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 대학살 Thảm sát Huế Tết Mậu Thân Massacre at Hu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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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베트남 공화국 후에 |
일시 | 1968년 2월 |
사망자 | 2,800 ~ 6,000명 |
가해자 | 북베트남군, 베트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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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전쟁의 구정 공세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들이 후에에서 저지른 학살. 학살당한 피해자의 숫자가 수천명에 이르며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최악의 학살로 평가된다. 보통 2,800명에서 6,000명 정도가 희생당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당시 후에 전체 인구의 무려 5 ~ 10%에 달하는 숫자다. 미군이 저질러 엄청나게 욕을 먹는 미라이 학살도 희생자는 300명 ~ 400명으로 후에 대학살에 비하면 약과 수준이다.후에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서 수많은 시신 매장지들이 발견되었으며 여성과 어린 아이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
수많은 증거 자료와 증언들이 있고 남베트남의 패전 후 보트피플이 되어 외국으로 빠져나간 베트남인들이 문제 제기도 하는 사건이지만 베트남 측에선 계속해서 이를 부인하거나 축소시키고 있다. 과거 한국 정부에서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에 대해 공동조사를 하자고 제안했을 때 베트남 정부가 자신들은 승전국이니 그런 건 필요없다는 이유로 거부한 적이 있는데 실제 이유는 이러한 자신들의 학살과 전쟁범죄들이 드러날 것이 두려워서라는 분석이 있다.
하술된 베네마 박사는 후에의 진실이 알려져야 하며 리디체, 푸테, 그리고 바르샤바의 이름과 나란히 역사 속에 언급되어야 한다고 하여 후에 학살의 성격이 나치 독일의 그것과 같은 계획적인 대량학살로 정의되어야 함을 은유했다.
2.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
남베트남 정부의 공식적인 피해자 추산은 4,062명이지만( #1, #2) 이건 말 그대로 당시 남베트남 정부에서 신원 확인이 가능한 희생자들을 집계한 것일 뿐이다.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피해자나 베트콩에게 납치당해서 살해당한 사람의 숫자는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후에 학살 당시 죽어나간 민간인들에 대한 대표적인 1차 자료 중 하나가 바로 당시 후에에 있었던 의사 알예 베네마 박사의 기록이다. 그는 구정 공세의 종료 직후 혼란한 상황의 후에에서 스스로 무덤과 시신의 숫자를 찾아서 기록해서 자서전으로 펴냈다. 아쉽게도 그의 자료만 가지고 최종 피해자 추산을 하는 건 불가능한데 그가 베트남을 떠난 뒤 추가로 시신들이 발굴됐기 때문이다. 그의 추산에 따르면 시신들이 발견된 무덤은 총 19개, 시신 숫자는 약 2,307개라고 한다.
미국의 반전주의자 학자였던 가렛 포터가 이 수치를 크게 조작해서 후에 학살이 별 것 아니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 #
참고로 베트남 전쟁 당시부터 후에 대학살 외에도 베트콩, 북베트남군이 저지른 고의적 학살에 대한 증언과 증거가 많이 담긴 보고서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