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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술탄국 제18대 술탄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 محمد بن تغلق |
|
<nopad> | |
<colbgcolor=#0B6D33><colcolor=#fff> 이름 | 파크르 웃딘 무함마드 |
출생 | 1290년? |
델리 술탄국 델리 | |
사망 | 1351년 3월 20일 (향년 60-61세) |
델리 술탄국 델리 | |
재위 기간 | 델리의 술탄 |
1325년 2월 1일 ~ 1351년 3월 20일 (27년) | |
대관식 | 1325년 2월 1일 |
전임자 |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 |
후임자 | 피루즈 샤 투글루크 |
부모 | 아버지 :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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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르두어: محمد بن تغلق힌디어: मुहम्मद बिन तुग़लक़
영어 Muhammad bin Tughluq
델리 술탄국의 18대 술탄. 정식 이름은 파크룻딘 무함마드지만,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의 아들로, 왕자 시절부터 데칸 원정을 이끄는 등 전공을 쌓으며 활약하였다. 따라서 1330년경 델리 술탄국은 역사상 최대 판도를 자랑하게 되었다. 즉위 과정에서 부친과 동생을 암살했을 것이라 의심을 받을만큼 성정이 잔인하였고, 특히 카나우지에서 벌인 대학살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약학에 관심이 많았고, 언어적인 재능이 특출하였다. 궁중 언어인 페르시아어 외에도 힌디어, 아랍어, 산스크리트, 튀르크어 등을 구사했다 한다. 또한 의외로 (저항하지 않는) 타종교에 관대하여 자이나교 수도승을 환대하거나 힌두교 축제에 참여하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세계 정복을 꿈꾸던 파크룻딘은 남인도와 중앙아시아, 더 나아가 중국까지 정복할 야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위해 1327년 수도를 (10년 전에 멸망한) 옛 야다바 왕조의 도성이던 데바기리로 옮겨 다울라타바드로 개칭하였고, 델리에는 북벌을 위해 30만에 달하는 기병을 소집하였다. 하지만 대대적인 인구 이동을 수반한 천도와 대군의 유지를 위한 지출은 제국에 부담으로 다가왔고, 결국 재정 적자로 이어졌다. 1333년에는 중국 진출을 위해 히말라야 산지로 10만 대군을 보내었으나 현지인들에 의해 괴멸당하였다. 이를 계기로 벵골, 라지푸트, 마두라이, 와랑갈 등지에서 반란이 벌어졌고 술탄의 진압군은 흑사병으로 인해 괴멸되며 델리 술탄국은 30여년 간의 정복지를 대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2. 생애
투글루크의 아들로, 할지 왕조 하의 델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펀잡에서 데팔푸르 총독을 지내는 동안 그는 델리 조정에서 등용되어 주나 칸이라 불리게 되었다. 1320년 할지 왕조가 찬탈로 멸망당하고, 그의 복수를 천명하며 투글루크가 거병하자 파크룻딘은 부친을 도와 찬탈자 쿠스라우 칸을 격파하고 델리에 입성하였다. 부친의 즉위 후 왕자가 된 파크룻딘은 파크르 말리크 주나 칸 혹은 울루그 칸이라 불리게 되었다. 1323년 파크룻딘은 부왕의 명에 따라 남쪽의 카카티야 왕조를 공격, 그 수도인 와랑갈을 함락하고 카카티야를 완전 병합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후계자 겸 재상에 임명되었고, 1325년 부왕이 (의심쩍은) 사고로 사망하자 술탄으로 즉위하였다.(투글루크 왕조 성립 전인) 1320년과 (파크룻딘 치세 초엽인) 1330년 델리 술탄국의 영토 비교
즉위 후 파크룻딘은 부왕의 벵골 원정으로 포로가 된 기야숫딘 바하두르 샤를 석방하여 동벵골의 소나르가온 총독에 봉하였다. 이로써 벵골은 라크나우티 총독 카다르의 서벵골과 소나르가온 총독 바하두르 샤의 동벵골로 나뉘었다. 바하두르 샤는 현 미멘싱 서남쪽에 기야스푸르를 세워 거점으로 삼았다. 다만 1328년 바하두르 샤가 재차 독립을 선언하자 분노한 파크룻딘은 장군 바흐람 칸을 보내어 그를 폐위하게 하였고, 바하두르 샤는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 이후 바흐람 칸이 소나르가온 총독이 되어 10년간 동벵골을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1329년 차가타이 칸국이 (오랜만에) 북인도를 침공하여 라호르를 약탈하였다. 다만 이는 기습에 그쳤고, 1330년대 들어 차가타이 칸국은 8년간 4차례 칸이 교체되는 등의 혼란을 겪으며 쇠퇴하였다. 서북쪽의 일 칸국 역시 마찬가지로 내전에 의해 붕괴하였고, 파크룻딘은 무주공산이 된 호라산을 공격하기 위해 내란을 피해 이주해온 몽골계 귀족들을 포용하여 37만에 달하는 대군을 편성하였다. 또한 남인도의 새 영토에 징세관들을 보내어 그 경제적 가치를 추정하게 하였고, 힌두스탄 지역의 비무슬림 농민들에게는 토지세를 무려 10배나 올려버렸다.
파크룻딘은 30만이 넘는 기병을 델리 인근에 1년간 주둔시키며 기회를 엿보았는데, 인도 대륙 각지에서 모여든 보물로도 그 경비를 부담할 수 없었다. 이로써 재정 적자에 몰리자 대군은 해산되었고, 파크룻딘은 적자를 상쇄하기 위해 이교도들에 대한 대외 원정을 기획하였다. 하지만 후술되었듯 그의 원정들은 연이은 패배로 귀결되었고, 파크룻딘은 관리들에게 봉급을 주는 대신 힌두 부락에 대한 수탈권을 주었다. 가혹한 세금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살해되었고, 인도 대륙은 델리 정권에 대한 불만과 저항 의식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2.1. 자한파나 건설
자한파나 내의 비자야 만달 (승리의 무대) 궁전 유적
자한파나의 외성 격으로 세워진 알리아바드 성채
즉위 직후인 1326년부터 파크룻딘은
이후 1398년 티무르의 파괴 전까지 델리의 시가지를 규정하게 된 자한파나는 서부의 민간 거주 지역 (옛 랄코트), 북부의 군사 지역 (시리 성채), 동부의 궁전 지역 (신시가지)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13개의 성문을 지니고 있었다. 당대에 델리를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시리 성채 외곽의 하자르 수탄 (천개의 기둥) 궁전이 술탄의 거처였다고 기록하였다. 다만 그가 감탄한 채색된 나무 돔과 그를 떠받드는 장대한 기둥들은 현존하지 않고, 현재까지도 일대 대부분이 주거지로 활용 중이라 조사가 쉽지 않다. 한편, 중세 델리의 도시들 중 가장 거대한 자한파나를 건설해 두고도 파크룻딘은 1327년 완성되어 가는 도시를 두고 즉흥적으로 수도를 남쪽으로 1천 km 넘게 떨어진 다울라타바드로 옮겨버리며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2.2. 다울라타바드 천도
다울라타바드 (데바기리) 성채 유적
북인도에 치우친 델리는 남인도 원정에 부적합하다 여긴 파크룻딘은 1327년 자신이 왕자 시절 데칸 원정을 위해 주둔했던 데바기리를 다울라타바드로 개칭하고,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천도를 위해 그는 델리와 다울라타바드 사이에 넓은 도로를 세우고 그 양편에 나무를 심었으며, 5km 마다 물과 식량을 제공하는 역참을 세웠다. 역참에는 또한 최소 한명의 수피 수도승이 이끄는 칸가 (예배당)가 더해졌고, 우편 기능도 있었다. 1329년 술탄의 모친과 대신들을 시작으로 델리 주민들의 다울라타바드 이주가 본격화되었다. 파크룻딘은 모든 노예와 대신, 이슬람 성직자들에게 새 수도로의 이주를 명하였다. 이로써 수만에 달하는 인파가 1천 km가 넘는 이주를 따났는데, 도중 피로와 배고픔에 의하여 노약자를 중심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다. 이븐 바투타에 의하면 (과장된 표현으로) 당시 델리에는 개나 고양이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빈 성이 되었다 한다. [1]
술탄의 강행된 천도의 결과 데칸 지역에는 우르두 언어와 문화가 전래되었고, 이주자 중에는 후일 바흐마니 술탄국을 세우게 되는 장군 하산 간구도 있었다. 다울라타바드는 군인, 문학인, 법학자, 귀족 등의 계층을 위한 여러 개의 모할라 (구역)들로 구획되었고 각 이주자들에게 일정한 토지가 주어졌다. 다만 천도 후 술탄의 주요 원정 대상은 남인도가 아닌 델리 북쪽의 히마찰이었다. 1333년 파크룻딘은 대군을 보내어 다람살라 부근의 캉그라를 공격하였다. 역사가 바다우니는 술탄의 본 목적이 히말라야를 넘어 중국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기록하였다. 하지만 원정군은 라지푸트계 카토크 가문의 군주 프리트비 찬드 2세에게 대패를 당하여 10만 중 10명만이 델리로 생환하였고, 그마저도 분노한 술탄에 의해 처형되었다 한다. 무리한 천도에 이은 히마찰 원정의 실패를 계기 삼아 델리 술탄국의 패권은 점차 약화되었다.
2.3. 연이은 반란과 분열
델리 '제국'의 해체
1334년 마바르 ( 마두라이) 총독 잘랄웃딘 아흐산 칸이 반란을 일으키자 파크룻딘은 진압을 위해 출정하였다. 하지만 도중 비다르에서 흑사병이 창궐하여 많은 병사들이 죽었고, 술탄 본인마저 감염되어 와병하였다. 따라서 원정군은 다울라타바드로 회군하였고, 아흐산 칸은 독립하여 마바르 술탄국을 세웠다. 동시에 그 북쪽의 드와르사무드라를 중심으로 한 힌두 호이살라 왕조 역시 델리에 대한 복속을 철회하고 자립하였다. 텔랑가나에서도 1335년 힌두 텔루구 부족장 무수누리 카파야 나야카가 (술탄푸르로 개명되었던) 와랑갈을 점령하고 자립하였다. 이로써 순식간에 남부 및 동남부 인도 대부분 지역이 델리 술탄국에서 떨어져 나갔고, 할지 왕조 때부터 이어지던 20여년 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북인도마저 불안정해질 것을 염려한 파크룻딘은 1335년 다시 델리를 수도로 삼기로 하며 (불만이 많던) 이주민들에게 델리 귀환을 허가하였다. 하지만 제국의 붕괴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336년 메와르의 라지푸트 군벌 함미르 싱이 1336년 싱골리 전투에서 델리 군을 격파한 결과 델리 술탄국이 반세기에 걸쳐 복속시킨 라지푸트는 재차 힌두 왕공들의 영토가 되었고, 1338년에는 벵골 총독 바흐람 칸이 사망한 후 벌어진 아미르들의 내분으로 인해 동서 벵골이 모두 자립해버렸다. 그 무렵 과거 포로가 되어 델리로 잡혀가 이슬람으로 개종했던 하리하라와 부카 형제가 탈출하였고, 그들은 후일 호이살라 왕국을 접수하여 비자야나가라 제국을 세우게 된다.
1339년에는 힌두 브라흐만 계급 출신의 개종자로서 장군에 오른 하산 자파르 칸이 데칸 중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다만 진압되어 아프간으로 추방되었던 그는 몇년 후 재차 데칸으로 돌아와 1346년 굴바르가 (칼라베리지)를 장악하였고, 이듬해에는 다울라타바드의 군대를 접수하였다. 1347년 데칸의 아미르들은 나시룻딘 이스마일 샤를 술탄으로 옹립했는데, 그는 재차 하산 자파르 칸에게 선양하였다. 이에 후자는 술탄 알라웃딘 하산 바흐만 샤로 즉위하여 바흐마니 술탄국을 세웠고, 이로써 델리 술탄국은 중남부 인도에 대한 지배권마저 상실하고 나르마다 강 이북만을 영위하는 40여년 전의 영토로 돌아갔다. 그나마 자립한 무슬림 세력들과는 친선을 유지한 것이 위안거리였다.
2.4. 죽음
파크룻딘은 1351년 세금 납부를 이행하지 못하고 신드로 도주한 튀르크 노예 출신의 구자라트 총독 타기를 쫓아 타타로 진군하던 중 사망하였다.3. 기타
역사가들은 비록 무모한 결정이긴 했지만, 파크룻딘의 다울라타바드 천도로 인해 유입된 무슬림 엘리트 층에 의해 데칸 지역의 이슬람화가 촉진되었고 막 상승세이던 비자야나가라 제국을 견제할 데칸 술탄국의 모태가 되어 인도 중남부가 향후 수세기간 이슬람 주도 하에 놓이는 계기가 되었다 평가한다.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인도를 방문한 것이 그의 치세 기간이었다.
현대 학자들은 파크룻딘이 아마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1]
다만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하면 남겨진 힌두 민중들은 더 나은 삶을 누리게 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