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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트라시아의 왕 Theudebert II | 테우데베르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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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테우데베르 2세 |
프랑스어 | Theudebert II | |
생몰 년도 | 586년 ~ 612년 | |
재위 기간 |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 |
596년 ~ 6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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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우스트라시아 프랑크 왕국의 왕.2. 행적
586년경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프랑크 왕국 군주 킬데베르 2세와 페일루바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테우데리크 2세가 있었다. 596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10살에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이 되었고, 남동생 테우데리크 2세는 9살의 나이로 부르군트의 왕이 되었다. 그들의 할머니 브룬힐트 왕비가 이들의 섭정을 맡아 전권을 잡았다. 이때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은 부르군트 왕국에 생트, 샹파뉴, 투르가우, 그리고 서부 프로방스와 알자스 일부 지역을 넘겼다. 이 조치는 두 왕국의 영역을 비슷하게 설정하는 한편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제어하기 위한 브룬힐트의 의도로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 메츠와 부르군트의 수도 오를레앙 중 어느 곳에도 거주하지 않고 두 왕국의 국경 지대인 오툉과 오세르에 주로 거주하면서 두 나라를 효과적으로 제어했다.킬데베르 2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네우스트리아 왕비이자 브룬힐트의 오랜 숙적인 프레데군트는 지금이야말로 브룬힐트를 물리치고 프랑크 왕국 전역을 제패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12살의 아들 클로타르 2세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파리로 진격했다. 몇몇 아우스트리아 귀족들의 호응 덕분에 일드 프랑스 일부 지역을 확보한 후, 그녀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 영내로 진입했다. 이윽고 수아송 인근의 라포에서,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군이 맞붙었다. 막대한 희생자를 양산한 이 전투에서 승리한 프레데군트는 여세를 몰아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 메츠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폐렴으로 쓰러져 1년간 고통을 겪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녀는 죽어가면서 브룬힐트를 잡아오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브룬힐트는 프레데군트가 사망한 뒤 곧바로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 정세가 여전히 불안했고 귀족들이 여전히 독립적으로 구는 상황에서 섣불리 공세를 개시했다간 위험하다고 여겼다. 여기에 599년 프로방스에서 역병이 발생해 군대를 일으키는 게 더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충실한 관료를 임명하고 잠재적인 반역자들을 숙청하고 행정을 돌보는 등 내치에 전념했다. 그러다 600년 기반을 어느정도 닦았다고 판단한 그녀는 친히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 연합군을 이끌고 두 손자와 함께 파리로 진군했고, 16살의 클로타르 2세가 이에 맞서고자 진군했다. 양군은 도르멜 근처의 오르베나 강둑에서 맞붙었다. 네우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에서 시체가 너무 많아 강을 막을 정도로 참혹한 패배를 당했고, 클로타르 2세는 얼마 안 남은 병력을 이끌고 파리로 도주했다. 이후 여러 마을을 차례대로 공략하고 파괴한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군은 클로타르 2세를 포위했다. 결국 클로타르 2세는 세나와 루아르 강 사이의 있는 영역 전체를 부르군트에게 넘기고, 오이즈, 캉슈, 영국해협 등 해안 지대를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넘기는 평화 협약에 동의해야 했다. 이제 클로타르에게 남은 것은 센 강 하류에 자리잡은 12개 마을 뿐이었다.
하지만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병합하지 않고 클로타르 2세가 조그마한 왕국에서 계속 군림하도록 내버려뒀다. 이는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이 네우스트리아 왕국과 대립할 때는 단결하지만 공동의 적을 무너뜨린 뒤에는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다가 나중에는 내전을 벌일 거라고 여겼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힘겹게 통제하는 상황에서 네우스트리아 귀족까지 통제하기는 버겁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네우스트리아를 껍데기나마 남겨놓고 상파르뉴 공작 비시온과 프로방스 지사 에길라를 반역을 꾀한 혐의로 처형하는 등 정적 숙청에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 바스크인들이 아두르 강과 가론 강 계곡을 장악하고 프랑크 왕국을 잇따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브룬힐트는 602년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복종시킨 후 공물을 바치도록 했다. 또한 바스크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바스코니아 공작을 세웠다.
이윽고 테우데베르 2세가 15살이 되어 성인식을 거행했다. 브룬힐트는 손자에게 노예 신분이던 빌리힐데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했다. 이는 훌륭한 가문에서 며느리를 맞아들이면 자신의 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그녀는 일찍이 아들 킬데베르 2세에게도 평범한 신분이었던 페일루바를 아내로 맞이하게 했다. 페일루바는 시어머니에 대한 흠잡을 데 없는 충성심을 보이며 공손하게 처신했다. 그러나 빌리힐데는 이와 달리 브룬힐트의 간섭에서 벗어나 여러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할머니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하라고 권고했다. 테우데베르 2세는 아내의 말에 동감했고, 점차 브룬힐트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604년 말, 클로타르 2세가 일전의 패전으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형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테우데베르 2세는 병력을 보내길 거부했다. 그대신 콩피에뉴에서 클로타르 2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아무런 손실 없이 돌아가게 했다. 이후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왕국간에 긴장감이 흘렀지만, 브룬힐트가 내전을 벌이는 것만큼은 원하지 않았기에 몇년 간은 별 탈 없이 흘러갔다. 브룬힐트가 수아송에 있는 성 메다드 바실리카 대성당에서 나오는 수입을 받기를 거절했을 때, 테우데베르 2세는 이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하는 지역 주교에게 할머니가 그 돈을 계속 받기를 바란하다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610년, 빌리힐데 왕비가 갑자기 사망하고 테오데힐트가 새 왕비가 되었다. 프레데가르에 따르면, 테오데힐트가 빌리힐데를 독살하고 그 자리를 가로쟀다고 한다. 빌리헬데는 브룬힐트에게 복종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 왕국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테오데힐트를 비롯한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은 달랐다. 그들은 일전에 부르군트에 넘겼던 생트, 샹파뉴, 투르가우, 그리고 서부 프로방스와 알자스 일부 지역을 되찾기를 바랐다. 테우데베르 2세는 그들의 설득에 넘어가 클로타르 2세에 사절을 보내 자신과 힘을 합쳐 부르군트를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낌새를 눈치채고 역시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과 합세하라고 권고했다. 클로타르 2세는 두 제의를 놓고 고심한 끝에 중립을 선택했다.
610년 초, 아우스트라시아군이 알자스를 침공하여 강제로 병합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라인 강 하류에 있는 셀츠 요새에서 회담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테우데리크 2세가 소수의 무장 수행원과 함께 회담장에 간 것과 달리, 테우데베르 2세는 정예병을 대거 동원해 회담에 참석했다. 결국 테우데리크 2세는 강한 압박을 받고 알자스를 형에게 공식적으로 넘겨야 했다. 이리하여 부르군트 왕국이 약한 모습을 드러내자, 알레만니인들은 자발적으로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귀순한 뒤 부르군트 왕국에 귀속된 아벙슈 일대를 파괴했다. 이 일련의 상황에 분노한 브룬힐트는 테우데리크 2세의 편에 서서 테우데베르 2세와 대립했다.
612년 5월, 테우데리크 2세는 전 병력을 집결한 뒤 할머니와 함께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을 침공했다. 그들은 안델로트를 통과한 후 툴루즈를 공략했다. 이에 테우데베르 2세 역시 전군을 이끌고 툴루즈 교외에서 맞붙었다. 전투 결과는 브룬힐트와 테우데리크 2세가 지휘한 부르군트군의 압승이었고, 테우데베르는 수많은 정예병을 잃고 아르덴 숲을 통해 도주했다. 이후 색슨족, 튀링겐족 등 여러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고용한 뒤 612년 7월 톨비아크(현재 췰피히)에서 재차 맞붙었다. 프레데가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프랑크 왕국 성립 이래 이 전투 만큼 막대한 희생자가 양산된 전투는 없었으며, 전사자들은 마치 그들이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서로 몸을 기댄채 서 있었다고 한다. 테우데베르 2세는 이 전투에서도 역시 패배한 뒤 쾰른으로 도주했다. 그러다가 추격대가 오자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탈출하여 숲속으로 달아나려 했다가 테우데리크 2세의 부하 베르타르에게 사로잡혀 끌려왔다.
테우데베르 2세는 왕의 의복과 인장을 빼앗긴 뒤 샬롱 수도원으로 보내져 머리를 깎이고 수도자가 되었다. 그의 어린 아들 메로베는 테우데리크 2세의 명령에 의해 돌에 던져지면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 프레데가르의 연대기는 수도자가 된 테우데베르 2세의 운명이 어찌 되었는지 기술하지 않았고, <성 콜룸바누스와 제자들의 삶>의 저자 바비오의 요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때 테우데리크와 테우데베르 사이에 반목이 일어났고, 그들 각자는 왕국의 힘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어서 각자 형제를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콜룸바누스는 테우데베르에게 가서 오만함을 경멸하고 성직자가 되어 교회의 품에 들어가고 거룩한 믿음에 복종함으로써 왕국을 잃어도 영생을 잃지 않도록 요구했다. 왕과 그의 측근은 웃으며 "왕위에 오른 메로베우스 가문의 후손이 자발적으로 수도원에 갔다는 소식을 아직 아무도 듣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축복받은 콜롬바누스는 그들 모두를 경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성직자가 되지 않는다면, 곧 강제로 성직자가 될 것입니다." 그의 예언은 곧 이뤄졌다. (중략) 테우데리크의 추격을 받은 테우데베르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체포된 뒤 할머니 브룬힐트에게 끌려갔다. 테우데리크 편에 있던 브룬힐트는 화가 나서 테우데베르를 성직자로 만들라고 명령했고, 며칠 후에 그를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반면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프랑크 역사집>에는 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테우데리크가 리푸아리 전역을 불태우고 약탈했을 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그에게 복종하며 요청했다. "우리는 이미 당신의 소유입니다. 우리와 우리 땅, 영주와 왕을 구해주십시오." 그가 답했다. "만약 너희가 살아남고 싶다면 테우데베르를 산 채로 데려오거나 잘린 머리를 가져와라." 그들은 도시로 돌아가서 테우데베르에게 거짓말 했다. "당신이 간직하고 있는 아버지의 보물을 그에게 돌려준다면 그가 군대를 철수시킬 것이다." 그는 이 말을 믿고 궁전 보고에 들어가 보물 상자를 열었다. 이때 백성 중 한 명이 칼을 뽑아 테우데베르의 머리를 벤 후 쾰른 성벽으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