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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A3051> 출생 | 1926년 4월 24일 | ||
스웨덴 회그셰 | |||
사망 | 2016년 7월 23일 (향년 90세) | ||
스웨덴 오스 | |||
재임기간 | 제27대 총리 | ||
1976년 10월 8일 ~ 1978년 10월 8일 | |||
제27대 총리 | |||
1979년 10월 12일 ~ 1982년 10월 8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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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A3051><colcolor=#FDCA15> 배우자 | 솔베이그 펠딘 | |
자녀 | 장남 폰투스 펠딘, 장녀 에바 펠딘, 차남 니키아스 펠딘 | ||
소속 정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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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의 제 27대 총리. 1932년부터 무려 44년간 이어져 온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당의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총리에 올랐다.현재까지 유일한 중앙당 출신 총리이자, 마지막 非 사민당 혹은 온건당 총리이다.
2. 약력
- 1958. 스웨덴 국회의원
- 1959. 스웨덴 축산협회 이사장
- 1965. 스웨덴 어업인 중앙 협회 이사장
- 1971. 스웨덴 한델스방켄 이사
- 1976. 스웨덴 제 27대 총리
3. 생애
3.1. 어린 시절
1926년 4월 23일, 농부였던 닐스 요한 펠딘과 그의 아내 훌다 올손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옹에르만란드의 작은 농가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우리 가족은 항상 돈이 부족했지만, 결코 먹을 것만큼은 부족하지 않았다"고 화목하게 묘사했고, 그의 부모들은 모두 농민 조합에서 활동했다.10대에 그는 스웨덴 농민 조합의 청년 조합에 가입했고,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는 행정감찰관으로서 근무하기도 했다.
3.2. 젊은 시절
1956년에는 1935년생인 그의 아내, 솔베리그와 작은 농장을 구매해 농장주가 되었다. 이 당시에 농업 당국은 농장이 너무 작고 생산성이 떨어진다며 농장 보조금 지급을 거부하자 그는 스웨덴 농업당에서 적극적으로 청년당을 이끌었고, 이후 1958년에 스웨덴 농업당은 당명을 중앙당으로 바꾸었다. 여담으로 그는 정치 생활을 하는 내내 농장을 유지했고, 훗날 1985년 그가 정계에서 은퇴했을 때, 다시 농장으로 돌아왔다.3.3. 정계 활동
3.3.1. 정계 입문
1950년대 내내 스웨덴 내에서 연금 문제로 정계가 큰 혼란에 빠져있을 때, 중앙당이 연금문제에서 큰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58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한다. 당시 그는 전문성과 겸손한 성격 덕분에 널리 존경을 받았다. 1971년 6월, 펠딘은 군나르 헤들룬드의 뒤를 이어 당수직을 맡게 된다. 당시에는 중앙당이 중앙당, 온건당, 기민당, 자유당의 우파 정당 연대를 일컫는 부르주아 정당들 중에서 가장 컸기 때문에 당수였던 펠딘은 자연스레 부르주아 측의 총리 후보가 되었다.3.3.2. 총리 재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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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스웨덴 총선거의 토론회에서 맞붙은 팔메와 펠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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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당의 펠딘, 자유당의 울스텐, 온건당의 보흐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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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우파연정 기자회견 |
1981년 4월에는 중국을 방문하며 중국을 방문한 최초의 스웨덴 총리가 되었다. 이 시기에 펠딘은 게이에르 스캔들로 인해 큰 정치적인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 스캔들에서 펠딘을 포함한 많은 고위직 남성들이 성 구매자로 지목된다. 스웨덴에서 성매매 자체가 불법은 아니었지만, 보안상의 이유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매춘부 중에서 미성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1981년 10월 스톡홀름 앞바다에서 소련의 잠수함이 발견된 "U-137 위기" 동안 펠딘은 총리로서 총사령관에게 "국경을 지켜라! (Håll gränsen!)"라고 대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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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로프 팔메와의 토론 중 |
1982년에서 선거 이후 부르주아 정부는 사민당에게 다수당 자리를 뺏기며 올로프 팔메에게 다시 총리직을 내주게 된다. 펠딘은 야당으로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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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의회 일반 정책 토론회에서 대화를 나누는 펠딘과 울스텐 |
1985년 선거 이전에 중앙당과 기민당은 연정을 구성하는 등 여러 협력을 했지만, 대다수의 중앙당 유권자들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는 중앙당이 우파와는 협력할 수 있지만 좌파와 협력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선거에서 중앙당이 참패하자 펠딘은 당내의 엄청난 비판에 직면하게 되고, 같은 해 12월 5일, 다음 해에 열릴 당 회의에서 당 대표 재선 포기를 선언한 뒤 정계까지 은퇴해버린다.
3.4. 정계 은퇴 이후
정계 은퇴 이후 그는 푀레닝스방켄, 푀레닝겐 노르덴, 텔레베르케트의 회장을 역임한다.정계를 떠난 지 몇 년 후, 그는 베스테르노를란드의 주지사 도전 가능성도 점쳐졌으나 본인이 거절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는 흡연자 이익 단체인 스모크 피스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1996년 받은 수술로 담배를 끊기도 했다.
3.5. 사망
2016년 7월 23일, 오랜 투병 생활 끝에 람비크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는 같은 해 8월 11일 헤르뇌산드 대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회그셰 묘지에 묻혔다.4. 평가
총리 재임기에는 스웨덴 내에서 재임 기간 내내 실업률은 증가했고, 국가재정은 악화되며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82년 선거에서 온건당에게 원내 2당을 내주고, 1985년에는 원내 제 3당자리까지 뺏기는 패배를 당했으니 말 다한 셈.한편으로 그는 의견 차이가 큰 정부를 이끌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 그의 재임기는 스웨덴이 1930년대 이후 가장 심각한 경기 침체를 겪고 있을 때였다. 게다가, 원내 제 1당이었던 사민당과도 협력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정책을 추진하는데 장애물이 많았다.
펠딘은 특히 부르주아 정당 내에서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으로 많은 정치 평론가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결정 전에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파헤치려는 그의 의지와 그의 개인적인 노력은 대부분의 좌우를 막론하고 인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