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2 17:51:17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로마 제국의 '프린켑스 유벤투티스'
Tiberius Gemellus|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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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berius Julius Caesar Nero "Gemellus"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네로 게멜루스
(출생 당시)
Tiberius Caesar Drusi filius Tiberii Augusti nepos divi Augusti pronepos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드루시 필리우스 티베리이 아우구스티 네포스 디비 아우구스티 프로네포스[1][2]
(칼리굴라의 양자로 선포된 뒤 얻은 휘)
출생 19년 10월 10일
로마 제국 로마
사망 37년 또는 38년(향년 18세/19세)
로마 제국 로마
매장지 아우구스투스 영묘(또는 율리우스 가문 개인 묘지)
가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버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친부),
가이우스(칼리굴라)(양부, 후원자)
어머니 리빌라
형제 율리아 리비아(누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쌍둥이 형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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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iberius Julius Caesar Nero "Gemellus"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네로 게멜루스(Tiberius Julius Caesar Nero Gemellus)는 로마 제국의 공식 상속자이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 황태자이다. 로마 제국의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손자, 로마 제국의 황태자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 리빌라의 아들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조카이다. 법적 가계로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가 되며, 혈연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이자 로마 최초의 아우구스타 리비아 드루실라의 증손자,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외증손자가 된다. 양부이자 후원자인 3대 황제 칼리굴라가 어머니 리빌라의 조카이자 외삼촌이자 큰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이므로 그와는 혈연상 사촌, 고종사촌이며 6촌 형제가 된다. 또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그에게 혈연상 5촌 당숙이자 외삼촌이 되며, 공화정 말의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의 외증조부가 된다.

2. 생애

로마 왕정, 공화정, 제정 역사상 로마 최고위층 가족 중 최초의 쌍둥이 형제로 태어난 까닭에 탄생 당시부터 모든 로마인들에게 상당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태어날 당시, 할아버지 티베리우스는 쌍둥이 손자 탄생을 기리는 의미에서 화폐에 게멜루스 형제를 그려 넣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의 쌍둥이 형제는 22년 요절했으며, 쌍둥이 형제가 태어난 생일은 공교롭게도 이들 형제의 큰아버지이자 외삼촌 게르마니쿠스가 시리아 속주에서 요절한 날이기도 했다.

통칭인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라는 이름에서 게멜루스는 별칭으로 '쌍둥이'를 뜻한다. 아버지 소 드루수스는 22년 티베리우스만 가지고 있던 호민관 특권을 티베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원로원에게 부여받았으며, 이때부터 로마군 최고사령관 직위를 제외한 로마황제의 거의 모든 특권을 갖게 됐다. 그러나 소 드루수스는 이 무렵부터 근위대장 세야누스와 여러 방면에서 충돌했고, 서기 23년 9월 14일 로마의 자택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이후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의 할아버지 티베리우스는 26년 근위대장 세야누스에게 로마를 맡기고 스스로 카프리 섬에 마련한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게멜루스의 조부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으로 스스로 은둔해 로마를 통치하는 동안, 로마는 세야누스와 그 일파의 세상이 됐고, 그 과정에서 게멜루스의 가족들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 황족들이 연이어 세야누스의 음모로 죄를 뒤집어 쓰고 숙청됐다. 여기에는 게멜루스의 매형이자 사촌형 네로 카이사르를 비롯해 사촌형 드루수스 카이사르, 큰어머니 대 아그리피나 등이 포함됐고, 먼 친척들도 여럿 반역죄로 추방되고 도주 중 체포돼 유배됐다. 그리고 게멜루스의 어머니 리빌라는 남편 소 드루수스 생전부터 세야누스의 유혹에 넘어가 그의 애인이 된 이후, 25년 타베리우스에게 재혼을 허락받으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는데 그럼에도 리빌라는 세야누스 몰락 때까지 세야누스파의 핵심공범이자 그의 애인으로 있었다.

따라서 서기 31년 세야누스가 몰락한 직후, 조부 티베리우스의 주도 아래 수 많은 세야누스파들이 반역죄로 숙청되었을 당시 게멜루스의 어머니 리빌라도 자살형식의 방법을 통해 처형됐다. 이 당시, 세야누스 일가는 티베리우스의 대대적인 기소 아래 국가반역죄 혐의에 의해 이례적으로 연좌죄가 적용됐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세야누스와 그 파벌은 그들 외의 직계 가족, 가문 내 여성, 아이 외에도 해방노예와 노예까지 모두 처형되거나 추방형에 처해졌고 그들의 재산은 국법에 따라 모두 몰수됐는데,[3] 세야누스의 전처 아피카타 역시 전남편과 장남, 장녀와 차남 등이 처형된 다음 날 자살을 강요당하는 방식으로 처형됐다. 그런데 아피카타는 자살을 강요당해 죽기 전 티베리우스에게 보낸다면서 편지를 남겼다. 여기에는 티베리우스의 아들 소 드루수스가 젊은 나이에 급사한 이유가 적혀 있는데, 그것은 게멜루스의 어머니 리빌라가 세야누스와 불륜관계였고 오랜 공모 후 독을 조금씩 먹여 독살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은 소 드루수스 사망사건을 재조사했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그간 아들 드루수스의 생전 발언과 공문서 및 회의록상 속기록, 세야누스 및 그 파벌 숙청 후 나온 여러 증거 등을 종합해 소 드루수스의 죽음이 독살이 맞다고 판결했다. 따라서 게멜루스의 어머니는 그 동안의 모든 악행이 드러나 간통죄 및 친족살해죄, 국가 반역 혐의로 기소돼 티베리우스의 명에 따라 죽었다. 이 때의 일에 대해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역사가이자 정치인 디오 카시우스는 리빌라는 그냥 처형되거나 자살을 강요당해 죽지 않고, 세야누스파에게 며느리와 두 손자, 사위를 잃은 게멜루스의 외할머니 소 안토니아에게 넘겨졌으며, 소 안토니아의 명에 따라 방에 강금된 뒤 굶어 죽었다고 한다.

서기 37년 게멜루스는 성년식을 할 무렵이 되자 할아버지 티베리우스가 머물던 카프리 섬으로 소환돼 후계수업을 받았는데, 그 해에 할아버지가 노환으로 사망했다. 이때 게멜루스는 할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유언장에 따라 사촌형 가이우스(칼리굴라)와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었는데, 티베리우스와 관계가 최악이었던 원로원과 로마 민중들은 밀어붙이기 식으로 게멜루스의 제위계승권을 무시한 뒤 일방적으로 칼리굴라에게만 단독 상속권을 부여했다. 따라서 게멜루스는 유언장과 달리 프린켑스 지위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사촌형 칼리굴라에게 성인식 거행 직후 양자이자 황태자로 임명됐다.

그러나 37년 말 또는 38년 초에 사촌형 칼리굴라와 원로원, 그리고 근위대 간의 모종 합의에 따라 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자살당하는 방식으로 숙청됐다. 이때 일에 대해 중병에서 쓰러진 칼리굴라가 게멜루스가 평소 먹던 기침약의 냄새를 독약으로 의심해 죽였다는 말도 있고, 자신이 병석에 있던 중 열린 국가행사에 합법적으로 참석한 게멜루스에게 의도적으로 반역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즉, 칼리굴라가 중병을 앓은 뒤 편집증 환자가 되어 게멜루스를 일방적으로 죽였다는 식으로 수에토니우스, 디오는 묘사 중이다. 하지만 현대에는 여러 정황상 이렇게 칼리굴라가 게멜루스를 죽인 것은 게멜루스를 최측근으로 보필해온 아울루스 아빌리우스 플라쿠스가 원인이었다고 확정적으로 평한다.

아울루스 아빌리우스 플라쿠스는 33년부터 38년까지 황제령 아이깁투스 장관으로 있던 에퀴테스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복심 같은 측근이었고, 당시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의 후원자이자 지지자였다. 그는 칼리굴라의 조부 대 드루수스와 죽마고우로, 칼리굴라와 게멜루스 사이의 가교 노릇도 했다. 헌데 그는 티베리우스 유언에도 원로원이 칼리굴라, 게멜루스 공동승계 대신 칼리굴라 단독 승계를 좋게 여기지 않고, 급기야 칼리굴라와 원로원 심기를 제대로 건들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그가 티베리우스 생전 칼리굴라의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 고발에 적극 협력하고, 티베리우스 생전부터 노골적으로 칼리굴라를 술라로 규정하면서 게멜루스에게 힘을 실어준 과거였다. 더해 그는 38년 벌어진 황제령 아이깁투스의 알렉산드리아 폭동 조짐이 칼리굴라 즉위 시작부터 보고되는 가운데에서도, 극단적인 그리스계 주민들을 비호해, 결국 황제가 개입해야 될 문제를 야기 시킨 일련의 사건까지 유발시켰다. 이때 그는 그리스계 주민 일부가 일방적으로 5개 구역 중 2개 구역에서 자행된 유대인, 유대인과 결혼한 그리스인 학살을 방치하고, 십자가형을 가족, 친구들을 살리기 위해 저항한 무고한 시민들에게 내려 죽여, 38년 폭동을 장기화시켰다. 따라서 그는 머리 끝까지 열받은 칼리굴라에게 38년 장관 자리를 잃고 소환되어 기소됐다가, 유대인 필로 등이 칼리굴라와 면담을 한 뒤 39년 유죄 확정 후 처형되는데, 게멜루스 숙청은 37년 말 ~ 38년 초 사이에 시작됐고, 플라쿠스는 게멜루스 죽음의 결정적 동기를 제공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원로원에게서 지켜줄 요량으로 사촌동생을 양자로 입적시켜, 파트리아 파테스타스 아래 보호 의지를 명확히 하고, 이후에도 게멜루스를 동생이자 양자 이상으로 대우한 칼리굴라가 중병 회복 후 큰 위기감을 느낀 끝에 어쩔 수 없이 꼬투리를 잡아 죽였다고 보고 있다.

이런 배경으로 게멜루스는 38년 초 죽임을 당했다. 이때 칼리굴라는 다른 이들과 달리 게멜루스에게는 그냥 교수형 또는 처형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내리지 않고, 단검을 보내 명예롭게 죽으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게멜루스는 자신의 반역죄 기소 이후 죽던 날까지 본인이 왜 죽어야 되는지 몰랐다. 또 그는 본래부터 워낙 착하고 성품이 바른 소년인 터라 단검을 가지고 온 백인대장과 근위대가 칼을 손에 쥐고 스스로 죽는 방법까지 알려주는 비극이 벌어졌는데, 이때 파견된 백인대장은 게멜루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칼리굴라가 보낸 검으로 그를 대신 죽이는 방식으로 죽였다.

게멜루스는 엄연히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후손이자 황족이었고, 황제의 양자이자 후계자였기 때문에 숙청 직전의 기소 당시 원로원에서 이 문제에 대해 보호조치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원로원은 게멜루스가 무죄임을 알고 있었던 와중에도 티베리우스를 진짜 미워했기 때문에 설령 자신들과 사이가 좋고 인기가 많았던 아우구스투스, 소 드루수스의 혈육이어도 게멜루스의 처형을 의도적으로 방치했다. 그들은 세야누스의 정부였던 리빌라의 행태를 간접적으로 언급해 전혀 보호해주지 않았다. 따라서 이 숙청 사건 당시 칼리굴라와 원로원, 근위대 모두 게멜루스가 억울하게 죽는 것에 대해 일절 언급이 없었다.

게멜루스가 죽은 뒤, 칼리굴라와 원로원 모두는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에 관한 어떤 추모를 하지 않았고, 칼리굴라와 게멜루스 사이의 관계 역시 무효화하듯 로마에 남아 있는 비문에 이렇게 적은 뒤, 사건을 덮었다.
Ti Caesar / Drusi Caesaris f / hic situs est.
여기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아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가 누워있다.

반면 게멜루스의 외할머니인 동시에 칼리굴라의 친할머니인 소 안토니아는 유일하게 반역혐의를 뒤집어 쓴 게멜루스를 끝까지 보호하려고 모든 노력을 쏟았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게멜루스는 처형됐다. 애당초 칼리굴라의 게멜루스 처형 사건은 칼리굴라가 미쳐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던, 정치적 이해가 얽힌 문제라서 그녀의 노력에도 뒤집기 힘들었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게멜루스가 죽을 당시 문제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유야무야 넘어가게 됐다. 그럼에도 안토니아는 죽은 외손자 신원복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이 기대마저도 아빌리우스 플라쿠스가 37년 초부터 칼리굴라를 제대로 골탕먹이고 38년 벌어진 소요를 장기화시켜 실패했다. 따라서 게멜루스가 죽은 이후 얼마되지 않아 안토니아는 이 일 때문에 홧병으로 쓰려져 사망했다.

3. 여담

  • 누나 율리아 리비아의 수양딸 루벨리아 바사는 미래의 로마황제 네르바의 외숙모였다.
  • 누나 율리아 리비아와 그녀의 자녀들인 조카들 역시 끝이 좋지 못했다. 게멜루스의 누이는 티베리우스 생전 의문스러운 결혼과 임신, 첫 남편 네로 카이사르, 시동생 드루수스 카이사르에게 벌인 무고 등의 악행에도 처형되거나 추방되는 일은 면했다. 그녀는 칼리굴라 시대 동안 동생 게멜루스가 황제와 원로원에게 살해되는 것을 본 직후 선행을 베풀며 숨죽여 살았다. 그렇지만 클라우디우스 시대때 근친상간 및 부도덕죄, 반역 혐의로 고발돼 모두 처형됐다. 이때 게멜루스의 누이와 그녀의 아들, 딸은 클라우디우스의 아내 발레리아 메살리나에게 일찍부터 클라우디우스의 어린 아들 브리타니쿠스와 황제, 황후의 위협요소로 정황상 인식됐는데, 이런 의심 때문에 황궁에서는 첩자들을 보냈고 결국 그들에게 거짓으로 기소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증거가 여럿 있었기 때문에 마냥 누명을 뒤집어 쓴 뒤 기소된 것은 아니었고, 결국 혈육을 보호하려고 한 클라우디우스조차도 이들 가족을 변호를 해주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율리아 리비아는 43년경 반역죄로 기소되었는데, 그녀는 사형 집행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1] 할아버지 티베리우스 사후, 사촌형 칼리굴라의 양자가 되면서 취한 황태자로서의 휘. [2] 해석하자면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황제의 손자,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이다. [3] 타키투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세야누스파 측의 물귀신 작전 등으로 인해 게르마니쿠스의 옛 친구와 측근, 세야누스와 어린시절 친분이 있었으나 이후 정적이 된 인사 등도 기소돼 곤욕을 치르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