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18:15:03

행크 그린버그

행크 그린버그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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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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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결번
<rowcolor=#ccac00> No.1 No.2 No.3 No.5 No.6
<rowcolor=#ffffff> 루 휘태커 찰리 게링거 앨런 트래멀 행크 그린버그 알 칼라인
<rowcolor=#ccac00> No.11 No.16 No.23 No.42 No.47
<rowcolor=#ffffff> 스파키 앤더슨 할 뉴하우저 윌리 호튼 재키 로빈슨 잭 모리스
기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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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6px -11px;" <rowcolor=#ffffff> 하이니 마누시 휴이 제닝스 조지 켈 🎙️ 어니 하웰 🎙️ }}}
코메리카 파크 외야 담장에 헌액된 명단이다. 성명으로 헌액된 인물들은 타이 콥과 같이 당시에 배번이 없었거나, 감독 및 캐스터 등 번호가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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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35 1945

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Greenberg%20Hank%20Plaque%20284_.png
행크 그린버그
헌액 연도 1956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84.97% (9회)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35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미키 코크런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행크 그린버그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루 게릭
( 뉴욕 양키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40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조 디마지오
( 뉴욕 양키스)
행크 그린버그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조 디마지오
( 뉴욕 양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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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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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ffffff
1915년 ~
1대
해리 그레비너
파일:미국 국기.svg
(1915~1945)
2대
레사일 오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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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948)
3대
프랭크 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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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955)
4대
척 코미스키
자니 리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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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1958)
5대
행크 그린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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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1961)
6대
에드 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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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1970)
7대
스튜 홀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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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973)
8대
로널드 헤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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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1985)
9대
켄 해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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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1986)
10대
톰 할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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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11대
래리 하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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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1990)
12대
론 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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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2000)
13대
케니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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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2012)
14대
릭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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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023)
15대
크리스 게츠
파일:미국 국기.svg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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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ank Greenberg.jpg
<colbgcolor=#0c2c56><colcolor=#ffffff>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No. 5
헨리 벤자민 "행크" 그린버그
Henry Benjamin "Hank" Greenberg
출생 1911년 1월 1일
뉴욕 뉴욕 맨해튼
사망 1986년 9월 4일 (향년 75세)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93cm / 98kg
포지션 1루수, 좌익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29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 DET)
소속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30~1946)
피츠버그 파이리츠 (1947)
프런트 시카고 화이트삭스 단장 (1959~1961)

1. 개요2. 생애3. 플레이 스타일4. 은퇴 후5. 명예의 전당 입성
5.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6. 이모저모7. 연도별 성적

[clearfix]

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첫 우승을 이끌었던 프랜차이즈 스타이며 통산 장타율이 .600 이상인 6명의 선수들 중 한 명으로[1]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통산 성적은 13시즌[2] 동안 타율 .313, 출루율 .412, 장타율 .605, 1628안타, 331홈런, 1274타점, BB/K 1.01, wRC+ 154를 기록했다.

참고로 유대인 출신 선수이다.

2. 생애

행크 그린버그는 1911년 1월 1일 뉴욕에서 루마니아 출신 유대인 이주민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린버그의 아버지는 그가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바랬지만 어린 시절을 양키 스타디움이 있는 브롱스에서 보낸 그린버그의 꿈은 야구 선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자이언츠에 입단에 희망했던 그린버그는 당시 뉴욕에 정착한 유대계를 겨냥해 유대인 선수를 찾고 있던 자이언츠 구단에 의해 트라이아웃에 참가하게 된다. 그러나 존 맥그로[3] 감독은 그린버그의 큰 덩치와 굼뜬 모습을 보고 그를 뽑지 않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한편 그린버그는 루 게릭을 발굴한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터인 폴 크리첼의 눈에도 띄었다. 크리첼은 그린버그를 양키 스타디움에 초대해 배팅 연습을 하는 게릭을 가리키며 자랑했다. 그러나 그린버그는 가뜩이나 굼뜬 자신이 맡을 수 있는 포지션은 게릭이 맡고 있던 1루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 양키스의 입단 제안을 거절했다.

1930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9천 달러를 받고 입단한 그린버그는 메이저 리그에서 한 경기만을 소화하고 마이너 리그로 내려갔다. 이후 3년간 마이너 리그에서 자신을 담금질한 그린버그는 1933년 메이저 리그에 콜업되었지만 그를 마땅치 않게 본 버키 해리스 감독에 의해 제한된 기회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한된 기회 속에서도 그린버그는 .301 .367 .468 12홈런 85타점이라는 인상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이듬 해인 1934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명포수인 미키 코크레인이 감독 겸 포수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부임해오면서 그린버그에게도 기회가 오게 되었다. 코크레인은 주저하지 않고 그린버그에게 1루를 맡겼고 그린버그는 .339 .404 .600 26홈런 139타점과 함께 리그에서 가장 많은 63개의 2루타를 날리며 기대에 부응했다. 그 해 팀은 25년만에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1934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디지 딘이 이끄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의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1935년 그린버그는 .328 .411 .628 36홈런 170타점을 기록하면서 만장일치로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했고 팀은 2년 연속 월드 시리즈에 올랐다. 그린버그는 비록 2차전에서 손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지만 팀은 시카고 컵스를 꺾고 창단 35년만에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듬 해인 1936년 그린버그는 12경기 만에 경기 도중 주자와 충돌하며 전년도 월드 시리즈에서 얻은 부상이 재발해 시즌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상태가 심각해 은퇴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었다.

하지만 1937년 그린버그는 .337 .436 .668 40홈런 184타점[4]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리고 1938년에는 .315 .438 .683 58홈런 146타점을 기록하며 성역으로 여겨지던 베이브 루스의 기록에 도전했다. 하지만 5경기를 남겨두고 58홈런을 기록하고 있던 그린버그는 남은 경기 동안 홈런을 추가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훗날 그린버그는 당시 루스의 기록을 지키려던 사람들에게서 협박편지를 받았음을 털어놓았다.

1939년 .312 .420 .622 33홈런 112타점을 기록하며 건재한 모습을 보여준 그린버그는 이듬 해인 1940년 또 다른 도전을 하게 된다. 팀이 수비력이 형편 없던 루디 요크를 1루수에 기용하기 위해 그의 포지션을 좌익수로 옮겨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 피나는 노력을 통해 데뷔 시절 형편없던 1루 수비를 평균 이상으로 끌어올렸던 그린버그는 팀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었음에도 흔쾌히 받아들이고 또다시 좌익수 수비 맹훈련에 돌입했다. 그리고 그린버그는 .340 .433 .670 41홈런 150타점과 함께 리그에서 가장 많은 50개의 2루타를 날리며 두 번째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하게 된다.

이렇게 20대 후반에 빛나는 4년을 보내며 리그 최고의 타자로 발돋움한 그린버그였지만,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목이 잡혔으니 바로 군대. 유럽이 제2차 세계 대전의 화마에 휩싸인 안보 상황 속에 그린버그도 군대로 징집될 판이었고, 구단에서는 그린버그의 평발을 어필하는 등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린버그는 미루지 않고 시즌 19경기만을 뛴 후 5월 7일 자원입대했다. 이후 12월 5일에 28세 이상 군인 제대 조치에 의해 전역, 다음 시즌 준비에 들어가는 듯 했지만... 불과 제대 이틀 후, 진주만 공습이 터졌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은 전면적으로 2차대전에 참전하게 됐고, 그린버그도 재차 징집돼 미 육군 항공대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했다. 이후 졸업 후 중위로 진급해 중국-버마-인도 전역의 20공군에 배치되어 58폭격비행단에서 체련 교관으로 근무했으며, 전쟁이 다 끝나가는 1945년 7월 1일에야 전역했다. 야구 시즌으로 쳐도 꼬박 4시즌을 군대에서 보낸 셈이다.

제대한 그린버그는 어느덧 34세의 베테랑이 돼있었고, 수년간 배트를 놓은 만큼 기량에도 의문부호가 있었다. 그럼에도 야잘잘은 어디 안가는지 78경기에서 .311/.404/.544 13홈런 60타점을 기록하는 건재한 모습으로 시카고 컵스[5]를 꺾고 팀의 두 번째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게 된다.

1946년 그린버그는 .277 .373 .604 44홈런 127타점으로 제 몫을 다했지만 팀과 연봉 협상에서 이견을 보이고 있었고 팀은 그를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트레이드 하게 된다.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당시 홈구장이었던 포브스 필드의 좌측 펜스 뒤 불펜을 'Greenberg Garden'으로 명명하는 등 그린버그에게 엄청난 대우를 해주었지만, 그는 시즌 내내 부상에 시달리면서 .249 .408 .478 25홈런 74타점에 그쳤고 시즌 후 36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피츠버그에서 그린버그는 당시 풀타임 2년 차에 불과했던 랄프 카이너를 정성껏 지도해 주었고 그 해 카이너는 51홈런을 치게 된다. 그리고 그린버그의 은퇴 후 'Greenberg Garden' 역시 'Kiner's Korner'로 바뀌게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고작 9년 반의 실질적인 메이저 리그 경력동안 그린버그는 1394경기에서 1628개의 안타와 1276개의 타점, 331개의 홈런, .605의 장타율을 기록했는데 당시 그보다 더 큰 임팩트를 보여준 선수는 베이브 루스, 테드 윌리엄스, 루 게릭, 지미 폭스 뿐이었다.

그린버그는 극단적인 당겨치기를 통한 홈런 생산 능력으로도 유명했지만 그를 더욱 훌륭한 타자로 만들어 준 것은 3할의 타율을 유지하면서도 꾸준하게 타점을 생산하는 능력이었다. 저평가로 인한 마이너리그 생활, 군 복무, 부상 등이 없었다면 베이브 루스의 통산 최다홈런 기록 경신에도 도전할 수 있는 선수였다. 실제로 그린버그는 군 입대 전 풀타임 5년간 연평균 41홈런 152타점, 한 시즌 최고 58홈런을 기록했다.

아울러 화끈한 장타력에 가려지고 당시 시대상에 묻혀서 그렇지 출루 능력도 발군이었다. 큰 부상을 딛고 돌아온 1937시즌을 기점으로 올스타에 선정된 4시즌간 그린버그는 출루율 .432 순출루율 .105라는 빼어난 기록을 남겼다. 그동안 삼진은 363개를 당했고, 볼넷은 405개를 골라내 볼넷이 삼진보다 많았다. 심지어 부상에 시달리며 고전하다 결국 은퇴시즌이 된 1947시즌에도 타율은 .249로 낮았으나 볼넷을 무려 104개 얻어내 출루율은 .408에 달했다. 부상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출루의 가치가 인정되는 현재였다면 장타형 OPS 히터로 수 년 더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을 하게 만드는 선수.

또한 그린버그는 엄청난 노력파였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구에 평발이어서 달리는 것도 쉽지 않고 운동 신경도 다소 부족했지만 피나는 노력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Self-Made' 슈퍼스타였다. 그린버그는 경기 전 아침 8시부터 4시간 동안 배트를 휘둘렀고 경기가 끝나면 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다시 타격 연습을 했다. 오죽하면 배팅볼 투수들이 그만 보면 도망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4. 은퇴 후

1946년 뉴욕 백화점 재벌의 딸인 카랄 짐벨과 결혼한 그린버그는 2남 1녀를 두었다. 그는 은퇴 직후인 1948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구단주였던 빌 빅의 제의를 받아 팀의 팜 디렉터를 맡았고 1950년 단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1958년 빌 빅을 따라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부회장이 되었다.

1961년 자신의 터전을 캘리포니아 남부로 옮기고 싶어 했던 그린버그는 메이저 리그 사무국의 구단 확장 계획에 찬성해 당시 창단 준비중이었던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의 구단주가 되려고 친분이 있던 빌 빅을 끌어들이는 등 노력을 했으나 당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구단주였던 월터 오말리의 반발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후 고향 뉴욕에서 은행계에 투신한 그린버그는 성공적인 은행가가 되었고 얼마 후 자신의 회사를 캘리포니아 주 베벌리힐즈로 옮겼다. 그리고 1986년 9월 4일 향년 75세에 베벌리힐즈에서 신장암으로 사망했다.

5. 명예의 전당 입성

1948년 처음 명예의 전당 입성 자격을 얻은 그린버그는 부족한 누적 성적으로 인해 투표에서 고전했지만 9수 만에 1956년 84.97%의 득표율로 당당히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되었다.

5.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행크 그린버그 46 171 188 46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First Base (16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행크 그린버그 57.5 47.7 52.6
1루수 HOF 입성자 평균 66.4 42.7 54.6

6. 이모저모

  • 유대인이었던 그가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했던 시기는 반유대주의가 확산되던 시기였다. 1935년 월드 시리즈 당시 상대 팀이었던 시카고 컵스에게서 인종차별적인 모욕을 듣기도 했고 한 번은 상대 팀의 클럽하우스에 쳐들어가 싸운 적도 있었다. 당시 미국 내 유대인들은 그린버그를 자신들의 희망으로 여겼고 그 역시 이를 자신의 막중한 임무로 생각했다. 훗날 샌디 코팩스에 의해 유명해진 유대교의 속죄일인 ' 욤 키푸르 데이'에 처음으로 출장 불가를 선언한 것도 그린버그였다.
  • 메이저 리그의 첫 흑인 선수였던 재키 로빈슨과도 인연이 있다. 그린버그가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이적하고 선수 생활 마지막 해였던 1947년은 바로 로빈슨이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막 데뷔를 해 경기장 안팎에서 갖은 인종차별을 겪어가며 분투하던 때였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흑인만큼은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유대인으로써의 차별을 접해봤던 그린버그는 경기 중에 상대 팀 선수였던 로빈슨을 만나자 "너한테 인종차별적 야유를 보내는 저 사람들을 너의 실력으로 이겨버려라."라고 격려해주었다고 한다.

7. 연도별 성적

파일:MLB 로고.svg 행크 그린버그의 역대 MLB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30 DET 1 1 0 0 0 0 0 0 0 0 0 .000 .000 .000 .000 0.0 0.0
1931 마이너 리그
1932
1933 117 499 135 33 3 12 59 87 6 46 78 .301 .367 .468 .835 2.8 2.6
1934 153 667 201 63 7 26 118 139 9 63 93 .339 .404 .600 1.005 6.5 6.3
1935 152 710 203 46 16 36 120 170 4 87 91 .328 .411 .628 1.039 7.6 7.5
1936 12 10 16 6 2 1 10 15 1 9 6 .348 .455 .630 1.085 0.6 0.6
1937 154 701 200 49 14 40 137 184 8 102 101 .337 .436 .668 1.105 8.3 7.6
1938 155 681 175 23 4 58 143 147 7 119 92 .315 .438 .683 1.122 7.8 6.5
1939 138 604 156 42 7 33 111 113 8 91 95 .312 .420 .612 1.042 5.9 5.4
1940 148 671 195 50 8 41 129 150 6 93 75 .340 .433 .670 1.103 7.7 6.7
1941 19 83 18 5 1 2 12 12 1 16 12 .269 .410 .463 .872 0.3 0.2
194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 복무)
1943
1944
1945 78 312 84 20 2 13 46 60 3 42 40 .311 .404 .544 .948 3.2 3.0
1946 142 604 145 29 5 44 90 127 5 80 88 .277 .373 .604 .977 7.2 6.5
<rowcolor=#fdb827>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47 PIT 125 510 100 13 2 25 71 74 0 104 73 .249 .408 .478 .885 3.2 2.7
MLB 통산
(13시즌)
1394 6098 1628 379 71 331 1046 1274 58 852 844 .313 .412 .605 1.017 61.1 55.4


[1] 베이브 루스 - .690, 테드 윌리엄스 - .634, 루 게릭 - .632, 지미 폭스 - .609, 배리 본즈 - .607, 행크 그린버그 - .605 [2] 실제 활동한 기간은 9.5시즌으로 봐야한다.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때에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기 때문이다. 그린버그는 역대 메이저 리거 군 복무 기간 1위인 47개월을 복무했다. [3] 역대 감독 승수 2위인 2763승을 기록한 명장으로 멜 오트를 길러낸 장본인이다. [4] 역대 타점 3위 기록으로 1위는 1930년 핵 윌슨의 191타점이고 2위는 1931년 루 게릭의 185타점이다. [5] 이 해 시카고 컵스가 그 유명한 염소의 저주에 걸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