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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 尙 勳
1903년[1] 10월 25일 ~ 1977년 1월 2일
1. 개요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대한민국의 정치인.2. 일생
1903년 10월 25일 황해도 풍천군(現 황해남도 과일군)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이후 귀국해 신간회 경성지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1928년 3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정치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같은 해 5월 퇴사했다. 1929년 5월 동아일보사에 재입사해 논설반 기자로 활동하다가 1933년 9월 사직하고 조선일보사로 자리를 옮겨 정치부장, 1934년 5월에는 정치부장 겸 편집국 차장으로 재직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서춘(徐椿) 당시 조선일보 주필로부터 조선총독부의 의향에 따라 황국신민의 입장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게재할 것을 지시받았으나, 이에 서춘을 " 이완용보다 더한 자"라고 비난하면서 지시 이행을 거부했다. 이어 1937년 11월 조선일보의 보도 방침을 놓고 주필 서춘과 편집국장 김형원(金炯元)이 대립각을 세우다가 끝내 둘 다 동반사퇴하자 1938년 1월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이후로는 전임 주필 서춘과 당시 사장 방응모 등의 주도 하에 중일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방향으로 바뀐 조선일보의 논조에 맞춰 신문을 발행했고,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된 뒤에도 《조광》의 대표 필진으로서 친일 논설을 기고하는 등 친일로 전향했다. 또한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8.15 광복 후 한국민주당 선전부장과 조사부장을 역임하는 등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49년[2]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제주도 북제주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홍순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민주국민당에 몸담았으나, 1954년 뉴델리 밀회 조작사건으로 민주국민당에서 제명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언론/출판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1]
1956년 간행된 대한민국건국십년지에는 1904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2]
제주도 북제주군 갑/을의 경우
제주 4.3 사건으로 1948년이 아닌 1949년 5월 10일 선거가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