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진출은 국내 축구선수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이로 인해 국내 축구계에 첫 번째 유럽 진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마침 분데스리가에서도
차범근 효과로 인해 동양인 선수들에 대한 수요가 올라가면서 자연스레 여러 선수가 유럽으로 건너가 입단 테스트를 보며 유럽 진출을 희망했다. 물론 실제로 주전으로써 자리잡은 선수는 이 중
허정무 한 명뿐이긴 했다. 유럽에 가지 못하더라도 미국 NASL과 같이 여러 축구 스타가 뛰는 리그에서도 한국인 선수들에 대한 수요가 있어서
조영증이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미국 무대에 진출하게 된다. 이 열풍은 1983년 K리그 출범과 함께 국내 리그 출범에 도움이 된다는 명목 아래 여러 유럽파가 귀국하면서 사그라들게 된다.
80년대 중후반에는 일본으로의 진출이 활발했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일본이 본격적으로 축구에 투자를 하기 시작하면서 JSL (일본 사커 리그)의 확장이 80년대 극에 달해 결국 93년 프로축구 출범을 목표로 일본축구협회는 여러 외국인 선수들을 리그에 끌어모으기 시작한다. 아시아 강호의 위치였고, 지리적으로도 가까웠던 한국도 이 스카우트망에 들어와 여러 선수들이 일본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는데, 요즘의 J리거 처럼 국대 선수나 유망주들이 아닌 선수시절 황혼기에 들어가던 30대 이상의 선수들이 지도자 연수 겸으로 일본에 진출하는 형태가 대다수였다. 70년대 주요 진출 무대였던 홍콩 리그는 자연스레 후순위로 밀려나 이후 꽤 긴 기간 동안 한국 선수를 보기 힘들어졌다.
허정무의 유럽 데뷔시즌이다.
차범근 직후 유럽행을 한 선수들 중 가장 성공한 유럽파라는 평을 듣는
허정무는
PSV 아인트호벤 데뷔시즌에서 수비형 미드필더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6골이나 넣으면서 공수 만능의 선수임을 입증한다. 또한 빠른 스피드가 주 무기인 김진국도 2부리그지만 로테이션 멤버로써 가치는 충분히 인정받는 경기수를 소화하면서 나름 활약한다.
차범근은 상대 집중 견제에 고전하며 큰 부상을 입는 등 8골에 그쳤으나 FA컵 대회인 DFB-포칼에서 6골을 넣으면서 팀을 우승시키는 등 여전한 면모를 보였다.
1세대 유럽파들이 가장 많이 활동했던 시즌이다. 그러나 대부분 백업 신세에 만족해야 해 아쉬웠던 시즌이기도 하다. 1980년 태국 킹스컵에 출전해서 득점왕을 수상한
박종원이 나름 파격적인 조건으로 당시 분데스리가 4위를 달리던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에 입단해 기대감을 모았으나 UEFA컵 출전을 앞두고 당한 부상으로 고생하며 결국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박상인 또한 뒤스부르크에서 철저한 백업에 그치면서 2경기 출장에 만족해야 했다. 유럽파의 두 축인
차범근과
허정무는 팀의 시즌 대부분의 경기를 소화하면서 확실한 주전임을 다시한번 보인 시즌이었다. 특히 차범근은 다시 리그 10골 이상에 성공하며 득점력을 과시했다. 아쉬운 것은 프랑크푸르트와 아인트호벤 모두 기대보다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며 유럽 대회와는 멀어졌다는 사실.
시즌 중반인 1983년 초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축구리그인
슈퍼 리그가 출범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그러면서 많은 해외 진출 선수들 혹은 해외 진출을 준비하던 선수들이 모두 한국으로 복귀하게 되면서 해외파의 수는 확 줄게 되었다.
차범근과
허정무도 여기서 다른 길을 가게 되는데,
허정무는 당초 네덜란드에 눌러 살겠다는 결심까지 했으나 결국 현대의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1983년 초 국내 복귀를 선언한다. PSV 측에서도 끝까지 국내 복귀를 만류했지만, 허정무는 국내 프로축구의 저변 확대라는 명분을 선택했다. 반면
차범근은 이미 국내에서 감당하기 힘든 몸값의 스타가 되었기도 했고, 프랑크푸르트도 재정난에 시달리면서 절대 헐값에는 보내주지 않을 스탠스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분데스리가에 남아 활동하게 된다. 기록에서도 나타나듯 82-83 시즌 차범근은 당시 자신의 커리어 하이인 15골을 넣으면서 리그를 대표하는 스타로써 우뚝 서게 된다.
앞서 서술했듯
프랑크푸르트의 재정난으로 인해 최고 연봉자인
차범근을 이적 시장에 내놓았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접촉한 것은
인터 밀란이었다. 선수와 직접 만나 거액을 제시하면서 협상하기도 했고 세리에 A 또한 80년대 초 외국인 영입금지 정책이 풀리던 시기였기 때문에
인터 밀란은 가장 유력한
차범근의 차기 행선지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차범근은 이미 적응이 다 된 독일 리그에서 떠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한 이 때 당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제공한 주거지에 대해 과세 문제까지 얽히면서 독일 내에서의 이적만이 현실적인 대안이 되었던 조건으로
인터 밀란과의 계약은 불발된다. 이후
1. FC 뉘른베르크와
바이어 04 레버쿠젠이 영입 경쟁을 벌여 차범근의 레버쿠젠 이적이 결정된다. 강등권에 가까울 정도로 성적이 안좋은 팀이었지만, 당시 팀의 감독인
데트마어 크라머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시절 자주
차범근과 맞대결한 인연이 있어 친근함을 느꼈기 때문에
차범근은 레버쿠젠을 결정했다고.
차범근의 커리어 하이 시즌. 2경기당 1골을 잡는 괴력을 보이며 기어코 레버쿠젠을 6위로 UEFA컵에 진출시킨다. 당시 1986 멕시코 월드컵을 앞둔 시즌이기도 했고, 리그 득점 순위 4위에까지 올랐던 차범근을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불가리아는 예의주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차범근에게 기본 맨 마킹 2명이 붙어다니는 전술이 86 월드컵 내내 차범근을 따라다녀 리그에서의 커리어 하이 시즌과는 별개로 차범근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 출전에서 무득점에 그치고 만다. 다만 확실히
차범근이 상대 수비들의 어그로를 끌어준 면은 있어서 죽음의 조 사이에서도
대한민국은 4골이나 잡아내고 승점도 획득하는 등 선전한다.
차범근이 본격적으로 정점에서 내려온 시즌이다. 그러나 이 시즌
바이어 04 레버쿠젠이
UEFA컵 우승을 하면서
차범근은 각기 다른 클럽에서 모두 UEFA컵을 들어본 사상 2번째 선수가 된다.[11]
RCD 에스파뇰과의 결승 2차전에서
차범근은 나이를 무색케 하는 서전트 점프로 헤딩 동점골을 따내면서 경기를 승부차기로 끌고 가 결국 우승시키는 수훈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