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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로버트 '핵' 윌슨 Lewis Robert 'Hack' Wil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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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0년 4월 26일 |
펜실베이니아 주 엘우드 시티 | |
사망 | 1948년 11월 23일 (향년 48세) |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포지션 | 중견수 |
투타 | 우투우타 |
신체 | 168cm, 86kg |
프로입단 | 1923년 뉴욕 자이언츠 자유계약 |
소속팀 |
뉴욕 자이언츠 (1923~1925) 시카고 컵스 (1926-1931) 브루클린 다저스 (1932-1934) 필라델피아 필리스 (1934) |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핵 윌슨 | |
헌액 연도 | 1979년 |
헌액 방식 | 베테랑 위원회 |
1. 개요
1930년대를 대표하는 강타자 중 하나로 홈런왕 4회, MLB 한 시즌 역대 최다 타점 191개에 빛나는 타자. 하지만 동시에 술 때문에 화려했던 현역 시절을 짧게 마무리하고, 불과 만 48세의 나이로 요절한 비운의 타자이기도 하다.2. 선수 경력
1900년 펜실베이니아 주 엘우드 시티에서 태어난 로버트 루이스 윌슨은 어릴 때부터 괴력으로 유명해 일명 해머링 핵(Hammering Hack)[1]으로 불리며 10대를 기관차 회사와 조선소에서 보냈다. 그러다 메이저리그의 눈에 띄여 1923년 뉴욕 자이언츠에서 데뷔하게 되는데, 처음부터 맞는 치수의 유니폼이 없어 곤란에 빠진 윌슨에게 당시 뉴욕 자이언츠의 감독 존 맥그로가 한 벌의 유니폼을 건네고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위대한 선수가 입었던 이 유니폼을 불명예스럽게 만들지말라."
"걱정 마라, 이 유니폼은 또 한 명의 위대한 선수에게 계승됐다."
그야말로 괴력과 자신감 덩어리인 핵 윌슨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에피소드.[2] 하지만 자신감과 달리 핵 윌슨은 자이언츠에서 뛴 3년 동안 불과 172경기 출장, 16홈런 87타점에 그친다. 타율-출루율-장타율 슬래시 라인은 276/.352/.461 에 불과. 물론 이것도 좋은 기록이지만 윌슨의 자신감을 뒷받침 해주기는 부족했다. "걱정 마라, 이 유니폼은 또 한 명의 위대한 선수에게 계승됐다."
결국 핵 윌슨은 이듬해 시카고 컵스로 이적하는데, 리글리 필드에서 윌슨은 비로소 실력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1926년부터 1928년까지 3시즌 동안 각각 21홈런-30홈런-31홈런을 기록하며 홈런왕 3연패에 등극.[3][4] 기세를 몰아 윌슨은 1929년에도 홈런왕 4연패를 위해 시동을 걸고 시즌 39홈런을 기록하나 43개의 척 클라인, 42개의 멜 오트에게 밀려 시즌 3위에 그치고 만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9시즌 핵 윌슨의 성적은 어마무시하여 시즌 159타점으로 NL 및 MLB 통합 타점왕에 오른다. 더불어 1929시즌 시카고 컵스는 간만에 월드시리즈에 올라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 패권을 겨루게 되는데, 당시만 해도 선글래스 등의 장비가 열악한 터라 4차전에서 햇빛에 평범한 타구를 놓치는 등의 실수를 연발하게 되고 결국 1승 4패로 시리즈를 내주게 된다. 이후 핵 윌슨은 다시는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대망의 1930시즌이 돌아오는데.
1930시즌 핵 윌슨의 성적은 다음과 같다.[6]
155게임 709타석 585타수 208안타 2루타 35개 3루타 6개 56홈런 191타점 146득점 105볼넷 84삼진 타율 .356 출루율 .454 장타율 .723 OPS 1.177 조정 OPS 177[7]
당장 전 시즌 척 클라인이 기록한 NL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 무려 13개 차이로 갱신되었고, 이 기록은 훗날 약쟁이 두 놈이 갱신하기 전까지 68년간 자리를 지키게 된다. 물론 타점 기록은 그야말로 불멸의 대기록. 훗날 루 게릭이 1931시즌 184타점, 행크 그린버그가 1937시즌 183타점, 지미 팍스가 1938시즌 175타점, 어느 약쟁이가 1998년 157타점[8], 또 다른 약쟁이가 1999시즌 165타점 등으로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만다. 심지어 1930시즌 핵 윌슨의 기록을 162경기에 대입한다면 무려 60홈런 200타점이 나온다. ESPN이 선정한 불멸의 대기록 TOP 10에 손꼽히기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타점이란 기록이 워낙 선행 주자의 유무에 따라 달라지며, 1930시즌 핵 윌슨의 앞에서 밥상을 깔아주던 이들이 개비 하트넷과 로저스 혼스비 라는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이라는 유리함이 있지만, 그렇다 하여도 찬스 때마다 여지없이 주자를 불러들인 핵 윌슨의 해결사 능력은 폄하할 수가 없을 것이다.
1930시즌은 핵 윌슨에게 있어 불멸의 대기록을 수립한 시즌이지만, 동시에 마지막 불꽃과 같은 시즌이기도 했다.
3. 말년
1931년 그를 이끌어주던 감독 조 맥카시가 뉴욕 양키스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떠나고, 팀 동료이던 로저스 혼스비가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하며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평소 술을 물처럼 들이키던 그를 제어해주던 이가 없으니 점차 폭력적으로 변해 팀 동료 및 상대방 선수들과 그라운드 내에서 주먹다짐을 하기 시작하고, 컵스의 다른 외야수들은 윌슨이 외야에서 뛰지 않는다고 불평을 일삼았다. 결국 1931시즌 고작 13홈런 61타점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한 윌슨은 이후 브루클린 다저스와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거치며 급격하게 몰락,[9] 만 34세의 나이로 유니폼을 벗고 만다. 통산 244홈런 1063타점의 기록과 함께. 은퇴 후 14년이 지난 1948년, 메이저리그의 한 시대를 풍미한 강타자 핵 윌슨은 볼티모어에서 눈을 감고 만다.사망하고 31년이 흐른 1979년, 베테랑 위원회의 추천으로 핵 윌슨은 마침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 그레이잉크 | HOF 모니터 | HOF 스탠다드 | |
핵 윌슨 | 31 | 110 | 102 | 39 |
HOF 입성자 평균 | 27 | 144 | 100 | 50 |
- JAWS - Center Field (43rd)
career WAR | 7yr-peak WAR | JAWS | |
핵 윌슨 | 38.9 | 35.8 | 37.3 |
중견수 HOF 입성자 평균 | 71.2 | 44.6 | 57.9 |
5. 여담
- 위스키를 물처럼 마시거나, 커다란 망치를 나뭇가지처럼 다루며 못을 박는다거나, 눈이 쩍 벌어질만한 커다란 홈런으로 주자를 불러들이는 일 세 가지를 아주 잘했다고 한다.
-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구단주였던 빌 빅은 핵 윌슨을 일컬어 '어깨에는 옷걸이가 들어있고 위장에는 수박이 들어있는 것처럼 이상하리만치 땅딸막한 통처럼 생긴 사람' 이라고 표현했는데, 프로필 상 핵 윌슨의 사이즈는 168센티미터 86킬로그램이지만 실제로는 키가 165센티미터도 안 되었고 몸무게는 최소 90킬로그램 이상이었다고 한다. 마치 드럼통이나 바윗돌을 연상케 하는 땅딸막한 체구였다는 것. 그 호세 알투베보다도 키가 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력이 마치 고릴라와 같았다고 하는데, 이는 타고난 괴력이라 야구를 하기 전인 10대 때는 기관차를 제조하는 공장이나 조선소에서 육체 노동을 했었다고 한다.
- 아무런 반발력이 없는 노크볼을 후려쳐 담장을 넘길 정도의 괴력을 가진 사나이었으나, 사실 그 괴력보다도 가공할만한 배트 스피드가 유명했다고 한다. 종종 낮은 볼은 안타를 치고 높은 볼은 홈런을 쳐내는 타자 라고 불릴 정도로 배드볼 히터에 가까운 스타일이었으나 통산 2차례 최다 볼넷을 기록할 만큼 선구안이 좋았고, 단 한 번도 시즌 100삼진 이상 당한 적이 없으며 통산 타율이 3할 이상인 정교한 타자기도 했다.
- 은퇴 후 종종 "내가 술만 안 마셨어도 베이브 루스보다 더 많은 홈런을 기록했을 것." 이라고 한탄했으나, 이미 그때는 알콜 중독에 빠져 몰락하고 있던 때. 야구에 만약은 없지만[10]정말 그가 술을 마시지 않고 야구에 전념했다면 가능했을 수도 있다고 예측된다. 그의 전성기인 1926 ~ 1930년의 불과 다섯 시즌 동안 기록한 177홈런 707타점만 봐도. 과도한 음주와 만 24세라는 다소 늦은 주전 데뷔가 안타까운 전설의 타자.
- 한때 내셔널 리그 최고액 연봉자였지만 죽을땐 돈 한푼 없는 신세였다. 생전 아버지한테 학을 뗀 아들 로버트는 그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 조차 거부했고, 결국 MLB 수장 포드 프릭이 돈을 보내준 후에야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 C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방탕한 인생을 참회하는 인터뷰를 했다. 이것이 그의 사망 1주일 전이였으니, 유언이였던 셈이다.
- "재능만으론 부족해요. 올바른 상식과 조언이 필요하죠. 누가 아니라고 한다면, 핵 윌슨(본인)의 이야기를 해줘요. 재능있는 야구 유망주들은 재능 하나로 세상을 다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착각이에요. 소년들이여. 옳은 조언을 무시할정도로 거만해선 못써요. 당신들은 저처럼 살면 안돼요."[11]
[1]
여기서 따온 핵 윌슨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피 위 리즈나 베이브 루스처럼.
[2]
이때 핵 윌슨이 존 맥그로에게 근데 대체 이게 누구 유니폼이길래 그러냐고 묻자, 존 맥그로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내꺼다."(...) 맥그로는 흔히 전설적인 명감독으로 알려져 있지만, 선수 시절에도 대단한 활약을 기록했다. 통산 48.9 fWAR, 시즌 최고 기록으로는 1899년의 9.0. 그리고 출루율 .467로 메이저리그 통산 3위 기록의 보유자이다.
[3]
1926시즌 21홈런은
컵스 팀 홈런 전체의 31.8%에 달한다.
[4]
1927시즌은 사이 윌리엄스와 공동 1위, 1928시즌은 짐 바텀리와 공동 1위.
[5]
1929시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컵스로 이적한 로저스 혼스비와 공동 3위.
[6]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1위.
[7]
리그 평균 OPS를 100으로 잡았을 때 수치로, 177은 곧 리그 평균보다 1.77배 잘했다는 말이다.
[8]
당시 전반기 101타점을 기록하여 기대치가 꽤 높았다.
[9]
여전히 술을 입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10]
막상 베이브 루스도 과음과 과식, 무절제한 생활로 유명했다.
[11]
Parker, Clifton B. (2000). Fouled Away: The Baseball Tragedy of Hack Wilson (Softcover ed.). Jefferson, North Carolina: McFarland & Company, Inc. ISBN 0-7864-086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