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1 19:13:20

철도청 야구단

코레일 야구단에서 넘어옴
<colbgcolor=#0054a6><colcolor=#ffffff> 구단명 철도청 야구단
모기업 대한민국 철도청
창단 1913년([age(1913-01-01)]주년)
실업 전환 1946년 4월 18일([age(1946-04-18)]주년)
해체 1978년([age(1978-01-01)]주년)
구단명 변천 철도 구락부(1913~1945)
철도국 야구단(1946~1962)
철도청 야구단(1963~1979)
철우 야구단(1977)
홍익회 야구단(1978)

1. 개요2. 상세3. 여담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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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3년부터 1978년까지 존속했던 야구단이다.

2. 상세

일본인 오지마(大島勝太郞)가 쓰고 당시 철도도서관 주사(主事)인 임정일씨가 서문을 작성한 《조선 야구사》에 따르면 최초 창단은 1913년 봄에 이뤄 졌으며 그다음해인 1914년에 조선야구대회 우승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각 부서별로 야구단이 있어서 철도 구장에서 부서대항 야구대회가 열렸다고 기록되어있다. 해방 이전 철도 야구단은 조선 야구단을 대표하는 명문 구단 중 하나였으며 평양에도 철도야구단이 있었다고 한다.[1]
파일:attachment/korailbaseball1956.jpg
1956년 4월 18일, 철도청 창단식

해방 후 1946년에 철도국이던 시기에 실업야구단으로 창단했고 1960년대 실업야구연맹의 발족 후 철도청으로 재창단했다. 1977년 철우회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78년 자회사인 홍익회로 구단을 이관했으나 그 해 해체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의 성적은 저조했다. 해체하기 전 3시즌 연속 승률이 3할을 못넘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굴지의 재벌인 롯데, 포철이 새로 야구단을 창단하면서 학생야구 유망주들을 싹쓸이한데다가, 홍익회는 당시 실업 야구단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선수들의 신분이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이었다고 한다. 승리 수당은 당연히 없었고. 열정페이

3. 여담

  • 한국 야구사 최초의 언더핸드 투수인 남궁택경[2]이 이곳에서 에이스로 활약.
  • 삼미-청보(1983~85)와 롯데(1990)감독을 역임한 김진영 김경기 부친으로 철도국 야구단 1960~63년, 1963~64년 철도청이 교통부 외청이 되면서 철도청 야구단으로 뜀.
  • OB내야수 유지훤은 대광고 졸업 후 1975~76년 철도청에서 뜀.
  • KBO 최초의 투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OB 투수 황태환은 철도고 졸업 후 1973년 철도청 야구단 입단 후 육군 경리단 제대 후 1976년 철도청 복귀 후 1977년 한양대 진학.
  • 금광옥은 동산고 졸업 후 1975~76년 철도청에서 뜀.
  • 임호균은 인천고 졸업 후 1975년 철도청에서 뛰다 1976년 부산 동아대로 진학.
  • 1975년 유지훤, 금광옥, 임호균 1976년 유지훤, 금광옥, 황태환 뜀.
  • 1982년 원년 개막전 구심으로 유명한 김광철은 성남고 졸업 후 1966~70년 철도청에서 뛴 후 육군 경리단 제대 후 철도청 복귀 후 1972~73년까지 우익수로 활약.

4. 관련 문서



[1] 해방 후 야구는 "자본주의"스포츠라며 강제 해산됐다고 한다. [2] 남궁택경의 조카 남궁성우도 홍익회 야구단에서 뛰었으며 남궁성우의 아들 남궁훈(개명 전 남궁지훈)도 야구 선수로 활동하다가 은퇴 후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의 스카우트가 됐다. 남궁훈과 덕수정보고 동기 투수가 류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