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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가문의 문장. 떨어진 구요.[1]
1. 개요
細川忠興(세천충흥)( 1563년 11월 28일 ~ 1646년 1월 18일)
일본 전국시대, 에도 시대 전기의 무장.
아버지인 호소카와 후지타카와 같이 교양인·다인으로도 유명하며, 리큐 칠철(利休七哲)[2]으로도 꼽힌다. 다도의 유파인 산사이류(三斎流)[3]의 개조.
아시카가 요시아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당시의 유력 인물들을 받들고 에도 시대 쇼군 3대(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츠) 섬긴 사실상 막부의 원로로서 지금까지 계속되는 히고노쿠니(肥後國, 폐번치현 후 구마모토현) 호소카와 가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무로마치 시대를 풍미한 호소카와 가문이 전국 시대를 지나면서 대부분 몰락했기 때문에 에도 시대 이후의 호소카와 가문이라면 대부분 이 히고노쿠니 호소카와 가를 일컫게 된다.
2. 생애
어릴 적 아버지 후지타카가 위태위태한 쇼군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있다보니 신변의 위협을 염려하여 아버지와 떨어져 숨어살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면서 함께 활동해,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 휘하를 거쳐 아버지의 동료 아케치 미츠히데의 군단에 속했다.성격이 격하여 전투에서는 선두에 서서 활약했고 노부나가는 이런 타다오키를 맘에 들어했다. 타다오키도 노부나가를 존경하여 부친 대까지 쓰던 가문을 바꾸었고,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부친 후지타카와 함께 머리를 깎고 아케치 미츠히데의 부탁을 거절했다. 게다가 타다오키는 노부나가에 대한 빠심이 얼마나 높았는지 자기가 죽을 때까지 노부나가의 기일을 챙겼다. 이름인 '타다오키'도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의 '타다(忠)'를 따온 것. 한편 타다오키의 매부로 호소카와 가와 함께 단고를 통치한 잇시키 요시사다[4]는 아케치 미츠히데 편에 가담했기 때문에 주멸했는데, 이 과정에서 속임수를 썼기 때문에 한을 품은 여동생에게 전후 살해당할 뻔 했다.
정실인 타마코(세례명은 가라샤)를 향한 애정은 깊어서 그녀의 아버지인 미츠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을 때에도 이혼하지 않고 유폐시켜 화가 미치는 것을 피했다. ...이긴 한데, 그 사랑의 정체는 가라샤 문서를 참조. 그냥 얀데레다.
두 사람은 당대 제일의 미남 미녀 부부로 일컬어졌지만 그 실체는 콩가루였다. 히데요시의 크리스트교 금지령 발표 직후에 가라샤가 크리스천이 되었을 때 격노하여, 그녀의 시녀의 코를 베거나 유곽으로 팔아넘겨 협박하면서까지 가라샤에게 개종을 강요했다고 한다. 또 가라샤의 아름다움에 반한 정원사를 손수 베어 죽였다고 하며,[5]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주둔하던 동안에는 몇 통의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은 히데요시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임란 중에 조선의 도공(陶工)을 끌고가 자신의 영지에서 도자기를 만들게 한다. 일본 서부에 집중된 도자기 명산지는 이렇게 끌려간 도공들이 기반을 이룬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장인들을 잡아가 자신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한건 다이묘들의 공통된 행태였고 타다오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진주 대첩 당시 일본군 주장으로 참여했지만 김시민과 곽재우 등 조선 관군과 의병의 맹활약으로 인해 패배하게 된다.
그래도 아내를 정말로 많이 사랑했는지 장례를 당시의 가톨릭 예식으로 치렀고 그의 영지에서는 교인에 대한 탄압이 다른 곳과 비교하여 매우 적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내가 죽은 원인이 서군의 핵심 인물이던 이시다 미츠나리여서 그랬는지 동군에 제일 빨리 참가했다. 야사에는 기독교인에 대해 심하게 말하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반발하여 다투기까지 했다고 하니...[6] 딱히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기보단 기독교를 통해 생전의 아내를 투영했다고 보는 게 옳은 듯하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그의 거성 타나베 성[7]은 아버지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지키고 있었는데 1만 5천 명의 서군이 쳐들어왔다. 후지타카는 잘 싸우다가 그가 죽을 것을 우려했던 후지다카의 제자이었던 하치죠노미야 토시히토 친왕(八条宮智仁親王, 1579 ~ 1629)이 두 양군에 가서 설득하지만 실패하고 친형인 당시의 덴노 고요제이 천황에게 상소문[8]을 올려서 그가 죽을 것을 염려했던 덴노가 산죠니 사네에다(三条西実条, 1575 ~ 1640), 나카노인 미치카즈(中院通勝, 1556 ~ 1610), 카라스마루 미츠히로(烏丸光広, 1579 ~ 1638)[9]를 시켜 양군에게 칙명을 내리자 성에서 물러났는데, 타다오키는 왜 끝까지 싸우지 않았냐고 아버지를 책망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역시 아버지를 위기에 빠뜨린 것을 용서할 수 없었는지 타나베 성을 공격했던 서군 소속 오노기 시게카츠(小野木重勝, 1563 ~ 1600)를 자결하게 했다.
83살까지 살았으며 몇몇 자식들보다도 오래 살았다.
장남 호소카와 타다타카(細川忠隆, 1580 ~ 1646)는 가라샤가 자결할 당시 친정인 마에다 가로 도망친 처 치요[10]를 감싸다가 폐적 당했고(실제로는 마에다 토시나가[11], 아사노 나가마사[12]와 함께 이에야스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받아서라고)[13], 차남 호소카와 오키아키(細川興秋, 1583 ~ 1615)는 자기 대신 3남 타다토시가 가독을 물려 받은데다 자신은 인질이 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나 도망쳤고 후에 오사카 전투에서 오사카 측으로 참전했다가 아버지에게 붙잡혔지만 교토에 있는 동림원(東林院)에서 할복했다.[14] 그래서 인질 시절 막부와 안면이 있던 3남 타다토시(細川忠利, 1586 ~ 1641)가 가독을 상속받았다고 하지만 먼저 죽어버리는 바람에 그의 장남인 호소카와 미츠나오(細川光尚, 1619 ~ 1650)가 당주를 받았다.
3. 구요의 문장
일화가 상당히 재미있는 것이 많아 2ch 등지에서는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중 하나가 구요의 문장 건인데 어린 시절 타다오키가 오다 노부나가의 소도에 새겨진 구요 문장을 보고 대단히 마음에 들어했다. 그러자 노부나가는 이를 기억해 뒀다가 이후 타다오키가 평생의 연인 가라샤와 결혼했을 때[15] 그 구요의 문장을 하사하여 가문의 문장으로 쓰게 했다.그런데 이 타다오키로서는 평생 기억할 만한 선물인 구요 문장이 정확히 168년 후에 사고의 원인이 되었다. 큰 원 하나를 작은 원 8개가 둘러싸고 있는 구요성의 문장이 호소카와 가의 문장인데 이 문장 때문에 후손인 호소카와 무네타카(細川宗孝, 1716 ~ 1747)가 비명횡사하고 개역의 위기에 처하게 되고 만 것이다. 사건인즉슨 7,000석짜리 하타모토(旗本)[16]인 이타쿠라 카츠카네(板倉勝該, ? ~ 1747)라는 자가 정신 착란을 일으쳐 본가인 안나카 번주인 이타쿠라 카츠키요(板倉勝清, 1706 ~ 1780)가 자신을 폐하려 한다는 피해 망상에 빠져 이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타쿠라 카츠카네는 본래 기행이 잦고 심약하면서도 광폭한 성질이라 가족들도 슬금슬금 피하는 위험 인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쯧쯧 저러다가 언젠가 폐적을 당할거다'라는 소문이 주위에 도는 것을 듣고 그만 꼭지가 돌아버린 것. 그런데 뜬금없이 엔쿄(延享)4년(1747년) 8월 15일 이타쿠라 카츠키요가 아닌 호소카와 무네타카를 에도 성 내의 혼마루에서 참살해버린 것이었다. 범인인 이타쿠라 카츠카네는 바로 체포되어 며칠 후인 8월 23일에 할복했다.
이타쿠라 가문의 문장이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과 디자인 자체는 완전히 같지만 원의 모양이 다른 구요 토모에(九曜巴)란 문장을 쓰고 있었는데 혼미한 와중에 실루엣이 똑같은 호소카와 가의 문장을 보고 이타쿠라 본가 당주인 이타쿠라 카츠키요로 착각하고 칼질을 해버린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이타쿠라 카츠카네가 잘못 보고 칼질한 것이 아니고, 정확히(?) 호소카와 무네타카를 노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진 유학자 오오야키 쥰도(大谷木醇堂, 1838 ~ 1897) 저서인 에도시대 여러 소문들을 모아놓은 책자인 쥰도소로쿠(醇堂叢稿)에 따르면 카츠카네의 저택은 쿠마모토 번의 에도야시키(각 번이 에도에 설치한 대사관 같은 기관이다. 번의 영주가 에도에 머물 경우 이 에도야시키에서 기거하게 된다)의 바로 아래쪽에 있었는데, 비가 내릴 때마다 에도야시키로부터 온갖 오물이 섞인 흙탕물이 카츠카네의 집을 향해 흘러 내렸다고 한다. 이에 빡친 카츠카네가 몇번에 걸쳐 어떻게 좀 해보라고 호소카와 무네타카에게 항의하였으나 호소카와 측은 무시로 일관하였고, 머리 끝까지 분노한 카츠카네가 쿠마모토 번 에도야시키 문을 걷어차며 난동을 부리는 등 평소부터 관계가 극히 나빴다는 것이 그 근거. 단 어쨌든 공식적인 기록상 범인 스스로가 잘못보고 썰어버렸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이타쿠라 카츠키요를 노리다가 문장을 착각해서 무네타카를 죽였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참살당한 당시 호소카와 무네타카는 아직 31살의 젊은 나이라 후사가 없었고 나이가 젊으니 만큼 당연히 비명횡사에 대비한 양자를 세워 놓지도 않아 대가 끊기게 되었고, 게다가 에도 성 혼마루에서의 칼부림이 일어난 아코 사건 이후로 비슷한 사례에는 양쪽에게 모두 책임을 적용했기 때문에 개역당하게 될 가능성이 커서 구마모토 번은 제대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에 놓였다.
구마모토 번의 무사들이 대량으로 실업자가 될 그 위기의 순간 등장한 것이 마침, 혼마루 근처를 지나고 있던 다테 마사무네의 증손자 다테 무네무라(伊達宗村, 센다이 번 6대 번주, 1718 ~ 1756)였다. 증조부를 닮아 재치가 있었던 그가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어서 저택으로 옮겨 치료하라' 고 한마디 해준 것이 구마모토 번을 살린 한마디가 됐던 것이다. 그 말에 따라 얼른 시신을 호소카와 저택으로 옮기고, 무네타카의 동생 나가오카 노리오(長岡紀雄, 1721 ~ 1785)[17]를 양자로 삼은 후에 이튿날 결국 숨을 거뒀다며 한 편의 연극을 펼쳐 개역을 막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테 무네무라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다. 만약 호소카와 가의 무사들 중 하나가 그런 아이디어를 내서 연기를 하려고 해도 뻔한 송장을 두고 속아줄 사람도 없고 들이닥칠 막부 관리들을 납득시킬 수도 없었겠지만, 도쿠가와 가와 그 방계 일파들을 제외하면 첫손에 꼽히는 거대 번주인 데다가[18] 에도에서 소비하는 쌀의 절반이 센다이산이라고 할 만큼 여러모로 입지가 거대한 인물이 즉석에서 두둔해주는데 거기에 감히 딴지 걸 사람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쿠마모토 번도 센다이만큼은 아닐지언정 규모가 컸던 터라[19] 무작정 개역시켰다간 실업자 대량 양산의 부작용을 낳을게 뻔한지라 막부 수뇌부가 알면서도 묵인해줬을수도 있다.[20]
결국 오다 노부나가와 어린 호소카와 타다오키 간의 훈훈한 미담은 백수십년 후 가문을 단절시킬 뻔한 참사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는 기묘한 이야기다. 이 참사 후에도 호소카와 가문은 구요성의 문장을 버리진 않았지만 원의 크기를 살짝 줄여 실루엣을 다르게 했다는 후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건에서 호소카와 가를 도와준 다테 무네무라의 가문인 다테 가의 문장 중 하나도 구요문이다. 그것도 다테 무네무라의 선조인 다테 마사무네가 호소카와 타다오키 본인에게서 받은 것.
4. 기타
- 편지 쓰기를 좋아해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그 내용이 다른 무장들 이야기라서 전국 무장들의 일화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 마사무네 공이 이러이러한 미친 짓을 했다는데 안 믿기겠지만 무네시게 공이 말했으니까 진짜인 듯' 식으로. 앞서 언급된 다테 마사무네나 타치바나 무네시게와는 친밀한 사이였던 듯 하며[21] 쿠로다 나가마사와는 이런 저런 일들로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 前 일본 총리인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이 사람의 후손이다.
-
일본 가죽공예가가 만든 타다오키 골판지 머리통.
5. 창작물에서
5.1. 드라마
5.2. 바사라 2
바사라 2의 호소카와 타다오키. 후지타카의 강화판으로 등장한다.
아케치 미츠히데로 플레이하면 제1면이 노부타다의 스테이지임에도 불구하고 후지타카 대신 등장한다.
5.3.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와 태합입지전 시리즈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
노부나가의 야망에선 그냥저냥 B급 무장. 무력을 제외하면 아버지의 마이너버전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혼노지의 변 이후 시나리오가 구현된 작품에서는 다이묘로도 나온다.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에서는 전국전에 간간히 등장. 센 리큐의 죽음 이벤트에서는 스승 센 리큐의 구명을 위해 노력하며 눈물로 센 리큐를 떠나지 말라 하는 의리남.[22] 그를 '애송이'라 칭하며 츤츤대는 후루타 오리베와 투닥대는 모습이 귀엽다. 세키가하라 전투 전국전에선 가라샤의 죽음에 분노하며 동군에 참여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능력은 75/72/75/78에 불과하지만 이놈도 수명이 무기인지라(...) 세키가하라 전투 시나리오에서는 이 정도면 충분히 준수한 편.
태합입지전에서도 마찬가지. 5를 기준으로 할 때 아버지의 능력치는 80 / 60 / 91 / 88 / 89인데 타다오키의 능력치는 78 / 68 / 80 / 72 / 73이며 기능 레벨도 전투, 내정은 비슷하지만 그외는 전반적으로 아버지에 비해 1등급씩 떨어지는 정도. 특히 변설이 1등급밖에 안되는건 조금 아쉽다. 그래도 저 정도면 나름대로 우수한 만능형 인재라고 할 수 있겠다. 철포 적성만 3레벨이기 때문에 철포대를 맡길 경우 유용하다. 1598년 태평의 장 시나리오로 플레이할 경우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할 것인지 관망할 것인지를 고를 수 있는데 참가하게 될 경우 공을 세워 영지를 받을 수 있으나, 가라샤가 인질이 되어 이벤트로 사망하고 가라샤 호위로 남겨둔 오가사와라 쇼우사이도 같이 죽으며, 이나토메 이치무는 낭인이 되어버린다. 관망하면 가라샤는 생존하나 영지 변화 없이 오사카 진의 전투 이벤트로 이어진다.
5.4. 지휘봉의 행방
비주얼 신장 183cm, 비주얼 연령 23세, 취미는 그림, 춤, 차 끊이기, 좋아하는 음식은 차.
평상시에는 단정한 외모의 미청년이나 폭주할 때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뱀파이어.
아내를 본 정원사를 단칼에 베어버렸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진위는 불명) 아내 가라샤를 지극히 사랑하나 호소카와 가의 사정으로 인해 반 유폐에 가깝게 집 안에 가둬두고 있다. 자유를 빼앗은 것에 대해 미안해하면서 그것을 이해해주는 아내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집 안에 갇혀있는 아내를 위해 한 쌍의 새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가라샤가 의문의 죽음을 맞자 이것이 모두 이시다 미츠나리 때문이라 여기고 원한을 품어 미츠나리가 있는 본진으로 돌진한다.
그러나 미츠나리의 필사적인 설득에 의해 오해를 풀고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고민하며 전투에 소극적으로 임하다가 시마 사콘의 기마대에 당해 패퇴. 그 뒤로는 등장이 없다.
[1]
태양과
달, 육안으로 보이는
행성 5개와 일식·월식을 형상화한 별 2개를 뜻한다.
[2]
당대의 유명한 다인
센 리큐의 제자들중 특히 뛰어난 7명을 일컫는 말.
아라키 무라시게 등 3명을 추가하여 리큐십철이라고도 한다.
[3]
산사이(三斎)는 타다오키의 호이다.
[4]
잇시키 가는 본디 단고의 슈고 다이묘였는데, 아케치 미츠히데의 공격을 받아 패망 직전까지 몰렸으나 요시사다가 끝까지 저항하자 오다 노부나가가 방침을 바꿔 구슬러 항복시키고 가신으로 삼았다.
[5]
가라샤가 정원에 나와 대야에 손을 씻고 있는데 정원사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정원사를 베어 죽였다. 그때 대야에 피가 튀었는데도 무덤덤한 가라샤를 보며 타다오키가 "이 뱀 같은 것"이라고 내뱉었는데, 가라샤도 태연하게 "마귀의 짝으로는 뱀이 제격이니까요."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6]
묘하게도 가토 기요마사가 죽은 뒤 1632년 타다오키의 아들 타다토시가 구마모토 번주로 이봉되어 기요마사가 애써 지은 구마모토 성을 차지한다.
[7]
교토부 마이즈루시에 있는 윤곽식 평성이다. 나중에 에도시대에는 타나베번(田辺藩)으로 승격한다.
[8]
문서의 형태로 국왕에게 올리는 모든 문서 양식
[9]
카라스마루는 이후 고요제이 덴노의 여자와 밀통한 것이 이노쿠마 사건을 통해서 들통나자 관직에서 파면당한다.
[10]
법명이 슈코인(春香院)이다. 생몰은 1580 ~ 1641
[11]
마에다 토시이에의 장남. 카가번(加賀藩, 폐번치현 후
이시카와현)을 중심으로 하여 호쿠리쿠(北陸) 지방의 백만석(石) 다이묘로 성장한다. 참고로 백만석이라면 도쿠가와 쇼군가 다음가는 석고(石高)이며 지방 다이묘 가운데 최대이다. 여담으로
마에다 케이지와는 사촌뻘이다.
[12]
도요토미 정권 오봉행(五奉行) 가운데 한명으로 이에야스 암살 음모 가담 혐의로 근신 처분을 받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아들
히데타다 편에서 참전하여 가문을 지킨다. 18세기 초 그의 후손인 아코(赤穂,
효고현 서부)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가 에도성에서 예절 문제로 칼을 뽑다가
할복을 명받는데, 이로 인해 졸지에 주군을 잃고 낭인 신세가 된 휘하 가신 무사들이 주군을 위해 최후의 복수전에 나선다는 이야기가 일본
에도시대의 대표작 "
추신구라(忠臣藏)"이다.
[13]
폐적당하긴 해도 막대한 은거료를 받고 교토에서 평생을 보내게 된다. 1646년 타다오키가 죽어가자 화해하지만 아비가 죽고나서 곧 교토로 돌아가버린다. 아비가 죽고나서 1년도 안되어서 67세 나이에 죽게 된다.
[14]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 심지어 덴노까지 사면(赦免)해줬는데도 여러 가지 이유로 거절해버렸다.
[15]
중매도 노부나가가 섰다. 이래저래 타다오키의 은인인 듯.
[16]
에도 시대 무사의 등급 중 하나로,
쇼군에 직속된 무사로서, 직접 쇼군을 만날 자격이 있는, 녹봉 500석 이상 ~ 1만석 미만의 무사를 일컫는다. 녹봉은 낮아도 격식은 다이묘급이라서 다른 다이묘이라도 존중해주었다.
[17]
입양되면서 이름을 호소카와 시게카타(細川重賢)로 고쳤다. 그는 통치하면서 번의 재정을 개혁하고, 텐메이 대기근이 일어났을 땐 사재를 털어 구제에 나서는 등 당대에 명군으로 불렸다.
[18]
센다이 번의 공식 석고는 62만석이었지만 100년만에 실질 석고는 무려 2백만석에 달했다. 첫 번주였던 다테 마사무네부터가 첫 석고에서 2배나 되는 규모로 키운데다 대를 이어가며 계속해서 석고를 늘리다보니 이정도에까지 이른 것.
[19]
쿠마모토 번의 명목상 고쿠다카는 54만석이었지만 실제로는 6~70만석에 가까웠다.
[20]
에도시대의 사회문제 중 하나는 로닌이었다. 근데 이 로닌은 바로 해고된 무사들인데다 그 수가 50만이나 되어서 막부의 큰 골칫거리였다. 그러니 무턱대고 개역시켰다간 로닌 문제가 더 심해지게 된다.
[21]
타다오키의 가문인 구요문을 마사무네에게 주기도 한다
[22]
히데요시를 두려워해 아무도 센 리큐를 만날 생각을 못하는데 오직 그만이 쫓겨난 센 리큐를 직접 찾아온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