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최석순
崔錫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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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9년 |
평안도 (現 평안북도) | |
사망 | 불명 |
호 | 우강(友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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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회고록 <녹두꽃>을 통해 대중에 알려진 인물이다.2. 생애
정정화가 집필하여 1987년에 출판한 회고록 <녹두꽃>에 따르면, 최석순은 1889년생으로 평안북도 사람이며 보성전문학교 상업학과를 졸업한 후 신의주와 마주한 남만주 안동현에 살았다고 한다. 안동현을 거점으로 삼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구축한 연통제에 가담해 일부러 나까무라로 창씨개명하고 일본 형사로 위장했다.그는 군자금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은 독립운동가들이 무사히 잠입할 수 있도록 도와줬는데, 정정화는 그 덕분에 국내에 3차례 성공적으로 잠입해 군자금을 모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거점을 발견해 정체가 발각될 위험에 몰리자, 1922년경에 가족을 이끌고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런데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는 그가 일본 경찰의 형사로 일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통제 요원이었다는 사실을 몰라 그를 체포해 엄히 문초했다. 다행히 뒤늦게 연락을 받은 정정화가 찾아와 자초지종을 설명한 덕분에, 그는 즉시 석방될 수 있었다.
그 후 최석순은 의열단의 상하이 책임자를 맡았고, 딸 최동선을 의열단장 김원봉의 아내로 삼게 했다. 또한 조선민족혁명당 상해특구 총책과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화부장, 조선민족혁명당 중앙감찰위원장을 지냈다. 8.15 해방 후엔 큰 아들 최동수가 김원봉의 밀명을 받고 만주로 가 현지에서 조선의용군과 접촉하기도 했다.
최석순은 해방 후 임정 요인들과 함께 남한으로 귀국했지만, 뒤에 김원봉으로부터 언질을 받고 가족과 함께 평안북도로 이주했다. 그 후 그가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의 존재는 오랜 세월 잊혀졌다가 1987년에 출판한 정정화의 회고록 <녹두꽃>에서 언급되면서 알려졌다.
한국광복군 출신 장준하와 김준엽의 절친이었던 최기일 박사의 회고록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에서도 최석순, 최동선 일가에 대해서 잠깐 언급이 된다. 최기일 박사에 따르면 최석순 일가는 본인의 먼 친척이기도 해서 해방 이후 월남하기 전까지 고향인 평북 삭주군 대관읍(오늘날 대관군)에서 자주 만났던 사이었다고 한다. 최석순의 아버지이자 최동선의 할아버지는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대한제국 시절부터 지방관리를 해 온 6급 공무원 주사(主事)여서 ‘최주사’라는 호칭으로 많이 불렸다고 하며, 상인 계급이 주를 이루었던 평안북도에서 양반 행세를 한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항상 몸가짐을 양반처럼 하고 다녀 동네 사람들이 가짜 양반이라고 많이 불러댔다고(…). 최주사에게는 아들이 6명 있었는데 이 중 장남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제국 경찰에게 연행되던 도중 총살당해 그 시신이 강물에 버려졌고, 차남 역시 가출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는데 만주에서 빨치산활동을 하다가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고 한다. 김원봉과 결혼한 최동선은 이 최주사의 차남의 딸이라고 한다. 최기일 본인은 친구 김준엽, 장준하와 다르게 학병으로 지원하지 않고 대신에 시멘트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하다가 해방 이후 월남하여 이승만 밑에서 공보비서로 일했는데 나중에 최씨 부녀가 임정 제2진 자격으로 귀국했을 때 잠깐 서울에서 만났지만 이념의 차이로 인해 결국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되어서 소식이 끊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