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21:29:05

호금전

호금전
胡金銓
파일:external/www.hkmdb.com/SonsofGoodEarth+1965-41-b.jpg
감독 데뷔작 대지아녀(大地兒女)에 항일유격대장 역할로 직접 출연했을 당시 모습
본명 <colbgcolor=#fff,#1f2023>호금전 (胡金銓, King Hu)
국적 중국 파일:중국 국기.svg
출생 1932년 4월 29일
중국 베이징시
사망 1997년 1월 14일 (향년 64세)
대만 타이베이시
직업 영화감독, 각본가, 프로듀서, 배우
링크 파일:IMDb 로고.svg

1. 개요2. 생애 및 작품 활동
2.1. 홍콩에서의 작품 활동기2.2. 대만에서의 작품활동기2.3. 홍콩 복귀후 작품활동기
3. 호금전에게서 영향을 받은 감독4. 필모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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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영화 감독, 각본가, 배우.

장철 감독과 같은 시대를 살면서 전혀 다른 느낌의 무협 영화들을 만들어냈던 거장. 장철 감독의 영화가 남성미가 넘쳤다면 호금전 감독은 여성미와 절제 그리고 섬세함과 뛰어난 미장센에 초첨을 맞추었다.

장철 감독은 마초스타일의 남성의 의리와 배신이 주제라면 호금전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자신의 뛰어난 미적감각을 영화에 투입시켰다. 그래서 호금전 감독은 무협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이끌어 올렸다고 평가받는 감독이다. 1975년엔 영화 < 협녀>로 무협영화임에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을 받아, 중화권 영화로는 최초로 칸 영화제 기술대상을 수상하였다.

2. 생애 및 작품 활동

2.1. 홍콩에서의 작품 활동기

베이징에서 태어나 1948년 홍콩으로 이주한 후 여러 일자리를 전전한다. 광동어를 전혀 할줄 몰랐기 때문에 말을 별로 안 해도 되는 직업을 찾으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 영화사에 미술감독으로 취직하였는데, 그 때 만난 엄준이라는 감독에게서 배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단지 돈을 더 받을 수 있겠다는 단순한 이유로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때의 그는 영화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에, 급한 대로 엄준 감독에게 속성으로 연기를 배우고 촬영을 시작하였는데, 자신이 주인공을 맡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한다.

이후 1958년 정식으로 쇼브라더스에 입사하여 배우 활동을 지속, 배우로 유명해진다. 배우 활동을 할 때에는 호금전에서 성인 호를 뺀 금전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였다. 호금전은 쇼브라더스의 배우 훈련반에서 교사로 신인 배우들을 교육하기도 했는데, 대취협의 주연 여배우 정패패가 이 당시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또한 당시 홍콩 영화계의 이한상 감독의 조감독으로도 일하며 영화를 공부하며 감독 데뷔를 준비하였다.

1963년, 드디어 감독 데뷔의 기회를 잡은 호금전은 첫 영화 <대지아녀>(大地兒女)를 만들었지만 많은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하였고, 두 번째 영화인 <옥당춘>(玉堂春) 마저 흥행에 실패하자 쇼브라더스의 회장 소일부가 권유한 무협 영화를 감독하게 된다. 그 영화가 바로 <대취협>이다. 호금전은 딱히 무협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고 무술 실력도 없었기에 경극을 하던 한영걸[1]을 무술감독으로 고용하고, 중국의 전통극들을 참고해서 <대취협>을 만들었다. <대취협>을 찍을 당시, 호금전은 <대취협>의 주연 여배우를 제자인 정패패로 일찌감치 낙점하였으나 남자 주인공을 맡을 만한 배우가 마땅히 없어서 호금전 본인이 남자 주인공을 연기하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사의 반대로 결국 신인급 배우인 악화를 캐스팅 하게 되었고, 정패패와 악화 모두 이 영화로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대취협>을 촬영할 때 영화 제작비, 배우 선정 등의 문제로 쇼브라더스의 총수 소일부와 계속해서 갈등을 겪던 호금전은 결국 <대취협>을 완성하고 쇼브라더스 영화사를 퇴사하고 대만으로 활동 장소를 옮긴다. 그의 친구이자 스승인 이한상도 비슷한 시기에 소일부와의 마찰로 쇼브라더스에서 퇴사하여 대만에서 영화사까지 설립하고 활동하였다.

2.2. 대만에서의 작품활동기

대만으로 활동 장소를 옮긴 뒤 호금전이 만든 < 용문객잔>< 협녀>는 그 뛰어난 완성도로 감독의 최고작이라는 평가는 물론 흥행에도 성공하며 호평을 받았다.

1967년작 <용문객잔>은 1992년 이혜민 감독이 장만옥, 임청하, 양가휘, 견자단을 주연으로 하여 <신 용문객잔>으로리메이크 했고, 왕가위 감독이 동사서독으로 오마주한 작품이다. 대만의 거장 감독 차이밍량 안녕, 용문객잔으로 작품으로 경의를 표했다. 또한, 극중의 실제 <용문객잔>의 두 주인공이 출연하기도 했다.

용문객잔으로 흥행기록을 수립한뒤 3년만에 촬영한 1971년작 < 협녀>는 훗날 편집본으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 기술대상을 받게 된다. <협녀>는 중국의 고전을 각색한 걸작으로, 숲속의 버려진 집에서 신분을 감추고 사는 여검객이 비밀 경찰의 앞잡이들에게 쫓기다가 불교에 귀의한다는 내용이다. 조악했던 홍콩영화의 역사를 급진전시킨 작품으로, 중국의 문학전통, 경극, 음악, 미술의 폭넓은 세계를 보여준다. 환상적인 검술의 엑스타시와 괴담, 궁정사극까지 장르를 포괄하는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는 평가이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타임지 선정 100대 영화, 스크린 선정 20세기 100대 영화 13위로 각 매체에서 찬사를 받는 작품이다. 또한, <협녀>는 장예모 감독의 연인, 허우샤오셴 감독의 자객 섭은낭,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를 비롯한 무수한 작품에 영향을 준 걸작이라는 평가이다. 대만감독 이안 와호장룡은 <협녀>의 오마주 작품으로, 유명한 대나무 결투씬에서 잘 드러난다. 더구나 <대취협>의 주인공 <정패패>가 출연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토록 호평과 흥행을 둘 다 거머쥐었지만, 특유의 완벽주의 때문에 호금전의 재정 상태는 파산 일보직전이었다.

2.3. 홍콩 복귀후 작품활동기

결국 호금전은 쇼브라더스의 라이벌 회사인 골든하베스트사와 계약을 맺고 1973년작 <영춘각의 풍파>와 1975년작 <충렬도>를 감독하며 홍콩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 때 무술 감독을 맡은 사람이 바로 홍금보다. 하지만 호금전은 이 영화들을 감독할 때 다시 영화사와 마찰을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중화권 영화 제작사들에게 블랙리스트로 찍혀서 한동안 메가폰을 잡지 못했다.

70년대 말이 되어서야 한국에서 겨우 영화 자금을 확보한 호금전은 1979년 <공산영우>와 <산중전기>를 동시에 제작, 완성한다. 두 영화 모두 한국의 해인사, 불국사, 설악산 등에서 촬영을 했는데 호금전은 헌팅과 촬영기간을 포함해서 거의 1년 가까운 시간을 한국에서 보냈다.

1980년에는 홍콩, 대만, 중국, 미국을 오가며 두편의 영화를 기획했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의 오페라 또한 기획하려 했으나 세 작품 모두 무산되고 만다.

1981년 대만에서 첫 코미디 장르인 <종신대사>를 감독하며 장르의 범위를 넓히는 시도를 했고, <천하제일>, 옴니버스 영화 <대윤회> 등에 작품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간다.

1984년부터는 미국, 일본 등 전세계 등지에서 회고전 순회를 열며 거장의 위치를 확고히 했고 1986년에는 타이베이에서 연극 <나비의 꿈>을 연출하기도 했다.

1989년에는 김용의 소설 《 소오강호》를 원작으로 한 영화 〈 소오강호 1990〉의 연출을 맡았으나, 제작자였던 서극과의 의견 차이로 인해 감독 자리에서 하차하고 만다. 호금전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촬영 전에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준비해놓는 타입이라서 촬영 도중에 시나리오를 수십 번이나 바꾸는 서극의 스타일을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또한 작품의 성격에 대해서도 서극은 동방불패 같은 와이어액션과 CG를 넣은 퓨전무협을 원했고, 호금전은 정통무협을 추구해서 '너랑은 도저히 더는 못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감독을 그만뒀다고 한다.

1996년에는 미국에서 서부개척사 당시의 철도 노동자로 일했던 중국인들의 삶을 그린 영화 <화공혈루사>(華工血淚史)에 주윤발을 캐스팅하는 등 야심찬 계획을 세웠으나, 건강 이상으로 인해 입원 하던 도중 1997년 1월 14일 타이베이에서 심장수술을 받은 직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유해는 LA에 묻혀있다고 한다.

3. 호금전에게서 영향을 받은 감독

  • 쿠엔틴 타란티노
  • 장예모
  • 정소동
  • 류승완 - 호금전의 팬으로 유명해서 대취협 dvd가 나올 당시 코멘터리에 참여하기도 했었고, 아라한 장풍대작전 촬영 당시 인터뷰에서 협녀를 참조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 오우삼 - 사실 오우삼은 호금전의 라이벌격인 장철의 직계에 가깝다.
  • 이안 - 와호장룡이 < 협녀>의 오마주 작품이다.
  • 차이밍량 - 안녕, 용문객잔으로 경의를 표했다.
  • 서극 - 서극의 경우 호금전 감독의 < 용문객잔>의 리메이크작 신용문객잔의 제작을 도맡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리메이크 제작 당시 호금전의 허락을 받지 않고 진행한데에다가, 상술했던 〈 소오강호 1990〉 제작 당시의 불화 일화 등 때문에 호금전 감독의 팬들 사이에서는 '서극 감독이 자처하는 것만큼 진정 호금전의 후계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 격렬하게 비난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서극의 작품 <서극의 칼>이 장철 감독의 <독비도>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비판까지 곁들여 '서극은 그냥 돈 될 것 같은 작품은 다 건드려보는 사람일 뿐이다'라고 비판한다.

4. 필모그래피

연도 제목 연출 각본 제작 비고
1963 대지아녀
大地兒女
Sons Of The Good Earth
O O 장편 연출 데뷔작
1964 옥당춘
玉堂春
The Story of Sue San
O O
1965 대취협[2]
大醉俠
Come Drink With Me
O O 객잔 4부작,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작, 국내에서 DVD 출시
1967 용문객잔[3]
龍門客棧
Dragon Inn
O O 객잔 4부작,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183위, 국내에서 DVD 및 VHS출시
1970 희로애락 中 <지노>
喜怒哀樂
Joy Anger Sadness Happiness
O O 객잔 4부작, 옴니버스 영화 참여작
1971 협녀
俠女
A Touch of Zen
O O 풍경 4부작, 칸 영화제 기술대상,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작, 타임지 선정 100대 영화, 스크린 선정 20세기 100대 영화 13위(국내에서 VHS 및 DVD출시)
1973 영춘각의 풍파
迎春閣之風派
The Fate of Lee Khan
O O 객잔 4부작, 국내에서 VHS출시
1975 충렬도
忠烈道
The Valiant Ones
O 풍경 4부작, 국내에서 DVD 및 VHS 출시
1979 공산영우[4]
空山靈雨
Raining in the Mountain
O O 풍경 4부작, 국내에서 촬영
1979 산중전기
山中傳奇
Legend of the Mountain
O O 풍경 4부작, 국내에서 촬영, 국내에서 DVD 및 VHS출시
1981 종신대사
終身大事
Marriage
O O
1982 천하제일
天下弟一
The Invincible Ones
O O 국내에서 VHS출시
1983 대윤회 中 <제1세>
大輪廻
The Wheel Of Life
O 옴니버스 영화 참여작
1990 소오강호 1990
笑傲江湖
Swordsman
O 공동 감독[5]
1992 무림객잔[6]
畵皮之 陰陽法王
Human Night In Painted Skin
O O 유작


[1] 후에 당산대형, 정무문등으로 유명해지는 무술감독 겸 배우 [2] '방랑의 결투'라는 표기도 쓰인다. [3] 서극이 제작하고 이혜민 감독이 1992년 <신용문객잔>으로 리메이크 했다. 임청하, 장만옥, 양가휘 출연. [4] 국내 개봉 당시에는 '사문의 승객'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었다. [5] 제작자였던 서극과의 스타일 차이로 인한 불화 때문에 감독직에서 중도 하차했다. [6] '영왕법왕'이라는 표기도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