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최담령(崔聃齡) |
생몰 | 1563년 ~ ? |
본관 | 동주 최씨 |
출생지 | 전라북도 남원시 |
1. 개요
조선 중기의 의병장. 김덕령의 부관이며 최영의 후손이다. 본관은 동주.2. 생애
임진왜란 이전 최담령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나,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취조를 받던 때의 나이가 33세라고 기록되었으므로 1563년생인 것으로 짐작되며, 본인이 "신은 최영의 자손으로 어려서부터 용건(勇健)하다는 이름이 있었다."고 진술했으므로 본관은 최영과 같은 동주(東州: 철원)이며, "신은 남원(南原)에 살고 있으며 직책은 수문장(守門將)입니다."라고 진술한 것을 봤을 때 남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을 것으로 추측된다.[1]최담령은 김덕령의 친구였다고 하며,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의 별장으로서 가담했다. 선조 29년(1596년) 3월, 권율은 선조를 알현한 자리에서 최담령에 대해 "체구가 남보다 크고 영기(英氣)가 있으며 7식(息)이나 되는 길을 하루에 가니 참으로 얻기 어려운 인재입니다."라고 호평했다. 이에 선조가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최담령은 흙덩이와 같다고들 하는데 사실이 그러한가?
권율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흙덩이와 같다는 것은 완인(頑人)을 일컫는 것인데 이 사람은 그와 같지 않습니다."
이에 선조가 다시 물었다.
문장에 능한가?
권율이 답했다,
담령의 측근에게 물으니, 담령은 평소에 옷소매 속에다 병서(兵書)를 넣고 다닌다고 하였는데, 정작 담령에게 물었더니, 담령은 ‘한 글자도 모른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어에는 문자를 많이 씁니다.
그 후 최담령은 김덕령 휘하 의병대에서 김덕령의 별장으로서 활동했지만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자신의 이름이 반란군 수뇌부의 입에 거론되는 바람에 반란이 진압된 후 김덕령과 함께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다. 선조는 최담령을 친국하며 물었다.
김덕령의 심복으로서 호서(湖西)의 흉악한 역적들과 결탁하여 함께 반역을 모의(謨議)하고 오가며 약조를 맺고서 번갈아 기세를 조성하여 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한 실상이 여러 역적들의 공초에서 드러났다. 역적 도모를 한 절차를 하나하나 바른대로 진술하라.
최담령이 답했다.
저는 남원(南原)에 살고 있으며 직책은 수문장(守門將)입니다. 위에서 하늘이 내려다 보고 있는데 신자(臣子)로서 어찌 그와 같은 짓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초야(草野)의 한미한 백성으로 글도 못하고 무예(武藝)도 없습니다. 3∼4년을 김덕령의 진중(陣中)에 따라다니다 보니 우연히 터무니없는 이름을 얻게 되어 사람들이 용건(勇健)하다고 하므로, 병조(兵曹)에서 그 말을 듣고 관직에 차임하려 하여 서울로 불렀습니다. 내려갈 때에 부안(扶安)에 있는 처가(妻家)에 가서 세답(洗踏)한 다음 김덕령의 진중으로 가서 그곳에 죽 있었는데, 7월 10일에 도원수로부터 전령(傳令)이 와 ‘호서의 토적 수천 명이 불의에 갑자기 일어났으니, 같은 마음으로 협력할 수 있는 믿을 만한 기병 수십 백 명을 거느리고 밤낮없이 달려오라…….’ 하였습니다.
장수가 13일에 진주(晉州)·안강(安康)에 나갔다가 미처 운봉(雲峰)에 닿기 전에 다시 전령이 바뀌어 오기를 ‘역적의 괴수를 이미 베었다.’ 했기에, 진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저의 군기(軍器)와 군량을 모두 도로 진중(陣中)에 보내고 처자를 만나기 위해 부안에 갔었는데, 현감 및 순찰사의 군관이 부안현에 잡아 가두었고, 의금부 도사에게 끌려 올라왔습니다.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알고 있다.’고 옛사람이 말하였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은휘(隱諱)할 수 있겠습니까? 역적들의 무리가 터무니 없는 말을 퍼뜨린 것은 제가 최영(崔瑩)의 자손으로 어려서부터 용건(勇健)하다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찌 이와 같은 민망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푸른 하늘이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으니 저는 이런 일을 할 리가 만무합니다.
장수가 13일에 진주(晉州)·안강(安康)에 나갔다가 미처 운봉(雲峰)에 닿기 전에 다시 전령이 바뀌어 오기를 ‘역적의 괴수를 이미 베었다.’ 했기에, 진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저의 군기(軍器)와 군량을 모두 도로 진중(陣中)에 보내고 처자를 만나기 위해 부안에 갔었는데, 현감 및 순찰사의 군관이 부안현에 잡아 가두었고, 의금부 도사에게 끌려 올라왔습니다.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알고 있다.’고 옛사람이 말하였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은휘(隱諱)할 수 있겠습니까? 역적들의 무리가 터무니 없는 말을 퍼뜨린 것은 제가 최영(崔瑩)의 자손으로 어려서부터 용건(勇健)하다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찌 이와 같은 민망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푸른 하늘이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으니 저는 이런 일을 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 후 김덕령은 형신을 받다 죽었지만, 최담령은 혐의가 크지 않다는 이유로 방면되었다. 선조는 그가 용기가 뛰어나고 계략도 없지 않으며 글을 조금 알고 발호(拔扈)하는 기상도 없다고 높이 평가하며, 그가 김덕령의 군사를 대신 거느리게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최담령은 김덕령의 부관이었던 최강(崔堈)과 함께 김덕령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리고 양남(兩南)의 방어사에게 나누어 배속되었다.
선조수정실록에선 최담령은 그 뒤로는 어리석은 겁보인 체 하며 스스로 폐인 노릇을 했다고 적고 있으나, 애초에 서인이 김덕령을 동정하느라 김덕령이 억울하게 옥사하고 의병이 자취를 감췄다고 적어놓은 게 수정실록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가 어떻게 살았으며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 미비로 알 수가 없다.