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1:00:41

11대 이치카와 단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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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야
나카무라 칸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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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이치카와 단쥬로
第十一代目 市川團十郞| Ichikawa Danjūrō XI
파일:11대 이치카와 단쥬로.jpg
<colbgcolor=#BC002D> 본명 [ruby(堀越, ruby=ほりこし)][ruby(治雄, ruby=はるお)](호리코시 하루오, Horikoshi Haruo)[1]
예명[2] 초대 마츠모토 킨타로
9대 이치카와 코마조
9대 이치카와 에비조
11대 이치카와 단쥬로(1962년 4월 습명)
출생 1909년 1월 6일
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
사망 1965년 11월 10일 (향년 56세)
도쿄도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173cm
학력 교세이 가쿠엔 초등부(졸업)
킨죠 가쿠엔 중등부(중퇴)
가족 아버지 7대 마츠모토 코시로(1870-1949)[3]
양아버지 10대 이치카와 단쥬로(1880-1956)[4]
남동생 초대 마츠모토 하쿠오(1910-1982)[5]
남동생 2대 오노에 쇼로쿠(1913-1989)[6]
여동생 후지마 아키코[7]
아내 호리코시 치요
장남 12대 이치카와 단쥬로(1946-2013)
장녀 초대 이치카와 쥬코(1949-)[8]
장손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1977-)
친손 4대 이치카와 스이센(1979-)[9]
증손 4대 이치카와 보탄(2011-)[10]
증손 8대 이치카와 신노스케(2013-)[11]
조카 2대 마츠모토 하쿠오(1942-)
직업 가부키 배우
야고[12] 나리타야(成田屋)
문장 파일:Mimasu_inverted.png
1. 개요2. 생애3. 연기 스타일4.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 가부키 제1명문가 나리타야 이치카와 종가의 선선대 당주이다. 12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아버지이자 가문의 현 당주인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의 친조부이기도 하다.

2. 생애

파일:7대 마츠모토 코시로와 세 아들.jpg
자택에서 아버지 7대 마츠모토 코시로, 남동생들과 함께
제일 왼쪽이 11대 이치카와 단쥬로이다
코라이야의 당주를 지내던 7대 마츠모토 코시로의 장남으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출생명은 후지마 하루오. 삼형제 중 첫째였으며 7대 코시로에게 있어서 든든한 장남이었다고.

모모타로 이야기로 하츠오메미에, 첫 무대를 밟았으며 이때 초대 마츠모토 킨타로를 습명받았다.
파일:11대 단쥬로 소학교.jpg
소학교 시절의 11대 이치카와 단쥬로
11대 단쥬로가 8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11대 단쥬로가 소학교를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때였기에 어머니와의 기억은 함께 소학교의 입학식에 갔던 것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이 시기부터 어머니를 잃은 충격과 함께 말수가 부쩍 줄었고 극도로 심한 결벽증을 앓게 되었다.

아버지인 7대 마츠모토 코시로는 곧바로 재혼하였지만 새어머니마저 가문에 들어온 지 1년도 안 돼서 병사하고 말았다.
파일:11대 단쥬로 스케로쿠.jpg
9대 이치카와 코마조 습명 이후
아버지의 스케로쿠 무대에서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자퇴를 하였고 가부키에 집중한다. 1929년 4월, 가부키계에서 역사가 깊은 세습명인 이치카와 코마조를 9대째로 습명받았다. 이 시기부터 후계가 없던 나리타야와 양자 입적 문제로 이야기가 오고 갔다고 한다. 코라이야와 나리타야 모두 긍정적인 반응이었다고.
파일:25살 11대 단쥬로.jpg
25살의 11대 이치카와 단쥬로
그러나 동년 5월, 습명 피로연 도중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는데 원인은 폐결핵이었다. 이때 첫째 동생은 5대 이치카와 소메고로를 습명하였고 막내 동생은 오토와야 일문에 들어가며 11대 단쥬로는 자신만 뒤쳐졌다는 생각에 힘든 요양 생활을 하였다. 4년의 요양 생활을 끝으로 무대에 복귀하여도 발성이 약하고 발음이 어눌하다는 등 여러 신문사에게 혹평을 받았다. 발음 교정에 프랑스어가 좋다는 말에 프랑스어를 배운 것도 이 시기다.
파일:서른 11대 단쥬로.jpg
서른살의 11대 이치카와 단쥬로
나리타야 입적과 9대 이치카와 에비조 습명 직후
1935년, 10대 이치카와 단쥬로 부부의 소개로 한 여성과 선을 보고 결혼한다. 결혼은 비교적 늦게 한 것으로 이미 교제를 하던 시기에 그녀와의 사이에서 첫째 아들을 얻었으나 어린 나이에 죽고만다. 거기에 부부의 성격 차이까지 겹치며 결국 결혼 4개월만에 이혼하였고 11대 단쥬로는 본가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에서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간 몸 담았던 도호 극단을 떠나 쇼치쿠로 극단을 옮긴 것도 이 시기였다.

1940년, 10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양자로 입적하며 성을 후지마에서 호리코시로 개명했다. 나리타야의 양자가 된 것이기에 9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습명하였고 카리스마 있는 연기력으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하며 '에비사마'라고 불렸다.

스케로쿠와 겐지모노가타리에서의 성공으로 그의 미모와 연기에 매료된 팬들이 생겨났고 업계에서도 상당한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세간은 그가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가정이 없는 것을 흠으로 꼽았었는데 사실 11대 단쥬로는 이미 결혼도 하였고 슬하에 자녀도 둘이나 있었음을 6년이 지나서야 밝혔다.
파일:하루오 치요.jpg
동생들에게 치요를 소개하는 11대 단쥬로
상대는 8살 연하인 호리코시 치요였으며 7대 마츠모토 코시로 일가의 하수인이었다. 11대 단쥬로가 폐결핵으로 4년간 요양 생활을 할 때 성심껏 간호하였던 것이 인연이 되었고 단쥬로가 나리타야에 입적되고도 함께 호리코시 가로 옮겨 동거 생활을 하였다. 단쥬로의 두 번의 결혼 생활이 이혼으로 끝나며 다시금 재회한 치요와 남몰래 혼인 신고를 올렸고 외곽에서 아이들을 낳고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세간에 아내와 아이들의 존재를 밝히자 역시나 치요의 뒷배경으로 인해 많은 후원자들에게 맹비난을 받으며 파혼을 요구받는다. 11대 단쥬로는 치요와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없다면 차라리 가부키 배우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하였고 그제서야 나리타야의 오랜 후원자 중 한 명이 치요의 뒷배가 되어주며 둘은 결혼 생활을 이어올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책이 많이 나오기도 하는 등, 11대 단쥬로와 치요의 이야기는 가부키 계에 있어 이례적인 사례로 꼽힌다.
파일:하루오와 나츠오.jpg
장남 호리코시 나츠오와 함께
치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호리코시 나츠오에게 첫 무대를 경험 시켜주기 전까지, 가족은 한 칸짜리 방에서 숨어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추운 겨울 날, 11대 단쥬로가 대사를 외우고 있었는데 아내인 치요는 아이와 자신이 연습에 방해가 될까봐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나가서 껴안아주며 힘든 날을 견뎠다고도 한다.
파일:580px-Ebizō_Ichikawa_IX_as_Ōboshi_Yuranosuke,1956.jpg 파일:11대 단쥬로 습명.jpg 파일:11대 단쥬로 습명 니라미.jpg
1962년, 11대 이치카와 단쥬로 습명을 공표
1962년 4월, 가부키좌에서 가부키 계의 대표 명적이자 나리타야의 당주가 습명받는 명적인 이치카와 단쥬로를 11대째로 습명받으며 해당 명적을 59년만에 부활시켰다.[13] 11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습명 피로연과 행진은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렸으며 많은 이들이 쇼와의 새로운 가부키 스타의 탄생을 축하하였다. 습명 피로연의 대표 연목은 칸진쵸.
파일:11대 단쥬로 말년.jpg 파일:단쥬로 스케로쿠.jpg
말년의 11대 이치카와 단쥬로
그의 생전 마지막 무대 <스케로쿠>에서
1965년, 11대 단쥬로는 스케로쿠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기자회견에서도 다음 무대를 기대하고 있다는 심정을 밝혔다. 그러던 중 동년, 위암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11대 단쥬로 본인과 가족들조차 단쥬로가 위암에 그것도 말기일 줄은 전혀 몰랐다고 한다.

체중이 부쩍 줄어, 뼈밖에 없다고 느껴지던 그였지만 그럴 때에 더욱 몸을 깎아내듯 연기하여 그와 신체 접촉이 있는 게 아닌 이상 그가 시한부였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라 한다.

조카인 2대 마츠모토 하쿠오 또한 11대 단쥬로의 마지막 벤케이 연기가 끝난 뒤, 그를 잠시 껴안았더니 뼈밖에 느껴지지 않아서 너무 놀랐던 기억이 있다고 한다. 그 순간 11대 단쥬로의 영혼이 벤케이를 연기하고 있음을 느꼈다고.

3. 연기 스타일

파일:11대 단쥬로 니라미.jpg 파일:11대 단쥬로 니라미1.jpg
11대 이치카와 단쥬로 습명 피로연의 니라미
눈이 매우 크며 눈매가 짙다.
파일:스케로쿠 11대 단쥬로.jpg
11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스케로쿠
가부키 분장을 했음에도 드러나는 날카로운 인상과 날렵한 미모가 인기의 비결이기도 하다. 특히 발성을 할 때에는 긁는 소리와 함께 고성을 자주 사용하였으며 선대들보다 더욱 과한 동작도 그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파일:벤케이 11대 단쥬로.jpg
11대 단쥬로의 무사시보 벤케이 토비 롯포
칸진쵸의 벤케이 토비 롯포에서 중간에 물러가는 동작 없이 그대로 롯포를 진행하여 객석에서 퇴장하는 것도 그만의 벤케이 동작이다.

4. 여담

파일:11대 12대 단쥬로.jpg }}} ||
장남 호리코시 나츠오와 함께
카메라를 굉장히 좋아하였으며 아이들의 모습을 필름으로 남기는 것이 취미였다고 한다. 장남 12대 이치카와 단쥬로에게는 애지중지하던 카메라를 물려주기도 했다. 또 낚시를 좋아하여 장남과 자주 낚시를 다녔다고 한다.
  • 애처가에 가정에 충실한 남자였다고 한다. 치요와 결혼한 뒤로는 여자 문제로도 전혀 걸리는 게 없었고 공연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여름에는 늘 가족과 해수욕에 다녀왔고 사망하기 바로 전 해에도 아내와 유럽 여행을 다녀왔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장손이라는 인간은…
  • 장손이자 현 나리타야 이치카와 단쥬로의 당대인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어린 시절, 가부키 연습이 힘들 때에 늘 할아버지인 11대 단쥬로의 비디오를 보면서 그의 용모와 예술에 감동하였고 이와 같은 대배우가 되어야 한다며 버텼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어릴 적 다큐에도 11대 단쥬로의 스케로쿠를 보며 연구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 간사이 가부키 명문가 마츠시마야의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장남인 14대 카타오카 니자에몬[14]과 동성이지만 좋은 감정으로 연애를 했었다는 게 드러났다. 회고록에서 9대 이치카와 코마조 습명 직후 눈이 맞았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11대 단쥬로가 폐결핵으로 가문의 사람들만 아는 장소로 요양에 들어가며 만나는 일은 없었다고. 나중에 11대 단쥬로가 이미 결혼도 했고 자녀도 두었다는 사실에 14대 니자에몬은 식음을 전폐했으며 그의 이른 죽음에 제일 슬퍼했다고도 한다.[15]


[1] 나리타야 양자 입적 전 출생명은 '후지마 하루오'. [2] 가부키 배우로서의 예명이다. [3] 본명은 후지마 킨타로. [4] 10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그의 사후 양자인 11대 단쥬로에 의해 추존된 것으로 생전 마지막 세습명은 '이치카와 미마스'였다. [5] 본명은 후지마 준지로. 나리타야에 양자로 들어간 11대 단쥬로를 대신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코라이야의 당주가 되었다. [6] 본명은 후지마 유타카.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일문이 되어 오토와야에 소속되었다. [7] 가부키 가문 쿄야의 4대 나카무라 자쿠에몬과 결혼하여 아오키 아키코가 되었다. 8대 오타니 토모에몬, 5대 나카무라 자쿠에몬 형제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8] 본명은 호리코시 하루요. 현재 일본 무용 이치카와류의 수장을 맡고 있다. [9] 본명은 호리코시 치에코. [10] 이치카와 보탄은 나리타야의 직계 영애가 일본 무용계에서 사용하는 예명으로, 본명은 호리코시 레이카. 애칭은 '레이(レイ)'. [11] 본명은 호리코시 칸겐. 애칭은 '칸칸(かんかん)'. 별탈없이 가부키 배우업을 이어나간다면 칸겐이 훗날 12대 이치카와 에비조, 14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될 수 있다. [12] 가부키 배우로서 가지는 집안 이름. 세습명 구도를 중심으로 창시되며, 가부키계에는 10대 명문가를 포함한 40개 정도의 야고가 있다고 한다. [13] 10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그의 사후 11대 단쥬로가 추존한 것이다. [14] 본명은 카타오카 하지메. [15] 지금이야 생각하기 어렵지만 당시 온나가타만을 주력으로 연기하는 배우들은 남자를 밝히는 경우가 꽤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