른다.
…
저 변칙적인 조각이 바로 카나에의 목적이었다.
저 미력한 조각이…
카나에는 개의치 않고,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 17-5 #=====
저 조각에 가까워지자 점점 더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카나에 본인이 원하지 않음에도 심장은 더욱 빠르게 박동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심장뿐.
경험으로 단련된 카나에의 몸과 마음은 조각의 영향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카나에는 알고 있었다. 이 세계가 낳은 저런 ‘괴물’은, 누구라도 그냥 피해 가는 것이 신산에 이로운 일이다.
저 ‘괴물’은 불편한 잠을 자고 있는 모양이다.
공간이 더욱 뒤틀렸다. 카나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조각에 다가갔다.
저 조각은 이 세계조차 잊어버린 ‘오류’. 더 이상 현실 구조의 이음새를 풀어헤칠 힘조차 없는 미력한 괴물이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해서…
카나에의 눈에,
수많은 “성좌”가 비쳤다.
카나에의 부름을 기다리며 춤추듯 일렁이거나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리 조각의 대형들이.
이럴 땐 어느 걸 써야 할까?
그렇지, 날개의 성좌다.
카나에가 저 유리 조각들을 불러오려 하자 괴물이 그들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카나에는 얼굴을 구기고서 굴하지 않고 다시 날개의 성좌를 불러냈다. 열 개의 조각이 괴물의 힘에 뒤얽혀 하늘에서 내려오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단호히 조각들을 부려 저 뒤틀린 조각의 주변을 마치 창끝처럼 겨누며 포위하도록 했다.
순식간에, 그리고 동시에, 열 개의 조각이 변칙적인 조각을 향해 달려들었다. 보이지 않을 듯이 희끗거리며 흐르는 힘의 파동이 공기를 채우며 솟아올랐다.
그리고 성좌의 조각들이 제 위치에 자리를 잡자, 조금 전까지 공간을 비틀던 변칙적인 힘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평온한 공기가 채웠다.
그렇게 기이한 조각과 그 힘은 구형 감옥에 갇혀 격리되었다. 카나에가 변칙적인 조각을 가까이 부르자, 우리가 둥둥 뜨며 카나에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카나에는 그 안에 든 기억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저 격리된 조각과 함께, 길을 나설 뿐이었다.
“폭풍이 아직도 안 멈췄네…” 계곡을 벗어난 후, 다음으로 향할 장소를 알아내기 위해 하늘을 바라보며 카나에가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간담? 음, 어쩌면…”
시선을 내리고 그 아름다운 풍경을 둘러보다가 익숙한 것을 발견한 카나에는 말을 흐렸다. 한 번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미소를 지었다.
‘친구’가 다시 돌아왔다. 카나에는 그 유리 조각을 자신 쪽으로 불렀다.
마치 자신을 기다리던 것처럼 나풀거리던 산장의 기억이 다가오자, 카나에는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고민했다.
정말로 할 수 있을까? 괴물을 담은 우리를 들고 기억 안에 들어가는 게 가능이나 한 걸까? 그리고 이것 안에서 저 유리 조각이 날아가는 방향을 조종할 수는 있는 걸까?
…일단 해보지 않으면 절대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용감한 소녀는 하늘 위에 떠있는 모든 ‘성좌’를 부르며 괴물을 담은 우리와 함께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마치 천상과 연결된 듯한 느낌.
그렇게 따스한 기억 속에 도착한 카나에는, 천상의 힘을 부려 유리 조각을 인도했다.
…눈보라를 뚫고, 날아가도록.
카나에 본인이 원하지 않음에도 심장은 더욱 빠르게 박동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심장뿐.
경험으로 단련된 카나에의 몸과 마음은 조각의 영향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카나에는 알고 있었다. 이 세계가 낳은 저런 ‘괴물’은, 누구라도 그냥 피해 가는 것이 신산에 이로운 일이다.
저 ‘괴물’은 불편한 잠을 자고 있는 모양이다.
공간이 더욱 뒤틀렸다. 카나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조각에 다가갔다.
저 조각은 이 세계조차 잊어버린 ‘오류’. 더 이상 현실 구조의 이음새를 풀어헤칠 힘조차 없는 미력한 괴물이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해서…
카나에의 눈에,
수많은 “성좌”가 비쳤다.
카나에의 부름을 기다리며 춤추듯 일렁이거나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리 조각의 대형들이.
이럴 땐 어느 걸 써야 할까?
그렇지, 날개의 성좌다.
카나에가 저 유리 조각들을 불러오려 하자 괴물이 그들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카나에는 얼굴을 구기고서 굴하지 않고 다시 날개의 성좌를 불러냈다. 열 개의 조각이 괴물의 힘에 뒤얽혀 하늘에서 내려오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단호히 조각들을 부려 저 뒤틀린 조각의 주변을 마치 창끝처럼 겨누며 포위하도록 했다.
순식간에, 그리고 동시에, 열 개의 조각이 변칙적인 조각을 향해 달려들었다. 보이지 않을 듯이 희끗거리며 흐르는 힘의 파동이 공기를 채우며 솟아올랐다.
그리고 성좌의 조각들이 제 위치에 자리를 잡자, 조금 전까지 공간을 비틀던 변칙적인 힘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평온한 공기가 채웠다.
그렇게 기이한 조각과 그 힘은 구형 감옥에 갇혀 격리되었다. 카나에가 변칙적인 조각을 가까이 부르자, 우리가 둥둥 뜨며 카나에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카나에는 그 안에 든 기억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저 격리된 조각과 함께, 길을 나설 뿐이었다.
“폭풍이 아직도 안 멈췄네…” 계곡을 벗어난 후, 다음으로 향할 장소를 알아내기 위해 하늘을 바라보며 카나에가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간담? 음, 어쩌면…”
시선을 내리고 그 아름다운 풍경을 둘러보다가 익숙한 것을 발견한 카나에는 말을 흐렸다. 한 번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미소를 지었다.
‘친구’가 다시 돌아왔다. 카나에는 그 유리 조각을 자신 쪽으로 불렀다.
마치 자신을 기다리던 것처럼 나풀거리던 산장의 기억이 다가오자, 카나에는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고민했다.
정말로 할 수 있을까? 괴물을 담은 우리를 들고 기억 안에 들어가는 게 가능이나 한 걸까? 그리고 이것 안에서 저 유리 조각이 날아가는 방향을 조종할 수는 있는 걸까?
…일단 해보지 않으면 절대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용감한 소녀는 하늘 위에 떠있는 모든 ‘성좌’를 부르며 괴물을 담은 우리와 함께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마치 천상과 연결된 듯한 느낌.
그렇게 따스한 기억 속에 도착한 카나에는, 천상의 힘을 부려 유리 조각을 인도했다.
…눈보라를 뚫고, 날아가도록.
=====# 17-6 #=====
진심을 담아 목표를 이루고 귀환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3일 정도일까.
여정의 끝은 출발점과 같은 곳. 눈이 내리는 고요한 풍경 한가운데.
카나에가 땅을 밟고 착지하자 숨이 막힐 정도로 만연한 새하얀 결정이 발밑에서 부드럽게 부서졌다.
산장의 기억 속에서 나올 때 찬란하게 번쩍이던 빛이 이제 멎어가고 있었다.
카나에는 조각에게 또다시 감사를 표하고, 걸어나갔다.
언젠가는 또다시 만나리라.
격리한 괴물은 여전히 카나에의 곁에 있었다.
어쩌면, ‘친구’를 인도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변칙적인 조각의 힘 덕분이었던 걸까…?
어찌 됐든, 카나에는 목적을 이루었다.
카나에는 출발지였던 절벽 쪽을 향했다. 재빠르게 척척 절벽을 기어올라갔다.
빨리 가고 싶었다.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절벽 위에 오르자 익숙한 황무지가 보였다.
그리고, 두 쌍의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두 마리의 박쥐가 있었다.
하얀색과 검은색, 그리고 주황색과 초록색으로 이루어진 박쥐가 서둘러 카나에에게 다가왔다.
검은색과 하얀색, 그리고 초록색과 주황색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박쥐가 그 뒤를 따라왔다.
두 박쥐는 걱정과 기대로 날개를 퍼덕이다, 카나에의 곁에 있는 우리를 보았다.
“그거야!” 한 박쥐가 말했다.
“그거야!” 다른 쪽 박쥐가 말했다.
“이거야?” 카나에가 말했다.
“그거야!!” 두 박쥐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거야! 그거야!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자,” 카나에가 격리된 기이한 조각을 박쥐들에게 건네며 말했다. “ 그 아픈 친구를 고치려면 이게 필요한 거지?”
“응! 맞아!!” 한 박쥐가 말했다. 두 박쥐 사이로 괴물이 담긴 우리가 빛을 발하며 둥둥 부유했다.
“분명 이걸로 고칠 수 있을 거야!” 다른 쪽 박쥐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여자애, 나도 만나볼 수 있을까?”
카나에가 부드럽게 물었다.
“으응… 안 보는 게 좋을걸…” 조금 어른스러운 쪽의 박쥐가 말했다.
“으응… 좀 위험할지도 모르고…” 조금 아이 같은 쪽의 박쥐가 말했다.
“그래… 그럼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꼭 알려줘!”
“그래! 우리가 찾아갈게! 알겠지?!”
두 박쥐 중 하나가 강조하듯 카나에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그 날개와 움직임이 이어진 구형 우리의 조각도 마구 움직이는 탓에 다른 쪽 박쥐의 신경이 조금 긁혔다.
“응.” 카나에가 부드럽게 미소 짓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대답했다.
“고마워, 누나! 누나가 최고야! 저, 정말로…큽…”
박쥐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 불분명한 형태의 고개를 휙 돌리고서 ‘얼굴’을 구기더니, 눈이 있을 자리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울기 시작한 것이다.
“드렘아, 가자.” 다른 쪽 박쥐가 뒤로 물러서며 말하고는, 카나에를 향해 다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고마워.” 또다시, 감사의 말을 남기며.
“별거 아닌걸, 뭐.”
그렇게 두 박쥐는 훌훌 떠나갔다.
“...”
카나에는 두 박쥐의 모습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미소를 지은 채 등을 돌려 절벽 끝으로 걸어가 걸터앉았다.
아르케아에서 눈을 뜬 지 얼마나 됐을까?
아마 수년은 되었겠지…
하늘이 갈라지고, 부서지고, 빛을 잃고…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서도, 카나에는 여태껏 다른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저 박쥐들의 ‘얼굴’조차… 추상화에 가까웠으니까.
“...망할…” 카나에가 허탈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코가 빨개지며 입가의 미소가 움찔댔다. “망할… 하하핫…”
붉어지는 눈시울을 하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듯, 카나에는 얼굴을 가렸다.
그 슬픔을 털어내듯 몸을 한 번 떨고서, 카나에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기가 구한 그 아이를 만나볼 수는 없지만…
…저 박쥐들을 도운 건 옳은 일이었다고.
“언젠가는…”
카나에는 무언가 말을 하려 하다가 멈추고서 눈밭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바라보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나의 빛이 저 검은 캔버스를 가로질렀다. 카나에의 눈이 반짝였다. 흔들리던 미소가 다시 힘을 되찾았다.
“제 소원은…”
고요한 반쪽짜리 밤. 색이 바래가는 낮의 하늘 아래, 잿빛 대지 위로 내리는 새하얀 눈,
이 풍경 속에서 카나에가 자신에게, 하늘에게, 모두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속삭였다…
부디, 이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4. Archive Story
4.1. 나미
4.1.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14-1 | Astral-1 | To the Milky Way 클리어 | ||
14-2 | Astral-2 | Clotho and the stargazer 클리어 | ||
14-3 | Astral-3 | Altair (feat. *spiLa*) 클리어 | ||
14-4 | Astral-4 | To the Milky Way 클리어 |
4.1.2. Astral Sea
=====# 14-1 #=====현실처럼 생생한 꿈은 좀처럼 드물다.
하지만 그조차 꿈일 뿐이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드넓은 초원에 흩뿌리듯 펼쳐진 꽃밭, 흐르는 강과 장엄한 동굴과 거대한 계곡, 겨울의 냉기에 얼어붙어 반짝이는 얼음 기둥이 되어버린 폭포.
현실 세계는 기적과 같은 풍경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진짜 기적이 아니다. 꿈에서나 나올 법한 장관이지만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홀려버릴 정도로 아름답지만 현실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이 세계의 법칙에 따라 형성된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게다가 소녀는 세계의 법칙을 이미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배운 내용들이 떠올랐다. 식물의 생육, 물의 순환, 온도의 변화와 그에 따른 현상…
하지만 이 세계는 기적인 것이 분명했다. 틀림없이 꿈이다. 소녀가 학교에서 배웠던 그 어떤 수업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유리 조각에 대해 알려주지는 않았으니까.
소녀는 절벽 끝에 서서, 이 새하얀 세계의 크기를 실감했다.
고요하고 창백한 땅을 건물들이 수놓고 있었다. 어떤 건물은 똑바로 서 있었고, 어떤 건물은 기울어져 있었다. 저것들은 버려진 걸까, 아니면 보존된 걸까?
“아르케아”라는 이름이 소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단어를 들은 기억은 없었다.
유리 조각이 하늘을 가르며 사람과 장소를 비추었다. 마치 영화와 같은 광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저 조각들의 이름도 “아르케아”였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며, 소녀는 분명 자기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생생한 꿈은 좀처럼 드물다.
“...”
소녀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곧, 무언가 깨달은 듯 소녀의 몸이 움찔했다. 어떤 단어가 소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거다!” 소녀가 소리쳤다. “자각몽!”
곧 깨달음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소녀는 방방 뛰기 시작했다.
“호, 혹시 나…”
두 손을 입 앞에 가져다대며 소녀는 작게 속삭였다.
“나… 날 수 있나?!”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절벽의 끝으로 발을 한 걸음 내디뎠다가…
갑작스레, 멈추었다.
뒷걸음을 치며 소녀는 머리를 마구 흔들고선 끙끙댔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아니, 아니아니아니, 되겠냐? 바보야!”
소녀가 소리쳤다. 마음속에서 공포와 행복한 고양감이 뒤섞였다. 걸음을 내디뎠던 순간, 절벽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마음을 움켜잡았다.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으으!” 소녀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신음했다. “한 번도 꾼 적 없는 자각몽을 왜 이제 와서?”
현실처럼 느껴지는 꿈, 자각몽. 꿈을 꾸는 도중 자신이 꿈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꿈속 세계에 한해 엄청난 힘을 얻게 된다. 하늘을 날거나, 새나 나비가 되거나,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사고는 현실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에 마법을 부리지도, 새나 나비로 변신하지도 못했다.
소녀의 이름은 나미.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나미는 비교적 완만한 길을 찾아, 절벽에서 내려갔다.
하지만 그조차 꿈일 뿐이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드넓은 초원에 흩뿌리듯 펼쳐진 꽃밭, 흐르는 강과 장엄한 동굴과 거대한 계곡, 겨울의 냉기에 얼어붙어 반짝이는 얼음 기둥이 되어버린 폭포.
현실 세계는 기적과 같은 풍경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진짜 기적이 아니다. 꿈에서나 나올 법한 장관이지만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홀려버릴 정도로 아름답지만 현실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이 세계의 법칙에 따라 형성된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게다가 소녀는 세계의 법칙을 이미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배운 내용들이 떠올랐다. 식물의 생육, 물의 순환, 온도의 변화와 그에 따른 현상…
하지만 이 세계는 기적인 것이 분명했다. 틀림없이 꿈이다. 소녀가 학교에서 배웠던 그 어떤 수업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유리 조각에 대해 알려주지는 않았으니까.
소녀는 절벽 끝에 서서, 이 새하얀 세계의 크기를 실감했다.
고요하고 창백한 땅을 건물들이 수놓고 있었다. 어떤 건물은 똑바로 서 있었고, 어떤 건물은 기울어져 있었다. 저것들은 버려진 걸까, 아니면 보존된 걸까?
“아르케아”라는 이름이 소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단어를 들은 기억은 없었다.
유리 조각이 하늘을 가르며 사람과 장소를 비추었다. 마치 영화와 같은 광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저 조각들의 이름도 “아르케아”였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며, 소녀는 분명 자기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생생한 꿈은 좀처럼 드물다.
“...”
소녀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곧, 무언가 깨달은 듯 소녀의 몸이 움찔했다. 어떤 단어가 소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거다!” 소녀가 소리쳤다. “자각몽!”
곧 깨달음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소녀는 방방 뛰기 시작했다.
“호, 혹시 나…”
두 손을 입 앞에 가져다대며 소녀는 작게 속삭였다.
“나… 날 수 있나?!”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절벽의 끝으로 발을 한 걸음 내디뎠다가…
갑작스레, 멈추었다.
뒷걸음을 치며 소녀는 머리를 마구 흔들고선 끙끙댔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아니, 아니아니아니, 되겠냐? 바보야!”
소녀가 소리쳤다. 마음속에서 공포와 행복한 고양감이 뒤섞였다. 걸음을 내디뎠던 순간, 절벽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마음을 움켜잡았다.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으으!” 소녀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신음했다. “한 번도 꾼 적 없는 자각몽을 왜 이제 와서?”
현실처럼 느껴지는 꿈, 자각몽. 꿈을 꾸는 도중 자신이 꿈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꿈속 세계에 한해 엄청난 힘을 얻게 된다. 하늘을 날거나, 새나 나비가 되거나,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사고는 현실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에 마법을 부리지도, 새나 나비로 변신하지도 못했다.
소녀의 이름은 나미.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나미는 비교적 완만한 길을 찾아, 절벽에서 내려갔다.
=====# 14-2 #=====
자각몽 다운 일도 못하는데, 내 무의식이 어떤 곳인지 구경이나 해볼까.
절벽에서 내려오며 나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길과 같이, 나미가 걷고 있는 길은 유리로 수놓아져 있었다.
손을 뻗어 만져보려 하면 수줍은 듯 도망가 버리지만, 정작 다가오지 않았으면 할 때엔 가까이 와버리는 유리 조각들.
유리 조각은 각자 풍경을 머금고 있었다. 대부분 평범하고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진기한 구경거리도 적지 않았다.
로브를 쓴 사람들의 손짓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채와 연기의 향연처럼, 마법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광경이라든지.
지금 나미가 서있는 장소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색이 정반대인 계곡과 절벽의 풍경이라든지. 마치 악마와 같이 뿔이 나있는 사람들이 에너지의 소용돌이를 바라보는 모습이라든지…
“멋있다…”
나미가 숨을 뱉으며 말했다. 유리 조각을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역시나 조각은 순순히 잡혀주지 않았다. 나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불평하고선, 다시 조심스럽게 길을 타고 절벽을 내려갔다.
이 세계는 분명 나미 본인의 무의식일 텐데, 그녀의 행동에는 그다지 동조해 주는 것 같지 않았다.
비록 이 무채색의 세계엔 처음으로 와보는 것이지만, 절벽은 한 번 타본 적이 있었다.
나미가 살던 나라는 산길이 험했다. 푸르른 산등성이와 울창한 나무숲으로 뒤덮인 지평선과 맞닿은 하늘.
나미는 원한다면 그 어느 곳이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미는 열심히 여행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방학이 되면 가족, 친구와 함께 숲이나 산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정도가 다였다.
나미는 자신의 옆에 놓인 새하얀 바위에 손을 얹었다.
하얗지만, 이거 석회암은 아니지? 나미는 학교에서 배운 지질학 수업 내용을 떠올리려 했지만, 애초에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얼마 없었다.
돌 분류가 어떻게 되더라? 다공암, 퇴적암, 변성암…
나미에게 있어 학교의 진정한 가치는 교실 밖에 있었다.
체육 시간은 재밌다. 음악 시간은 재밌다. 돌멩이 공부는 재미없다.
그럼에도, 이 세계의 기묘한 풍경은 나미의 흥미를 사로잡았다.
“이걸 보고 어떻게 돌멩이 수업을 안 떠올려…” 그녀가 중얼거렸다.
절벽을 타고 내려오며, 나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지면 너머로 유리 조각들이 사라져버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마치 벽을 뚫고 지나가듯이… 아니, 어쩌면?
“동굴인가?!”
나미는 그 생각을 떠올림과 동시에 소리쳤다. 그리고 재빨리 그 지면 너머로 발을 옮겼다.
세상에 동굴보다 멋진 건 없어. 나미는 그렇게 믿었다.
나미는 신이 나서는 달려나갔다. 유리 조각들이 그녀를 인도하듯이 발걸음에 맞추어 튀어 올랐다. 동굴 안으로 들어갈수록, 유리 조각들은 더욱 빠르게 날아올랐다.
동굴의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아트리움이 나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리적으로 여기에 존재하는 게 가능한 건지 의심될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나미는 또다른 기적을 찾았다.
절벽에서 내려오며 나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길과 같이, 나미가 걷고 있는 길은 유리로 수놓아져 있었다.
손을 뻗어 만져보려 하면 수줍은 듯 도망가 버리지만, 정작 다가오지 않았으면 할 때엔 가까이 와버리는 유리 조각들.
유리 조각은 각자 풍경을 머금고 있었다. 대부분 평범하고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진기한 구경거리도 적지 않았다.
로브를 쓴 사람들의 손짓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채와 연기의 향연처럼, 마법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광경이라든지.
지금 나미가 서있는 장소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색이 정반대인 계곡과 절벽의 풍경이라든지. 마치 악마와 같이 뿔이 나있는 사람들이 에너지의 소용돌이를 바라보는 모습이라든지…
“멋있다…”
나미가 숨을 뱉으며 말했다. 유리 조각을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역시나 조각은 순순히 잡혀주지 않았다. 나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불평하고선, 다시 조심스럽게 길을 타고 절벽을 내려갔다.
이 세계는 분명 나미 본인의 무의식일 텐데, 그녀의 행동에는 그다지 동조해 주는 것 같지 않았다.
비록 이 무채색의 세계엔 처음으로 와보는 것이지만, 절벽은 한 번 타본 적이 있었다.
나미가 살던 나라는 산길이 험했다. 푸르른 산등성이와 울창한 나무숲으로 뒤덮인 지평선과 맞닿은 하늘.
나미는 원한다면 그 어느 곳이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미는 열심히 여행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방학이 되면 가족, 친구와 함께 숲이나 산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정도가 다였다.
나미는 자신의 옆에 놓인 새하얀 바위에 손을 얹었다.
하얗지만, 이거 석회암은 아니지? 나미는 학교에서 배운 지질학 수업 내용을 떠올리려 했지만, 애초에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얼마 없었다.
돌 분류가 어떻게 되더라? 다공암, 퇴적암, 변성암…
나미에게 있어 학교의 진정한 가치는 교실 밖에 있었다.
체육 시간은 재밌다. 음악 시간은 재밌다. 돌멩이 공부는 재미없다.
그럼에도, 이 세계의 기묘한 풍경은 나미의 흥미를 사로잡았다.
“이걸 보고 어떻게 돌멩이 수업을 안 떠올려…” 그녀가 중얼거렸다.
절벽을 타고 내려오며, 나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지면 너머로 유리 조각들이 사라져버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마치 벽을 뚫고 지나가듯이… 아니, 어쩌면?
“동굴인가?!”
나미는 그 생각을 떠올림과 동시에 소리쳤다. 그리고 재빨리 그 지면 너머로 발을 옮겼다.
세상에 동굴보다 멋진 건 없어. 나미는 그렇게 믿었다.
나미는 신이 나서는 달려나갔다. 유리 조각들이 그녀를 인도하듯이 발걸음에 맞추어 튀어 올랐다. 동굴 안으로 들어갈수록, 유리 조각들은 더욱 빠르게 날아올랐다.
동굴의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아트리움이 나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리적으로 여기에 존재하는 게 가능한 건지 의심될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나미는 또다른 기적을 찾았다.
=====# 14-3 #=====
생각만으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까?
인지와 현실을 동일선상에 놓는 학자들도 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인지하고 있다면, 그건 자신이다.
그렇다면,
나비가 된 꿈을 꾸는 사람은 나비가 되는 걸까?
아니면 인간이 되는 꿈을 꾸는 나비에 불과한 걸까?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의 한계는 지식의 한계와 같다. 그렇다면, 개별적인 지식은 현실, 세계를 이루는 조각이다.
인간은 정신에 세계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과 감정과 기억을 물리적으로 재현하고, 그것들을 이어붙여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도 있는 걸까?
나미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공간, 기록 보관소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산 안에 존재하기엔 너무나 커다란 비밀 도서관… 아니, “도서관”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의 장엄함.
마치 예고 없이 열린 천국의 문 너머로 건너온 것만 같았다. 반짝이는 유리 조각의 무리가 나미의 앞을 가로질러 산 중심의 공동으로 향하는 길을 이루었다.
이곳은 영원히 “생각”이 모이고, 분류되는 장소였다.
나미의 등 뒤로 새로운 생각들이 쏟아져들어왔다. 머리 위로는 유리가 발하는 빛이 쏟아져내려와 모든 공간을 비추었다.
나미는 걸음을 내딛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바닥은 유리가 아니라 새하얀 자갈돌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산속 공간은 인공물과 자연물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모양이었다.
그 순간 나미는 이곳이 존재할 수 없는 장소이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눈부신 도서관은 나미를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자갈돌 길을 따라 나선 계단과 책장과 기둥을 지나칠 때마다 아르케아 조각들이 날아와 그녀의 곁에서 동행하듯 따라왔다.
조각들이 발하는 빛이 나미의 피부를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그녀는 벽 앞에서 멈추어 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우와.”
숨이 섞인 목소리로, 나미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나… 여기 너무 좋은데 어떡하지…”
미려하게 일렁이는 유리 조각 무리에서 한 조각이 빠져나와 나미의 두 손 사이로 날아왔다.
물과 파도로 가득찬 세계의 모습이 그 조각 안에 비추었다.
나미는 침을 삼켰다.
저 장소로 가고싶었다.
그리고 이 꿈같지만 꿈이 아닌 세계는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줄 것이다.
소녀의 소원이 유리 조각과 공명했다.
그녀가 이 세계를 받아들이자…
아르케아의 세계도, 그녀를 받아들였다.
인지와 현실을 동일선상에 놓는 학자들도 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인지하고 있다면, 그건 자신이다.
그렇다면,
나비가 된 꿈을 꾸는 사람은 나비가 되는 걸까?
아니면 인간이 되는 꿈을 꾸는 나비에 불과한 걸까?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의 한계는 지식의 한계와 같다. 그렇다면, 개별적인 지식은 현실, 세계를 이루는 조각이다.
인간은 정신에 세계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과 감정과 기억을 물리적으로 재현하고, 그것들을 이어붙여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도 있는 걸까?
나미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공간, 기록 보관소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산 안에 존재하기엔 너무나 커다란 비밀 도서관… 아니, “도서관”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의 장엄함.
마치 예고 없이 열린 천국의 문 너머로 건너온 것만 같았다. 반짝이는 유리 조각의 무리가 나미의 앞을 가로질러 산 중심의 공동으로 향하는 길을 이루었다.
이곳은 영원히 “생각”이 모이고, 분류되는 장소였다.
나미의 등 뒤로 새로운 생각들이 쏟아져들어왔다. 머리 위로는 유리가 발하는 빛이 쏟아져내려와 모든 공간을 비추었다.
나미는 걸음을 내딛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바닥은 유리가 아니라 새하얀 자갈돌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산속 공간은 인공물과 자연물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모양이었다.
그 순간 나미는 이곳이 존재할 수 없는 장소이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눈부신 도서관은 나미를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자갈돌 길을 따라 나선 계단과 책장과 기둥을 지나칠 때마다 아르케아 조각들이 날아와 그녀의 곁에서 동행하듯 따라왔다.
조각들이 발하는 빛이 나미의 피부를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그녀는 벽 앞에서 멈추어 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우와.”
숨이 섞인 목소리로, 나미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나… 여기 너무 좋은데 어떡하지…”
미려하게 일렁이는 유리 조각 무리에서 한 조각이 빠져나와 나미의 두 손 사이로 날아왔다.
물과 파도로 가득찬 세계의 모습이 그 조각 안에 비추었다.
나미는 침을 삼켰다.
저 장소로 가고싶었다.
그리고 이 꿈같지만 꿈이 아닌 세계는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줄 것이다.
소녀의 소원이 유리 조각과 공명했다.
그녀가 이 세계를 받아들이자…
아르케아의 세계도, 그녀를 받아들였다.
=====# 14-4 #=====
꿈속의 꿈인가? 아니야, 이건…
나미가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오렌지색 물결이 그녀의 주변을 감쌌다. 황혼의 빛, 일몰의 빛이었다.
나미는 뒤로 누워 파도에 몸을 맡겼다. 곧 그녀의 전신이 물에 잠겼다. 놀랍게도, 물 안에서도 나미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나미의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이는 상식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생각들은 나미 본인의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경험이자 삶이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멋진 삶을 사는 누군가의…
시원한 수면 밑으로 흐르는 따뜻한 바닷물.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파도 소리. 나미는 행복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긴 대체 어딜까?”
나미가 말을 하자 수중임에도 또렷하게 목소리가 울렸다.그리고 자신이 이곳에 혼자 온 것이 아님을 기억해 냈다.
나미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수십 마리의 알록달록한 물고기가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헤엄치고 있었다.
왼쪽으로부터 “그녀”가 알고 있는 어린아이가 이쪽으로 헤엄쳐오고 있었다. 아이가 손을 뻗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그 손을 잡았다.
마치 집처럼 편안한 기분이었다.
두 소녀는 수면을 향해, 태양을 향해 고개를 올려들었다.
빛줄기가 파도에 부서져 물의 우주를 수놓는 아름다운 빛의 조각이 되었다. 두 소녀는 서로의 손을 꼭 붙잡았다.
물고기들의 색, 무지개색으로 갈라지는 햇빛, 몸을 감싸는 온기…
이 천국과도 같은 장소는…
기억이었다.
그리우면서도, 어딘가 기묘한… 그런 종류의 깨달음.
하지만 나미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손을 더욱 꼭 붙잡았다. 해가 완전히 지고, 검은 장막이 드리운 하늘에 박힌 별들이 수면에 일렁일 때까지…
하늘에 박힌 별들이 수면에 일렁일 때까지…
거부하기 힘든 안락함이었다.
그렇다. 이건 기억이다. 그 세계는 기억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기억이 끝나면, 깨어나 현실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삶과 기억이 그 장소에서 나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미의 얼굴에 태양보다도 밝은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 마음은 깃털보다도 가벼웠다.
이것이 기쁨이자 천국이다.
나미는, 아르케아의 세계에 사로잡혔다.
나미가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오렌지색 물결이 그녀의 주변을 감쌌다. 황혼의 빛, 일몰의 빛이었다.
나미는 뒤로 누워 파도에 몸을 맡겼다. 곧 그녀의 전신이 물에 잠겼다. 놀랍게도, 물 안에서도 나미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나미의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이는 상식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생각들은 나미 본인의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경험이자 삶이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멋진 삶을 사는 누군가의…
시원한 수면 밑으로 흐르는 따뜻한 바닷물.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파도 소리. 나미는 행복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긴 대체 어딜까?”
나미가 말을 하자 수중임에도 또렷하게 목소리가 울렸다.그리고 자신이 이곳에 혼자 온 것이 아님을 기억해 냈다.
나미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수십 마리의 알록달록한 물고기가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헤엄치고 있었다.
왼쪽으로부터 “그녀”가 알고 있는 어린아이가 이쪽으로 헤엄쳐오고 있었다. 아이가 손을 뻗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그 손을 잡았다.
마치 집처럼 편안한 기분이었다.
두 소녀는 수면을 향해, 태양을 향해 고개를 올려들었다.
빛줄기가 파도에 부서져 물의 우주를 수놓는 아름다운 빛의 조각이 되었다. 두 소녀는 서로의 손을 꼭 붙잡았다.
물고기들의 색, 무지개색으로 갈라지는 햇빛, 몸을 감싸는 온기…
이 천국과도 같은 장소는…
기억이었다.
그리우면서도, 어딘가 기묘한… 그런 종류의 깨달음.
하지만 나미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손을 더욱 꼭 붙잡았다. 해가 완전히 지고, 검은 장막이 드리운 하늘에 박힌 별들이 수면에 일렁일 때까지…
하늘에 박힌 별들이 수면에 일렁일 때까지…
거부하기 힘든 안락함이었다.
그렇다. 이건 기억이다. 그 세계는 기억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기억이 끝나면, 깨어나 현실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삶과 기억이 그 장소에서 나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미의 얼굴에 태양보다도 밝은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 마음은 깃털보다도 가벼웠다.
이것이 기쁨이자 천국이다.
나미는, 아르케아의 세계에 사로잡혔다.
4.2. 아유
4.2.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11-4 | Colorful-4 | 11-3 스토리 열람[4] | ||
11-5 | Colorful-5 | |||
11-6 | Colorful-6 | |||
11-7 | Colorful-7 | |||
11-8 | Colorful-8 | Désive 클리어 |
4.2.2. Colorful Dream
=====# 11-4 #=====뱉을 말도 없고
머리에 든 것도 없고
배에 들어찬 것도 없이
새하얀 세계에서 깨어난 소녀의 이름은 아유였다.
옛날 옛적부터 시작된 이야기.
하늘이 비틀리기 전에, 하늘이 부서지기 전에,
하늘이 눈부신 빛으로 뒤덮이기 전에, 낮이 밤을 만나기 전에…
한 소녀가 무너져내리는 탑과 미궁으로부터 떨어진 후에…
아유는 안에 든 것 없이 깨어났다.
아유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펴보았다. 빛의 세계. 유리와 기억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아유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배가, 배가 비어있었으니까.
입을 열어봐도…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뱉을 말도 없고, 머리에 든 것도 없었으니…
아유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잠시 걷다가 아유는 또다시 털썩, 하고 쓰려졌다. 일어나려고, 다시 일어나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은 그대로 땅 위를 기었다.
어쩌면 며칠, 어쩌면 몇 주가 지났을 때쯤, 흙투성이가 된 아유는 쓰러진 채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팔을 움직여 배를 움켜잡아보려 했지만 손까지 덮는 긴 소매 때문에 무엇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한숨을 내뱉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여기까지 기어 오는 도중 단 하나의 유리조각도 아유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늘에서 빛이 내리쬤지만, 조금도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눈앞에 펼쳐진 황량한 대지와 무너져내린 도시를 바라보았다.
안에서부터 자신을 좀먹는 듯한 공허감…
아유는 울었다. 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아르케아는 잘못된 마음이 서툴게 만들어낸, 잘못되고 서툰 세계.
그런 곳에서 아유는 태어났다.
원하고, 원하고, 또 원한다 한들…
무엇을 원하는 지도 모른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유는 고통을 곱씹으며 소매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달랠 수 없는 아픔과 굶주림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이에는 그 어떤 의미도 없었다.
반쪽자리 ‘마음’에 후회의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와 함께 두 쌍의 날개가 날아올랐다.
유리의 심장을 지닌 그들이 향하는 곳은 명확했다.
두 개의 조각, 두 개의 심장.
날갯짓 소리가 귀에 들어오기도 전에 아유는 그들을 느낄 수 있었다.
등을 감싸안는 날개의 감촉, 마치 담요처럼 따뜻한 그 감촉…
…
그렇게 아유는 평생의 친구와 만났다.
=====# 11-5 #=====머리에 든 것도 없고
배에 들어찬 것도 없이
새하얀 세계에서 깨어난 소녀의 이름은 아유였다.
옛날 옛적부터 시작된 이야기.
하늘이 비틀리기 전에, 하늘이 부서지기 전에,
하늘이 눈부신 빛으로 뒤덮이기 전에, 낮이 밤을 만나기 전에…
한 소녀가 무너져내리는 탑과 미궁으로부터 떨어진 후에…
아유는 안에 든 것 없이 깨어났다.
아유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펴보았다. 빛의 세계. 유리와 기억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아유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배가, 배가 비어있었으니까.
입을 열어봐도…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뱉을 말도 없고, 머리에 든 것도 없었으니…
아유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잠시 걷다가 아유는 또다시 털썩, 하고 쓰려졌다. 일어나려고, 다시 일어나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은 그대로 땅 위를 기었다.
어쩌면 며칠, 어쩌면 몇 주가 지났을 때쯤, 흙투성이가 된 아유는 쓰러진 채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팔을 움직여 배를 움켜잡아보려 했지만 손까지 덮는 긴 소매 때문에 무엇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한숨을 내뱉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여기까지 기어 오는 도중 단 하나의 유리조각도 아유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늘에서 빛이 내리쬤지만, 조금도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눈앞에 펼쳐진 황량한 대지와 무너져내린 도시를 바라보았다.
안에서부터 자신을 좀먹는 듯한 공허감…
아유는 울었다. 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아르케아는 잘못된 마음이 서툴게 만들어낸, 잘못되고 서툰 세계.
그런 곳에서 아유는 태어났다.
원하고, 원하고, 또 원한다 한들…
무엇을 원하는 지도 모른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유는 고통을 곱씹으며 소매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달랠 수 없는 아픔과 굶주림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이에는 그 어떤 의미도 없었다.
반쪽자리 ‘마음’에 후회의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와 함께 두 쌍의 날개가 날아올랐다.
유리의 심장을 지닌 그들이 향하는 곳은 명확했다.
두 개의 조각, 두 개의 심장.
날갯짓 소리가 귀에 들어오기도 전에 아유는 그들을 느낄 수 있었다.
등을 감싸안는 날개의 감촉, 마치 담요처럼 따뜻한 그 감촉…
…
그렇게 아유는 평생의 친구와 만났다.
“잘한다, 아유!”
“그렇지, 천천히. 아주 잘하고 있어.”
아유가 비틀거리는 다리로 두 박쥐를 향해 걸어갔다. 쓰러져있던 아유를 찾아낸 두 마리의 조그마한 박쥐들.
아유가 걷는 연습을 하다 쓰러질 때마다 잽싸게 날아와서 다시 일으켜주었다.
박쥐들은 소녀의 곁을 지키며, 길을 앞장섰고…
곧, 아유는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아유야! 이거 좀 먹어봐라!”
“이것도!”
박쥐들이 공중에 떠다니던 유리 조각을 가져왔다.
아유는 이제 익숙하다는 듯 그 유리 조각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 혀로 굴리고, 이로 씹었다.
이 사이로 느겨지는 평평하고 단단한 감촉. 딱 원하던 느낌이다.
날카롭고 삐죽삐죽한 모서리 때문에 혀가 간지럽다.
씹고 삼키고, 또 씹고 삼키고, 또 씹고 삼키고…
행복한 맛, 든든한 맛… 기억을 삼킬 때마다 새로운 것을 알아갔다.
뺨을 적시던 눈물이 말랐다.
아유는 웃었다. 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소리높여 웃었다. 그리고 입을 벌려 말했다.
“팬즈야, 드렘아! 이거 마시쪙!”
“아유야…?!” 깜짝 놀라 굳은 채로 드렘이 말했다.
“아유야! 너… 지금, 너…? 말을?!” 팬즈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유는 두 박쥐를 향해 폴짝 뛰어 다가갔다.
두 팔을 크게 벌려 하얀색과 검은색, 그리고 주황색과 초록색인 박쥐와, 검은색과 하얀색, 그리고 초록색과 주황색인 박쥐를 꼬옥 껴안았다.
그에 보답하듯 박쥐들은 날개로 소녀를 감쌌다.
아유는 그렇게 유리조각으로 이루어진 구름과 파도의 바다를 먹어치웠다.
이 새하얀 세계에 흔들림이 생겨날 때마다 아유와 박쥐들이 달려가 유리 조각을 먹어치웠다.
한 장소에 유리 조각이 너무 많이 모여 ‘오류’를 만들어내기 전에…
아유가 먹어치웠다.
그리고 만약 결국 ‘오류’가, 이상현상Anomaly이 어디선가 생겨난다면…
그것도 먹어치울 것이다.
친구 박쥐들의 인도를 따라…
먹고, 또 먹고, 또 먹었다.
…
아르케아에는 의미도, 목적도, 상식도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세계가 있을까?
슬픔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이 바보 같은 세계에서 이 셋은 행복을 찾아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
아유, 팬즈, 드렘은 서로를 떠나 각자의 길을 걸으며…
그 질문의 답을, 빛의 종말과 함께 운명의 끝에서 찾아내게 되리라.
=====# 11-6 #=====“그렇지, 천천히. 아주 잘하고 있어.”
아유가 비틀거리는 다리로 두 박쥐를 향해 걸어갔다. 쓰러져있던 아유를 찾아낸 두 마리의 조그마한 박쥐들.
아유가 걷는 연습을 하다 쓰러질 때마다 잽싸게 날아와서 다시 일으켜주었다.
박쥐들은 소녀의 곁을 지키며, 길을 앞장섰고…
곧, 아유는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아유야! 이거 좀 먹어봐라!”
“이것도!”
박쥐들이 공중에 떠다니던 유리 조각을 가져왔다.
아유는 이제 익숙하다는 듯 그 유리 조각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 혀로 굴리고, 이로 씹었다.
이 사이로 느겨지는 평평하고 단단한 감촉. 딱 원하던 느낌이다.
날카롭고 삐죽삐죽한 모서리 때문에 혀가 간지럽다.
씹고 삼키고, 또 씹고 삼키고, 또 씹고 삼키고…
행복한 맛, 든든한 맛… 기억을 삼킬 때마다 새로운 것을 알아갔다.
뺨을 적시던 눈물이 말랐다.
아유는 웃었다. 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소리높여 웃었다. 그리고 입을 벌려 말했다.
“팬즈야, 드렘아! 이거 마시쪙!”
“아유야…?!” 깜짝 놀라 굳은 채로 드렘이 말했다.
“아유야! 너… 지금, 너…? 말을?!” 팬즈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유는 두 박쥐를 향해 폴짝 뛰어 다가갔다.
두 팔을 크게 벌려 하얀색과 검은색, 그리고 주황색과 초록색인 박쥐와, 검은색과 하얀색, 그리고 초록색과 주황색인 박쥐를 꼬옥 껴안았다.
그에 보답하듯 박쥐들은 날개로 소녀를 감쌌다.
아유는 그렇게 유리조각으로 이루어진 구름과 파도의 바다를 먹어치웠다.
이 새하얀 세계에 흔들림이 생겨날 때마다 아유와 박쥐들이 달려가 유리 조각을 먹어치웠다.
한 장소에 유리 조각이 너무 많이 모여 ‘오류’를 만들어내기 전에…
아유가 먹어치웠다.
그리고 만약 결국 ‘오류’가, 이상현상Anomaly이 어디선가 생겨난다면…
그것도 먹어치울 것이다.
친구 박쥐들의 인도를 따라…
먹고, 또 먹고, 또 먹었다.
…
아르케아에는 의미도, 목적도, 상식도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세계가 있을까?
슬픔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이 바보 같은 세계에서 이 셋은 행복을 찾아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
아유, 팬즈, 드렘은 서로를 떠나 각자의 길을 걸으며…
그 질문의 답을, 빛의 종말과 함께 운명의 끝에서 찾아내게 되리라.
그것도 오래전의 일이다.
지금 아유는…
눈을 감은 채 무채색의 꿈속으로 빠져들어,
점점 더 낮고,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기억, 가장 처음 마주한 기억.
혼자 있으니 떠오르는 기억들.
눈물이 아유의 눈에 차올랐다.
무(無)를 향해 가라앉으며, 외로움이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다시 겪게 된 아유의 어깨 위로 따뜻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유가 고개를 돌리자 자신과 함께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조그마한 빛이 아주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와 함께 따뜻한 감촉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아유는 더이상 혼자가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너는 누구니?” 아유가 물었다. “괜찮아?”
답변이 들려왔다.
자길 걱정해 주는 아유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팠다.
아주 조용하고, 익숙한 목소리.
빛과 삶과 죽음의 목소리.
아이의 목소리이자 어머니의 목소리.
언젠가 분명 들은 적 있는 대지의 목소리.
아르케아에 깊이 다가간 아주 소수의 이들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
아유는 그 목소리에 대답했다.
“응? 왜 아파?”
목소리가 말했다: 꿈을 꾸고 있지 않았니?
“응.” 아유가 가볍게 대답했다. “내 꿈이 보여?”
조용한 목소리가 긍정하며 꿈에서 깨운 것을 사과했다.
“있지, 있지. 깨어났더니 친구들이 안 보여. 어디 갔는지 알아?”
…목소리는 침묵했다.
“하으어음… 그…” 아유가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 빛 쾅! 하고 터지는 거… 봤어?”
터졌지. 봤어.
“쾅! 터지고… 그 다음에 콰카카캉콰오오! 푸슈우우욱~! 파아아앙!!!!
하는거 봤어?!”
무슨 말이니 아유야?
“빛 말이야!” 아유가 신이 난 듯 말했다. “사라졌잖아!”
목소리가 물었다: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기억하니?
“쓰러졌어…” 아유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냥 발이 헛디뎌서 넘어진 것뿐이잖아. 그치?”
아니다. 헛디뎌서 쓰러진 것이 아니다.
“엥, 그렇구나. 으음… 그 다음엔… 팬즈랑 드렘이랑 같이 일어서니까…”
아유가 팔짱을 끼고 다시 생각했다.
“머리가 아팠어!”
그 순간,
공기가 흔들렸다.
“팬즈랑 드렘이 계속 나보고 유리를 먹으라고 했거든! 못됐지?!”
그 순간,
공기가 잠잠해졌다.
“으응, 배가 고팠던 건 맞는데…”
목소리가 나오는 것으로 짐작되는 방향을 보며 아유가 말했다.
“속이 안 좋았거든. 좀 많이… 헤헷…”
그래?
“너무 안 좋아서 눈물이 나오더라니까! 하하핫!”
그렇다 아유는 울었다.
“그러고 나서는… 아무 기억도 안나!”
아유가 머리 위로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뒤집어져 있으니 물구나무를 선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있지, 있지. 나 여기 얼마나 있었어?”
비록 날짜라는 게 여기서는 생소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아유는 이곳에 삼일을 있었다.
아유가 왜 여기서는 날짜가 생소…?한 어쩌고냐 물으니, 목소리는 신경 쓰지 말라 대답했다.
“흐으음…” 아유가 숨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곧 목소리가 물었다. 아유야, 제일 좋아하는 동물이 뭐니?
“물고기!” 아유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박쥐가 아니라?
“박쥐는 팬즈랑 드렘이잖아! 바보들이잖아!”
팬즈랑 드렘이 싫어?
“아니, 너무 좋아!”
그렇구나. 잘됐네.
아유야, 제일 좋아하는 색은 뭐니?
“초록색!”
왜 초록색이니?
“내가 초록색이잖아! 그리고… 많잖아!”
어디에?
“음식에!” 아유가 말했다. “좋은 음식은 초록색이거나 빨간색이니까!”
무슨 말이니?
“아이고…”
아유의 입꼬리가 내려가며 그 사이로 애석함이 섞인 말이 새어 나왔다.
“너도 팬즈랑 드렘만큼 바보구나…”
미안해.
“잘 들어!” 아유가 가르치듯 말했다.
“초록색은 나무랑 꽃이고 걔넨 달달해! 빨간색은 피랑 불이고 걔넨 고소해! 그 둘을 같이 먹으면… 짠!” 아유가 미소를 지으며 제스처를 취했다. “엄청 맛있지요!”
공기가 조금 시원해졌다. 목소리가 말했다: 아유야. 많이 컸구나. 행복한 삶을 살았어.
그리고, 비록 목소리가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유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목소리 본인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괜찮아?” 아유가 물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아유야… 너는 행운이 없었어.
“행운이 뭔데?”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은 행운 또는 ‘안행운’, 둘 중 하나인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
또다시 따뜻함이 아유를 감쌌다. 하지만 이번엔 아유의 눈에 그렁그렁 한 눈물을 고이게 하는 종류의 따뜻함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미간이 구겨졌다.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너도 언젠가는 그 의미를 알았을 텐데.
더 즐겁고, 더 많이 먹었을 텐데
더 따뜻함을 느끼고, 더욱 멀리 나아갔을 텐데.
영원히 대지를 걸으며 영원히 미소를 머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너는 그런 아이니까.
너는 원본 없이 만들어졌으니까.
목소리가 말했다: 아유야, 너는 영원히 바뀌지 않았을 거야.
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착하고 멋진 아이야.
“고마워!”
너는 착하고 멋진 아이야. 목소리가 반복해서 말했다.
정말로, 고마워.
“…?”
…
목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따뜻한 침묵 속에서, 무채색의 꿈속에서…
아유는 목소리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렇게…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 11-7 #=====지금 아유는…
눈을 감은 채 무채색의 꿈속으로 빠져들어,
점점 더 낮고,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기억, 가장 처음 마주한 기억.
혼자 있으니 떠오르는 기억들.
눈물이 아유의 눈에 차올랐다.
무(無)를 향해 가라앉으며, 외로움이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다시 겪게 된 아유의 어깨 위로 따뜻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유가 고개를 돌리자 자신과 함께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조그마한 빛이 아주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와 함께 따뜻한 감촉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아유는 더이상 혼자가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너는 누구니?” 아유가 물었다. “괜찮아?”
답변이 들려왔다.
자길 걱정해 주는 아유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팠다.
아주 조용하고, 익숙한 목소리.
빛과 삶과 죽음의 목소리.
아이의 목소리이자 어머니의 목소리.
언젠가 분명 들은 적 있는 대지의 목소리.
아르케아에 깊이 다가간 아주 소수의 이들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
아유는 그 목소리에 대답했다.
“응? 왜 아파?”
목소리가 말했다: 꿈을 꾸고 있지 않았니?
“응.” 아유가 가볍게 대답했다. “내 꿈이 보여?”
조용한 목소리가 긍정하며 꿈에서 깨운 것을 사과했다.
“있지, 있지. 깨어났더니 친구들이 안 보여. 어디 갔는지 알아?”
…목소리는 침묵했다.
“하으어음… 그…” 아유가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 빛 쾅! 하고 터지는 거… 봤어?”
터졌지. 봤어.
“쾅! 터지고… 그 다음에 콰카카캉콰오오! 푸슈우우욱~! 파아아앙!!!!
하는거 봤어?!”
무슨 말이니 아유야?
“빛 말이야!” 아유가 신이 난 듯 말했다. “사라졌잖아!”
목소리가 물었다: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기억하니?
“쓰러졌어…” 아유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냥 발이 헛디뎌서 넘어진 것뿐이잖아. 그치?”
아니다. 헛디뎌서 쓰러진 것이 아니다.
“엥, 그렇구나. 으음… 그 다음엔… 팬즈랑 드렘이랑 같이 일어서니까…”
아유가 팔짱을 끼고 다시 생각했다.
“머리가 아팠어!”
그 순간,
공기가 흔들렸다.
“팬즈랑 드렘이 계속 나보고 유리를 먹으라고 했거든! 못됐지?!”
그 순간,
공기가 잠잠해졌다.
“으응, 배가 고팠던 건 맞는데…”
목소리가 나오는 것으로 짐작되는 방향을 보며 아유가 말했다.
“속이 안 좋았거든. 좀 많이… 헤헷…”
그래?
“너무 안 좋아서 눈물이 나오더라니까! 하하핫!”
그렇다 아유는 울었다.
“그러고 나서는… 아무 기억도 안나!”
아유가 머리 위로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뒤집어져 있으니 물구나무를 선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있지, 있지. 나 여기 얼마나 있었어?”
비록 날짜라는 게 여기서는 생소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아유는 이곳에 삼일을 있었다.
아유가 왜 여기서는 날짜가 생소…?한 어쩌고냐 물으니, 목소리는 신경 쓰지 말라 대답했다.
“흐으음…” 아유가 숨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곧 목소리가 물었다. 아유야, 제일 좋아하는 동물이 뭐니?
“물고기!” 아유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박쥐가 아니라?
“박쥐는 팬즈랑 드렘이잖아! 바보들이잖아!”
팬즈랑 드렘이 싫어?
“아니, 너무 좋아!”
그렇구나. 잘됐네.
아유야, 제일 좋아하는 색은 뭐니?
“초록색!”
왜 초록색이니?
“내가 초록색이잖아! 그리고… 많잖아!”
어디에?
“음식에!” 아유가 말했다. “좋은 음식은 초록색이거나 빨간색이니까!”
무슨 말이니?
“아이고…”
아유의 입꼬리가 내려가며 그 사이로 애석함이 섞인 말이 새어 나왔다.
“너도 팬즈랑 드렘만큼 바보구나…”
미안해.
“잘 들어!” 아유가 가르치듯 말했다.
“초록색은 나무랑 꽃이고 걔넨 달달해! 빨간색은 피랑 불이고 걔넨 고소해! 그 둘을 같이 먹으면… 짠!” 아유가 미소를 지으며 제스처를 취했다. “엄청 맛있지요!”
공기가 조금 시원해졌다. 목소리가 말했다: 아유야. 많이 컸구나. 행복한 삶을 살았어.
그리고, 비록 목소리가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유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목소리 본인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괜찮아?” 아유가 물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아유야… 너는 행운이 없었어.
“행운이 뭔데?”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은 행운 또는 ‘안행운’, 둘 중 하나인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
또다시 따뜻함이 아유를 감쌌다. 하지만 이번엔 아유의 눈에 그렁그렁 한 눈물을 고이게 하는 종류의 따뜻함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미간이 구겨졌다.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너도 언젠가는 그 의미를 알았을 텐데.
더 즐겁고, 더 많이 먹었을 텐데
더 따뜻함을 느끼고, 더욱 멀리 나아갔을 텐데.
영원히 대지를 걸으며 영원히 미소를 머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너는 그런 아이니까.
너는 원본 없이 만들어졌으니까.
목소리가 말했다: 아유야, 너는 영원히 바뀌지 않았을 거야.
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착하고 멋진 아이야.
“고마워!”
너는 착하고 멋진 아이야. 목소리가 반복해서 말했다.
정말로, 고마워.
“…?”
…
목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따뜻한 침묵 속에서, 무채색의 꿈속에서…
아유는 목소리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렇게…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한 번, 아르케아의 세계에 눈이 내렸다.
그리고 지금, 회색빛 대지 위로 또다시 한번 눈이 내리고 있다.
여기에서는 부드럽게 내리는 함박눈이, 멀리서는 매서운 눈의 폭풍이.
고요한 세계, 아르케아를 눈이 뒤덮은 풍경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이 세계의 옛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새하얀 눈밭이 무너져가는 대지 위에 펼쳐져 있었다.
“하아악…”
옅은 숨에 눈꽃이 날렸다.
“하아아윽… 끄흑…”
몸이 덜덜 떨렸다. 추워서가 아니라, 뱃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퍼지는 고통 때문에.
그 위로 한 쌍의 날개가 그 몸을 밀고, 밀고, 흔들었다. 밀고, 또다시 밀고, 껴안았다. 박쥐 팬즈가 속삭였다.
“아, 아유야… 제발 일어나. 제발…”
그 둘을 드렘이 지켜보고 있었다.
지켜야 할 존재, 아유의 숨이 점점 옅어져가다. 마침내 끊겼다.
“아유야?!” 팬즈가 소리쳤다. “아유야, 안돼. 제발!” 애원하고,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아유의 미간에 번져있던 주름이 풀렸다. 드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박쥐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미간의 주름이 풀린 것은 편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드렘, 아유가 숨을… 심장이… 설마, 아니지? 아니잖아! 이럴 순 없어!”
“…”
그대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무언가 목적을 위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가?
드렘은 아유의 곁에 있기 위해 태어났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태어난 목적’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드렘은 생기가 빠져나간 아유를 바라보았다…
그 차가운 입술이 옅은 미소를 지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걸 용납하기엔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드렘이 날갯짓하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드렘?! 어디 가는… 잠깐만! 드렘아! 가지 마!”
“팬즈!” 드렘이 소리쳐 대답했다. “먹을 걸 찾아오자! ‘맞는’ 음식을!”
“저, 저 눈폭풍 너머로…?! 저길 어떻게 가!”
“난 갈 거야!” 드렘이 소리쳤다. 이에 팬즈도 맞받아 소리쳤다.
“…그럼 나도 갈게!”
두 박쥐가 낮과 밤의 경계를 향해 재빨리 날갯짓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아유의 기척이 점점 더 옅어졌다.
너무 멀리 떨어지면, 너무 시간을 끌면… 아유를 다시는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은 절대로 답이 아니었다.
박쥐들은 꼭 붙어서 서로의 몸을 녹이며, 이 세상의 부서진 조각을 찾아 헤맸다…
사랑하는 이에게 먹이기 위해. 이 망가진 세계가 그녀에게 준 사명을 다시금 일깨우기 위해.
아르케아가 만들어낸 감시자, 아유는 이상 현상을 먹어치우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니, 박쥐들은 이상 현상을 찾아낼 것이다.
무서운 눈보라를 뚫는 한이 있더라도, 이상현상의 기척을 좇아갈 것이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이 그들의 날개에 내리쳤다
마치 채찍처럼 격렬하게 두 조그마한 박쥐를 마구 후려치며 날려보냈다.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그럼에도 나아갔다.
눈가에 차갑게 서리는 눈물을 느끼며…
아유의 배에 들어찬 병을 고치기 위해서 세계의 ‘뒤틀림’을 향해 지지 않고 나아갔다.
하지만…
원하고, 원하고, 또 원한다 한들…
이룰 힘이 없다면 무의미할 뿐이다.
곧, 팬즈가 땅으로 떨어졌다. 곧, 쓰러진 팬즈를 끌고 가던 드렘도 힘이 다해 추락했다.
곧, 눈이 그들의 몸을 덮었다. 곧, 눈가에 고여있던 눈물은 훌쩍이는 소리가 되었다.
곧, 상냥한 소녀가 그들을 발견하고 팔로 껴안아 들어 올렸다.
[ruby(그 소녀, ruby=Sunset Radiance)]는 낮을 향해 몸을 돌려,
팬즈와 드렘을 팔과 가슴으로 품고 따뜻한 곳으로 걸어갔다.
=====# 11-8 #=====그리고 지금, 회색빛 대지 위로 또다시 한번 눈이 내리고 있다.
여기에서는 부드럽게 내리는 함박눈이, 멀리서는 매서운 눈의 폭풍이.
고요한 세계, 아르케아를 눈이 뒤덮은 풍경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이 세계의 옛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새하얀 눈밭이 무너져가는 대지 위에 펼쳐져 있었다.
“하아악…”
옅은 숨에 눈꽃이 날렸다.
“하아아윽… 끄흑…”
몸이 덜덜 떨렸다. 추워서가 아니라, 뱃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퍼지는 고통 때문에.
그 위로 한 쌍의 날개가 그 몸을 밀고, 밀고, 흔들었다. 밀고, 또다시 밀고, 껴안았다. 박쥐 팬즈가 속삭였다.
“아, 아유야… 제발 일어나. 제발…”
그 둘을 드렘이 지켜보고 있었다.
지켜야 할 존재, 아유의 숨이 점점 옅어져가다. 마침내 끊겼다.
“아유야?!” 팬즈가 소리쳤다. “아유야, 안돼. 제발!” 애원하고,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아유의 미간에 번져있던 주름이 풀렸다. 드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박쥐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미간의 주름이 풀린 것은 편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드렘, 아유가 숨을… 심장이… 설마, 아니지? 아니잖아! 이럴 순 없어!”
“…”
그대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무언가 목적을 위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가?
드렘은 아유의 곁에 있기 위해 태어났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태어난 목적’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드렘은 생기가 빠져나간 아유를 바라보았다…
그 차가운 입술이 옅은 미소를 지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걸 용납하기엔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드렘이 날갯짓하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드렘?! 어디 가는… 잠깐만! 드렘아! 가지 마!”
“팬즈!” 드렘이 소리쳐 대답했다. “먹을 걸 찾아오자! ‘맞는’ 음식을!”
“저, 저 눈폭풍 너머로…?! 저길 어떻게 가!”
“난 갈 거야!” 드렘이 소리쳤다. 이에 팬즈도 맞받아 소리쳤다.
“…그럼 나도 갈게!”
두 박쥐가 낮과 밤의 경계를 향해 재빨리 날갯짓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아유의 기척이 점점 더 옅어졌다.
너무 멀리 떨어지면, 너무 시간을 끌면… 아유를 다시는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은 절대로 답이 아니었다.
박쥐들은 꼭 붙어서 서로의 몸을 녹이며, 이 세상의 부서진 조각을 찾아 헤맸다…
사랑하는 이에게 먹이기 위해. 이 망가진 세계가 그녀에게 준 사명을 다시금 일깨우기 위해.
아르케아가 만들어낸 감시자, 아유는 이상 현상을 먹어치우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니, 박쥐들은 이상 현상을 찾아낼 것이다.
무서운 눈보라를 뚫는 한이 있더라도, 이상현상의 기척을 좇아갈 것이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이 그들의 날개에 내리쳤다
마치 채찍처럼 격렬하게 두 조그마한 박쥐를 마구 후려치며 날려보냈다.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그럼에도 나아갔다.
눈가에 차갑게 서리는 눈물을 느끼며…
아유의 배에 들어찬 병을 고치기 위해서 세계의 ‘뒤틀림’을 향해 지지 않고 나아갔다.
하지만…
원하고, 원하고, 또 원한다 한들…
이룰 힘이 없다면 무의미할 뿐이다.
곧, 팬즈가 땅으로 떨어졌다. 곧, 쓰러진 팬즈를 끌고 가던 드렘도 힘이 다해 추락했다.
곧, 눈이 그들의 몸을 덮었다. 곧, 눈가에 고여있던 눈물은 훌쩍이는 소리가 되었다.
곧, 상냥한 소녀가 그들을 발견하고 팔로 껴안아 들어 올렸다.
[ruby(그 소녀, ruby=Sunset Radiance)]는 낮을 향해 몸을 돌려,
팬즈와 드렘을 팔과 가슴으로 품고 따뜻한 곳으로 걸어갔다.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심연.
오로지 소중한 이들만이 존재할 수 있는 장소, 그곳에서 아유는 눈물을 닦았다.
아유는 알고 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는 걸.
이제는 조용해진 목소리.
목소리는 자신처럼 눈물을 흘릴 수조차 없으니 ‘안행운’이겠지.
하지만, 최소한 이것만큼은…
이것만큼은 묻고 싶었다.
“너는 왜 슬픈 거야?”
목소리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있지…” 아유가 물었다. “넌 뭘 할 때가 행복해?”
“나는 말이야, 맛있는 거 먹을 때가 행복해!”
알고 있다.
“그리고, 팬즈랑 드렘이랑 놀 때…”
알고 있다.
“난 ‘친구 만들기’가 좋거든!”
알고 있다…
어둠 속의 목소리는…
사람이 좋았다. 사람들이 미소 지을 때가 좋았다.
자신이 싫었다. 자신이 한 일이 싫었다. 서툴게 만든 것들과 실수로 점철된 과거가 싫었다.
비극은 혐오했다.
하지만, 행복한 결말은…
행복한 결말이 있다면, 참 좋겠지.
“아이고, 저런, 저런. 괜찮을 거야.” 아유가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로! 왜냐하면…!”
목소리가 아유의 지혜 한 조각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괜히 똑똑한 척하며 아유가 말했다.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면, 분명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것들도 잔뜩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예를 들면 산책이나, 먹는 거나… 친구! 그런거! 알지? 응? 그게 인생이랑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거야! 계속해서 나아가면 분명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그러…니까…”
아유의 목이 매였다. 애써 차오르는 울음을 눌러 담았다.
그리고, 아주 밝게 웃으며 목소리를 향해 말했다.
“아직 친구를 못 찾았으면, 내가 네 첫 번째 친구가 될게!”
아유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아유가 모르는 사람이, 그녀를 위해 살을 에는 눈보라를 뚫고 나아갔다. 그 여정의 결과가 아유의 곁으로 다가왔다.
뱃속이 요동쳤다. 꿈속의 공간이 마구 뒤틀리기 시작했다. 비록 약해져 우리 안에 갇힌 신세일지라도, 세계의 ‘오류’는 여전히 강대한 힘을 품고 있었다.
모든 법칙에 위배되기에, ‘결함’의 현현이기에, 이상현상은 결코 이어질 수 없는 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었다.
마치 구름과 바다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과 같았다.
사실, 비록 기묘하고 강력한 존재이긴 하나, 이상 현상은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소원으로 만들어진 세계에 금처럼 새겨진 창조자의 유약함, 오류였다.
그들은 창조자가 남긴 간절한 소원보다는 창조자의 마음, 그 본질 자체에 더 가까웠다. 그렇기에 특별하진 않지만,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닌 존재였다.
이 결함들은 운명조차 어찌할 수 없다. 희망이나 운명의 실로도 달랠 수가 없는 고통이다.
그렇기에 다른 이상 현상들과 같이 한때 압도적인 힘을 뽐냈던 이 이상 현상은 누군가 찾고 싶어 했기에 발견된 것이 아니다.
대부분 그렇듯이,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개연성도 없이.
이 낡고 상처받은 고통의 껍질은…
기적 따위가 아니라 진실한 사랑이 있었기에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오류’는 아유의 어금니 사이에서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입 속에 들어온 유리 조각을 느낀 아유는 미소를 지었다.
힘껏 깨물어 유리 조각을 깨트리자, 그와 함께 어둠도 깨지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터져 나오듯 공간을 물들이며, 그림자를 햇살로 바꾸는 새하얀 빛,
깨진 파편을 통해 검은 공간으로 흘러들어오는 대지의 빛이 반짝이는 유리 가루와 함께 아유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마치… 한숨이 들린 것만 같았다.
불만이나 실망에서 온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행복하고 상냥한 숨소리가.
아유를 감싼 압도적인 빛은 멈추지 않았다.
목구멍을 지나가고 나서야 빛은 사그라들었다.
눈부신 빛이 사라지자 다시 앞이 보였다. 아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건넸다.
네 말이 맞아, 아유야.
고마워.
아르케아의 빛이 아유의 배를 채우자, 새로운 색이 꿈을 물들였다.
아유가 눈을 뜨자 울고 있는 날갯짓하는 팬즈와 드렘이 보였다.
몸이 허약해진 것이 느껴졌다. 두 박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매달렸다.
아유는 미소를 머금고 눈물을 흘리며 두 박쥐를 껴안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햇빛 사이로 내리는 눈.
행복한 세 친구는, 서로의 따뜻함을 느꼈다.
아유가 강을 건너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이상 현상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기적? 아니면 우정의 힘이었을까?
…모두 정답이다.
꿈속에서 빛에 감싸였을 때, 아유는 친구들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고된 여정을 헤쳐 나갔는지, 그 모든 기억을 볼 수 있었다.
…나도 친구들을 지켜줘야지. 아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팬즈와 드렘은 물론, 새로 만든 친구도.
셋은 한 번 더 얼싸안은 뒤, 힘들었던 여정과 친절한 소녀. 그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유는 웃었다. 웃고 또 웃고, 소리 높여 웃었다.
끝없는 허기가 사라졌다.
항상 그랬듯 아유와 박쥐들은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는 저 너머로, 나아갔다.
4.3. 에토/루나
4.3.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19-1 | Rotaeno-1 | Rotaeno 팩 구매 | ||
19-2 | Rotaeno-2 | 19-1 스토리 열람 | ||
19-3 | Rotaeno-3 | MVURBD 클리어 | ||
19-4 | Rotaeno-4 | 루나 & 이로로 Waltz for Lorelei 클리어 | ||
19-5 | Rotaeno-5 | 루나 & 이로로 Dual Doom Deathmatch 클리어 | ||
19-6 | Rotaeno-6 | 루나 & 이로로 MVURBD 클리어 | ||
19-7 | Rotaeno-7 | 루나 & 이로로 Inverted World 클리어 | ||
19-8 | Rotaeno-8 | 루나 & 이로로 Vulcānus 클리어 |
4.3.2. Rotaeno
Rotaeno와의 콜라보레이션 스토리.=====# 19-1 #=====
그 재미난 얘기, 또 해볼까.
우리가 공허로 떨어졌을 때 말이야. 너 괜히 센 척 하려고 눈 부릅뜨고 있었잖아.
나도 조금 무서웠는데 네가 안 무서워할 리가 없으니 허세란 걸 단박에 알아챘지.
세상이 무너져내리고 칠흑같은 그림자와 기이하게 밝은 구름만이 우리의 시야를 채웠어.
마치 폭죽이 수놓은 듯 하늘이 반짝거리고 지진이 오기라도 한 것인양 발 밑이 마구 흔들렸지.
루나야, 그 상황에 네가 겁을 먹지 않았을 리가 없잖니. 뭐, 안 무서운 척 하던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공허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 "걷는다"는 행위조차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변질되어버렸어.
그 장소의 빛나는 구름들에는 무언가 비치고 있었지. 익숙한 아르케아의 풍경들이었어.
거기서 한 장소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어. "아쿠아"라 불리는 세계였지.
우리는 유리 조각을 향해 열쇠를 들어올리고, 그 세계로 들어갔어.
거대한 호수들 사이로 경이로운 기술력으로 지어진 도시가 솟아있었어.
거리에서는 인간형 로봇이 사람들을 돕는 모습이 보였고, 하늘은 우주선과 부유하는 섬들이 수놓고 있었어.
전에 보지 못한 놀라운 풍경이었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눈부신 햇살 사이로 돈을 얼마나 들였는지,
멋들어진 섬들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
우리 둘 다 그 곳에 뭐가 있는지, 얼마나 특별한 장소인지 알고 있었지.
넌 귀여운 몸짓으로 폴짝 튀어나가 달려나가며 호들갑 떨듯 한 섬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어.
"해 지기 전까지 내가 저 섬에 숨어들어갈 수 있다? 없다? 난 있다에 걸게!"
그 말에 입꼬리가 올라갔어. 오늘, 지상에 살던 한 꼬마가
"서머 페스티벌"을 보러 저 섬에 숨어들어갔다 들키게 되었거든. 분명 거기서 발상을 얻었겠지.
좋아. 어디 가 봐. 나는 웃으며 너에게 손을 흔들었어.
그래, 난 "기억"할 수 있었어. "나"는 부유섬에 사는 사람. 너는 지상 출신의 "고아".
그러고 보니 물어보지 못했네. 너도 느꼈을까?
불안하다든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든지. 그런게 아니었어.
다만 확실히 알 수 있었어. 느껴졌거든...
이 세계가 함정이라는걸.
이 물로 가득한 세계의 기억을, 너와 나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거야.
=====# 19-2 #=====
미쳤다! 쩔어! 어떻게 이런 세계가 존재하지?
아, 그래, 맞아. 이야기 도중이었지.
공허를 가로질러 물과 최첨단 기술로 가득 찬 세계에 당도하는 경험은,
비유하자면 어두컴컴한 던전을 헤쳐나가 그 끝에 있는 보물더미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
최고야!!! 에토 언니는 어떻게 그리 침착한 줄 모르겠어!
게다가, 떠다니는 섬이라니...
여기는 "서머 페스티벌"의 기억인 모양이야. 눈부시게 밝고, 엄청 멋있고, 반짝반짝하고, 놀라운 축제!
그 곳에 가는 "기억"이 나. 기억만으론 부족해. 직접 가보고싶어!
아니, 그냥 가는 것도 아니라... 숨어들고 싶어!
무단 침입이라니. 너무 재밌을 것 같아.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 그래, 그 꼬마는 잡히고 말지.
하지만 발상 자체는 너무 훌륭하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언니를 두고 가장 가까운 항구로 달려갔어.
공간을 가득 채우는 웅성웅성 북적대는 소리... 보통 부유섬 출입은 엄격하게 제한되는 편인데,
서머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으니 부유섬에 출입 가능한 사람들이 한무더기가 되어 들어가고 있었어. 그 말인즉...
내 기억이 맞다면... 보안이 평소보다 더 빡빡할 거란 뜻이지...
그래도 반드시 어딘가에 빈틈이 있을거야. 경비원이 볼 수 없는 사각지대가.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 자체는 간단하겠지.
그런데, 숨어들 생각을 한 게 나 혼자만이 아닌 모양이야.
살금살금 움직이던 중 모퉁이에서 어떤 여자애랑 부딪혔거든.
서로 쓰고 있던 모자가 뒤바뀔 정도로 강하게 머리를 쿵 하고 부딪혀서 우리 둘 다 엉덩방아를 찧었어.
그 애의 새하얀 모자를 뒤집어 쓴 채 나는 머리에 난 혹을 문지르며 일어섰어.
내 파란 모자를 머리에 얹은 그 애는 일어서며 나에게 윽박을 질렀지. "앞 좀 보고 다녀!"
그 애를 조용히 시키기도 전에, 머리에 얹혀있던 내 모자가 스르륵 미끄러져 그 애의 얼굴을 가렸어.
모자를 벗기자, 마침내 그 때 깨달았어.
이 애, 서머 페스티버에 몰래 들어가려다 잡힐 그 애구나! 곧바로 질문을 던졌지.
"배에도 몰래 올라탈 계획이었어?"
"뭐?!"
그 애는 그렇게 외치고선 잠시 말이 없었어. 그러더니 나를 살펴봤지.
서로 비슷한 나이로 보이니 안심한걸까, 그 애는 꽤 빨리 경계를 풀었어. 그리고 내게 물었지.
"너도... 서머 페스티벌에 숨어들 생각이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애도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어.
"그거 짱이다! 참, 내 이름은 이로라고 해."
"나는 루나야."
그렇게 대답하고 난 이로의 손을 잡아 일어서는 걸 도와줬어.
우리 둘은 살금살금 움직여 적당한 곳에 숨어 항구를 바라보며 빈틈을 노렸어.
"가자, 기회는 한 번 뿐이니까." 내가 말했어.
화물칸으로 보이는 공간을 향해 열린 문 주변을 한 경비원이 서성이고 있었어.
뭘 확인하는 건지 20초에 걸쳐 몇 번이고 같은 곳을 왕복했지. 10초. 10초만 있으면 충분해. 적어도 나는 말이야.
나는 이로의 손을 꽉 잡고 속삭였어.
"셋하면 간다."
"하나...둘...셋!"하는 구령과 함께 우리는 경비원의 등 뒤를 지나 배 안으로 재빨리 들어갔어.
=====# 19-3 #=====
네가 문제없이 해낼거란 예감은 들었어.
쌍둥이의 예감같은 건 아니고, 하늘에 떠다니는 섬으로 향하는 배 위에 몰래 올라타는 거 정도야,
너한테는 식은 죽 먹기 아니겠니. 하지만, 그래도...
해가 지고 있었어. 사실 있지. 지금 좀 불안해. 기억 속에서 서로 떨어져 돌아다닌 적은 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진 적은 없잖아.
게다가... 우리 마음대로 이 기억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 외에 또 불안한 점은 있었어. 어째서인지 이 기억은...
뒤죽박죽 섞여있거든. 보통 기억에 입장하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그 기억의 아주 세세한 부분들, 그게 없었어.
여기에선 시간이 흐를 수록 현실 그 자체가 마구 뒤집어지는 느낌이 들어.
예를 들어... "나"는 누구지? 공무원인가? 아니면 파일럿?
이 기억을 찾은 장소가 공허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건 또 왜지?
흐음... 넌 좋겠다, 루나야.
바보라서 이런 생각 안 해도 되니까.
그래도 이 세계를 둘러볼 수 있는 만큼 둘러보는 건 나쁘지 않았어. 우주선의 구조는 아주 흥미로웠고,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양의 물이 그리는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어.
낮에는 햇빛에 온 도시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듯 하다가,
밤이 다가오자 도시가 스스로 내는 빛이 아주 멋진 야경을 그렸어.
마치 환상화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
아, 불안해.
현지인들에게 말을 하고 다녔어. 네 생김새를 설명하고 혹시 보지 못했냐고 말이야. 아무도 모르더라.
그리고 로봇들에게 가서 이 기억속에서 네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의 사람에 대해 물어보면,
그 사람에 대한 사실만을 늘어놓을 뿐이었어. 네가 지금 뭘 하고 있든 간에, "기억"되지 않고 있는 모양이야.
나는 계속 거리를 방황하며 머리 위에 떠있는 섬을 바라보았어. 매 분, 매 초가 지날때마다 불안은 더욱 커져만 갔지...
그 때야. 호페를 만난 건.
조그만 꼬마와 부딪혀서 거의 넘어질 뻔 했어. 그 애는 넘어졌지.
나는 서둘러 그 애를 일으켜주었어. 그러자 자기 옷매무새를 다듬고, 내게 정중히 사과하더니, 나를 보고 놀라더라.
"부유섬에서 오신 분이세요?! 거기, 거기 혹시... 으음..."
"진정해요. 괜찮으니까."
말을 못 잇길래 우선은 진정시켰어.
그 애의 이름은 호페. 부유섬에 가야 한다고 하더라. 아니면 적어도 대신 누군가를 보내 봐야 할 것이 있대.
이유는 말래주지 않았지만, 나는 "부유섬 주민"이니 호페를 도와줄 수 있었지.
호페는 주머니에서 티켓을 한 장 꺼내더니 꼼지락대며 중얼댔어.
"저, 이게 있는데... 있긴 한데..."
부유섬으로 가는 티켓이었어. 그게 얼마나 얻기 어려운 것인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나는 전부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호페는 티켓을 자기가 쓰려고 하지 않는걸까?
추측일 뿐이지만... 몰래 부유섬에 들어가려다가 잡힐 어떤 애 떄문에 일어날 소란을 생각하니...
뭔가 감이 왔지.
"놀라지 말고 들어요." 호페의 눈을 보고 말했어.
"혹시... 서머 페스티벌에 가려고 부유섬에 몰래 들어간 친구가 있나요?"
호페가 당황하는 게 눈에 보였어. 하지만 의리가 두터운 걸까. 쉽게 인정하지 않을 낌새였지.
...그런데 난 에둘러 말하는 건 질색인 사람이거든!
"걱정하지 마세요. 부유섬에 친구가 있다면, 제가 찾아드릴게요. 인맥이 있거든요. 티켓은 안 쓰셔도 돼요."
"네...? 아뇨, 아니에요! 부유섬에 숨어들어간다니,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어요!" 호페가 허둥대며 말했어.
"의심한 적 없어요. 저는 평범한 부유섬 주민이 아니라, 친절한 공무원이거든요! 자, 공짜로 보내드릴게요. 같이 가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부드럽게 호페가 손에 든 티켓을 다시 주머니로 넣어줬어.
그리고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뻗었지. 루나 생각이 나네...
"제 이름은 렐린이에요."
나는 그렇게 말했어. 그 기억속 "나"의 이름,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었지.
"그런데 그냥 에토라고 불러요. 다들 그렇게 부르거든요."
그렇게 운을 띄운 후 나는 말을 이었어.
"호페, 잘 들어요. 저는 친구분이 어디에 계신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쌍둥이의 예감같은 건 아니고, 하늘에 떠다니는 섬으로 향하는 배 위에 몰래 올라타는 거 정도야,
너한테는 식은 죽 먹기 아니겠니. 하지만, 그래도...
해가 지고 있었어. 사실 있지. 지금 좀 불안해. 기억 속에서 서로 떨어져 돌아다닌 적은 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진 적은 없잖아.
게다가... 우리 마음대로 이 기억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 외에 또 불안한 점은 있었어. 어째서인지 이 기억은...
뒤죽박죽 섞여있거든. 보통 기억에 입장하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그 기억의 아주 세세한 부분들, 그게 없었어.
여기에선 시간이 흐를 수록 현실 그 자체가 마구 뒤집어지는 느낌이 들어.
예를 들어... "나"는 누구지? 공무원인가? 아니면 파일럿?
이 기억을 찾은 장소가 공허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건 또 왜지?
흐음... 넌 좋겠다, 루나야.
바보라서 이런 생각 안 해도 되니까.
그래도 이 세계를 둘러볼 수 있는 만큼 둘러보는 건 나쁘지 않았어. 우주선의 구조는 아주 흥미로웠고,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양의 물이 그리는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어.
낮에는 햇빛에 온 도시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듯 하다가,
밤이 다가오자 도시가 스스로 내는 빛이 아주 멋진 야경을 그렸어.
마치 환상화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
아, 불안해.
현지인들에게 말을 하고 다녔어. 네 생김새를 설명하고 혹시 보지 못했냐고 말이야. 아무도 모르더라.
그리고 로봇들에게 가서 이 기억속에서 네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의 사람에 대해 물어보면,
그 사람에 대한 사실만을 늘어놓을 뿐이었어. 네가 지금 뭘 하고 있든 간에, "기억"되지 않고 있는 모양이야.
나는 계속 거리를 방황하며 머리 위에 떠있는 섬을 바라보았어. 매 분, 매 초가 지날때마다 불안은 더욱 커져만 갔지...
그 때야. 호페를 만난 건.
조그만 꼬마와 부딪혀서 거의 넘어질 뻔 했어. 그 애는 넘어졌지.
나는 서둘러 그 애를 일으켜주었어. 그러자 자기 옷매무새를 다듬고, 내게 정중히 사과하더니, 나를 보고 놀라더라.
"부유섬에서 오신 분이세요?! 거기, 거기 혹시... 으음..."
"진정해요. 괜찮으니까."
말을 못 잇길래 우선은 진정시켰어.
그 애의 이름은 호페. 부유섬에 가야 한다고 하더라. 아니면 적어도 대신 누군가를 보내 봐야 할 것이 있대.
이유는 말래주지 않았지만, 나는 "부유섬 주민"이니 호페를 도와줄 수 있었지.
호페는 주머니에서 티켓을 한 장 꺼내더니 꼼지락대며 중얼댔어.
"저, 이게 있는데... 있긴 한데..."
부유섬으로 가는 티켓이었어. 그게 얼마나 얻기 어려운 것인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나는 전부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호페는 티켓을 자기가 쓰려고 하지 않는걸까?
추측일 뿐이지만... 몰래 부유섬에 들어가려다가 잡힐 어떤 애 떄문에 일어날 소란을 생각하니...
뭔가 감이 왔지.
"놀라지 말고 들어요." 호페의 눈을 보고 말했어.
"혹시... 서머 페스티벌에 가려고 부유섬에 몰래 들어간 친구가 있나요?"
호페가 당황하는 게 눈에 보였어. 하지만 의리가 두터운 걸까. 쉽게 인정하지 않을 낌새였지.
...그런데 난 에둘러 말하는 건 질색인 사람이거든!
"걱정하지 마세요. 부유섬에 친구가 있다면, 제가 찾아드릴게요. 인맥이 있거든요. 티켓은 안 쓰셔도 돼요."
"네...? 아뇨, 아니에요! 부유섬에 숨어들어간다니,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어요!" 호페가 허둥대며 말했어.
"의심한 적 없어요. 저는 평범한 부유섬 주민이 아니라, 친절한 공무원이거든요! 자, 공짜로 보내드릴게요. 같이 가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부드럽게 호페가 손에 든 티켓을 다시 주머니로 넣어줬어.
그리고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뻗었지. 루나 생각이 나네...
"제 이름은 렐린이에요."
나는 그렇게 말했어. 그 기억속 "나"의 이름,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었지.
"그런데 그냥 에토라고 불러요. 다들 그렇게 부르거든요."
그렇게 운을 띄운 후 나는 말을 이었어.
"호페, 잘 들어요. 저는 친구분이 어디에 계신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 19-4 #=====
우주선은 좁았고 창문도 뚫려있지 않았어.
너무 실망스러웠어. 올라가면서 창 밖 풍경도 보고 싶었는데...
물론, 나 혼자는 아니었어. 이 애도 나만큼이나 실망한 모양이야.
"뭔 우주선에 창문이 없어?!"
새 친구, 이로가 갑작스레 소리쳤어. 나는 곧바로 쉿 하고 신호를 줬지.
"쉿...!!! 여긴 화물칸이니까 그렇지."
"어, 그래?"
"몰랐어...?"
어두컴컴한 화물칸.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로를 쳐다봤어.
이로는 어깨를 한 번 들썩하더니, 이렇게 말했지:
"들어올 때 잘 안봐서 몰랐어."
참 별난 애야...
"근데 루나야, 너 옷이 이상하다."
"그래?"
"부유섬 출신이니?"
잠시 생각해봤어. "나"는 부유섬 출신이 아니었지만, 에토 언니는 그랬지.
"나"는 고아였어... 서머 페스티벌에 가게 되는데... 어떻게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났어.
아무튼, 아니라고 대답했지.
그러자 내 허리춤에 찬 열쇠검을 보더니 "그럼 검객이야?"라고 묻더라.
또 아니라고 대답했지.
그러자 이번엔 "그럼 너 혹시... 아이돌이니?!"라고 물었어.
나는... 아이돌이 뭔지 몰랐어.
하지만 그 질문을 하는 이로의 눈이 반짝거리는 것만은 보였지.
"아이돌이라니... 그게 뭐야? 무슨 돌인가?"
"아이돌이 뭔지 모른ー?!?!?!!" 나는 서둘러 이로의 입을 막았어.
"조용히! 조용!" 작은 소리로 주의를 줬어. 손을 치우자 이로는 곧바로 입을 열었지.
"알았어, 속삭이면 되지...? 아이돌이 뭔지 모른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 기억의 주인은 아이돌에 대한 정보는 갖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럼... 한 번 설명해봐."
"헉! 으아!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지? 루루아랑 올란은 기본이고, 그리고, 음, 아, 왕국소녀..."
"무슨 높으신 분들인가?"
"가수들이야!"
그니까... 아이돌은 가수를 다르게 부르는 요상한 이름인건가?
으음... 그러고 보니 언젠가 아이돌이라는 말은 숭배받는 "우상"이란 뜻이라고 언니가 가르쳐준 적 있었는데...?
뭐, 이로의 모습을 보면 그것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신심이 아주 깊어보여.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란 말이지. 나도 음악 할 줄 아는데."
나 자신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어. 언니보다 훨씬 잘하지.
"정말? 너 노래도 부를 줄 알아? 아이돌 해보는 게 어때?"
"어... 별로 나한테 맞는 직업은 아닌 것 같아." 숭배받는 건 좀 그래...
"아이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보기만 해도 삶이 충만해지는데...
직접 아이돌이 되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아 그래, 루나야! 동영상을 몇 개 보여줄게.
어휴, 볼륨은 줄일테니까 화 내지 말고! 자, 봐봐... 그리고 잘 들어봐!"
어...
솔직히... 나쁘지 않네!
관현악 쪽이 더 내 취향이긴 한데...
비좁고 어두운 화물칸에 숨어서 속닥거리는 모양새긴 해도, 다른 사람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즐거웠어.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아이돌, 해볼까?
너무 실망스러웠어. 올라가면서 창 밖 풍경도 보고 싶었는데...
물론, 나 혼자는 아니었어. 이 애도 나만큼이나 실망한 모양이야.
"뭔 우주선에 창문이 없어?!"
새 친구, 이로가 갑작스레 소리쳤어. 나는 곧바로 쉿 하고 신호를 줬지.
"쉿...!!! 여긴 화물칸이니까 그렇지."
"어, 그래?"
"몰랐어...?"
어두컴컴한 화물칸.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로를 쳐다봤어.
이로는 어깨를 한 번 들썩하더니, 이렇게 말했지:
"들어올 때 잘 안봐서 몰랐어."
참 별난 애야...
"근데 루나야, 너 옷이 이상하다."
"그래?"
"부유섬 출신이니?"
잠시 생각해봤어. "나"는 부유섬 출신이 아니었지만, 에토 언니는 그랬지.
"나"는 고아였어... 서머 페스티벌에 가게 되는데... 어떻게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났어.
아무튼, 아니라고 대답했지.
그러자 내 허리춤에 찬 열쇠검을 보더니 "그럼 검객이야?"라고 묻더라.
또 아니라고 대답했지.
그러자 이번엔 "그럼 너 혹시... 아이돌이니?!"라고 물었어.
나는... 아이돌이 뭔지 몰랐어.
하지만 그 질문을 하는 이로의 눈이 반짝거리는 것만은 보였지.
"아이돌이라니... 그게 뭐야? 무슨 돌인가?"
"아이돌이 뭔지 모른ー?!?!?!!" 나는 서둘러 이로의 입을 막았어.
"조용히! 조용!" 작은 소리로 주의를 줬어. 손을 치우자 이로는 곧바로 입을 열었지.
"알았어, 속삭이면 되지...? 아이돌이 뭔지 모른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 기억의 주인은 아이돌에 대한 정보는 갖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럼... 한 번 설명해봐."
"헉! 으아!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지? 루루아랑 올란은 기본이고, 그리고, 음, 아, 왕국소녀..."
"무슨 높으신 분들인가?"
"가수들이야!"
그니까... 아이돌은 가수를 다르게 부르는 요상한 이름인건가?
으음... 그러고 보니 언젠가 아이돌이라는 말은 숭배받는 "우상"이란 뜻이라고 언니가 가르쳐준 적 있었는데...?
뭐, 이로의 모습을 보면 그것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신심이 아주 깊어보여.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란 말이지. 나도 음악 할 줄 아는데."
나 자신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어. 언니보다 훨씬 잘하지.
"정말? 너 노래도 부를 줄 알아? 아이돌 해보는 게 어때?"
"어... 별로 나한테 맞는 직업은 아닌 것 같아." 숭배받는 건 좀 그래...
"아이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보기만 해도 삶이 충만해지는데...
직접 아이돌이 되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아 그래, 루나야! 동영상을 몇 개 보여줄게.
어휴, 볼륨은 줄일테니까 화 내지 말고! 자, 봐봐... 그리고 잘 들어봐!"
어...
솔직히... 나쁘지 않네!
관현악 쪽이 더 내 취향이긴 한데...
비좁고 어두운 화물칸에 숨어서 속닥거리는 모양새긴 해도, 다른 사람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즐거웠어.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아이돌, 해볼까?
=====# 19-5 #=====
"정말로 에토 양은 부유섬 주민이신가요...? 실례지만, 제 예상보다 훨씬... 착하셔서."
호페가 별안간 물었어.
나는 한 번 웃은 뒤 대답했지.
"실례 맞네요! 네, 저 부유섬 출신 맞아요. 친구분 찾으면 함께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제가 잘 얘기할게요."
나는 호페와 함께 섬으로 향하는 우주선을 타러 가고 있었어. 굳이 걸어가는 이유는...
이 세계, 아쿠아에서는 항상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었거든. 지금은 일거수일투족을 다투는 상황이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들켜서 난리를 피우는 일은 피하고 싶었거든.
또 다른 이유는, 사실 주된 이유는, 아직도 아쿠아의 풍경이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이야.
미소가 내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어. 호페는 그걸 알아차리고 궁금해졌는지 내게 또 질문을 던졌어.
"여기엔 무슨 일로 내려오셨어요? 뭔가... 할 일이 있었다든지?"
음...
"나"는 뭔가 설문조사 같은 걸 하러 내려온 것 같기도 하지만...
뭐, 너나 나나 정해진 이야기 따라가는 건 싫어하지 않니.
"관광하러 왔어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어.
"그건 의외네요. 부유섬 사람들은 자기에 동네가 너무 좋아서 지상은 거들떠도 안 보는 줄 알았어요.
안 그러면 뭐하러 그렇게 높은 곳에 살겠어요?"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법이니까요. 제 쌍둥이 동생조차 저랑은 한참 성격이 다른 걸요."
"우와...! 쌍둥이... 쌍둥이는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있다든가...
아니면 서로를 향해 아주 강한 공감력이 발휘된다든가... 그거 진짜예요?"
"...재밌는 걸 알고 계시네요. 음... 어느정도는 진짜라고 할 수 있어요."
"너무 신기하네요..."
흐으으음... 갑자기 호페를 살짝 놀려보고 싶어졌어...!
"사실... 제 동생 루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저 지금 당장 다 알 수 있어요!"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그렇게 말하니까, 호페가 화들짝 놀라더라. 정말 몸이 붕 뜰 정도로.
"정말요?!" 호페가 허억 하는 소리를 내며 손을 입으로 가져갔어.
"네, 푸른 하늘이 보여요. 거대한 도시와 무한히 뻗어나가는 수평선이..."
"부유섬에서 보는 풍경 아니에요?!"
"네, 맞아요...! 부유섬에 있는 루나의 모습이 보여요!" 물론 거짓말이지.
"세상에, 호페씨의 친구분과 함께 있네요!"
"정말요?! 제 친구가 무례하게 굴고 있진 않나요?!"
그 말을 듣고 풉 하고 빠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어. 거의 넘어질 뻔 했다니까.
"하하하... 아뇨, 루나가 훨씬 무례하거든요."
(미안해, 루나야. 예의 차리려다가 널 욕해버렸네.)
호페는 그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
"다행이다... 아! 동생분이 무례하다는 게 다행이란 게 아니라..."
어음, 루나야, 혹시 몰라서 다시 말하는데, 네가 무례하다는 건 거짓말이니까, 알지?
그나저나...
너는 이 기억에 입장하면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가진 정보로 판단했을 때 호페는 여기서 "엘리트"로 불리는 부류의 사람인 것 같아.
너도 그 재수없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가 엘리트라고 곧잘 말하곤 하지만...
여기 아쿠아에서는 "엘리트"란 꽤 무게를 지닌 단어인 것 같아.
엘리트가 맞냐고 물어보려다가, 다른 질문으로 바꿔 물어봤어.
"질문을 자주 하시네요."
"배워야 할 게 많으니까요. 세상은... 정말로 넓은 곳이잖아요."
"알아요. 저도 굉장히 넓은 세상에 살다 왔거든요."
"음...? 아쿠아 출신이 아니셨나요?"
"아... 맞다. 그랬죠, 참. 하하하!" 실수할 뻔 했어. 얘랑 얘기하고 있으면 너무 안심이 돼서...
"세상이 넓다는 건, 이 행성만을 말한 게 아니에요."
호페가 고개를 들어 부유섬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어.
우주라... 에토와 루나, 이런 이름을 지닌 우리니까, 나도 우주에는 항상 관심이 많았어.
언젠가 하늘에서 떨어지던 붉은색 혜성과 검은색 혜성...
그 혜성들의 정체, 그리고 하늘이 갑자기 변한 이유를 알아낼 날이 올까?
"...언젠가는 우리 모두 이 세상을 이해할 날이 올지도 모르죠." 내가 말했어.
"우리요? 에토 씨랑 제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어.
"우리 모두요.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점점 가까워지는 항구를 눈에 담으며, 호페가 순수하고 멋진 미소를 내게 지어보였어.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그럼 정말 좋겠네요."
호페가 별안간 물었어.
나는 한 번 웃은 뒤 대답했지.
"실례 맞네요! 네, 저 부유섬 출신 맞아요. 친구분 찾으면 함께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제가 잘 얘기할게요."
나는 호페와 함께 섬으로 향하는 우주선을 타러 가고 있었어. 굳이 걸어가는 이유는...
이 세계, 아쿠아에서는 항상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었거든. 지금은 일거수일투족을 다투는 상황이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들켜서 난리를 피우는 일은 피하고 싶었거든.
또 다른 이유는, 사실 주된 이유는, 아직도 아쿠아의 풍경이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이야.
미소가 내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어. 호페는 그걸 알아차리고 궁금해졌는지 내게 또 질문을 던졌어.
"여기엔 무슨 일로 내려오셨어요? 뭔가... 할 일이 있었다든지?"
음...
"나"는 뭔가 설문조사 같은 걸 하러 내려온 것 같기도 하지만...
뭐, 너나 나나 정해진 이야기 따라가는 건 싫어하지 않니.
"관광하러 왔어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어.
"그건 의외네요. 부유섬 사람들은 자기에 동네가 너무 좋아서 지상은 거들떠도 안 보는 줄 알았어요.
안 그러면 뭐하러 그렇게 높은 곳에 살겠어요?"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법이니까요. 제 쌍둥이 동생조차 저랑은 한참 성격이 다른 걸요."
"우와...! 쌍둥이... 쌍둥이는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있다든가...
아니면 서로를 향해 아주 강한 공감력이 발휘된다든가... 그거 진짜예요?"
"...재밌는 걸 알고 계시네요. 음... 어느정도는 진짜라고 할 수 있어요."
"너무 신기하네요..."
흐으으음... 갑자기 호페를 살짝 놀려보고 싶어졌어...!
"사실... 제 동생 루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저 지금 당장 다 알 수 있어요!"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그렇게 말하니까, 호페가 화들짝 놀라더라. 정말 몸이 붕 뜰 정도로.
"정말요?!" 호페가 허억 하는 소리를 내며 손을 입으로 가져갔어.
"네, 푸른 하늘이 보여요. 거대한 도시와 무한히 뻗어나가는 수평선이..."
"부유섬에서 보는 풍경 아니에요?!"
"네, 맞아요...! 부유섬에 있는 루나의 모습이 보여요!" 물론 거짓말이지.
"세상에, 호페씨의 친구분과 함께 있네요!"
"정말요?! 제 친구가 무례하게 굴고 있진 않나요?!"
그 말을 듣고 풉 하고 빠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어. 거의 넘어질 뻔 했다니까.
"하하하... 아뇨, 루나가 훨씬 무례하거든요."
(미안해, 루나야. 예의 차리려다가 널 욕해버렸네.)
호페는 그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
"다행이다... 아! 동생분이 무례하다는 게 다행이란 게 아니라..."
어음, 루나야, 혹시 몰라서 다시 말하는데, 네가 무례하다는 건 거짓말이니까, 알지?
그나저나...
너는 이 기억에 입장하면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가진 정보로 판단했을 때 호페는 여기서 "엘리트"로 불리는 부류의 사람인 것 같아.
너도 그 재수없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가 엘리트라고 곧잘 말하곤 하지만...
여기 아쿠아에서는 "엘리트"란 꽤 무게를 지닌 단어인 것 같아.
엘리트가 맞냐고 물어보려다가, 다른 질문으로 바꿔 물어봤어.
"질문을 자주 하시네요."
"배워야 할 게 많으니까요. 세상은... 정말로 넓은 곳이잖아요."
"알아요. 저도 굉장히 넓은 세상에 살다 왔거든요."
"음...? 아쿠아 출신이 아니셨나요?"
"아... 맞다. 그랬죠, 참. 하하하!" 실수할 뻔 했어. 얘랑 얘기하고 있으면 너무 안심이 돼서...
"세상이 넓다는 건, 이 행성만을 말한 게 아니에요."
호페가 고개를 들어 부유섬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어.
우주라... 에토와 루나, 이런 이름을 지닌 우리니까, 나도 우주에는 항상 관심이 많았어.
언젠가 하늘에서 떨어지던 붉은색 혜성과 검은색 혜성...
그 혜성들의 정체, 그리고 하늘이 갑자기 변한 이유를 알아낼 날이 올까?
"...언젠가는 우리 모두 이 세상을 이해할 날이 올지도 모르죠." 내가 말했어.
"우리요? 에토 씨랑 제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어.
"우리 모두요.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점점 가까워지는 항구를 눈에 담으며, 호페가 순수하고 멋진 미소를 내게 지어보였어.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그럼 정말 좋겠네요."
=====# 19-6 #=====
우리 고향에는 축제라는 게 있던가?
꽃과 춤, 하늘을 수놓는 빛... 많은 게 기억나지만, 축제가 있었는 지는 기억나지 않아. 적어도 더이상은.
"망각했다"든지, 그런 심각한 건 아니야.
그냥 기억을 못할 뿐이지. 고향에서 지낸 시간보다 아르케아에서 지낸 시간이 훨씬 기니까...
음...
그건 그렇고, 에토 언니, 서머 페스티벌은 최고였어.
팥빙수도 처음 먹어봤고, 내가 지어낸 놀이가 아닌 진짜 놀이를 한 것도 처음이었어.
아이스크림이나 수박은 처음 먹어본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너무너무 맛있었어.
그리고 부유섬의 끝자락에 서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바쁜 도시와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풍경은....
정말 놀라웠어...!
자기도 부유섬에는 처음 와보면서, 이로는 전문가인양 나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녔어.
그런데... 고맙단 말을 못했네... 고마워, 이로야.
그런데, 이로는 그다지 즐기지 못한 낌새였어... 특히 하루가 끝날 때 쯤에는 말이야.
화물칸에서 나올때는 그렇게 신이 나서는 페스티벌 회장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로의 얼굴에서 미소가 옅어졌어.
솜사탕을 밀어넣기 전까지는 입이 쭉 삐져나오기까지 했다니까!
이로에게 뭐가 마음에 안 드냐고 묻자, 자기 친구 호페가 같이 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어.
호페가 친구보다 부유섬 입장 티켓을 더 중요시한게 화가 난다고...
보아하니 둘이 싸운 모양이야. 나랑 언니는 절대 싸우는 일이 없으니, 이해는 할 수 없었어.
내려가면 여기서 겪은 일을 왕창 자랑해버리라고 조언해줬지. 그닥 좋은 조언은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래도 언니, 나는 이로의 곁을 꼭 지켰어.
그런데… 해가 수평선에서 뉘엿거릴 쯤, 부유섬에서 내려갈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지 뭐야.
=====# 19-7 #=====
이로는 너랑 많이 닮은 모양이구나, 루나야.
바보지만, 그래서 귀여워. 그 애랑 호페가 왜 친구인지 알 것 같아.
있지... 친구 이야기가 나오자 마자 호페는 부유섬을 향해 올라가는 시간 내내 이로에 대해 말을 멈추지 않았어.
항구에 도착할 떄 쯤 잔뜩 긴장해있었지만 내가 정말로 부유섬 주민이라는 걸 증명하니까,
안도하며 같이 데려가줘서 고맙다고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어.
그리고 대화 중에 친구 이야기를 하니, "이로!" "이로는요..." "그, 이로는 있잖아요..." 라며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어.
좋은 이야기만 있었던 건 아니야. 불평 불만도 섞여있었지.
"미안해요. 불평만 늘어놓고 있어서..."라고 하길래 나는 얼마든 불평해도 괜찮다고 대답해줬지.
우리 호페, 귀여워라.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이길래 몰래 기분을 북돋아주려고 이로는 어떤 장소를 좋아하는 지 물었어.
강을 좋아한다더라. 만약 이로가 정말 부유섬에 있는 거라면, 아마도 강변에 있을 거라고.
"벌써 잊었어요? 이로는 정말로 부유섬에 루나와 함께 있다니까요." 내가 말했어.
"어... 그거 농담 아니었어요?"
"농담일리가!"
농담 맞았어. 하지만 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지.
호페는 내 말을 믿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런데, 부유섬이 가까워지자 점점 내 열쇠가 빛나기 시작했어. 네 것도 그랬니?
루나야, 너와는 정말 부유섬에서 만날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어.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또다른 이야기 속에서는...
운명을, [ruby(뒤집을, ruby=Rotaeno)] 수 있을 지도 모르지.
=====# 19-8 #=====
해가 넘어가고 있었어. 부유섬에는 꽤 오랫동안 갇혀있었어...
페스티벌은 끝난 지 오래였고.
이로가 울기 시작했어. 무슨 말을 해줘야 할 지 모르겠더라.
나한테서 도망가기까지 했다니까!
공원을 지나 강변까지 쫓아갔어. 거기 주저앉아서 울고 있더라.
그 옆에 앉아 등을 토닥여줬어. 절로 표정이 구겨졌어.
내가 이럴 때 언니는 어떻게 했나 몰라.
음... 맞아, 노래를 불러주곤 했지. 나는 천천히 자장가를 불렀어.
좋아할지는 몰랐지만...
울음을 조금은 그친 것도 같았어.
주홍빛 석양, 강이 흐르는 소리...
허리춤에 찬 열쇠가 부드럽게 빛나기 시작했어.
다 괜찮을 거라며 이로를 위로하면서, 나는 언니를 기다렸어.
그 날, 무언가 달랐지?
맞아. 그 날은 달랐어. 우리가 열쇠검을 들이대던 평소의 기억들과는 달랐어.
뭐가 달랐지?
알고 있어?
내가 안다는 말은 안했어. 너한테 묻는 거지.
왜 묻냐면... 그 기억 속에선 평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았거든.
시시한 장난이 아닌, 정말 중요한 무언가를 해냈다는 느낌이...
그래, 원본 기억은 그렇지 않았어.
분명... 기적이 일어났던 거야.
에토 언니... 언니가 데려온 호페와 내 곁에 있던 이로가 서로에게 달려가 부둥켜안자,
언니는 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의미로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고 있었지...
그 때 눈치 챘어. 분명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구나!
대체 그게 뭔지 묻고 싶었지만,
언니가 내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와선 어깨에 팔을 두르고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말하는 거 있지.
"기적은 일어나는구나."
난 언니 미간에 딱밤을 넣었어.
"감사합니다!"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호페가 말했어.
"너는 누구니?!"
이로가 언니 쪽을 보며 물었어.
이로의 눈도 그렁그렁했는데, 도대체 얘가 화가 난 건지, 슬픈 건지, 기쁜 건지 모르겠더라.
언니가 "정체불명의 히어로입니다."라고 대답했을 땐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었어.
"내 쌍둥이 언니, 에토 언니야." 내가 말했어.
"쌍둥이가 있었어?!" 이로가 큰 소리로 외쳤어. 목청이 어찌나 큰 지 움찔해버렸어.
"왜 말을 안해줬어?! 너 엄청 노래 잘 부르기도 하고 둘이서 아이돌 하면 되겠다! 듀오 아이돌! 쌍둥이 아이돌!"
"이로야, 실례잖니..." 호페가 귓띔했어.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어. 거울을 안 봐도 얼굴이 새빨개진 걸 알아. 왜냐면...
"너 얘한테 노래 불러줬니?!"
...언니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으니까.
마침내 다들 진정하자...
호페가 고개를 숙였어. 이로는 온 힘을 다해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지.
서로 작별인사를 나누는 내내 언니는 내 옆구리를 마구 찔렀어. 쏘아봐도 멈추질 않았지.
이제서야 생각난건데, 내기에서 이겼다고 자랑할 기회를 놓쳐버렸네...
우리는 새로운 두 친구를 뒤로 하고 길을 떠났어.
그리고, 무너져내리는 카드탑처럼, 주변의 풍경이 사라지기 시작했지.
그렇게 우리는 공허로 돌아왔어.
그 무서운 장소로 돌아오고 나서, 나는 언니에게 물었어.
"언니... 기억 내용이 그렇게 막 바뀌거나 하진 않지?"
"그런가?" 언니는 그렇게 대답했어.
"잠깐... 아직 다 해결된 게 아니잖아. 호페는 티켓이 있으면서도... 아, 그리고 이로는..."
"괜찮아. 손을 써놨으니까."
"무슨 말이야?"
"다 그런게 있어. 하하하!"
"에휴... 아무튼, 그건 기억일 뿐이었으니까, 어찌 되든 아무 상관 없는 거잖아, 그치?"
"음... 그럴까?"
"언니 진짜 싫어."
언니는 그러면서 웃었어. 그리고 또 웃고, 또 웃고... 또 웃고, 안도하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지.
걸리는게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얘기해도 되는데.
아니... 그냥, 됐다.
나한테까지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 고생을 하면서 다시 합류했는데 괜히 안 좋은 이야기를 꺼내서 뭐 해, 그치?
그리고... 결국 우리가 다시 만났으니까, 모든 사정을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안심이 됐어.
언니는 갑자기 내 손을 잡더리 뒷걸음으로 총총 뛰어가며 나를 잡아당겼어.
"으악! 뭐, 뭐야...! 그만 좀 당겨!"
그리고 언니는 웃으며, 가장 찬란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지.
"가자. 돌아가자. [ruby(빛, ruby=아르케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