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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더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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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풍덕린.jpg
중화민국 봉천군무방판
산릉수호대신
정체 馮德麟
간체 冯德麟
한국식 독음 풍덕린
영문 Féng Délín
각침(閣枕), 인각(麟閣)
출생 1867년
청나라 봉천성 해성현
사망 1926년 8월 11일 (향년 58~59세)
중화민국 진저우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학력 없음
직업 정치가, 군인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장쭤린과의 갈등2.3. 장훈복벽과 몰락2.4. 장쭤린에게 복종하다
3. 참고문헌4.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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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말의 군인, 봉천군벌의 일원. 원래 장쭤린의 경쟁자였으나 장훈복벽 사건을 계기로 장쭤린의 부하가 되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67년 청나라 봉천성 해성현에서 태어났다. 17세에 마적이 되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이름을 떨쳤으며 1900년 의화단 운동을 구실로 러시아 제국이 만주에 주둔했는데 주둔한 러시아 병사들이 약탈과 강간, 살인 등을 서슴지 않아 치안이 문란해지자 펑더린은 1900년 요양에서 대단을 조직하여 치안유지에 나서 마적에서 정식 군인으로 거듭나는데 성공했다.[1] 펑더린은 적극적으로 만주의 백성들을 보호하여 인심을 얻는데 성공했고 수백명의 부하들을 거느린 거대 세력의 두목으로 성장하여 수호전에 나오는 양산박의 108 영웅호걸들을 표방하여 자신들을 일백팔장이라 불렀다.

펑더린의 반러활동에 자극을 받은 러시아 제국군은 펑더린을 습격하여 사할린 섬으로 유배를 보냈으나 펑더린은 2년만에 그곳에서 탈출하였고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일본군을 도와 러시아를 공격했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이후 일본군은 동삼성 총독 조이손에게 지방 치안유지를 위해 펑더린을 다시 등용할 것을 권했고 그 덕에 펑더린은 관직에 복직, 순방영 좌로 통영까지 승진하여 북진에 주둔했다.

2.2. 장쭤린과의 갈등

그러던 중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했고 1912년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9월 11일 위안스카이는 순방영 전로통영 겸 중로통영인 장쭤린에게 지시하여 동삼성의 군대를 개혁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장쭤린은 육군 제27사단에 취임,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고 펑더린은 28사단장 겸 육군 중장이 되었다. 펑더린은 표면적으로는 장쭤린과 잘 지냈으나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병사도 많은 장쭤린을 시기하여 내부적으로는 갈등이 있었다. 그러던 중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하는 일이 생겼다. 장쭤린 등은 표면적으로 위안스카이의 즉위를 옹호하였지만 실제로는 만주에서 중앙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도모하고 있었다. 이들은 봉천장군 장석란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으나 곧 위안스카이의 심복 돤즈구이가 봉천장군으로 취임하면서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위안스카이의 제제에 반대하여 호국전쟁이 벌어지자 장쭤린과 펑더린은 이 틈을 타서 돤즈구이를 몰아내기로 했다. 펑더린의 28사단이 돤즈구이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적 하고 장쭤린의 27사단이 돤즈구이를 옹호하는 척 하다가 만주에서 쫓아낸다는 것이 계획이었는데 사실은 펑더린에게 약역을 강요하려는 장쭤린의 술수였다. 이 계획은 주효하여 돤즈구이는 만주에서 쫓겨난 후에 위안스카이에게 펑더린에 대해서만 보고하고 장쭤린은 오히려 호의적으로 보고했다.

두 사람의 합작은 어디까지나 돤즈구이라는 공동의 적을 놓고 일시적으로 맺어진 것이라서 오래 갈 리가 없었다. 1916년 4월 22일, 위안스카이가 장쭤린을 봉천장군 겸 봉천 순안사로 임명하고 펑더린을 봉천 군무방판으로 임명했는데 펑더린은 자신보다 9살이나 어린 장쭤린이 자신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 때문에 크게 분노하여 군무 방판 취임을 거부했다. 장쭤린은 펑더린이 가진 1개 사단 병력을 의식하여 그에게 아첨하며 그를 선배로 예우했고 기분이 좋아진 펑더린은 군무 방판 부대를 독립부대로 운용하여 봉천장군부와 별개로 직무를 수행하겠다고 제의했다. 장쭤린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15만원의 판공비를 매달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지만 펑더린은 거절했다.

이에 장쭤린은 위안스카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위안스카이는 전 봉천장군 장석란을 보내 중재를 시도했으나 펑더린은 장석란의 중재를 묵살했다. 장쭤린은 54여단장 손열신을 보내 많은 선물과 3만원의 금일봉을 내리며 펑더린에게 방판에 취임해줄 것을 요청했다. 1916년 5월 20일, 봉천성에 입성한 펑더린은 28사단 사령부를 설치했다. 장쭤린은 펑더린을 환영하기 위한 연회를 베풀었으나 펑더린은 참석조차 하지 않았고 이에 장쭤린이 펑더린을 직접 찾아가 기생 파티를 열어주었으나 펑더린은 장쭤린에게 50만원을 인출하여 비행기를 사달라고 요청했고 위안스카이에게 전보를 쳐 7개 부대를 증설, 북진에 독립 부대를 설치하자고 요구한 후 바로 다음날 북진으로 돌아가버렸다. 장쭤린은 비서장 양위팅을 보내 펑더린을 계속 달랬으나 펑더린은 요지부동이었다.

2.3. 장훈복벽과 몰락

그러다가 1916년 6월 6일 위안스카이가 죽었다. 이에 펑더린은 봉천으로 와서 장쭤린에게 3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 1. 방판 권력과 장군 권력이 완전 평등해야 한다.
  • 2. 사람을 쓸 데는 서로 자문을 구한다.
  • 3. 20만원으로 28사단에 비행기를 사준다.

펑더린의 요구가 너무 가혹했기 때문에 장쭤린 입장에서는 들어줄 수가 없었지만 장쭤린의 후견인인 위안스카이가 죽은 걸 안 펑더린은 더욱 안하무인으로 나왔다. 그리고 돤치루이 신내각이 출범하자 28사단 장병 전체의 이름으로 돤치루이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는 등 중앙에 공공연하게 도전했다. 돤치루이는 전 동삼성 총독 조이손을 보내 해결하게 했지만 조이손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펑더린은 1917년 3월, 장쭤린의 부하인 53여단장 탕위린과 결탁하여 장쭤린을 제거하려 했지만 장쭤린은 돤치루이의 지원사격을 받아 탕위린을 파면하고 장징후이로 대체하였다. 이쯤에서 돤치루이의 분노가 폭발하여 2개 사단을 보내 펑더린을 토벌하고자 했다. 이에 놀란 펑더린은 북진의 주둔지에 처박혀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7월 1일, 부원지쟁 끝에 장강순열사 장쉰 선통제를 복위시키고 장훈복벽을 단행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장쉰은 펑더린을 자신의 사람으로 회유하려 했는데 펑더린은 장쉰을 도우면 자신이 봉천독군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겨 200명의 장병을 베이징에 보낸 후 자신도 6월 20일 호위병 30명을 거느리고 입경하여 장쉰의 복벽운동을 적극 지지한다고 선포하였으며 28사단 소속 병력을 베이징으로 이동시켜 황실을 지키겠다고 했다. 펑더린의 알현을 받은 선통제는 펑더린을 어전시위대신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복벽은 돤치루이가 국무총리 겸 토역군 총사령관에 취임하면서 금방 불리하게 돌아갔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안 펑더린은 7월 10일 기차를 타고 봉천으로 달아났으나 7월 14일 돤치루이가 베이징이 입성하여 7월 15일 펑더린 체포령을 내림에 따라 톈진에서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8월 15일, 돤치루이는 펑더린이 공화국을 배반한 죄가 크다고 28사단장직과 육군 중장 계급을 박탈하고 투옥하였다.

2.4. 장쭤린에게 복종하다

헌데 갑자기 펑더린에게 구원의 손길이 찾아들었다. 다름아닌 장쭤린이었다. 장쭤린은 27사단, 28사단, 29사단, 각 여단, 각 부대의 명의로 펑더린 석방 타원서를 올리며 적극적으로 펑더린 구명운동에 들어갔다. 이는 당연히 장쭤린이 녹림의 의리에 도취되어서가 아니라 28사단을 흡수하기 위한 정치적 쇼를 벌이는 것이었다. 이어 요서 지역 16개 현의 유지들도 동참하여 펑더린에 대한 관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장쭤린의 의사를 눈치 챈 돤치루이는 10월 15일 펑더린이 복벽운동에 동조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석방하고 오로지 아편 흡연 죄목으로 벌금 800원을 내게 했다. 펑더린은 계급과 훈장을 돌려받고 산릉수호대신으로 임명하여 백두산에 있는 누르하치, 홍타이지 등의 영묘를 관리하게 되었는데 이 자리는 권력은 없어도 명예와 재물복이 많은 자리였기 때문에 펑더린은 장쭤린에게 크게 고마워하면서 봉천에 부임했다.

장쭤린은 자기 자신이 28사단장을 겸하였으며 곧 부하 급금순을 28사단장에 삼으면서 봉천성의 군사권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1920년 봉천부도통, 금주도통 등 의미없는 자리를 역임하며 펑더린은 조용히 잘 살았는데 1922년 1차 직봉전쟁에서 봉군이 패하면서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장쭤린을 몰아내려고 했던 직예군벌이 펑더린을 흑룡강성 독군으로 임명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장쭤린을 해하려는 음모임을 안 펑더린은 5월 15일 전보를 보내 임명을 거부했다.

이렇게 충성심을 입증한 펑더린은 조용히 살다가 1924년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금주에 머물다가 1926년 8월에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4. 관련문서


[1] 중국 역사상 이러한 협객들이 정부의 승인을 받아 정규군으로 승격되는 일은 흔한 일이었고 이 풍습이 청말민초까지도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