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00:43:20

풍선 아저씨 행방불명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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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풍선 아저씨의 일생3. 다마가와 하천에서의 소동4. 판타지호 사건
4.1. 판타지호에 대한 이야기
5. 여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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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1월 23일에 ' 풍선 아저씨(風船おじさん)'란 별명으로 불리는 스즈키 요시카즈(鈴木嘉和)가 자신이 만든 박스에 풍선을 매달고 태평양 횡단을 도전하다가 11월 25일 행방불명된 사건.

2. 풍선 아저씨의 일생

스즈키 요시카즈는 1940년 도쿄도에서 피아노 조율사 일가에서 태어나 구니타치 음악 대학 부속 고교를 졸업하고 야마하의 계약 사원으로 고가네이시에서 피아노 조율업을 했으며 1984년 44세의 나이로 음악 교재 판매 회사인 '뮤직 앙상블'을 개업하고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소리를 녹음한 테이프 판매를 개시했다. 이외 여러 음악 사업을 펼쳤으나 잘되지 않아서 빚에 쫓기던 그는 "비닐 풍선 26개를 붙인 곤돌라를 만들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곤돌라를 타고 미국에 건너가서 빚을 갚겠다!"는 황당무계한 발상을 하기 시작했다.

스즈키의 판타지호는 1989년 요코하마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출품에 3,000만 엔[1]이 필요했고 기껏 출품에 성공했는데 회장 내 전시 위치도 영 좋지 않은 데다 박람회 자체도 흥하지 않자 폭발한 스즈키는 박람회 마스코트인 ' 부루아짱(ブルアちゃん)' 인형 옷을 입고 높이 30미터의 탑에 올라가서 "단체 버스 주차장을 개방하라!"라는 현수막을 걸고 7시간이나 서서 항의를 하다가 출동한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후에도 그는 헬륨 풍선의 부력으로 10미터에서 20미터 지상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공중 산책'이라는 곤돌라를 박람회장에 자비로 설치했다. 한편 뮤직 앙상블은 1990년 5억 엔가량의 채무를 안고 최종적으로 도산했다.

3. 다마가와 하천에서의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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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회사가 파산했음에도 그는 본격적으로 모험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풍선 아저씨는 1992년 4월 17일에 경찰들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쿄도 오타구 다마가와강에서 지바현 구주쿠리 해안을 향해 의자에 5미터 크기의 풍선과 2.5미터 크기의 풍선을 각각 2개씩 동여매고 오후 12시 45분경 날아올랐다. 이때 15 kg의 모래주머니 2개가 떨어져 나가며 고도가 급상승하는 바람에 예정된 고도 400 m를 넘긴 5,600 m 고도[2]에 도달하자 당황한 풍선 아저씨는 라이터로 5미터 풍선 끈을 지져서 끊어내 겨우 고도를 하강시켰고 오후 1시 40분 출발 지점에서 24 km 떨어진 도쿄도 오타구의 민가 지붕에 불시착했다. 이때 풍선 아저씨 자신은 왼손에 상처만 입은 반면 민가는 지붕이 무너지고 TV 안테나가 꺾이는 해를 입었음에도 피해 민가에 손해 배상은커녕 별다른 사과의 말이나 행동도 없이 오히려 이 도전이 성공하면 다음엔 하와이를 향하는 모험을 계획할 예정이었다고 인터뷰했다.

'풍선 아저씨'라는 별명은 이 사건을 보도하던 미디어에서 붙인 것으로, 다마가와에서의 실패를 본 많은 미디어들이 거리를 두게 되어서 판타지호가 출항했을 때 찾아온 언론은 후지 테레비뿐이었다고 했다.

4. 판타지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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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년이 지난 1992년 11월 23일 스즈키의 전화에 불려 나온 도시샤대학 교수 미와 시게오(三輪茂雄)와 학생 7명, 아사히 신문의 통신 국장, 전날부터 밀착 취재해 온 후지 테레비 와이드 쇼 '굿모닝! 나이스 데이' 취재진, 그리고 스즈키의 지지자들이 비와호 호반에 모인 가운데 스즈키는 헬륨 풍선 여러 개를 단 판타지호의 시험 비행을 시작했다.

원래 이날의 명목은 단순한 시험 비행이었으며 판타지호가 120미터까지 상승하고 난 다음 일단 지상에는 착륙하였지만 갑자기 16시 20분경 스즈키는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주위의 제지를 뿌리친 채 연습용 로프를 풀고 비와호 호수에서 미국 네바다주 샌드 마운틴을 향해 출발했다. "어디로 가는 건지?"라고 묻는 미와 교수의 말에 그는
미국이에요.(アメリカですよ。)
라는 대답을 남겼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제트 기류를 타면 40시간 내에 미국에 도착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었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스즈키는 가족들에게 휴대 전화로 "아침 해가 아름다워요."라는 연락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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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 신호 후 발견되었을 때 뉴스 화면.
하지만 그날 자정부터 판타지호로부터 SOS 신호를 받았고 해상보안청의 수색기가 출동했다. 판타지호는 25일 8시 30분의 미야기현 긴카산섬 동쪽 약 800 km 해상에서 발견되었고 수색 헬기를 본 스즈키는 헬기를 향해 앉아 있는 자세로 손을 흔들면서 SOS 신호를 중지했다. 당시 판타지호의 고도는 평균 2,500 m로서 높았을 때는 4,000 m 상공까지 도달했다고 하며 시속 70 km의 속도로 비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신호도 중지되어 계속 비행할 의사가 있다고 판단한 데다 약 3시간 뒤에 판타지호가 구름 속으로 사라지자 수색기는 추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위 뉴스 화면에도 있는 순간이 판타지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사실 비와호에서 긴카산까지만 해도 직선거리로 무려 570 km에 달하는 거리이고 긴카산에서도 800 km를 더 비행한 데다 추적기가 3시간 동안 감시까지 하는 동안에도 시속 70 km의 속도로 비행한 것까지 감안하면 무려 1,580 km라는 거리를 비행한 것이 되니 이것도 나름대로 대단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문제는 비와호에서 목적지인 미국 네바다주 샌드 마운틴까지는 무려 8,700 km나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1,580 km나 왔어도 목적지의 반의 반도 다다르지 못했다.

전문가는 실험 전에 풍선으로 미국에 간다니 말도 안 된다고 이야기했으며 풍선이 미국까지 갔다는 증거가 없으니 아마 바다에 떨어져 사망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 긴카산은 태평양과 맞닿아 있는 섬이라서 여기를 넘은 게 확실한 이상 바다에 추락해 사망했거나 살았어도 바다 한가운데에서 조난당해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1994년까지는 호적상에는 살아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2001년 2월 1일자로 실종 선고가 확정되었다. 즉, 일본 민법상 실종 후 7년이 경과하여 사망한 것으로 간주된다. 알래스카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루머로 밝혀졌다.

4.1. 판타지호에 대한 이야기

직경 6미터의 메인 비닐 풍선 4개[3], 직경 3미터의 풍선 20개를 장비했고 곤돌라의 외형은 약 2미터가량, 깊이는 약 1미터이며 해상에 착수할 때를 대비해 부력이 높은 전나무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곤돌라의 제작은 전나무 장인에게 의뢰했지만 곤돌라 전문은 아니었고 비닐 풍선을 제작한 회사에서는 비닐 풍선은 애초에 사람을 태울 수 없고 풍선이 영하 수십 도에 달하는 고도에 견딜 만하다는 보증도 없음을 미리 스즈키에게 얘기했다.[4] 스즈키는 풍선 가스가 빠지면 부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비행시 기체의 부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추를 준비했지만[5] 부력 부족으로 비와호에서 출발할 때 준비한 200개를 전부 내렸다.

소지품으로 산소 충전기와 마스크, 일주일분 식량, 경위 경도 측정기, 고도계, 속도계, 해난 구조 신호기, 낙하산, 레이더 반사경, 휴대 전화, 지도, 영하 60도 이하의 기온에 견딜 수 있는 방한복, 헬멧과 자외선 차단 선글라스 등이 있었던 걸로 보아 준비는 꽤 철저하게 한 것으로 보이지만 무전 면허를 소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전기는 포함되지 않았고 고도계의 사용법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5. 여담

일본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지~' 정도의 유머 취급을 받는 모양이지만 남겨진 가족들, 특히 아내였던 이시즈카 유키코(石塚由紀子)는 2006년 기준으로 그의 회사 공동 경영자로 집이 저당 잡혀 있었고, 남긴 빚을 필사적으로 갚느라 엄청난 고생을 했다고 하는데 그 빚을 다 갚았는지는 알 수 없으며, 2016년 포르투갈인 남성과 재혼하고 나서 2017년 담관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0년에 남편을 회상하면서 "풍선 아저씨의 조율(風船おじさんの調律)"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1995년 록 그룹 LÄ-PPISCH가 앨범 '포르노포르노'에 돈키호테적인 삶을 산 그에게 경의를 담는 내용으로 '풍선 아저씨'라는 곡을 수록했고 1997년에는 극작가 야마자키 테츠지가 연출한 무대 '풍선 아저씨'가 카니에 케이조(蟹江敬三)[6]의 1인극 형태로 신주쿠 시어터 톱스에서 상연되었다.

2001년 야구 선수 스즈키 이치로가 ' 국민영예상'을 거절했을 때 비트 다케시가 '모험가였던 풍선 아저씨에게 국민 영예상을 주는 게 낫겠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1982년에 풍선을 단 의자를 타고 하늘을 나는 짓을 벌인 사람이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실제로 수십 개의 풍선을 몸에 매달아 비행하거나 우리나라 방송에서 실험한 사례( 호기심 천국 등)도 있으며 영화 이 비슷한 소재를 써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8년에도 브라질의 한 가톨릭 신부가 화물 트럭 운전사 전용 공동묘지를 만들기 위해 후원자를 모으려고 풍선을 잔뜩 단 의자를 타고 비행을 시도한 사건이 있었다. 이 신부는 만약을 대비해 철저히 준비하였고 등산 및 밀림 생존법까지 배웠으나 하필이면 GPS 사용법은 숙지하지 않아 결국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 못하고 실종된 뒤 한 시추 플랫폼에서 하반신만 남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7] # 참고로 그 신부는 히우그란지두술주에서 출발해 원래 비행하려고 한 파라과이 방향과는 정반대인 대서양 방향으로 날아갔다. # 다윈상을 받게 되었는데 이 사례는 풍선 아저씨와 달리 좋은 일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거고 애초에 가톨릭 신부라서 후사가 없으므로 다윈상의 수상 자격에도 적합하지 않아서 선정 이후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2018년 9월 9일에는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방영되었다.

2021년 4월 14일에는 프리한 19에서 방영되었다.

포켓몬스터에 등장하는 포켓몬 둥실라이드 썬 버전 도감의 내용[8]이 이 사건을 패러디한 것이다.
[1] 2020년 기준으로 3,200만 엔에 상당한다. [2] 대한민국의 롯데월드타워의 높이가 554.5 m이므로 롯데월드타워 높이의 10배 이상 올라간 것이다. 참고로 HALO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5,600 m는 특수 부대가 낙하산 침투를 하는 정도의 고도다. [3] 본래 설계상으로는 6개였으나 4개로 줄였다. [4] 심지어 출발 전에 일부 풍선은 찢어져서 스즈키가 긴급하게 테이프로 땜질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발견되었을 때도 이미 메인 풍선 4개 중 2개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알려진 상식대로 기압은 고도가 높아질수록 떨어지기 때문에 높이 올라갈수록 풍선 내부의 압력은 역으로 증가하여 결국은 터지게 된다. 보통의 풍선으로는 애초에 가능할 리 없는 도전이었다. [5] 추 안에는 극한에서도 얼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주가 들어 있었다. [6] 스케반 데카, 아마짱 등의 유명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며 2014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7] 사후 새 같은 야생 동물에게 시신이 먹히거나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8] 둥실라이드에 타고 여행을 떠난 남자가 그대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