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by(虎, ruby=とら)]ハンター / Tiger Hunter> [ruby(小林, ruby=こ ばやし)] [ruby(邦昭, ruby=くにあき)] / Kuniaki Kobayashi |
NJPW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colcolor=#f8d010><colbgcolor=#000> 링네임 |
키드 코비 (Kid Koby) 코바야시 쿠니아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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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ruby(小林, ruby=こ ばやし)] [ruby(邦昭, ruby=くにあき)] 코바야시 쿠니아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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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56. 1. 11 | |
사망 | 2024년 9월 9일 (향년 68세) | |
신장 | 183cm | |
체중 | 108kg | |
혈액형 | O형 | |
출생지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나가노현 코모로시([ruby(小諸市, ruby=こ もろ 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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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슈터 + 테크니션 | |
시그니쳐 무브 |
앞차기 스핀 킥 토라스 킥 소배트 플라잉 닐 킥 슬라이딩 킥 다이빙 클로스라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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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쉬 무브 | _ 피셔맨즈 수플렉스_[1] | |
별명 | 호랑이 헌터 ([ruby(虎, ruby=とら)]ハンター) | |
테마곡 |
The Room (Brainwash) - Rick Wakeman (1984 -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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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
1973년 2월 1일 (17세) 에히메현 사이죠시 체육관 신일본 신춘 버팔로 시리즈 11일차 vs 쿠리스 마사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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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
2000년 4월 21일 (44세, 커리어 27년) 도쿄도 분쿄구 코라쿠엔 홀 신일본 STRONG ENERGY Ⅱ 6일차 vs 수신 선더 라이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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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커리어 |
세계 주니어 헤비웨이트 챔피언쉽 1회 IWGP 주니어 헤비웨이트 챔피언십1회 NWA 인터내셔널 주니어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1회 NWA 아메리카스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1회 |
1. 개요
일본의 前 프로레슬러, 前 신일본 프로레슬링 소속 노게 도장 관리인.전성기 시절 무적에 가까웠던 타이거 마스크 1세의 라이벌이었으며, 타이거 마스크 2세를 상대로 가장 많은 핀폴을 따내 '호랑이 헌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 경력
2.1. 신일본 프로레슬링
2.2. 해외원정
2.3. 신일본 프로레슬링 복귀
2.4. 재팬 프로레슬링
2.5. 신일본 프로레슬링 재입단
2.6. 은퇴 이후 ~ 사망
은퇴 이후 2000년 초반부터 영 라이온들의 거처인 노게 도장 관리인으로 오랜 기간 일했다.그러다가 2023년 말 즈음 팬들이 모르는 사이 노게 도장에서 모습을 감췄는데, 2024년 9월 10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공식 SNS에 코바야시가 전일인 9월 9일 사망했다는 부고가 올라왔다. 향년 68세.
식도암 4기로 투병 중으로 서로 병문안을 다니던 친한 후배 '링 위의 철학자' 니시무라 오사무에 의하면 2024년 2월에 췌장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였으며,[2] 사망 이후 도쿄스포츠의 취재에 따르면 이미 발견 시점에서 도쿄 여자 의학대학 병원에서 치료 불가능 판정을 받고 암 연구 센터를 소개받았지만 그 곳에서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라는 비보를 전달받은 상태였다고 한다.
자택은 본래 요코하마시 츠나시마역 인근이었으나 8월부터 노게 도장 인근에 살던 둘째 딸이 '집 근처에서 살며 돌봐주고 싶다'라는 바램에 응해 둘째 딸 집 근처로 이사갔지만 이후 식욕을 잃고 급격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사망 1주일 전인 9월 2일 둘째 딸의 생일 때 온 힘을 다해 직접 걸어 딸의 집에 방문하여 생일을 같이 보내고, 사망 5일 전 니시무라가 병문안을 갔을 때도 몸을 못 일으키는 상태에서도 "모두에게 스쿼트 하고 있다고 전해둬라"라고 농담을 하는 등 약해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으나 상태가 급히 악화되어 9월 6일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9월 9일, 고향 나가노에서 급히 방문한 누나와 여동생, 두 딸 등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후 8시가 되기 전 코바야시 쿠니아키는 세상을 떠났다.
소식이 밝혀진 후 영원한 라이벌 초대 타이거 마스크와, 노게 도장 시절 그에게 신세를 크게 졌던 신일본 현 사장 타나하시 히로시, WWE 소속의 나카무라 신스케 등 대스타급의 후배들은 물론, 2023년 4월에 입문한 카토 쇼마와 무라시마 카츠야 등[3] 수많은 후배들의 추도가 이어졌고, 그 추도 속에 '호랑이 헌터' 코바야시 쿠니아키는 떠났다.
3. 여담
- 신일본의 자금을 슈킹해서 그 자금으로 정계로 진출한데다 이노키즘으로 신일본을 나락으로 빠트린 이후 볼드모트화가 되었으나, 창설자이자 역대 최고 스타여서 노게 도장에 있던 사진조차 감히 아무도 못 떼고 있던 안토니오 이노키의 사진을 새파란 애송이인 타나하시 히로시가 떼자는 의견을 제시했을 때 신일본의 원년 멤버임에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고 타나하시의 등을 강력히 밀어줬으며, 결국 코바야시 본인이 "이노키 씨의 간판, 떼어냈다고.(猪木さんの看板、外してやったぜ)"라고 가볍게 말하며 이노키의 사진을 도장에서 떼냈다. (출처 - 나카무라 신스케와 타구치 류스케의 회고) 이 별 것 아닌 듯한 사건이 신일본을 좀먹던 이노키즘 타파의 상징이 되고 신일본을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한 것을 감안했을 때 코바야시의 공헌도가 매우 컸다.
- 레전드 급의 대식가였다. 코바야시가 프로레슬러가 된 계기 중 하나도 코바야시의 엄청난 식사량에 질린 코바야시의 어머니가 "그렇게 먹을거면 프로레슬러라도 되라!" 라고 해서였다고 할 정도.
- 코바야시의 대식에 관련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선배인 '귀신 군조' 야마모토 코테츠가 신오사카역에서 도쿄역으로 가는 신칸센 안에서 "내가 쏠 테니까 뭐든지 원하는 만큼 먹어라" 라고 하자 "정말로 그래도 되는거죠?"라고 말하더니 신칸센 뷔페 칸에 있는 메뉴 전 종류를 먹어치웠다고.
- 대식가인만큼 요리에도 조예가 상당히 깊어 코바야시가 만드는 챵코는 정말 맛있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노게 도장 관리인 시절 실력을 아낌없이 보여줬다고 한다. 분야도 안 가려서 디저트, 스테이크 등 양식도 잘 만들었고, 후배 고토 히로오키는 코바야시의 부고를 듣고 X에서 '코바야시 씨가 구워주는 스테이크가 가장 좋았다'라며 코바야시를 추억했으며 심지어 외국인인 체이스 오웬스조차도 코바야시의 스테이크를 추억했다.
- 위로 누나 한 명, 아래로 여동생 한 명이 있으며, 슬하에 장녀 레이, 차녀 아야카 두 딸을 두었다.
- 온화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성격이여서 새파란 후배인 영 라이온들과도 잘 지냈으며, 노게 도장 관리인 시절 항상 "알고있냐?!" 하면서 말을 걸어왔다고 한다. 나카무라 신스케의 말에 따르면 간혹 나카무라가 오전에 말해준 일인데 이걸 까먹고 저녁에 "알고있냐?!" 하면서 나카무라가 오전에 말해준 일을 그대로 다시 말해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 타구치 류스케가 데뷔 초기 '드랍킥 마스터'라는 별명을 얻는 계기를 만들어 준 사람이기도 한데, 데뷔 전 요시 타츠와 타구치에게 "드랍킥 정도는 못하면 안 된다"라며 드랍킥을 가르쳤는데 타구치가 두 번째만에 드롭킥을 성공시키자 "사야마(초대 타이거) 이래로 처음이야. 이렇게 빨리(드롭킥을 익힌) 한 녀석 없어."라며 칭찬해 줬고, 타구치는 이에 드랍킥에 자신을 얻었다고 한다.
- 전국구 스타였던 초대 타이거 마스크의 마스크를 찢고 타이거 마스크의 적이 되기 전까지는 전형적인 미남은 아니였어도 좋은 성격과 탄탄한 몸과 깔끔한 스타일로 여성 인기가 상상 이상으로 어마어마했어서 신일본 시절 후배 니이쿠라 후미히로의 말에 따르면 발렌타인 데이 때 초콜릿이 골판지 상자 2개 분량을 받아 선수들 중 가장 많은 초콜릿을 받았다고 하며, 세타가야구 토도로키에 있던 자택에는 언제나 여성이 5~6명, 많을 땐 10명 정도가 놀러 왔다고 한다.
- 애칭은 산페이쨩(三平ちゃん). 후지나미 타츠미에 의하면 1972년 신일본 창립 당시 참전 중이던 토요노보리가 코바야시 쿠니아키가 자신이 봤던 가부키 혹은 시대극의 '산페이'라는 등장 인물과 닮아서 붙여줬다고 하며, 이게 정착되어 비슷한 나이대의 선수들은 이 애칭으로 코바야시를 불렀다고 한다.
4. 둘러보기
NJPW 그레이트 레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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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올해의 경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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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6월 21일 |
전일본 프로레슬링 & 재팬 프로레슬링 스페셜 워즈 in 무도관 |
NWA 인터내셔널 주니어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타이거 마스크 2세 vs _코바야시 쿠니아키_ (C) |
별점 없음 |
레슬링 옵저버 선정 5성 경기 | |||
1985년 3월 9일 |
전일본 프로레슬링 격투([ruby(激闘, ruby=げきとう)])! 익사이팅 워즈 14일차 |
싱글 매치[5] 타이거 마스크 2세 vs 코바야시 쿠니아키 |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노력상 | ||||
록키 하타 츠루미 고로 초슈 리키 (19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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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다 카즈하루 스네이크 아사미 이시카와 타카시 코바야시 쿠니아키 (1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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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니타 아츠시 아라카와 마코토 타카스기 마사히코 (1979) |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공로상 | ||||
마츠다 히로 점보 츠루타 마사 사이토 요시노사토 재키 사토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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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나키 마사카츠 코바야시 쿠니아키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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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도 오사무 모모타 요시히로 (2001) |
[1]
코바야시 쿠니아키의 대표 기술로, 1982년 10월 8일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코라쿠엔 홀에서의 코바야시 멕시코 개선 귀국 매치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기술. 코바야시 왈 멕시코 수행 시절 이름없는 젊은 레슬러가 사용하는 것을 보고 일본에서는 아무도 사용 안 하는데 괜찮아 보여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이름의 유래는 기술을 사용하는 모습이 마치 투망을 끌어올리는 어부 같다고 하여 TV 아사히 실황 아나운서였던 후루타치 이치로(古舘󠄁 伊知郎)가 붙였으며 당초 이름은 피셔맨즈 수플렉스였다가 점차 간소화되어 나중엔 피셔맨 수플렉스가 되었다.
[2]
이미 1992년 7월 대장암을 시작으로 1999년 은퇴를 결심하게 만든 간암, 이후에도 폐암 2번 등 총 4번, 마지막 췌장암까지 5번의 암 투병을 해왔었다.
[3]
백스테이지 코멘트에서 눈물을 보이며 코바야시에 대한 감사와 코바야시가 만든 신일본의 미래를 이끌어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
[5]
더블 카운트 아웃으로 인한 무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