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현춘(玄春) |
생몰년도 | 미상 |
1. 개요
신라 말기의 해적. 신라구 중 유일하게 이름이 기록에 남아있는 경우이다.2. 생애
통일신라 말에 정부의 세금 독촉으로 지방에서 연쇄 반란이 시작되어 전국이 혼란해지자 현춘과 그 일당은 남해안을 기점으로 해적질을 하기 시작했는데, 894년에는 신라인 해적들이 일본 규슈의 구마모토현까지 약탈했을 정도였다. 이후 배 100척과 2천 5백명이라는 일개 해적집단으로 보기엔 굉장히 큰 규모로 다시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를 습격하여 피해를 주었지만, 쓰시마노카미 훈야노 요시토모(文屋善友)가 지휘하는 일본 관군에게 패배해 결국 포로로 붙잡힌다.포로로 잡힌 현춘이 말한 것에 따르면 신라왕의 명에 따라 곡물과 천을 빼앗으라고 하여 배 1백 척과 2,500명의 군사를 각지에 파견하였으며, 자신들은 신라 왕이 파견한 부대 중에서 일부라고 증언했다. 이는 일본기략, 부상략기라는 책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현춘이 정말로 왕명에 따라 공격을 한 것인지 현춘이 왕명을 사칭한 것인지는 기록이 간략하여 알 수 없다.
그의 기록은 이걸로 끝인데, 해적 특성상 잡혔으니 좋은 꼴은 보지 못했을 걸로 추측된다. 처형되었거나 목숨을 건졌다 해도 일본 동부 변방으로 유배되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신라구에게 당한 것이 많아 죄 없이 단순히 일본 서부에 머물고 있던 재일 신라인도 일본 반대편 오지 도호쿠로 강제이주시키는 상황이었다.
신라인들로 구성된 신라구가 4차례에서 걸쳐 일본을 공격한 것은 일본에서 충격적인 사건으로 남게 되는데, 이 중에서 현춘은 간표의 한구라는 사건에서 나타난 해적으로 이처럼 신라의 해적들이 일본을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자 일본에서 신라인 입국 금지령까지 내리고 기존에 일본에서 거주하던 신라인은 무츠( 도호쿠) 등 변방으로 강제이주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